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인정의 공간

검색결과 228건 처리시간 0.024초

'신선(神仙)'을 지명소(地名素)로 하는 바위명의 유형과 입지특성 (Types and Site Characteristics of Rocks with Sinsun Relevant Place Name Morpheme)

  • 노재현;박주성;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29권3호
    • /
    • pp.61-77
    • /
    • 2011
  • 본 연구는 문헌 및 인터넷조사를 중심으로 민간어원적으로 신선사상의 흔적이 장소와 결합하여 고착화된 '신선[仙]' 관련 바위 지명어에 주목하였다. 특히 신선 지명소를 포함한 대표적 지명의 유형을 분류하는 한편, 각 신선 지명별 입지 및 장소 특성을 개관함으로써 바위 지명에 남겨진 신선과 관련된 문화의 흔적을 조명하였다. 본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선 관련 바위지명 중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지명은 신선바위(52개소)였으며, 이어서 신선봉(38개소), 신선대(31개소) 등의 지명이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되었다. 그밖에 강선대(12개소), 선유대(10개소), 사선대(5개소)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2. 신선대는 '대(臺)' 라는 대상 자체의 경관성도 뛰어나지만 원경의 부감경관(俯瞰景觀) 조망이 탁월함 곳에 입지하고 있다. 3. 신선봉의 위치는 해당 산의 최고봉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봉(峰)의 의미에는 '하늘과 맞닿아 있는' 그리고 '우러러 올려보는' 등의 숭배의 개념이 내포된 공간이다. 4. 신선봉에는 신선바위와 같이 '신선 바둑' 또는 '신선 하강'과 관련된 전설을 잉태하고 있는 지명도 상당수 있었는데 '신선과 바둑'은 신선 지명 바위의 민간어원설을 이끄는 매우 중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다. 그리고 신선대와 함께 신선바위는 내륙은 물론 해양경관이 수려한 바닷가 암상 위에도 다수 존재하고 있다. 5. 신선 바위가 위치한 고도 분석 결과, 신선봉-신선대-신선바위 순으로 '해당 위치'뿐만 아니라 '지명이 속한 최고봉의 높이' 역시 동일한 순으로 나타났다. 이는 신선봉이 산의 정상에 위치하거나 단일 산봉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음에 기인된다. 이에 비해 신선대는 대부분 파노라믹한 원경이 부감되는 곳으로, 정상은 아니더라도 신선경(神仙境)을 이루는 듯한 조망이 펼쳐지는 곳에 입지하였다. 그러나 신선바위는 높은 곳에 위치한 경우와 높지는 않지만 인가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암경(巖景)이 수려하고 계곡이 잘 발달된 곳에 입지하고 있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보아 고도 보다는 장소성에 기인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6. 신선지명을 보이는 곳의 암경적 특성은 숭배 대상의 시각적 존재감이 인정되고, 숭배 주체의 태도와도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숭배대상과 숭배주체의 소통방식과 깊이 관련되고 있는데 이는 신선 바위지명의 민간어원설을 이끄는 주요 사유인 것으로 보인다. 7. 신선사상이 시대 변천에 따라 점차 가시적이며 현실적 차원으로 우리 곁에서 구현되어 왔음을 가장 여실이 보여주는 대상이 바로 지명으로 표상(表象)되는 '신선[仙] 바위'이다.

