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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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전환기 한국 '工藝(공예)' 용어의 쓰임과 의미 변화에 대한 고찰 (A Literary Study on the Changes in the Meaning of Gongye During Korea's Transition to the Modern Era)

  • 노유니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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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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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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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이 글에서는 근대 전환기 한국에서 '工藝(공예)'라는 용어의 의미가 변화하는 과정을 문헌을 통해 고찰한다. 근대이전의 용례는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개항 후 중국과 일본을 통해 번역됐을 때 달라지는 각각의 의미는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 외에 『승정원일기』, 『각사등록』 등의 사료와 통감부 문서(1904~1910년), 주한일본공사관 기록(1894~1908년), 1910년 이전에 발간된 잡지와 신문을 대상으로 '공예'라는 용어가 어떻게 쓰였고 변화하게 되었는지를 검토하였다. '공예'의 의미는 개항 이후 각기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종사하는 일·직분이라는 넓은 범위에서 제조업·공업과 같은 산업의 한 분야를 나타내는 범위로 좁혀진다. 새로운 의미로 쓰인 '공예'라는 단어는 동아시아 국가 중에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본받아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고 산업을 일으키자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개항과 더불어 산업화가 국가적 과제로 부상하면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할 용어가 필요해지자 일본이 서양의 개념을 번역하여 조어한 한자어를 기표 그대로 수입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예'는 '공업'과 서로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혼용되었다. 그러나 한일합병 후 총독부의 문화정책을 통해 미술로서의 개념이 부여되면서 '공예'는 공업으로부터 분화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용어와 개념의 성립을 살펴보는 작업은 한국 공예가 안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협길통의(協吉通義)』 본원일(本原一)의 역률(曆律)에 대한 분석 (An Analysis on the rule of the Calendar(曆律) in 『Hyupgiltongui』 Bonwon chapter one)

  • 권영수;김기승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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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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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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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역법(曆法)은 역대 왕조마다 매우 중대한 관심사였다. 조선시대 『협길통의』에는 역법과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협길통의』 본원1에서 보여주는 고대 역률은 선택(選擇)과 간명(看命)에 필요한 역법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협길통의』의 바탕이 되는 『협기변방서』, 『상길통서』, 『천기대요』 등을 비교분석하여 사주간명과 실생활에 활용될 수 있는 역법과 역서의 근본원리가 되는 역률을 분석하고자 한다. 사주명리학이란 간지(干支)의 결합에 의한 시간변화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법은 연월일시를 세우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를 위해 『협길통의』에서는 십간·십이지, 사서(四序), 육진(六辰), 갑력(甲曆) 등과 같은 간단한 간명구성원리(看命構成原理) 뿐만 아니라 28수(宿)와 같은 별자리를 활용하는 등의 사주명식(四柱命式)을 세우기 위한 기본원리나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역률이 빚어내는 결과의 한계가 있음에도 사주간명이 과학이 아닌 술법으로 보아 길(吉)한 것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그 유용성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전통 사상 및 교육 방법의 현대 도덕 교육과정에서의 활용 가능성 연구 (A Study On Possible Utility of Korean Traditional Thoughts and Educational Practice In Contemporary Moral Education)

  • 함규진;신창호;임홍태;지준호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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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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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3-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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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도덕은 하나의 철학적, 심리적 상념으로서도 존재하지만, 실천으로 이어져야만 비로소 도덕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기본적으로 도덕이란 타자가 자신과 공존할 때, 그 타자와의 관계에서 좋음(goodness) 또는 옳음(righteousness)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도덕이란 대부분 본능적으로 체득할 수 없기에 도덕교육이 있게 되는데, 한국인의 경우 서구와 다른 도덕적 전통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서구적 도덕교육으로 충분하지 않거나, 전통적 도덕교육을 활용함으로써 더 나은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 견지에서 전통의 실천적 의미를 재해석하고 활용하는 일은 한 편의 논문으로는 너무 방대한 과제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비교와 범주화, 그리고 활용의 편의를 위해 전통을 '근세 유교(조선왕조 이후의 유교) 전통'으로 한정짓고, 다시 도덕교육 가운데 현행 도덕과교육의 교육과정을 전통 교육과정과 비교함으로써 일정한 성과를 얻고자 하였다. 전통 교육과정은 기(氣)의 발달에 근거하여 연령별로 단계별 학습을 시도했으며, 그 핵심 이념은 인(仁)과 의(義), 실천적 덕목은 효(孝), 제(弟), 자(慈), 직(直), 근(勤), 검(儉)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전통 교육 이념이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사회 공동체와의 관계', '자연 초월과의 관계'로 영역을 나누고 각기 지향할 가치, 실천할 덕목을 배정한 현 도덕과교육의 체계와 상통할 수 있다고 보고, 그에 따라 교육현장에서 실천할 몇 가지 전통-현대 융합적 교육 방안들을 제안하였다.

