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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 입지 선정의 기준과 지형에 대한 연구 - 경복궁과 창덕궁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Topography and the Criteria of Choosing the Location-Allocation of Palaces - Focusing on Gyeongbokgung Palace and Changdeokgung Palace -)

  • 김규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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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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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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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의 궁궐은 크게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으로 분류된다. 이와는 별개로 정궁(正宮)의 개념이 있다. 법궁은 정궁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궁이 정궁으로 활용되는 것은 정치적인 상황에 따른다. 한양 최초의 궁궐은 경복궁이며 법궁으로 지어졌다. 경복궁의 자연 지형은 왕권을 상징하는 백악산을 배경으로 하였으며 사신사가 뚜렷하다. 궁궐의 입지도 왕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도록 궁궐 밖에서 잘 보이는 장소를 선정하였으며, 백악산의 능선을 따라 하나의 축선을 기준으로 일직선상에 삼문삼조를 배치하여 왕권의 정통성과 위계질서와 통일성을 추구하였다. 이궁(離宮)은 왕의 요구나 왕실의 수요 또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건축되었으며, 왕실의 일상생활 공간으로서 복수의 축선에 의해서 독립적이고 다양한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법궁은 양(陽)의 지형을, 이궁은 음(陰)의 지형을 선택하였으므로 전각을 배치하는 준거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궁궐의 조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왕기(王氣)였다. 궁궐 건설의 중요 요소는 풍수기맥과 금천이다. 풍수기맥은 왕기를 수용하는 통로였고, 금천은 왕기가 궁궐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게 하는 방법론이었다. 전형적인 풍수 지형을 선택한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경우 풍수 요소를 적재적소에 적용하고 있어서 풍수 원리를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반면에 이궁(離宮)은 비정형적이고 온전하지 않은 풍수 지형에 지어졌다. 풍수는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자연관이며 지리관이었다. 이들의 지리관을 살펴봄으로써 전통문화 계승과 복원에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시대 궁원 내 친잠(親蠶)문화의 배경과 공간적 특징 (Backgrounds and Spatial Characteristics of Sericulture in the Rear Garden of Palace in Joseon Dynasty)

  • 허선혜;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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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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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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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 내에서 일어났던 친잠문화의 배경과 공간적 특징에 대한 탐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조선은 유교적 중농주의 국가로서 국초부터 농업 못지않게 양잠업 장려에 열의를 보여 양잠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진행해 왔다. 그러한 노력의 일면으로 조선 왕실은 궁궐 내에서 친잠활동을 하게 되었다. 조선은 초기 태조 연간부터 궁원 곳곳에 뽕나무를 심었으며, 세조는 동궁(東宮) 근처에 잠실(蠶室)을 설치하여 세자를 비롯한 궁중 사람들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수시로 알게 했다. 성종 연간에는 조선 최초로 창경궁 후원에 채상단을 만들어 친잠례를 거행하였고, 이후 채상단은 위치를 달리하며 광해군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 영조 연간에는 경복궁에 채상단과 정해친잠비(丁亥親蠶碑)를 건립하였는데, 이는 경복궁 유지에 대한 영조의 애착과 양잠의 권면에 대한 적극적 의지의 산물이었다. 경복궁 유지에서 터가 고르고 뽕나무를 심기 적합한 동편이 선택되어 채상단을 축조했으리라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이 장소는 세종 연간 잠실이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궁궐 도배지 특성 연구 - 경복궁, 창덕궁, 칠궁을 중심으로 - (A study on characteristics of palace wallpaper in the Joseon Dynasty - Focusing on Gyeongbokgung Palace, Changdeokgung Palace and Chilgung Palace -)

  • 김지원;김지선;김명남;정선화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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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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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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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후기부터 현재까지 보존된 경복궁, 창덕궁 그리고 칠궁 내 일부 전각의 도배지를 채취하여 조선 왕실에서 도배지로 사용한 종이의 종류와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첫 번째로, 고문헌 조사를 바탕으로 왕실에서 사용된 도배지 기록을 통해 왕실에서의 도배 특성을 확인하였다. 두 번째로, 건립 시기가 비교적 분명한 전각을 대상으로 현장 조사를 실시하여 시료확보 후 초배지 분석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왕실 도배지로 활용된 한지의 주원료를 확인하였으며, 청색 장식지 분석을 통해 격식을 갖춰야 하는 공간에 사용된 청색 발색물질(염료·안료)의 종류를 파악하였다. 분석을 통해 확인한 결과를 토대로 조선시대 궁궐 도배지와 관련한 고문헌 기록과 대조함으로써 문헌의 기록과 현존 도배지 실물을 확인하고, 향후 궁궐 도배지의 보수 시 문화재 복원의 기초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17~20세기 영건의궤류 36건 등에 기록된 도배 관련 내용을 추출하여 시기별 도배지 종류 변화, 사용처에 따른 도배지 종류 등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의궤 제작용 한지와 도배용 한지의 명칭이 다르지 않아 조선시대에는 문서지와 도배지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시대별 도배지의 종류는 차이가 있지만 백지, 후백지, 저주지, 초주지, 각장이 도배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된 것이 확인된다. 궁궐 벽체와 직접 붙어있던 면의 초배지를 대상으로 섬유의 형태학적 특성 및 정색 반응(KS M ISO 9184-4: 그라프 "C" 염색 시험)을 통해 섬유 식별을 실시한 결과, 왕실에서 도배지로 활용된 한지의 주원료를 확인하였으며 전각의 건립 시기에 따라 당시 한지를 제작하는 데 사용한 지료의 원재료를 파악하였다. 또한 청색 장식지의 발색원료를 광학현미경, 자외-가시광 분광분석(UV-Vis), X선 회절분석(XRD)을 통해 분석한 결과 격식을 갖춰야 하는 공간에 사용된 청색 장식지의 염료 및 안료의 종류를 파악하였으며 청색을 내기 위한 원료로서 쪽, 청금석, 코발트블루 등이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궁궐 정전(正殿)의 배치형식에 투영된 풍수구조 (A Feng Shui Analysis of the Locations of the Main Buildings in the Palaces of Joseon Dynasty)