예(禮)의 본질(本質)과 일상성(日常性) - 율곡(栗谷) 예교(禮敎)의 실학적(實學的) 성격(性格)과 일상성(日常性)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essence of Ye and its usualness - With focus on Shirak's feature of Yulkok's Yegyo)

  • 이행훈
    • 동양고전연구
    • /
    • 제35호
    • /
    • pp.161-188
    • /
    • 2009
  • 유학 특히 주자 성리학의 예(禮)는 절대적 보편적 이치로서 천이(天理)와 상대적 관계적 규범 형식으로서 절문(節文)과 의칙(儀則)으로 개념 규정된다. 예의 본질은 이렇게 두 가지 의미로 구분되는데, 절대성과 상대성이 중층적으로 혼합되어 있지만 단순한 양가성(兩價性)으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예가 발현되는 과정에는 천리(天理)와 인성(人性)이라는 본질 외에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라는 일상성(日常性)이 매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자가 서로 조화를 이루었을 때 예(禮)의 현실적 효용이 극대화될 수 있다. 물론 예(禮)는 구분의 원리이고, 악(樂)은 조화의 기능을 수행하여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예의 본질은 신분, 계급, 귀천 등 현실적 차이 속에서도 쌍무호혜적(雙務互惠的) 성격을 특징으로 한다. 유학은 일반인은 물론 최고 통치자에게도 엄격한 도덕성과 윤리를 요구하며 이를 상실한 인군(人君)은 일개 필부(匹夫)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제정하는 주체가 통치자가 아니라 성인(聖人)인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이다. 예의 현실적 효용은 '예교(禮敎)'를 실현하는 것이다. 예교는 예의 본질과 일상성이 발현되는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기제이다. 구득된 인간 본성의 발현, 주체와 타자의 소통을 매개하는 문화의 형성, 윤리 도덕적 규범에 기초한 정치행위 등이 활발한 사회가 예교가 지향하는 유교적 공동체의 본모습이다. 유교적 공동체의 원리로서 예교의 특징을 민본성(民本性)과 시의성(時宜性)을 중심으로 고찰한 이유는 예의 본질이 구현되는 일상성(日常性)의 측면에 착안한 것이다. 이는 유교가 지닌 본원적 특질인 동시에 천리(天理)와 인성(人性) 자체에 대한 원리적 탐구에 머물지 않고 인정(人情)과 시속(時俗)이라는 현실을 실천의 장으로 고민하는 실학적(實學的) 성격인 것이다. 16, 7세기를 거치며 조선사회에서는 예의 일상화(日常化)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데, 세종조 이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지속적으로 보급되어 도덕수신서(道德修身書)로 활용되었고 도덕성과 호혜성에 기반한 향촌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이 보급 시행되었다. 율곡 이이는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전범으로 하여 해주향약(海州鄕約)을 완성하였는데, 예교의 본질을 일상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실학적 특성으로 평가할 수 있다.

로맨스, 여성, 가부장제의 함수관계에 대한 독자반응비평 -제니스 A. 래드웨이의 『로맨스 읽기: 여성, 가부장제와 대중문학』을 중심으로 (Reader-Response Criticism about the Functional relation of Romance, Women and Patriarchy -Based on Janice A. Radway's Reading the Romance: Women, Patriarchy and Popular Literature)

  • 이정옥
    • 대중서사연구
    • /
    • 제25권3호
    • /
    • pp.349-383
    • /
    • 2019
  • 본 논문은 제니스 래드웨이의 『로맨스 읽기: 여성, 가부장제와 대중문학』(1984)을 중심으로 로맨스 연구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고찰했다. 이 책은 문화연구와 문학연구를 조합하여 여성독자들의 로맨스 독서의 의미를 고찰하고 로맨스 텍스트를 분석한 점에서 지금까지 대표적인 로맨스 연구서로 손꼽히고 있다. 제니스 래드웨이는 여성독자공동체를 대상으로 로맨스 독서 행위의 의미를 실증적으로 고찰했다. 즉, 설문조사와 심층면담을 토대로 여성들의 로맨스 독서가 부담스러운 가부장적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탈출의 해방감을 추구하며 정서적 구원을 안겨주는 '보상문학'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여성들이 선호하는 로맨스는 '만남 → 시련 → 회복 → 해피엔딩'이라는 4단계와 13개의 서사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항상 미성숙한 여주인공의 정체성 불안에서 출발하여 여성의 능력으로 배려 깊은 남자로 변모한 남자주인공에 의해 여성의 본래적 가치를 인정받는 행복한 결합으로 끝을 맺는 공식을 유지한다. 따라서 로맨스는 '여성 유토피아적 판타지'를 추구하며 여성을 가부장제와 화해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당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로맨스독서는 '여성적 읽기'이며, 로맨스는 여성의 삶과 가부장제의 함수관계를 그린 문학이라는 점을 공유한다. 