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의례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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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선사시대 굽다리토기 연구

  • 강병학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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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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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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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본 고는 매우 복잡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는 선사시대 토기 중 굽다리토기에 대한 연구이다. 특수한 기형의 이 토기는 분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의례용으로 인식되어져 왔으며, 그 명칭 또한 무분별하게 사용되어져 왔다. 따라서 충분히 객관적이고도 적절한 정립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 토기는 저부와 신부의 상대크기에 따라 대부형(Ⅰ형)과 대각형(Ⅱ)으로의 세부기종 설정이 가능하고 세부기종별 속성분석을 통하여 6형식의 형식분류가 이루어졌다. 무문토기시대 전기 주거지유적에서 공렬 및 각형토기와 공반하는 1·2·3·4형식의 토기(북한→강원영동→경기중부·충청서해안지역)는 점토대토기문화가 도래하면서 생활, 분묘, 생산, 폐기 그리고 의례관련유구에서 출토되는 5·6형식 토기(경기중부·충청서해안→호남·영남지역)로의 변화를 보이면서 전개된다. 즉 점토대토기문화가 도래하는 시점에서 굽다리토기의 형식도 변화·확대되고 있다. 또한 출토맥락, 형식조합, 제작기술 등의 관점에서 공렬 및 각형토기와 공반하는 1·2·3·4형식은 일상 생활용기로의 상정이 가능한 반면 점토대토기와 조합을 이루는 5·6형식 토기는 의례관련유구와 분묘유구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어 기원이나 소원과 관련된 의례용기, 그리고 부장용으로의 기능분화가 관찰된다. 〔주제어〕: 굽다리토기, 공렬토기, 각형토기, 점토대토기문화, 기술유형, 시공적 전개, 기능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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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진오기굿의 의례적 특징 (The Characteristics of Seoul Ginoguigut in Ritual Form)

  • 이용범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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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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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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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글은 서울 진오기굿의 의례형식을 중심으로 의례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글은 서울 진오기굿의 의례상 특징으로 저승길의 가시적 구현, 망자와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죽은 자와 산 자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축원 등 세가지를 지적하였다. 먼저 서울 진오기굿은 굿의 의례과정을 통해 죽은 자의 저승길을 가시적으로 구현한다. 이는 유교, 불교의 죽음의례 뿐만 아니라 타 지역 무속 죽음의례와 비교했을 때도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서울 진오기 굿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두 번째로 서울 진오기굿에서는 무당의 신내림을 매개로 죽은 자와의 의사소통이 직접적인 대화형식으로 이뤄진다. 죽은 망자와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개개 죽음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확인하는 의미를 갖는다. 세 번째로 서울 진오기굿에서 이뤄지는 축원은 죽은 자의 저승천도에 머물지 않고 살아있는 가족들의 평안까지 포괄한다. 이는 죽음이 죽은 자와 산 자에 다 관련되며, 죽음과 삶은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무속의 죽음이해를 보여준다. 이 글에서 밝힌 서울 진오기굿의 의례적 특징은 유교, 불교 죽음의례와의 상대적 비교를 염두에 둔 것으로, 그것은 유교, 불교 죽음의례와의 상호관계에서 어떻게 무속 죽음의례가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죽음의례로서 존재가치와 기능을 인정받아왔는가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를 통해 본 조선왕실출산(朝鮮王室出産)의 의학적처치(醫學的處置)와 의철학(醫哲學)에 대한 고찰(考察) (通过 ≪护产厅日记≫ 对朝鲜王室关于分娩的 医学处置以及医学哲学的考察)