흑룡강성(黑龍江省) 동부(東部)지역 선사문화(先史文化)와 숙신(肅愼) (The Prehistoric Culture and Sushen in the Eastern Area of Heilongjiang Province)

  • 이종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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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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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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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문헌기록에 숙신이란 명칭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사기(史記)"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다. 그러나 숙신이 어떤 계통의 종족이고, 언제 처음 나타났으며, 주 활동지역이 어디이고, 어떻게 생활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그 실체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동안 숙신의 활동지역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으나, 중국의 경우 흑룡강성 동부지역을 숙신의 활동지역으로 보는 "숙신동북설"이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숙신동북설"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문헌비판에만 그치고 있어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문헌사적 연구성과를 토대로 중국측이 주장하는 숙신 활동 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를 분석해 봄으로써 "숙신동북설"의 문제점과 허구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흑룡강성 동부지역의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신개류유적, 소남산유적, 앵가령유적, 석회장유적, 진흥유적, 아포력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 생활한 선사인들은 어렵과 수렵 중심의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다만 목단강유역의 경우 어렵과 수렵 이외에도 일부 원시 농업이 행해지고 있다. 사회구조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씨족부락 단계에 해당되며, 복합사회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문헌에 중국 왕조와 숙신과의 교류 관계 기사는 요순시기와 주 무왕 시기 두 차례 보인다. 두 시기로 나누어 중원과 흑룡강지역 유적에 보이는 문화양상을 비교 분석한 결과, 양자간의 문화적 교류 가능성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선사시대 흑룡강성 동부지역은 중원과 교류할 수 있을 정도의 복합사회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가부장적인 씨족부락단계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결과적으로 중국에서 주장하는 "숙신동북설"은 진수의 "삼국지" 저술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와 현재적 시점에서 중화민족통일론에 입각해 만들어진 허구적 학설에 불과하다.

종묘제례악 사상과 선율의 미의식 연구 (Aesthetics melodic thought research Jongmyojeryeak)

  • 김현호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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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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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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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현재 이루어진 종묘제례악의 미의식과 다른 관점에서 여러 사상을 배경으로 완성된 종묘제례악의 피리 선율을 중심으로 미적 요소를 찾아보고 그에 따른 미의식을 살펴보았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곳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유교제사 의례의 결정체이자 제례문화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1964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國歌重要無形文化財) 제 1호로 지정되었다. 또 2001년 5월 18일에는 유네스코(UNESCO)지정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한국에서는 가장 먼저 등재되어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오랜 기간 조선왕조와 명운을 같이한 제례문화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우리조상들에 의해 창조된 악 가 무에 따른 총체적 예술형태의 아름다움을 집대성한 우리음악의 정수(精髓)로 인정받으며 전해지고 있다. 또 유교사상 뿐 아니라, 예악사상을 비롯하여 음양오행사상과 삼재사상(三才思想), 팔괘사상(八卦思想)의 전통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종묘제례악에는 정관미 유장미 자연미 장려미 조화미가 내제되어 있다. 정관미는 희문과 전폐희문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유장미는 정대업에만 나타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자연미는 변주시 선율진행에서 노련한 연주기교로 자연스런 창작이 연결되는 부분으로 희문과 전폐희문에 잘 나타나고 있다. 장려미는 보태평 악장선율의 가장 두드러진다. 또 조화미는 종묘제례악의 불협화음이 협화로 음악에서 자연스러운 조화미적인 관점의 미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대업의 소무에 잘 나타나고 있다.

묵가(墨家)의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 - 제가(諸家)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The Theory of Yin and Yang and the Five Elements of Mohism - Focusing on the Comparison with Hundred Schools of Thought)