다만 누구의 관점으로 볼 것인가, 여성적 유토피아의 판타지가 무엇인가에 관한 관점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최근 들어 여성들의 삶의 조건과 여성독자들의 의식과 상상력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여성 유토피아적 판타지도 이전과 현격하게 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가부장적 체제 내 여성의 삶은 여전히 모순적이며, 여성들의 모험적 상상력은 서브컬쳐와 같은 대안공간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로맨스란 무엇인가, 아울러 로맨스 연구의 의미와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지구화 시대 개입으로서의 예술실천과 장소의 문제 : 동두천 작업을 중심으로 (Site-Specific Art Practices as Intervention in the Era of Globalization: Focused on Two "Dongducheon" Art Projects)

  • 김영옥
    • 여성학논집
    • /
    • 제27권1호
    • /
    • pp.73-109
    • /
    • 2010
  • 오늘날 지구화된 문화 환경 속에서 점점 강조되는 문화 다원주의는 지역 정체성을 중요한 문화교류의 지표로 삼는가 하면, 지역 정체성 자체를 표준화된 국제적 관점에 끼워 맞추라고 강요함으로써 모든 지역을 동질적인 공간으로 변형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포스트식민 분단 한국의 정치경제, 사회문화가 가장 특징적으로 새겨져 있는 '동두천'과 관련된 두 개의 아트 프로젝트, <아메리칸 앨리>(김동령)와 (정은영)를 분석한다. 이 프로젝트들은 '지역 특수성에 기반을 둔 예술실천'으로서 지구화 시대 사라지는 지역의 역사성을 지켜낸다는 것은 무엇인지, 역사적 기억으로서의 예술실천은 어떤 모습으로 가능한지, 무엇보다 특정 장소가 극단적인 젠더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있을 때 이 장소를 여성주의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지 등을 성찰한다. 동두천은 해방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 내부의 어떤 섬, 혹은 '외부'로서 존재해왔으며, 이것은 현재 동두천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대부분 구 러시아 지역과 필리핀 등지에서 온 이주여성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다중적이고 지구적인 성격을 띤다. 포스트식민/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는 <아메리칸 앨리>와 는 지나치게 '두터운' 정체성을 가진 동두천이라는 지역/장소와 그 정체성의 한가운데에 있는 클럽여성들을 이제까지의 이데올로기적 재현을 거슬러 인정과 소통이 가능한 방식으로 '가시화'시키고자 시도한다.

대순사상의 인문정신과 인류평안의 이념

  • 잔스촹
    • 대순사상논총
    • /
    • 제21권
    • /
    • pp.199-254
    • /
    • 2013
  • 대순사상은 인간의 행위와 정신적 틀, 즉 몸과 마음을 닦고 세상을 다스리며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도리를 설파하고 있다. 우주 공간의 질서와 깊은 연관을 맺는 이러한 도리는 인간 자신의 인지(認知)와 심신 수양의 내용을 포함하며, 사람이 사회와 우주자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 나갈 것인지에 관한 문제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대순사상을 인문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서양의 인문주의와 비교해 볼 때, 중국 전통의 인문정신은 인류 개체의 창조력과 그 성과를 인정하고, 인격적 수양과 개선을 주장하며, 사회의 조화를 강조하는 한편, 인류가 반드시 천지인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개체와 전체의 생존을 파악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문정신은 『전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하나가 모악산과 단주(丹朱)에 대한 서술인데, 모악산은 산 즉 '간'(艮)괘이며 단주는 적색에 상응하니 곧 '리'(離)괘가 된다. 이 두 괘가 서로 조합하면 '비(比)'괘가 되며, 『주역』의 비괘와 연관하여 서로 간의 모순을 없애고, '바둑'을 두는 기법을 거울삼아 심성을 다스리며, 인격을 완성하고, 인신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며, 사회를 안정시킬 것을 말한다. 대순 신앙의 최종 목표는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것인데,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격수양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인격수양의 목표는 바른 도인이 되기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수도 공부를 해야만 한다. 수도는 춘추시기 노자 이래로 유구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것이지만, 대순진리회는 한국사회 역사의 경향과 현실의 필요에 부응하여 수도 이론을 새롭게 수립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대순진리회는 수도자가 '성(誠), 경(敬), 신(信)'에 힘쓰는 품격 함양을 매우 중시한다. 