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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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지역 행정구역개편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Reorganization of Administrative Districts in New Town)

  • 이향수;이성훈
    • 디지털융복합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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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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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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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에서는 C시 사례를 중심으로 행정구역 개편에 대한 사례를 살펴보고 우리나라 행정구역 개편에 있어서의 시사점을 밝혀보고자 한다. 연구대상 기업도시지역에는 2개의 면단위 지역과 1개의 읍지역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 지역은 신도시라는 거대한 메가폴리스로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 아니면 그대로 분리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본 연구는 시작되었다. 본연구에서는 행정구역 개편과 관련된 이론들에 대한 문헌연구를 하고, 해당 신도시 지역의 관련 이슈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행정구역 개편을 추진함에 있어 고려해야 할 정책적 시사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협조와 이해가 필요하다. 둘째, 통합 시 통합의 목표 및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 통합 전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넷째, 공동체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이해관계 집단의 양보와 조정이 필요하다. 여섯째, 행정구역 개편과정은 절대적으로 민주적이고 공정해야 한다.

인지갈등 전략을 이용한 과학 개념변화에서 학습자 특성의 효과 (The Effects by Learners' Characteristics on Scientific Conceptual Changes using Cognitive Conflict Strategy)

  • 권난주;권재술
    • 한국과학교육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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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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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6-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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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과학교육에서 개념학습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히는 만큼, 개념변화에서 인지갈등의 역할은 크다. 그러나 과학교육 연구에서 인지갈등을 유발하는 방법이 과연 얼마나 효과적인지 다수의 인원으로 검증한 연구가 많지 많으며, 같은 상황임에도 학생에 따라 인지갈등과 개념변화의 정도가 다른 원인에 대한 연구도 찾아보기 어렵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여 인지갈등을 올바로 이해하고, 앞으로의 개념변화 학습에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하고자 인지갈등과 개념변화에 미치는 학습자 특성에 따른 차이를 알아보았다. 연구 대상은 대도시, 중소도시, 읍지역의 777명 남녀 중학생이며, 학습자 특성이란 과학 개념학습과 인지갈등 관련 문헌의 고찰과 과학교육 전문가 대상의 설문 조사를 통하여 대표적인 6가지 학습 변인으로서 지능, 인지수준, 성적, 인지양식, 성격, 과학에 관련된 태도등이다. 연구 결과, 인지갈등 전략에 의한 개념변화에서, 인지갈등의 정도는 성격과 태도 등 정의적 영역과 관계 있으며, 과학적 개념으로의 변화는 지능, 성적 등 지적 영역과 관계 있었다.

서거정의 '대구십영'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 (A Geographical Study on 'Daegusibyeong(大丘十詠)' written by Seo, geojeong)

  • 전영권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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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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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7-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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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에서는 서거정의 '대구십영'에 대한 한시 해석과 고문헌 조사 및 현장답사를 통해 대구십영지의 장소 고증을 지리학적 관점에서 규명하여 보고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얻었다. 1) 그동안 논란이 있어 왔던 대구십영지에 대해 고문헌 및 현장답사를 통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고증하였다. 2) 제7영의 '동사심승' 중 잘못 사용된 한 개의 한자어를 찾아냄으로써 기존의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3) "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발간된 "사가집"에 게재된 '대구십영'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구읍지"에 게재된 '대구십영' 보다 시제와 내용이 보다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다. 4) '대구십영'과 관련하여 시제와 시어가 고문헌별로 약간 다르게 나타나는 오류를 바로잡았다. 5) 본 연구에서 밝혀진 '대구십영지'를 복원하고, 활용 측면에서는 기존의 대구시티투어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면 대구시의 브랜드 가치와 이미지 제고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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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지역 공공보건시설의 잠재적 접근성 측정 (Potential Accessibility of Public Healthcare Facilities in Rural Areas)

  • 이준모;조순철;황정임
    • 농촌지도와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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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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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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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농촌지역 공공보건시설의 잠재적 접근성을 측정하고 지역 간의 차이를 분석하는 것이다. 공공보건시설의 수요에 해당하는 인구를 대시메트릭 매핑기법을 활용하여 공간적으로 미시적인 수준에서 구축 분석하여 보다 정확한 접근도를 측정하였다. 최소거리 기반의 공공보건시설의 접근도 측정결과, 군지역과 읍면지역은 거주지로부터 각각 1,845m와 1,777m가 떨어져 있었다. 강원도와 경상북도에 입지하고 있는 지역들이 상대적으로 접근도가 낮았으며, 면지역의 접근도가 읍지역보다는 다소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의 결과는 농촌지역 공공보건시설의 잠재적 접근도의 현황과 지역 간의 격차를 구명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향후 공공보건시설의 입지를 탐색하고 의료시설의 전달체계를 높이기 위한 기초자료로서 활용이 가능하다.