  • 정우진;고제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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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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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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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에 나타난 핵심전각의 배치형식을 주산과의 관계로 검토하여 궁궐 축선에 투영된 풍수개념과 그에 따른 계획원리를 고찰하는 것이다. 조선 건국 직후 창건된 경복궁은 거대한 분지의 중앙에 입지한 자금성과는 달리 도성 서북쪽에 치우친 곳이면서 백악산의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입지하였다. 태종 때 창건된 창덕궁도 마찬가지로서 삼각산의 또 다른 지맥인 응봉 아래에 궁궐터가 마련되었는데, 모두 산의 정기를 궁궐에 담으려 했던 의도를 담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구체적으로, 궁궐 내부의 정전, 편전, 침전 등 임금과 관련된 주요 건물의 배치가 주산의 내맥에 따라 배치되는 것으로 이행되었다. 특히 대내에 들어와 있는 아미사는 궁궐터가 정해졌던 근거지형이기도 했지만 전각배치가 이루어진 기준점으로 작용하였다. 아미사를 기점으로 하는 축선은 풍수적 의미의 좌향이 건축적 형식으로 구현되는 형식이었으며, 주례에 근거한 전조후침과 삼문삼조를 실현하는 형식으로 통합되어 나타났다. 한편 양궐 모두 아미사가 혈진처(穴盡處)를 이루고 있는 곳 가까이에는 임금의 정침이 우선적으로 입지되었다. 침전의 남쪽에는 보통 편전이 배치되었는데, 이는 임금이 아미사 혈의 순수한 지기를 가장 먼저 점유하고 누리고자 하는 실리를 따른 결과로 판단된다. 중축선 배치가 뚜렷한 경복궁의 경우, 하나의 주맥 하에 침전, 편전, 정전이 일원적으로 배치되었고, 내맥이 분산된 창덕궁은 정전과 침전의 축이 형편에 따라 나뉘어 졌다. 정전의 입지형식은 최소한의 풍수적 이점을 취하되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공간의 질서와 형식이 보다 중시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고려 강도(江都)의 성곽과 궁궐 재고찰 (A reevaluation of the castles and palaces of Goryeo Gangdo (江都) using GIS)

  • 강동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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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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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4-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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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강도는 39년간 고려의 수도였으며, 이는 개경의 재현이었다. 하지만 몽골군의 침입이라는 급박한 전시 상황과 강화도의 지형적인 특징 등으로 인해 개경과는 다소 다른 성곽 체제와 궁궐의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강도의 성곽은 외성-중성-내성으로 구성된 3중성(重城) 체제로 이해할 수 있다. 외성은 가장 먼저 완성한 성곽이었으며 몽골군의 침입을 최전선에서 최우선으로 방비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었다. 그 구간은 조선시대 외성의 휴암돈~화도돈이었다고 추정된다. 중성은 강화산성 외곽의 토축성인 현 '중성'으로 볼 수 있다. 이 성곽은 고고학적 조사에서 확인된 축조 수법의 정교함과 견고성을 통해 볼 때 치밀한 계획 하에 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중성은 강도의 도성으로서 궁궐, 관청, 민가 등을 보호하기 위해 18년이라는 장기간의 축성 과정을 거쳐 『고려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이다. 내성은 궁성적 성격을 지닌 성곽이었다. 조선시대 강화부의 '구성(舊成)'이 이에 해당하며 개경 구성의 규모와 거의 일치하였다. 내성은 궁궐을 포함한 주요 관부와 부속 시설이 위치한 궁성과 황성의 통합, 즉 복합적 기능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궁궐은 개경에 준하였다는 문헌 기록에 근거하여 개경 궁궐도와 중첩한 결과, 승평문-선경전에 이르는 건축물의 중심축이 김상용 순절비각-고려궁지와 일치하였다. 따라서 강도의 궁궐은 기본적으로 개경과 동일한 건축물 배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내전과 부속 건물 등은 강화의 지형 조건을 감안하여 배치되었을 것이며, 이는 관청리 '궁골' 일대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궁궐에서의 양학(養鶴) 사례 (A Cases of Crane Breeding(養鶴) in the Palace of the Joseon Dynasty Period)