또 도인들이 가정의 화목에 힘써야 하며, 솔선수범하는 도인으로서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대순진리회는 '인도'(人道)를 함양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은 전통적인 유가에서 말하는 '수신, 제가' (修身, 齊家)의 정신과 그 의미가 맞닿아 있다. 또한 중국 도교의 '선도(仙道)를 이루고자 하면 먼저 인도(人道)를 행하라'는 사상적 취지와도 일치한다. 대순진리회에서 수도의 최종 목표는 도통이다. 도통은 수도자가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었을 때 가지는 특수한 능력과 정신의 경지이다. '도통'에 대한 기록은 『장자·제물론』, 『문자』의 「부언편>(符言篇)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순진리회가 말하는 도통은 중국의 도가 전통에 보이는 도통과도 연관되지만 강한 인륜수양(人倫修養)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것은 대순진리회가 가지는 중요한 인문적 함의라 하겠다. 대순진리회는 수도 공부로써 광제창생·보국안민·지상천국건설의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조화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토대는 대순진리회의 종지 첫 번째인 음양합덕이다. 음양합덕은 대순진리의 인문 취지의 이론적 기초를 형성하는 사상이다. 음양합덕의 철학적 사고는 종지 두 번째인 신인조화(神人調化)의 이상으로 이어진다. 신인조화는 『상서·순전』(尙書·舜典)의 신인이화(神人以和)에서 그 사상적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다만 신인이화가 율려 조화의 '결과'를 표현한 것이라면, 신인조화에서 중시하는 것은 '과정'이며 인간과 신의 상호작용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신인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며, 그 배후에는 인본(人本)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종지 세 번째인 '해원상생'의 내용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신인조화가 인간과 신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면, 해원상생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긴 역사의 과정 속에서 맺힌 원을 풀어 우주의 기운을 잘 통할 수 있게 하고 인간 사회의 정상적인 교류를 이루도록 한다. 이러한 내용은 사회적인 인문적 관심과 배려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의 종지 네 번째인 도통진경은 수도의 가장 높은 경지를 말하는데, 이러한 이념은 노장 일파의 도가 학자들이 말한 순박한 본성으로 회귀하자는 정신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한진(漢晉)시대 이래 중국 도교가 추구했던 '진경' 의 의미와도 합치된다. 그러나 시대와 환경이 다름으로 인해, 대순진리회의 '진경'은 사회생활의 의미까지 내포한다. 비록 대순진리회의 경전이 인본(人本)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대순진리회의 요의(要義) 중 하나인 인존사상은 대순진리회의 인문정신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존사상의 직접적인 기능은 평안(平安)으로서 삶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대순진리회는 우주대원의 진리를 '도'라 하였는데 이러한 '도'는 중국의 도가에서 말하는 '도'와 동일하며, 여기에는 '안(安)'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대순진리회의 신조 중 '안심', '안신'은 마음을 정(靜)하게 하고, 몸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심신의 공포와 두려움을 떨쳐내어 안전과 보호를 얻는다는 의미도 있으므로 결국 평안이 전제가 된다. 이렇듯 대순진리회에서는 '평안에 대한 희구'를 근본으로 하여 신앙인들이 열심히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 대순진리회가 인류 평안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반드시 세인들의 환영을 받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중관으로 연결된 자연치와 임플랜트의 악골 내응력분포에 관한 3차원 유한요소분석 (A Study on the Stress Distribution of Tooth/Implant Connected with Konus Telescope Denture Using 3-Dimensional Finite Element Method)

  • 이수옥;최대균;권긍록;우이형
    • 대한치과보철학회지
    • /
    • 제46권4호
    • /
    • pp.381-395
    • /
    • 2008
