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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쪽샘유적 적석목곽분의 특징과 과제 (Features and Issues of the Wooden Chamber Tomb Covered with Stone in Gyeongju Jjoksam-Site)

  • 박형열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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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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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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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글은 경주 쪽샘유적에서 확인된 적석목곽분의 특징을 분석하여 정리하고 향후 발굴의 방향성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 경주 쪽샘유적 적석목곽분에서는 6가지의 특징이 확인된다. 첫째, 지상식과 지하식 적석목곽분이 구분된다. 둘째, 분할성토와 적석부구조 등 축조양상이 확인된다. 셋째, 호석과 경계석, 잔자갈층, 제사시설 등 호석 전면부 구조가 확인된다. 넷째, 적석목곽분 간선후관계가 확인된다. 다섯째, 기 확인된 적석목곽분 범위와 크기가 밝혀져 기존자료의 불명확성을 해소했다. 여섯째, 적석목곽분의 군집단위가 확인된다. 이 여섯 가지의 특징을 정리하면 적석목곽분의 개별단위와 군집단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개별단위와 군집단위의 확인은 연접과 중복에 의해 어지럽게 위치한 적석목곽분의 크기와 범위를 분명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단위 간의 선후관계를 통해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적석목곽분은 미고지에 목곽묘와 중층구조로 자리하며 선별적 위치선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포양상과 형성과정을 정리하면, 경주 쪽샘유적 적석목곽분은 4단계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상의 적석목곽분의 개별단위와 군집단위의 확인과 형성과정을 기초로 향후 발굴조사에서 선택적 기획발굴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경주식 적석목곽묘의 구조복원 재고 (The Structual Restoration on Gyeongju-Style Piled Stone-Type Wooden Chamber Tombs)

  • 권용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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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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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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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적석목곽묘는 목곽 외부에 석재를 쌓거나 채운 다음 목개 위에 일정한 두께로 적석하고 점토로 밀봉한 구조이다. 경주 중심부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거의 모든 지배자가 지속적으로 한 묘제를 사용하였다는 점, 타 지역에서 확인되는 적석 형태와 전혀 다르다는 점 등에서 경주식 적석목곽묘로 정의하고자 한다. 적석목곽묘는 경주 중심부에서 5C 전반대부터 축조되기 시작한다. 평면형태, 목곽, 이중곽, 석재충전, 석단, 순장 등은 이전시기의 목곽묘에서 계보를 잇고 있다. 이외에 석축과 목주, 적석, 성토분구는 적석목곽묘의 출현과 함께 새롭게 나타나는 요소이다. 특히 석축과 목주는 황남대총을 비롯한 지상식 초대형분에서만 확인된다. 석축과 목주, 적석은 모두 성토 분구 축조과정 속에서 하나의 공정을 이루고 있다. 석축은 지상에 설치된 목곽의 외벽을 견고하게 유지시켜 주면서 성토 분구의 하중을 분산 수용한다. 목주는 석축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보조장치로서 횡가목, 버팀목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 적석은 일정 크기의 석재를 갖고 일정한 두께로 목개 상부에 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 점토로 밀봉한 다음 분구를 성토하였다. 적석은 경주지역의 입지적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경주 중심부의 적석목곽묘는 하천부지가 넓고 평탄한 형산강 동안을 따라 분포한다. 기반층은 대부분 모래와 냇돌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성토분구는 모래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목개를 횡가한 다음 바로 성토할 경우 유수에 의한 붕괴 가능성 또한 크다. 고분의 외형을 유지하면서 내부구조물의 파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적석과 점토밀봉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상부의 봉토가 유실되더라도 하부의 적석은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토분구는 국가 혹은 단위정치체가 성장단계에 진입하면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이다. 국가 출현단계 이후 성장단계에 진입하면서 사회구조에 변화가 나타나고 이와 맞물려 새롭게 출현한 지배등급에서 전대의 목곽묘와는 다른 적석목곽묘를 축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분구를 함께 성토한 것으로 파악되며, 지배등급의 성격에 따라 규모와 구조에서 차이를 보인다. 평면형태, 곽과 석단, 순장자의 수, 유물의 양과 질 등은 지배등급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적석목곽묘는 신라가 성장단계에 접어든 시점에 전대의 묘제로부터 분화 발전된 양상을 보이면서 나타난것으로 생각된다.