  • 류정아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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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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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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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연구목적 : 조선(朝鮮) 왕실자녀(王室子女)의 출산과정을 일지(日誌) 형식으로 기록한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는 후기 조선(朝鮮)의 임산(臨産)과 분만, 산후 및 신생아 증상에 대한 의학적 처치 및 산실배설(産室排設)과 출산의례를 고찰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의학사료(醫學史料)이다. 연구방법 : 1.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에 기록된 세 번의 출산에 대해 출산 전후 산부(産婦)와 신생아의 실제 상황과 증상, 의관(醫官)의 판단과 치법(治法), 처방(處方)내용, 치료경과 등 의학적 처지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산과의학(産科醫學)의 경향성, 발달정도 등을 가늠해보았다. 2.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에 기록된 세 번의 출산에 대해 조선왕실(朝鮮王室)의 출산형식 및 관련의례에 드러난 당시 의학의 출산에 대한 의철학(醫哲學)이 어떠하였는지 고찰하였다. 결과 및 결론 : 산전(産前) 의관(醫官)의 정기문진으로 산모와 의사 간 관계형성 및 산부(産婦)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의녀(醫女)의 진찰소견을 의관(醫官)이 판단하여 처방하였다. 임산(臨産)에 불수산(佛手散)과 인삼차(人蔘茶), 산후어혈증(産後瘀血症)에 가미궁귀탕(加味芎歸湯)을 빈용(頻用)하였으며, 화반곽탕(和飯藿湯)의 식치(食治)가 주요 산후조리법이었다. 신생아의 구급(救急)에 특히 우황(牛黃)을 빈용(頻用)하고 증상에 따라 유모(乳母)가 복약(服藥)하기도 하였으나, 조산(早産)된 신생아의 청색증(靑色症)(cyanosis)으로 보이는 증후(症候)와 사망례(死亡例)가 보인다. 산실배설(産室排設) 및 현초(懸草), 권초제(捲草祭) 등 관련의례에는 출산을 '하늘과 직접 소통하는 하나의 의례(儀禮)'로 생각하여 외부 환경의 방해 없이 산부(産婦)와 신생아의 천계(天癸)가 잘 작동하도록 배려한 의철학(醫哲學)이 드러나 있다.

종교적 상징이 복식으로 표출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 -고등종교의 의례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Mechanism of Religious Symbol, Manifested in Costume -Focusing on the Rites of High Religion-)

  • 서봉하;김민자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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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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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5-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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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종교는 인간을 궁극적인 삶의 조건과 관련시키는 일련의 상징적인 형식과 행위이다. 종교사상은 상징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또 상징을 통해 행위를 유발한다. 본 연구는 종교가 복식에 미치는 영향과 그 메커니즘을 규명하는데 목적을 두고 문헌을 중심으로 연구를 하였다. 세계 고등 종교 중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연구하였으며, 종교의 여러 구성요소가 의례로 표현되고, 복식으로 표출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며,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도식화하여 제시하는 것에 목표가 있다. 믿음체계, 경험, 공동체, 의례 등 종교의 구성요들은 긴밀한 상호 연관성을 갖는다. 특히 의례는 종교적 의미를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이자 실천이며, 구원의 방편이다. 모방의례, 긍정적 혹은 부정적 의례, 희생의례, 통과의례 등의 종교적 의례들은 제사와 같은 종교 예식은 물론, 종교음악이나 복식, 건축, 미술 등의 조형예술로 표현되어 왔다. 종교는 삶의 의미를 밝혀 주고, 불안이나 갈등과 같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신앙체제로서 복식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 큰 영향력을 끼쳐 오고 있다.

『석문의범(釋門儀範)』 간행의 의의와 한계 (The Significance and Limitation of the Publication of the Manual for Buddhist Rituals (釋門儀範))

  • 이선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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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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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9-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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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석문의범(釋門儀範)"(1935)은 한국불교의례의 근대화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의례집이다. 이 의례집은 "작법귀감(作法龜鑑)"(1827)을 근간으로 "불자필람(佛子必覽)"(1931)을 거치며 완성된다. 3종의 의례집은 의식집을 사용할 수 있는 범례를 싣고 있다. 이 법례를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작법귀감"은 사성(四聲)과 여어(儷語)를 활용하여 범패소리를 담으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불자필람" 이후 소리표기가 생략된다. 그리고 예참(禮懺)의 삼보통청(三寶通請)을 예경(禮敬)의 사성례(四聖禮)로 바꾸어 놓는다. 한글과 한문을 동시에 기록한 형식은 누구나 쉽게 불교의례에 참여할 수 있는 대중화의 초석이 된다. 이와 같은 틀을 수용한 "석문의범"은 대중화의 목적은 이루었으나, 범패 또는 염불은 글만이 전해지게 된다. 결국 한국불교의 음악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혼례 음식에 담긴 소중한 의미(1)