  • 서론: 임플랜트와 자연치가 혼재하는 증례에 있어서 보철물의 연결여부와 그 결과에 대해 논쟁이 많이 있어왔다. 본 연구에서는 임플랜트와 자연치를 이중관으로 연결했을 경우에 치조골 내에서 임플랜트 주변 조직의 하중에 대한 응력의 양상을 분석하여 자연 치와 임플랜트를 연결하는 보철물의 방식으로 이중관의 사용가능성을 비교 분석하고자 하였다. 연구재료 및 방법: 실험군으로서는 한 개의 자연치아와 한 개의 임플랜트를 이중관으로 연결한 모델을 사용하고, 대조군으로 두 개의 임플랜트를 이중관으로 연결한 모델을 사용하여 응력분포의 차이를 비교분석하였다. 임플랜트와 자연치 각각 통상적인 금합금을 사용하여 내,외관을 모델링한 후 각각의 외관을 연결한 구조를 형성한다. 내관과 외관은 $6^{\circ}$의 경사도 (taper)로 형성하고 내외관 사이의 공간을 인정하여, 하중을 가했을 경우 내외관 사이에 합금의 마찰력과 변위를 계산하여, 그 결과가 골내 임플랜트의 응력 분포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실험모델을 형성하였다. 하중은 일반적인 저작력의 크기로 임플랜트 부위와 자연치 부위에 각각 부여하여 응력의 차이를 비교하였으며, 최종적으로 대조군과의 차이를 비교하고자 하였다. 하중 조건은 임플랜트와 자연치아 사이, 임플랜트 후방, 전방부 자연치아의 사이에 하중을 가하였으며, Load case 1, 2, 3로 분류하였다. 실험을 위해서 ANSYS Version 8.1을 사용하여 3차원 유한 요소 분석을 시행하였다. 연구성적: 지대주에 가해지는 응력 - 최대 응력은 실험군이 대조군에 비해 각각 2.4 (Load Case1), 1.02 (Load Case2), 0.46 (Load Case3)배 높게 나타났으며,Load Case3의 경우 대조군의 최대응력이 더욱 높게 나타났는데, 이것은 전치부 치아의 경우 하중을 효과적으로 분산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악골내에 가해지는 응력 - 악골내에서 최대 응력은 실험군이 대조군에 비해 각각 1.69 (Load Case1), 1.26 (Load Case2), 1.93 (Load Case3) 배 크게 나타났다 결론: 임플랜트와 자연치아가 혼재된 경우, 이중관으로 상부 보철물을 연결한 경우, 임플랜트만으로 구성된 대조군에 비해, 임플랜트 및 임플랜트 식립 부위의 악골에 가해지는 최대 응력은 1.02 에서 2.4배 가량 높게 나타났다. 자연치아의 움직임이 임플랜트의 경부 및 악골 내에 응력을 집중시킨 것으로 보이며, 자연치아가 있는 악골부위에서는 응력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본 실험의 경우 자연치아와 임플랜트에서 모든 하중을 받는 것으로 계산하였고, 실제 가철성 의치에서 나타나는 점막의 영향을 배제하였기 때문에, 실제 임상에서는 후방 임플랜트에 미치는 최대 응력의 크기는 2.4배 이하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앞으로, 실제 임상에 적용하였을 경우, 임플랜트에 미치는 영향 및 자연치아에 미치는 결과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지리인식(地理認識)과 문인(門人)들의 지지편찬(地誌編纂) 의의 (Yeoheon's Recognition of Geography and the Significance of the Compilation of Geographical Records by His Disciples)

  • 최원석
    • 동양고전연구
    • /
    • 제49호
    • /
    • pp.73-107
    • /
    • 2012
  • 여헌 장현광(1554-1637)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이면서 우주론과 자연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저술한 사람이다. 조선조 유학의 지리적인 학맥에서 여헌은 남명 조식과 한강 정구의 학풍을 이어받으면서 풍수와 지지편찬을 계승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여헌은 주자학에 영향을 받았지만 역학(易學)의 기틀을 견지하였으며, 사변적인 공리공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용적 경세학(經世學)으로서의 지리를 인식하였다. 여헌의 지리인식 방법은 역학(易學)의 체계와 구도 상에서 이루어졌다. 여헌은 자연에 대한 인간 본위(本位)의 인식태도를 드러내며, 따라서 인사의 공능이 지리의 조건보다 우선되는 준칙이었다. 여헌에게 산수와 자연은 비덕(比德)의 공부대상이었고, 자연공부 방법은 대상물의 관찰을 통해 생명의 이치를 자득하고, 무심한 경지를 통해 천지의 마음에 이르는 것이었다. 유학의 가르침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여헌에게 있어서 낙토(樂土)는 안분자족(安分自足)함에서 얻어지는 것이었다. 여헌에게 지리인식의 의의는 생활의 실용적인 이익 됨에 목적을 둔 필수적인 지식정보였다. 여헌은 은거지의 생활현장에 자신이 견지한 유학적 우주관과 세계관을 '우주사업'의 일환으로 구현하였다. 이러한 의식과 태도는 주거지의 장소경관과 자연경물(自然景物)을 북극성과 주위 28수의 별자리로 상징화하여 명명하고 우주적 중심 공간으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경영에서 비롯된 유학자들의 동천구곡(洞天九曲) 전통은 조선시대에 유행되었지만, 여헌의 장소 구성 체계는 여타의 형태와 방식을 뛰어넘은 우주적 구도의 독창성이 있다. 여헌의 장소 명명 의식에는 선현을 본받고자하는 태도, 자연물의 형용과 성정에 대한 비덕(比德), 그리고 은거(隱居) 의식의 반영이 나타난다. 여헌의 국토관 및 국토이해는 지형개관, 산수이해, 도읍입지, 지역이해, 풍토론, 현실인식의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드러나고 중국의 지리적 조건과도 비교되어 파악되었다. 그의 국토인식과 이해방식은, 국토의 유기체적인 인식, 주자학의 자연관이 반영된 기적(氣的)인 국토인식, 산천 인식과 도읍 입지의 풍수적 이해, 지역구분을 통한 비교론적 이해, 인물과 풍속에 대한 풍토론적 이해 방식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헌은 역의 포괄적인 사상체계 범주에서 풍수도 수용하였다. 그가 풍수를 수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남명과 한강을 계승하는 학풍에서 연유되는 바가 있었다. 여헌은 풍수지식을 활용하여 주거지의 입지를 정하기도 하였고, 고향 연고지의 여러 곳에 대해 풍수적 견지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풍수관을 보면, 묘지풍수에서 형세론적 이치는 수긍하고 있지만 장례기일을 미루는 발복 목적의 행위는 비판하였다. 