호남지방 점토대토기문화기의 묘제와 지역성 (Burials and Regionality of the 'Jumtodae' Pottery(Pottery with Clay Strips) Cultural Age in Honam Province)

  • 이동희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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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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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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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기존에 호남지방에서 점토대토기문화기의 묘제로 알려진 것은 적석목관묘(적석석관묘), 토광(목관)묘, 옹관묘, 주구묘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묘제가 호남지방에 있어서 점토대토기문화기의 묘제를 모두 포괄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점토대토기문화기에도 청동기시대의 묘제가 잔존하고 있어, 지역마다 그 양상이 상이하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호남지방에 있어 점토대토기 유입기의 묘제의 양상과 그 변천, 그리고 지역성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호남지방의 점토대토기문화기 묘제를 유물상과 관련지어 보면 크게 4단계로 구분된다. 원형점토대토기 문화의 유입기(I한계)에, 세형동검${\cdot}$조문경${\cdot}$흑도${\cdot}$원형점토대토기 들의 새로운 유물이 확인되고 있지만, 묘제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묘제에 신묘제인 적석목관묘의 일부 속성이 가미된 적석석곽묘${\cdot}$석개토광묘, 지석묘 등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적석석곽묘와 석개토광묘는 전북지역에서, 지석묘는 전남지역에서 확인되는데, 이는 청동기시대 묘제의 지역성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지방에서 원형점토대토기문화기의 초기에 호서지방의 대전 괴정동 적석목관묘와 같은 신묘제의 유입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유물에서도 뒷받침되다싶이 요법지방 등지에서의 유이민의 1차 도래지가 호서지방이 중심이었고, 호남지방은 그러한 문화의 2차적인 파급속에서 묘제에 부분적으로만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호남지방에서 화순 대곡리와 같은 적석목관묘가 출현하는 것은 호서지방보다 늦은 기원전 3세기대에 이르러서이다(II단계). 이후에 토광묘${\cdot}$주구묘${\cdot}$옹관묘 등이 나타난다. 다뉴조문경이 출토되는 I단계를 요녕지방과 일정한 관련성을 가지면서 점토대토기문화가 파급되는 시기라고 한다면, 다뉴세문경이 확인되는 II단계 이후는 점토대토기문화의 토착화가 진전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호남지방에서도 전남지역은 새로운 문화의 영향이 더 늦었다고 판단된다. 전남지역에서 영산강유역의 전남서부지역에는 지석묘가 일부 지속되고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이른 한계의 토광묘나 적석목관묘가 조사되고 있어 전남동부지역과도 차별성을 보인다. 현재까지의 조사성과로는 전남동부지역에 토광목관묘 이전의 적석목관묘 한계가 확인되지 않으며, 주구묘나 옹관묘도 조사된 바가 없어 지역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전남동부지역이 산악지대이면서 문화 전파의 종착지였고, 청동기시대 이래의 지석묘가 장기적으로 사용되어 신묘제와 은화를 바로 수용하지 못하는 문화적 보수성에 기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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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샘유적 신라고분 분포양상과 목곽묘의 성격 (The Distributional Patterns of Silla Burial Grounds and the Character of Outer Coffin Tombs in Jjoksaem Site, Gyeongju)