  • 이춘자
    • 식품문화 한맛한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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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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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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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혼례는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여겼고, 각 민족의 오랜 전통으로 계승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혼인의례는 인간이 한생을 살면서 치르는 의례 중 가장 큰 의식으로 혼인대례(婚姻大禮)라고 한다. 혼례는 몇 십 년 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남녀가 합쳐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인류의 번영을 이루는 것으로, 우리 인간에게 생애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자, 인간만이 행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혼례는 단순히 두 남녀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만남, 서로 다른 가풍과 가풍의 만남, 그리고 남과 여라는 음(陰)과 양(陽)의 조화이다. 이렇듯 작게는 남녀 개개인에서 크게는 집안, 문화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혼례이다. 따라서 혼례를 치를 때 갖추는 예는 단순한 형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해 배우자와 배우자 집안 어른들에게 올리는 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혼례는 한 인간과 한 집안에서 가장 큰 경사인 셈이다. 새로 사람을 맞아 가족으로 받아 들이는 것만큼 중요하고 경사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신랑과 신부가 가족, 친지,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약을 맺고, 이들에게 따뜻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일생 최대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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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군례(軍禮)의 정비와 사례(射禮)의 의례화 (A study on the Ritualized of Royal Archery of early Chosun Dynasty)

  • 이왕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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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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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9-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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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조선시대의 군례(軍禮)가 중국 고대의 의례를 답습한 것만이 아니라 삼국시대와 고려를 이어 내려오던 전례도 함께 수용되었음을 밝혔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사례(射禮)를 들어서 군례의 역사적인 정착과 의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조선의 군례는 국가의례인 오례의가 정착되는 성종대에 정비되었다. 군례가 국가 전례서에 공식적으로 오례의 하나로 포함되면서 군사의례가 완비되었다. 그러나 군례의 정비는 중국 고대의 예제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던 전통적인 부분을 흡수하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중국의 예제는 "주례"의 오례 구조를 계승하였던 당대의 "개원례"를 도입하였으며, 삼국시대의 예제를 계승한 고려의 오례 구도를 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군례의 기원은 고려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와 주나라 및 당 송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런 오랜 기간을 통해 정비되고 개선된 의례 형식이 가미되어 정착되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군례에 활쏘기가 들어간 것은 조선왕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었다. 조선초부터 활쏘기는 왕실은 물론 관료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유교적 관점에서 활쏘기가 군자의 덕을 살필 수 있는 의례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부분도 있으며, 태조를 이은 국왕들이 왕실내 전통적인 행사로 활쏘기를 이어간 것도 한 요인이었다. 활쏘기가 습사(習射)와 관사(觀射)로 정비되면서 점차 의례적인 절차로 규정되었으며 결국 세종대 오례의에 포함되고 성종대 의례로 정비되었다. 습사와 관사는 사례의(射禮儀)로 정비된 이후에도 의례적인 시행만이 아니라 국왕들의 잦은 활쏘기에 맞추어 활발하게 거행되었다. 다만 성종대 성균관 대사례가 정비된 이후 왕실의 활쏘기는 축소되었다. 특히 중종대 이후에는 국가적인 사례의 거행이 드물게 되었으며, 국왕이 활쏘기를 장려하는 것도 조선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크게 감소되었다. 이점은 중종대를 전후하여 문치를 강조하던 사림파의 정계 진출 이후 벌어진 일이라고 보인다. 중종 재위기간 내 국왕이 주재하는 활쏘기가 2회만 거행되었다는 점이 그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국초부터 왕실의 장기이며 상무기질을 북돋기에 가장 용이한 방안이었던 사례(射禮)가 쇠퇴했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군례를 소홀히 다루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따라서 조선초 군례의 정착과 사례의 정비는 상무적 기상이 강조되었던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그 변화양상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중종대 이후 잦은 왜변을 거치면서 상무적인 군례의 시행이나 활쏘기는 권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왜란을 거친 뒤 새로 도입된 명나라의 군제에 맞추어 군례가 변화되고 새롭게 정비되는 과정에서 무예가 강조되었다. 결국 조선전기의 군례는 그 정착 과정이 국가의례적 속성을 보이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분히 의례적(依例的)인 수준으로 변모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이점이 왜란과 호란을 겪게 될 조선의 딜레마였음은 물론이다.