  • 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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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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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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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시대 궁궐에서도 학을 길렀는가에 대한 확인과 함께 그 사례를 고찰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조선 시대이며 공간적 범위는 외전, 내전, 궐내각사, 궐외각사 등 궁궐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본 연구를 위한 문헌 자료는 일부 원문 자료를 발췌·번역하여 고찰하였으며, 이와 함께 한국고전번역원 데이터베이스(http://db.itkc.or.kr)에 탑재되어 있는 고전번역서를 활용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시대 최고 관부인 의정부에서는 전기 때부터 학을 길렀다. 임진왜란 이후 위상 변화와 청사의 훼철로 인해 의정부에서의 양학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조선 시대에 경연과 언론 기능을 담당하며 왕을 측근에서 보좌한 홍문관에서의 양학은 조선 전기 중종 대부터 임진왜란 이후 정조 대에까지 이어졌다. 셋째, 정조 대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학문의 중추기관으로 새롭게 설치한 규장각에서도 학을 길렀다. 당시 규장각에는 여러 쌍의 학을 기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의정부, 홍문관, 규장각 등 조선의 핵심적 관부에서의 양학 행위는 그 기관의 위상이나 성격 등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상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섯째, 홍문관 등 궁궐에서 기르는 학은 관례적으로 황해도 배천군 등에서 충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례는 영조 대에 이르러 중앙 관서와 지방 관아 간에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이후 정조 연간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에서는 대부분 국역 자료에 의존하여 연구를 진행했다는 한계가 있다. 추후 자료의 발굴과 번역 성과가 더욱 축적된다면 보다 풍부한 사례를 확인할 있을 것이다. 또 지방의 관아, 사찰 등에서의 양학 사례 등 보다 심화된 후속 연구도 필요하다.

한국과 중국의 궁궐 내 교량에 관한 경관특성 비교 연구 - 조선시대와 명·청시대를 중심으로 - (A Comparative Study of Landscape Characteristics on Bridges in Palaces of Korea and China - Focusing on the Chosun Dynasty and Ming and Qing Dynasties -)

  • 장푸천;이애란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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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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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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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교량(橋梁, bridge, 다리)은 물 위나 공중에 가설해서 통행하기 편리하게 하는 건축물이다. 다른 건축물에 비해 교량이 요구하는 건축재와 건축구조는 공간을 건널 수 있는 독특한 기능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건축할 때의 생산력, 과학기술 수준과 환경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고대 교량에 대한 학술 연구는 대부분 교량 건조기술 분야의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어 교량의 경관 미학과 역사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본 연구는 한국과 중국의 궁궐 내에 위치한 교량을 대상으로 분석함으로써 두 나라의 교량 형태와 역사 및 문화에 대한 이해와 기술, 미학적 자료의 축적으로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연구방법은 현장조사와 문헌 분석을 통해 교량을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교량의 재료, 형태, 경관과 장식 문화를 비교함으로써 한중 양국의 궁궐 정원의 교량 건축 스타일에서 물리적 형태미와 경관 및 장식미를 정량적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둘째, 교량의 분류를 통해 양국 교량 양식의 특징과 함께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출하고, 그 원인을 물리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한중 양국 교량의 축조기술과 미학에 대한 상호간 연구에 기여할 것이다. 본 연구의 조사 결과를 보면 첫째, 재료 면에서 한국과 중국 궁궐 정원의 교량은 석재를 위주로 하지만 중국 궁궐의 교량은 목재 또한 운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둘째, 형태의 면에서 한국과 중국의 궁궐 정원의 교량은 모두 형교를 위주로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형태, 비율, 형교의 양식, 홍교의 공수 등에 있어서는 차이가 크다. 셋째, 연결 방식의 대부분은 중교형을 위주로 한다. 주변 경관과의 융합을 중시한다. 수면의 면적과 위치의 차이 때문에 한국 궁궐 내 교량은 주변 건물과 식생을 융합하고, 중국 궁궐 내 교량은 수경의 조화에 더 치중한다. 넷째, 장식은 한국과 중국의 궁궐 교량이 모두 교량의 예술성과 미관성을 중시한다. 문화적 특성으로 인해서 같은 유형의 장식이 스타일에 차이점이 있다.

조선초기 창건 경복궁의 공간구성 - 고려 궁궐과의 관계에 대해서 - (The architecture of the Kyongbok Palace in the early years of the Chosun Dynasty)

  • 김동욱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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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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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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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 It could be said that the Kyongbok Palace, the main palace of the Chosun Dynasty which built in the early years of the Dynasty, had two main architectural characters. One ; the entire building complex was arranged under the influence of ancient Chinese building principle based on the Confucian ideas. Two ; building compositions and shape of each buildings were succeeded from the palace of the former Koryo Dynasty, especially on the latter periods of it. The architecture of the Kyongbok Palace had formed its own uniqueness by developing these two charac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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