  • 윤형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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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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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8-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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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쪽샘유적은 사적 제512호 대릉원 일원에 속하는 신라고분군으로 학계에서는 월성북고분군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 2007년부터 실시한 발굴조사는 마을이 들어서며 파괴된 신라고분의 현황을 파악하여 고분공원정비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이루어 졌다. 조사결과 일제강점기에 확인한 155기 고총고분 외에 700여기 이상의 새로운 고분들이 확인되었으며, 적석목곽묘 이외에 목곽묘, 석곽묘, 옹관묘 등의 소형묘 출토 비율이 70%에 달한다. 쪽샘유적 출토 목곽묘를 분석한 결과 묘광의 모양은 대체로 세장방형에 가까워 기존의 경주식목곽묘의 특징은 인정된다. 또한 묘광의 평면면적을 분석하여 대형, 중형, 소형의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동일 묘제 내에서의 무덤간 위계 차이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목곽묘 중 가장 이른 것은 후기 와질토기가 출토되어 3세기 대까지 올라가는 등 적석목곽묘 축조 이전에 쪽샘유적 곳곳에 목곽묘가 이미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립간 시기가 되면 선대 무덤들의 정체성은 존중받지 못한 채 파괴되기도 하는데, 이후의 목곽묘들은 적석목곽묘의 등장과 소멸과 궤를 같이 한다. 이들 후대의 목곽묘들은 적석목곽묘의 묘역에 의해 입지가 제한되는데, 죽은이의 신분에 따른 묘역 선정의 차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적석목곽묘는 미고지에, 목곽묘는 저지대에 입지한다는 기존 견해는 쪽샘유적 발굴조사 결과 선입견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적석목곽묘 호석 최하단석과 목곽묘 등의 굴광 어깨선은 유의미한 레벨 차이가 없으며, 44호 적석목곽묘와 같이 해발이 낮은 곳에 입지하는 적석목곽묘나 B지구 목곽묘와 같이 미고지에 위치한 목곽묘등도 다수 확인된다. 목곽묘는 사로국에서 국가단계의 신라로의 발전과정에 대한 필수 연구자료로서 향후 쪽샘유적에서의 발굴조사 성과가 기대된다.

신라 전기 적석목곽분의 출현과 경주 월성북고분군의 묘제 전개 (The Emergence of Wooden Chamber Tombs with Stone Mound and the Changing Nature of Tombs at the Wolseong North Burial Ground of Gyeongju in the Early Silla Phase)

  • 최병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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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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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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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고대국가 신라가 성립하고 발전한 신라 조기와 전기에 경주 월성북고분군은 경주지역의 중심고분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전체의 중앙의 중심고분군으로 기능하였다. 경주 월성북고분군은 신라 고분문화 변동의 진원이었으며, 따라서 신라 고분문화 전개과정의 이해는 월성북고분군에서 조영된 고분과 묘제들에 대한 실상의 파악이 그 출발점이다. 이글은 월성북고분군을 비롯하여 경주지역에서 전개된 신라 전기 고분문화의 전개과정을 살피려는 작업의 시작으로 작성되었다. 사로국 후기부터 목곽묘가 축조되어 경주지역의 중심고분군이 된 월성북고분군에서는 신라 조기 석재충전목곽묘의 발생에 이어 신라 전기에는 적석목곽분이 출현하여 그 중심 묘제가 되었다. 적석목곽분은 매장주체부인 목곽, 목곽 주위의 사방적석에 더해 목곽의 뚜껑 위에 가해진 상부적석과 호석으로 보호된 고총 봉토가 묘광 내 목곽과 사방적석, 그 위의 저봉토로 이루어진 석재충전목곽묘와 차별화 된 것이다. 신라 전기 월성북고분군에서는 적석목곽분이 지상적석식과 상부적석식의 두 유형으로 나뉘어 전개되었으며, 신라 조기 이래의 석재충전목곽묘와 점토충전목곽묘, 토광묘도 공존하였고, 신라 전기에 새로 발생한 수혈식석곽분도 축조되었다. 그러나 그 중 고총으로 조영된 것은 적석목곽분 뿐이었으며, 묘제들 사이에는 그 외 고분의 입지, 묘곽 형식의 분포, 구조 각부의 축조기법과 규모에서도 차등이 있었다. 월성북고분군에서는 신라 조기부터 진행된 묘제 사이의 위계화가 신라 전기에는 한층 더 강화되었던 것이다.