제사공간으로서 장백산의 문화경관적 해석 (Cultural Landscape Analysis of Changbai Mountain as Sacrifice Space)

  • 허종화;성종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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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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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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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특정한 시대에 장백산 지역에 조성된 제사공간을 문화경관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장백산의 신성성이 역사 속에서의 변화과정과 정권의 교체와 민족의 변화 속에서도 신성성이 유지된 이유에 대하여 해석했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시기로 과도하면서 겪은 정권의 교체와 민족의 다양성, 그리고 문화의 수용성으로 인하여 장백산의 제사성격과 신적대상이 변화했다. 둘째, 청나라의 황가 제사공간인 망제전(望祭殿)은 권위적인 공간으로 만족만의 유일한 제사공간과 문화를 형성했고 중화민국 시기에는 한족의 이주와 정착과정을 겪으면서 방산인 사이에서 새로운 민간신앙이 탄생했으며 따라서 제사공간인 여래사(如來寺), 산신노파두묘(山神老把頭廟)가 조성되었다. 셋째, 제사공간과 장백산을 공간적으로 보면 망제전은 수직적인 공간으로 권력적인 공간이고 여래사와 팔괘묘는 장백산과 수평적인 공간에 입지되어 순종적인 공간으로 나타났다. 넷째, 제사의례를 보면 청나라의 망제전은 만족만의 유일한 제사의례 이지만 황권의 폐지에 따라 단절되었다. 현재는 민간제사의례가 일상화 되어있고 청나라의 제사의례는 형식적으로만 진행된다. 결론적으로 보면 역사적으로 장백산에 대한 신성성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백산 제사공간은 청나라의 단일한 제사문화에서 정권의 교체와 다민족의 문화에 대한 수용을 거쳐 변화하였다. 현재는 상호수용을 통하여 중첩된 제사공간과 문화를 형성하였다.

중국(中國) 광서성(廣西省) 전주현(全州縣) 동산요족(東山瑤族) 민속문화(民俗文化) 조사(調査) 약보고(略報告) (The Research report of ethnic customs in Dong-shan(東山) Yao(瑤) family)

  • 박대남;현창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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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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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9-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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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중국(中國) 광서성(廣西省) 전주현(全州縣) 동산요족(東山瑤族)은 한족(漢族)과의 교류가 일찍부터 활발했던 이유로 그 기층을 이루는 민속문화(세시풍속 통과의례 민간신앙 주거민속 농업과 농기구 등)가 대체적으로 한족(漢族)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요족(瑤族)의 전통적인 문화형태를 보존해 오고 있다. 세시풍속 중 모든 요족(瑤族)의 시조인 반고(盤古)의 탄생을 기념하는 명절, 여러 의례 중에 혼례 때 이루어지는 곡가(哭嫁) 같은 노래들, 상례(喪禮)에서의 의례형식, 요족(瑤族)의 신앙생활을 주재하는 사공(師公) 등이 있는 것들이 그러하 다. 또한 주거에 있어서 환경적인 요인과 생활습관에 의해 한족(漢族)의 것과는 부분적으로 다른 차이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주택이 기본적으로 2층 구조라든가, 상량의식에 사용하는 도구가 틀리다는 점 등이다. 농업과 농기구는 기본적으로 한족(漢族)의 그것과 비슷하며 단지 지역적 차이로 인한 약간의 변형이 있는 정도이다.

조선왕조 로부(어가행렬) 의례에 관한 연구 - 형식구조의 파악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Royal Procession Ceremonies in the Yi Dynasty - Focusing on the Analysis of the Systems -)

  • 백영자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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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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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6-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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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 This study was undertaken to discuss the frameworks of the gorgeous and magnificent royal procession ceremonies in the Yi Dynasty, thereby exploring the classification systems of 'three stages and five segments' on the basis of cultural anthropology and Korean traditional shamanism of ancestral sacrifices. The ceremonies were classified into three phases of (1) cleanup stage, (2) primary objective attendance stage, and (3) completing stage. Among these phases, p. :mary objective attendance stage was further distributed into five segments of (1) road guide, (2) dressing, (3) royal procession, (4) attendants' procession, and (5) back row procession. The isolates and functions of the royal procession ceremonies in the Yi Dynasty were studied through the application of Levi Strauss's structural method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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