• 제목/요약/키워드: 종법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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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집단의 거주지 이동과 종족촌락의 기원에 관한 연구 -14~19세기 보성오씨(寶城吳氏) 사례 분석을 중심으로-

  • 전종한
    • 대한지리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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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지리학회 2002년도 추계학술대회 요약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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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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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14~19세기를 거치면서 종법사상의 보급, 동성동본의식의 강화, 부계혈통 중심의 친족의식, 장자우대 관행, 족보간행 등과 더불어 한국의 종족집단(宗族集團)은 사회적 구성에서 중요한 단위로 부각되었다. 종족집단이 갖는 당대의 이 같은 사회적 단위성은 시ㆍ공간상에 다양한 패턴과 경관으로 표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지리학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현상이 '거주지 이동'과 '종족촌락(宗族村落)의 기원'이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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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오산리 사례를 통해서 본 근기권(近畿圈) 종족촌락 형성의 정치.경제적 배경 (Political and Economical Background of Formation of a Lineage Village in the Vicinity of Seoul: A Case Study of Osan-ri, Yesan)

  • 임병조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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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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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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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종족촌락이 일정한 시기에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등장했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결과물입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적 배경, 특히 지배집단으로서 사대부계급의 정치적 입장의 변화 및 강력한 혈연 공동제의 물적 기반이 되었던 토지제도와의 관련성 속에서 종족촌락의 발생과 발달을 살펴보는 것은 종족촌락을 이해하는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정치적 갈등이 지속되면서 사대부들은 학연, 지연뿐만 아니라 혈연을 중요한 정치적 배경으로 활용하였으며, 사적 토지 소유를 확대함으로써 종족촌락의 형성과 확대를 위한 물적 토대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근기권(近畿圈)의 종족촌락들은 한양에 근거를 두고 있던 유력 가문들의 경제적 근거로 활용되었으며 이러한 근거를 확보해 가는 과정에서 정치권력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정치적 갈등으로 오산리에 입향한 영산신씨 가문은 사적 토지 소유와 가문 출신의 현달한 관료를 배경으로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안정된 종족촌락으로 발달하였다.

주자학의 사상적 분화와 전개양상에 관한 연구 - 황간(黃?)과 원대(元代) 금화학파(金華學派)의 사상적 연관성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differentiation and development aspects of Zhu-zi xue - centering around the connection between Huang Gan and Jin-hua school in Yuan period)

  • 지준호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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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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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7-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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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 논문은 주자문인인 황간과 원대 금화학파의 사상적 연관성을 연구함으로써 주자문인 및 주자 후학에 의한 주자학의 분화와 발전 과정을 분석하였다. 황간은 주자의 적통을 이어받은 도학파 주자문인이며, 그의 학문은 절강(浙江) 금화학파(金華學派), 강서(江西) 쌍봉학파(雙峰學派), 신안(新安) 주자학파(朱子學派)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사상사적인 흐름 속에서 도통론을 기반으로 황간의 학문을 계승한 대표적인 학파, 즉 사상사적으로 면재(勉齋) 황간(黃?)으로부터 하기(何基), 왕백(王柏), 금리상(金履祥), 허겸(許謙)으로 학통이 이어지는 절강(浙江) 금화학파(金華學派)를 연구의 주요 범위로 하고 있다. 황간과 원대 금화학파의 사상적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특징지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종법적인 도통관이다. 황간의 도통설은 주자의 도통관을 진일보 발전시킨 것으로서 주자가 유가의 도통을 집대성하였음을 논증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황간의 도동관은 특히 주자학의 적전(嫡傳)을 자부하는 금화학파에 의하여 계승된다. 둘째, 체용론과 관련한 "분수이리일(分殊而理一)"이라는 인식방법이다. 황간은 태극과 음양의 관계를 '도겸체용(道兼體用)'의 측면에서 일종의 '이일분수(理一分殊)' 또는 '일이이(一而二)'로 설명한 바 있다. 황간은 '도(道)의 체(體)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파악하기 힘들므로 우리들은 여러 만물에 산재해 있는 이(理)를 통하여 도(道)의 체(體)를 이해할 수 있다'라는 '유용이언체(由用而言體)' 또는 '인용이명체(因用而明體)'라는 구체적인 인식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이러한 인식방법 역시 황간의 후학인 금화학파에 의하여 계승된다. 셋째, 격물치지의 공부론이다. 황간은 존덕성과 도문학을 모두 중시하였으며, 금화학파 역시 존덕성과 도문학을 모두 중시하였다. 특히 허겸(許謙)은 '격물치지'의 공부론을 통하여 심(心)의 문제를 폭넓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금화학파는 당시 상산학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도문학의 의의를 상대적으로 보다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유가 경전의 독서와 훈석(訓釋)을 중시하고 있으며 "분수이일(分殊理一)"의 인식방법을 자신들의 학문에 응용함으로써 "유전이구경(由傳以求經)"이라는 특색을 지니게 된다.

정산 송규의 사상 형성과정에 미친 증산의 영향 (The Influence of Jeungsan on the Thought Formation Process of Jeongsan Song Gyu)

  • 김탁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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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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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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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원불교의 제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는 15세 때 증산교인들과 만나 많은 영향을 받는다. 정산은 그들의 권고로 가야산에서 3개월 동안 수행했으며, 가족들에게도 태을주(太乙呪) 수련을 하도록 포교했다. 이후 정산은 18세 무렵에는 여러 이적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그 해 가을에는 증산의 행적을 좇아 멀리 전라도까지 찾아간다. 그곳에서 정산은 증산의 누이동생을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성주에 모셔와 백일치성을 드리는 정성을 보였다. 다시 증산의 생가를 찾아간 정산은 증산의 외동딸로부터 「정심요결」이라는 도교적 수련서를 전수받았고, 증산이 천지대도를 연 장소인 모악산 대원사에서 10개월간 공부를 행하였다. 대원사에서 만났던 증산교인과의 인연으로 그녀의 집에 머물던 정산은 그곳에서 비로소 소태산과 만났다. 소태산과의 만남이 있기 이전의 청년 정산은 증산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정산은 원불교를 선언한 이후로도 제생의세(濟生醫世)라는 증산의 종교적 표어를 사용했고, 증산이 제자들에게 써주었던 글귀를 주문처럼 외웠으며, 증산이 짓거나 인용한 한시(漢詩)를 언급했다. 그리고 정산은 증산이 지은 『현무경(玄武經)』에 나오는 구절들을 독특하게 해석했으며, 증산이 했던 말을 자주 인용했다. 나아가 정산은 증산의 언행록에 나오는 글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나름대로 대답했으며, 증산을 개벽을 주재하는 삼원(三元)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적극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