울산 만회정의 문화콘텐츠를 위한 복원 모델 (Restoration Model for Culture Contents of the Man-Heo-Jeong in Ulsan)

  • 이창업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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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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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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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울산 태화강변 십리대숲의 가운데에 위치하였던 '만회정'은 울산 출신의 무관인 박취문이 조성한 정자였다. 울산읍지와 고문헌 및 고지도를 참고해 보면, 조선후기 당시 만회정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만회정의 규모는 정면 3~4칸, 측면 1.5칸 정도로 추정되며, 전면부에 누마루(테라스)를 둔 것을 알 수 있다.공간의 구성은 양쪽에 방 한 칸씩을 두고, 가운데에 마루 한 칸을 둔 중당협실형인데, 이와 같은 형식은 정자의 뒤에서 진입하게 하여 전면의 경관을 극적으로 보게 한 구성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만회정은 태화강과 십리대숲을 충분히 이해하여 구성된 정자라고 할 수 있으며, 문화콘텐츠 요소로 활용하기에 손색 없음을 알 수 있다.

미륵리 봉산석표(封山石標)에 관한 연구(硏究) - '문경읍(聞慶邑) 봉산(封山)' 및 조령봉산(鳥嶺封山)과 관련(關聯)하여 - (A Study on the Miruk-ri Bongsan Stone Landmark - With a Relevance to the 'Moonkyung County Bongsan' and Choryung Bongsan -)

  • 배재수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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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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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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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 본 연구는 1997년에 발견된 '미륵리 봉산석표(封山石標)'와 '문경읍(聞慶邑) 봉산(封山)' 및 조령봉산(鳥嶺封山)의 관련성을 밝혀 보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본 연구를 위해 조선 후기 지리지(地理誌), 읍지(邑誌), 지도(地圖),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을 이용한 문헌분석과 현장답사를 병행하였으며 그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1)'미륵리 봉산석표(封山石標)'는 조령봉산(鳥嶺封山)의 경계표식석(境界標識石)이며, (2)지정 목적은 한양의 문호(門戶)며 남한강(南漢江)에 접속된 충주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조령관방(鳥嶺關防)의 산림을 보호하는 데 있었다. (3)미륵리에 봉산석표(封山石標)를 세웠던 이유는 그곳이 오래 전부터 조령(鳥嶺), 문경(聞慶), 충주(忠州)를 이어주는 교통상의 요지(要地)에 위치하여 왕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산(封山)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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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달리농악의 연행 현황과 판제 (Current Status and Practices of 'Dali Village Farm Music')

  • 최흥기;최호곤;오현정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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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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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5-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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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1960년대 울산은 한국 경제개발의 선도적 입지로 공업과 산업도시로 선정되었고, 이에 많은 노동인구가 유입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환경은 급격하게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그 변화는 이 지역의 전통적 풍속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와 함께 전래된 무형문화는 사라지거나 소멸되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울산의 무형문화유산은 타 지역에 비해 긴급으로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가진다. 이 연구는 1930년대에 울산 달리지역에서 이루어진 마을농악을 분석하여, 이를 연행하기 위한 상황과 판제를 고찰하였다. 연구방법은 먼저 문헌연구로 조선시대 울산 최초의 사찬 읍지인 학성지(1749, 영조 25년)와 1936년 울산 달리마을의 농경과 이와 연계한 농악을 분석하였다. 둘째, 현장조사는 현재 울산남구문화원에서 울산달리농악을 복구하는 현황을 토대하였다. 연구의 성과는 급격하게 사라져가는 울산지역 농악의 현황과 판제를 고찰하고, 울산문화원에서 활동했던 농악 전승자인 고 '김달오'에게 계승한 김세주의 울산달리농악에 관한 연행을 밝혔다.

자인단오제의 고형(古形)에 관한 탐색 - '여원무'와 '호장굿'을 중심으로 - (Search for an archaic form of Jain-Danoje - Focucing on 'Yeowonmoo' and 'Hojanggut' -)

  • 한양명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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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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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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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근대 이후 자인단오제의 노정은, 1960년대 이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배경으로 복원 재현되었던 대부분의 연행민속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연행 민속은 대개 전승의 단절과 재현의 과정에서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했고 새로운 전승의 길로 접어들면서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하고 있다. 현재의 자인단오제는 1970년 문화재지정조사 당시의 모습을 일정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1936년 자인단오제의 마지막 모습은 물론이고 자인현읍지를 비롯한 몇몇 문헌에 실린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와 같은 차이는 재현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옛 문헌과 초창기의 보고서, 그리고 현행 텍스트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특히 자인단오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여원무와 호장굿의 고형을 탐색하고 현행 텍스트와 비교해 봄으로써 재현의 과정에서 일어난 양상을 드러내보려고 했다. 검토 결과, 현재 연행되고 있는 여원무와 호장굿의 모습은 1960년대 이후 전국민속경연대회와 무형문화재 지정을 의식하고 창출된 텍스트였다. 이 텍스트는 전근대사회에서 전승된 읍치축제의 구조와 흐름, 그리고 연행의 양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구성된 것이다. 재현에 관여한 지식인들은 자인단오제의 실상을 전하는 여러 읍지 가운데 1895년 본을 바탕으로 고형을 탐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입견을 가지고 문맥을 이해함으로써 한장군제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고 여원무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했다. 또한 호장이 주도하는 오신을 가장행렬로 오해하고 단오제의 한 구성요소로 인정함으로써 우리 축제 특유의 오신과는 다른 텍스트가 통용되기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읍지연구(邑誌硏究) (A Study on the Eubj(邑誌) in the Yi Dynasty -Based upon the existing Eubjis-)