그리고 고을의 풍수에서 숲의 조성을 통한 비보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풍수관은 문도(門徒)들의 지지편찬에도 일정하게 반영되었다. 여헌 학풍에서 주목할 만한 지리학적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지지(地誌)의 편찬이다. 이것은 남명과 한강의 치용(治用) 정신과 경세적(經世的) 실천을 계승한 학풍이기도 했다. 여헌은 지지를 중요시하게 생각하면서 문인들에게 편찬을 독려하였다. 고을의 통치자나 지식인으로서 지역의 역사와 옛 일을 잘 알아야하고, 권면하고 징계하는 기준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헌의 견해는 이후 문인들의 지지편찬 취지와 내용 구성에 지침이 되었다. 이 연구는 여헌의 지리인식에 관한 사실적인 면모의 정리와 지리적 학풍의 계승 맥락에 관한 고찰에 그친 한계가 있다. 다음에는 여헌 전후 유학자들의 지리인식과 지지편찬 전통이 어떻게 전승되면서 전개 발전되었고 질적으로 변천해 나갔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학계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조선 초 중기 유교지식인의 지리학사를 정립하는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과시된 효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연구 (Showing Filial Piety: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재호
    • 미술자료
    • /
    • 제96권
    • /
    • pp.123-154
    • /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덕수5520)는 그림과 발문(跋文) 열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으로, 작가는 조중묵(趙重黙)(1820~1894 이후), 주문자는 박경빈(朴景彬)(생몰년 미상), 발문을 쓴 사람은 홍선주(洪善疇)(생몰년 미상), 제작연대는 1868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낱장으로 보관되어 온 <인왕선영도>를 병풍으로 복원하고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최초로 공개하였다. <인왕선영도>에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홍은동을 아우르는 인왕산 서쪽 실경이 묘사되어있고 원경에는 북한산 연봉이 그려져 있다. 화면 속에는 인왕산(仁旺山), 추모현(追慕峴), 홍재원(弘濟院), 삼각산(三角山), 대남문(大南門), 미륵당(彌勒堂)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있다. 이 지역을 나타낸 조선후기 지도와 비교해보면 지형 표현과 지명 표기에 유사성이 있다. 조중묵은 넓은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지도의 지리정보를 숙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경의 현장을 답사한 결과, 조중묵은 각각의 경물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였고 수평의 화면에 나열식으로 조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조중묵은 남종화풍 정형산수에 뛰어났던 화가로, <인왕선영도>의 세부 표현에서 사왕파(四王派) 화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도화서 화원들이 화보를 활용하여 가옥을 그리거나 토파에 호초점을 찍고 당분법(撞粉法)으로 꽃을 나타내는 등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한 경향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인왕선영도>에는 바위를 짙은 먹으로 쓸어내리듯 붓질한 기법, 산세의 괴량감, 가로로 붓을 대어 단순하게 그린 소나무 등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의 개성적 양식도 가미되어있다. 조중묵은 인왕산 실경산수로 유명한 정선의 양식과 권위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유기적 공간감과 현장의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연폭 화면이라는 매체도 조중묵의 개인 양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인왕선영도>는 발문의 텍스트와 화면의 이미지가 잘 조응하는 작품이다. 발문의 내용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①무덤의 주인공과 이장 경위, ②무덤의 입지와 풍수, ③묘제(墓祭)와 신이(神異)한 응답, ④무덤 관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 ⑤병풍 제작의 동기인 박경빈의 효성과 수묘(守墓), ⑥발문을 쓴 의의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용이한 ②의 내용은 화면에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인왕선영도> 제작의 직접적 동기인 ⑤를 보면 주문자 박경빈이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다."