경주 지역 지석묘 문화의 특징과 종말기의 양상 (The Characteristics of Dolmen Culture and Related Patterns during the End Phase in the Gyeongju Region)

  • 이수홍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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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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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6-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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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경주 지역 청동기시대 무덤 문화를 검토하고 지석묘의 종말기 양상을 살펴보았다. 청동기시대 무덤 유적 18곳, 초기 철기시대 이른 시기 즉 종말기의 무덤 유적 9곳을 분석하였다. 경주는 검단리 문화 분포권에 포함된다. 현재까지 경주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무덤은 약 120기 조사되었다. 주거지의 수에 비해 무덤의 수가 부족한 편인데, 검단리 문화권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무덤의 수는 부족해도 매장주제부의 구조는 다양하다. 경주 지역 청동기시대 무덤의 특징은 토광묘와 묘역식지석묘·적석제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축조된다는 점이다. 토광묘는 동산리유적 부장품인 방추차를 통해서 볼 때 북한 동북 지역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묘역식지석묘와 적석제단은 송국리 문화권에 주로 분포하는데, 특이하게도 검단리 문화권인 경주 지역에서 많이 확인된다. 초기철기시대가 되어도 청동기시대의 영향이 이어진 묘역식지석묘와 적석제단이 계속 축조된다. 새롭게 이주한 점토대토기 문화인들은 목관묘를 축조하였다. 초기철기시대가 되면 새로운 고소의례가 등장하는데 국읍(國邑)에서 주재하는 천신제사(天神祭祀)의 장소일 가능성이 있다. 화천리 산251-1유적과 죽동리유적은 고소의례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러한 고소의례에도 묘역식 지석묘와 동일한 형태의 적석제단이 축조되고 지석묘의 상석과 유사한 바윗돌이 이용되었다. 초기철기시대에도 청동기 시대 전통을 유지한 묘역식지석묘와 적석제단이 계속 축조, 이용되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되었어도 지석묘가 가진 권위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청동기시대로 알려진 묘역식지석묘나 적석제단 일부에서는 초기철기시대까지 의례 행위가 지속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2세기 후반이 되면 목관묘가 군집하기 시작한다. 철기 문화가 확산하고, 중국 중원의 유물이 유입되는 등 경주 지역을 비롯한 남부 지역이 동아시아 네트워크에 포함되는 시점이다. 이때 지석묘 문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신라 전기 적석목곽분의 묘형과 집단복합묘군의 성격 (The Nature of the Tomb Form and the Group Tomb Complex of the Wooden Chamber Tombs with Stone Mound in the Early Silla Phase)

  • 최병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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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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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8-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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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고에서는 경주 월성북고분군에서 조영된 적석목곽분의 존재 양태의 두 측면, 즉 묘형과 집단복합묘군에 대해 고찰하였다. 적석 목곽분은 호석으로 한정된 봉분 안에 단위묘곽이 설치된 원형의 단위고분이 기본형으로, 그 묘형은 단일원분, 연접분, 다곽분으로 구분된다. 단일원분은 피장자 1인의 단장분이고, 연접분은 일반적으로 부부나 혈연관계인 가족의 합장분이다. 다곽분도 대개 최하위 랭크의 묘곽들로 구성된 합장분으로, 월성북고분군의 왕릉구역에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경주 월성북고분군의 쪽샘지구에서는 미고지를 따라 고분들의 소구역 군집현상이 보인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친연관계에 따라 소집단별로 미고지를 점유하여 그 축선 방향으로 중형급 단일원분이나 연접분을 조영하고 그 주변으로 다수의 소형분들을 위성처럼 배치하여 집단복합묘군을 형성해 나갔기 때문이다. 대릉원지구를 비롯한 경주 월성북고분군의 왕릉구역에서도 고분들은 집단복합묘군을 형성하였다. 왕릉구역의 집단복합묘군은 마립간 왕릉인 초대형 단일원분이나 왕과 왕비의 합장릉인 초대형 표형분을 주분(主墳)으로 그 주변에 대소형 고분들을 배치하여 형성되었다. 집단복합묘군의 피장자 중에는 신분이나 사회적 인격이 대등한 부부나 혈연관계의 가족이 포함되었겠지만, 고분들 사이의 랭크 차이가 현저하여 피장자 모두가 혈연관계였다고 볼 수는 없다. 집단복합묘군에 포함된 하위 랭크 고분의 피장자들은 주분 피장자 및 그 가족과 주종관계의 '소속인'들이었다고 판단된다. 경주 월성북고분군의 적석목곽분에서 보이는 이와 같은 묘형과 집단복합묘군은 신라 마립간시기 중앙의 사회집단과 그 성격을 말해준다. 앞으로 이에 대한 좀 더 정밀한 분석은 당시 신라사회의 여러 측면을 밝히는 데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일제강점기의 신라고분조사연구에 대한 검토 (An Study on Cognition and Investigation of Silla Tumuli in the Japanese Imperialistic Rule)