  • 김전배
    • 한국비블리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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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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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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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
  • A. The principal geographical descriptions compiled by the government during Yi dynasty started from the Shinchan-Paldo-Chiriji(新撰八道地理志) which was compiled by the royal decree in the sixth year (1424) of King Sejong(世宗) and it ended in the Jungbo-Munhonbiko(增補文獻備考) which was published in the second year(1908) of Yunghyi(隆熙). The process of their compilations can be divided into four steps according to the compilatory work's contents of the principal geographical descriptions which were compiled through the Yi dynasty. We can say that the first step (1424-1454) of those works began at the date of the compilation of the Shinchan-Paldochiriji and it ended in the date of the compilation of the "Sejongsilok-Chiriji"(世宗實錄地理志), and during that period the Kyonsangdo-Chiriji(慶尙道地理志) was published. In the second step(1455-1531), were published the Paldochiriji,(八道地理志), Kyongsangdosokchanchiriji(慶尙道續撰地理志), DonggukYojisungnam(東國與地勝覽) and the third step (1532-1769) began at the date of the compilation of the Dongguk-Munhonbiko(東國文獻備考) and it ended in the date of the publication of the Jungbo-Munhonbiko(東國文獻備考), and in that period the Jongjung-Munhonbiko(訂增文獻備考) was published. The works of compilation of the Eubjis in the period of King Kojong(高宗) came within the category of the fourth step. B. Generally speaking, the state geographical descriptions were composed of the regional data of the country which were collected and arranged. In other words, firstly, the Eubjis were compiled in each county, secondly, the Dojis(道誌) were compiled based upon the collections of all the Kunjis(郡誌), lastly, the government collected all the Dojis and compiled them into the state geographical descriptions. The Eubjis in the early days of Yi dynasty were compiled as the data for the compilation of the nation-wide geographical descriptions, but the Eubjis in the age of King Kojong were compiled as the administrative data. C. The main contents of the Eubjis were composed of the descriptions on the geography, history, industry, naval and military affairs, traffics, communication, administration, economy and society, and of the matters on the prose and poetry, persons of loyalty, historic remains, social customs and schools. Consequently, the above-mentioned data will be contributed to the study on the structures of the geography, history, economy, administration, education, naval and military affairs and traffics as well as the study on the literature, social customs and bibliography. Especially, they will be important data for the arrangement of cultural assets of our country. Furthermore, because the traditional study of national literature was centered around the study on the central government ignoring the study on the regional matters, the study of the Eubjis will be worthy of being val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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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현감 이제마와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에 관한 연구 - 관측(官側) 사료 『각사등록(各司謄錄)』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과 『외안(外案)』 및 『진해군읍지(鎭海郡邑誌)』 「관적읍선생안(官蹟邑先生案)」을 중심으로 - (A study of Lee Jema as the governor of Jinhae with a focus on his official evaluations and on the Joseon Dynasty official documents of Separate Office Formal Records (各司謄錄), Ruling Management and Instruction Records (統制營啓錄), Employees Documents (外案), the Town Chronicle of Jinhae (鎭海郡邑誌), and A Roster of Local Government Officials (官蹟邑先生案))

  • 최성운;황지혜;하동림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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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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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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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We discovered various sides of Lee Jema's tenure as the governor of Jinhae by looking at recently found historical materials of the central government of Joseon. Lee Jema went to his appointed post in Jinhae in February of 1887 and was replaced before the termination of his office in June of 1888. Since his replacement did not immediately arrive at Jinhae, Lee Jema continued to perform his duties until the first half of 1889. The difference between the date of his resignation and the arrival of his replacement reveals why various historical materials disagree about when he left office. After Lee Jema's official resignation in June of 1888, he was appointed to the honorary posts of Naegeumjang and Cheomji, which indicates the termination of his career as an official. Two superior officials conducted job assessments on Lee Jema three times during his service (once every six months) and these are the rare evaluations which were performed during his lifetime. Lee Jema was highly regarded in terms of job competency by two superiors in succession, which was unique for a local government official in the late Joseon dynasty. One of the job assessments referred to the potential of his performance as an official which usually implied that he was a suitable candidate for higher rank. This might have derived from Lee Jema's study of statecraft. Lee Jema's love for the people as an official was also mentioned in one of the job assessment reports. This is borne out by his quelling the revolt of Hamheung Province in 18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