라 하여 <인왕선영도>에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경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듯 나열한 구도는 회화미는 떨어지더라도 무덤의 풍수지리를 전달하는 데는 더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산도(山圖)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목판본 선영도로서, 족보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기록에서는 족자 선영도를 첨배(瞻拜)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선영도 첨배는 현실적으로 수묘(守墓)가 곤란할 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의례로 인정되었다. 한효원(韓效元)(1468~1534), 조실구(曺實久)(1591~1658) 등이 선영도를 제작한 후 당대의 명사에게 서문을 요청하고 효심을 과시한 사례는 <인왕선영도>의 선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개인 소장),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선영도는 아니지만 계회도 형식의 족자이고 풍수를 도해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선영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인왕선영도>는 첨배라는 측면에서 초상화와도 의미가 비슷했다. 발문의 "부친의 기침소리를 직접 접하는 듯하고, 그 태도와 몸가짐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는 표현과 부친의 초상에 조석 문안을 올린 서효숙 고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경빈이 일반적인 선영도 형식이었던 족자나 목판화 대신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를 주문한 의도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사례(四禮) 의식에 다수의 병풍을 배설(排設)하였는데, 의례의 성격에 따라 그림의 주제를 반드시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인왕선영도> 또한 여러 의례에 두루 배설하거나 장식 병풍으로도 사용하기 위해서 선영 그림이라는 주제를 실경산수화 이미지 아래에 가렸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왕선영도>의 핵심 소재인 무덤 봉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것은 사산금표(四山禁標)의 금제 위반을 숨기기 위함일 가능성이 있다. <인왕선영도>에 묘사된 인왕산 서쪽 산기슭은 분묘 조성 금지구역이었다. 1832년에 금표 내에 몰래 쓴 묘를 적발하여 즉시 파내고 관련자를 엄히 처벌한 사례로 볼 때, 19세기 중엽까지도 사산금표 내의 분묘 금제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장지를 얻기 위해 쏟은 정성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장지조성에 마을사람들의 협조와 묵인이 필요했던 것은 금표 구역 내에 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인왕선영도>와 비교 가능한 동시대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로 이한철(李漢喆)(1808~1880)이 그린 <석파정도(石坡亭圖)>(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를 들 수 있다. <석파정도> 제작시기를 전후한 1861년에 이한철과 조중묵은 철종어진도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조중묵이 이한철의 <석파정도> 제작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조중묵이 몇 년 후 <인왕선영도>를 주문받았을 때 <석파정도>의 인상적인 연폭 실경산수를 본 경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작품의 화풍 차이는 주문자의 취향과 제작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는 실경산수화와 선영도의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지식수준과 주문자와의 친분, 관람에 들이는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과 자호, 본관이 일체 작성되지 않은 채 '박공(朴公)'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주문자인 박경빈의 인적 사항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다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가계를 미루어 볼 때 재력이 있음에도 지배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발문을 쓴 홍선주 또한 사대부로 보기 어려우며, 『승정원일기』 기록에 나타나는 경아전 서리일 가능성이 있다. 박경빈은 상류 계층에 진입하고 싶은 욕망으로 보수적인 가치인 효(孝)를 강조하여 부친의 무덤을 명당으로 이전하고 <인왕선영도>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금제위반 적발에 대한 우려, 병풍의 다목적성 등의 이유로 본래의 제작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모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병풍이 제작된 지 47년 만에 각 폭이 분리된 채 미술상을 통해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이 된 상황을 보더라도, 박경빈이 <인왕선영도>에서 꿈꾸었던 명당 발복과 가문의 신분상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