  • 차순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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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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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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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근대 초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를 비롯한 일본인 관학파 연구자들은 신라고분을 비롯한 한국의 문화유적 전반에 대한 조사연구와 자료수집활동을 했다. 이들은 초기에는 메이지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한국이 식민지화된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와 유관기관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고고, 미술, 건축, 인류학, 민속학 등 전 분야에 걸친 조사를 하였다. 이들이 신라고분을 비롯한 한국의 문화유산을 조사한 목적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와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지역적으로 편중되고 왜곡된 시각이 나타나기도 한다. 1886년부터 한국의 고분과 출토유물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한 방한 조사가 계속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1904년 세키노가 한국에서 조사한 건축조사 보고서인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에는 오릉을 비롯한 여러 고분에 대한 내용이 간단하게 소개되었고, 1906년에는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최초로 소금강산에 위치한 '북산고분(北山古墳)'과 황남동 남총(南塚)에 대한 발굴조시를 한 후, 적석목곽분(積石木樹墳)과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의 구조에 대한 초보적인 인식이 이루어졌다. 1909년 건축학을 전공한 야츠이 세이이치(谷井第一)는 서악동 석침총(石枕塚) 발굴조사에서 작성한 석실의 평면도와 단면도는 한국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최초로 제작된 유구실측도면으로 수치가 표현된 점에서 이전의 스케치된 그림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또한 이후 발굴조사에서는 이러한 유구 실측도면의 작성은 계속 이어진다. 이마니시와 야쯔이는 신라고분의 입지적 특징, 분구의 형태와 규모, 출토유물 등에 대한 조사 결과에 근거하여 적석목곽분과 횡혈식석실분은 서로 연대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혔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에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과 "고적조사위원회규정"을 시행하고 고적조사위원회와 박물관협의회를 설치했다. 박물관이 활동하게 되면서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유적을 조사하는 사업들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어야 됐다. 1921년에는 금관총(金冠塚)이, 1927년에는 서봉총(瑞鳳塚)이 각각 발굴조사되면서 경주의 대형 적석목곽분은 화려한 출토유물로 주목을 받게 되지만, 전국 각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여러 고분들에 대한 보고서 발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근 몇몇 연구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미발간 보고서가 간행되었지만, 서봉총과 같이 중요한 고분들에 대한 보고서가 아직 출판되지 못한 점은 당시의 한계로 볼 수 있다. 1920년대 후반에는 노모리 켄(野守健)이 지적도를 기초로 제작한 경주고분 분포도는 현재 통용되고 있는 155기의 고분의 규모와 위치를 명기한 자료로 시내에 소재한 여러 고분의 전체 모습을 확인시켜준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1930년대부터 아리미츠 쿄이찌(有光敎一)와 사이토 타다시(齋藤忠)는 다수의 적석목곽분과 횡혈식석실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 한 묘제에 여러 가지 형식의 분묘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특히 복잡하게 중복된 모습으로 노출된 적석목곽분에 대한 발굴조사경험은 이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와 보고서간행 등에 있어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에 지난 근대~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된 신라고분에 대한 발굴조사 내용을 살펴본 결과, 이때 조사된 여러 유적들에 대한 조사내용을 재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는 한국고고학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사실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