  • 윤무학;조주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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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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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9-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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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고에서는 음양가(陰陽家)의 등장 과정과 아울러 묵가(墨家)의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을 제가(諸家)와의 비교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사마천(司馬遷)이 열전(列傳)에서 시사한 바대로 추연(鄒衍)으로 대표되는 음양가는 당시 유가(儒家)와도 일정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음양 관념은 본래 햇빛과 관련이 있었지만 전국 중기 이후 기(氣), 혹은 도(道) 관념과 연계되면서 점점 추상화되었다. 오행 관념 또한 본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오재(五材) 관념에서 출발하여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분류 기준으로 발전하였다.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로 대표되는 추연을 비롯한 음양가 혹은 음양오행가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왕조 교체의 법칙성을 도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전국말에 이르기까지 백가쟁명의 주제로서 부각되지 못하였다. 비록 제가에서 공통적으로 음양오행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전제로 그것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각각의 사상체계에 연계되지 못하였다. 묵가 또한 음양오행 관념을 수용하고 군사학 방면에 활용하면서도 일관되게 합리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제가의 현실인식과 역사관의 차이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황희(黃喜), 그 역사적 평가와 위상에 대한 일고찰(一考察) - 실록(實錄)의 사신평(史臣評)과 관련하여 - (A Study on Evaluation and Status of Hwang Hee in History - Focused on the evaluation from authors of chronicles)

  • 최영성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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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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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3-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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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황희(黃喜: 1363~1452)는 조선 초기의 명재상으로 세종 시대의 찬란한 문화를 여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는 종묘(宗廟)에 배향된 공신(功臣)이며 조선시대의 대표적 청백리(淸白吏)이다. 학문상의 공로를 인정하는 팔도유생들에 의해 문묘(文廟)에 배향을 청하는 상소가 두 차례나 있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위상은 실로 남다른 바가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 등 조선왕조에서 펴낸 실록(實錄)에 따르면 황희에 대한 당대(當代)의 평가가 일률적이지는 않았다. 황희의 부정과 비리 등을 비판하는 내용이 실록에 다수 실려 있다. 모두 사실로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순히 의혹을 제기하는 수준의 내용이 있고, 고의적인 악평(惡評)에 가까운 내용도 있다. 다만, 사관(史官)이 양심에 따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존중할 필요는 있다. 황희는 특유의 관대함[관(寬)]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관료 사회에서 인심을 얻었다. 그러나 관대함이 지나쳐 집안을 다스리는[제가(齊家)] 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사관의 평이다. 필자는 이 평이야말로 당시 일각에서 황희에 대해 제기한 비판의 근본 원인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잘못에는 저마다의 유형이 있다. 잘못을 보면 그 사람의 인간됨을 알 수 있다"고 한 공자의 말에도 잘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법전에 기록된 산림·조경 분야 시기별 중점 추진 사항 분석 및 의의 (A Significance of Key Milestones for by Period to Create based on the Analysis of the Details of the Forestry and Landscape Fields Described in the Law Codes of the Joseon Dynasty)

  • 이현채;윤정원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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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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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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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조선시대 법전류에 기록된 산림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을 통하여 그 당시 산림문화의 전반적인 사항을 파악 후 국민의 산림문화 충족 욕구에 부응하고자 수행하였다. 조선시대 법전류(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에 기록된 산림 관련 조항을 통해 산림행정과 정책의 변화과정 및 산림의 경관상 변화를 고찰할 수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분석을 통해 특수한 수종이나 특정 지역에만 생산되는 수종에 대한 관리와 특정 지역 경관 관리에 신경을 많이 기울였다는 것, 금산 관리 규정에 있어서 벌채를 금하는 수준을 넘어 재식과 배양뿐만 아니라 경관 조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산림의 사유를 금했었으나. 상·장례에 있어서 분묘 주변의 일정 범위의 산림에 대한 소유를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고종대 왕실도서관의 변천 과정에 관한 통시적 고찰 (A Diachronic Study on the Transition Process of the Royal Library during the Gojong Period)

  • 송승섭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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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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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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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이 연구는 근대화에 앞서 국내외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고종 시대사 속에서, 왕실도서관(규장각)의 변천 과정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그 흐름을 분석하여 통시적 의미를 찾고자 시도되었다. 이를 위해 첫째, 고종대 왕실도서관과 개인도서관 역할을 한 고종의 서재와 도서 수장처 전체 현황을 조사했다. 둘째, 조사 현황을 바탕으로, 고종대 초기 왕실도서관부터 대한제국 시기 황실도서관까지 이어지는 변천 과정과 그 의미를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각종 서목 등 당시의 다양한 사료와 함께 고찰했다. 셋째, 경복궁, 창덕궁, 경운궁으로 이어지는 왕실도서관의 시·공간적 변화와 양상을 왕궁별로 도식화하여 정치·사회적 의미를 분석했다. 그 결과, 첫째, 고종은 규장각을 왕권을 강화하고, 근대화과정에서 서양 문화를 수용하는 장치로 활용했다. 둘째, 고종의 정치적 지향을 담은 핵심 공간인 어진 봉안처, 도서 수장처, 집무처는 경복궁, 창덕궁, 경운궁에 걸쳐 별전으로서 일곽을 이루며 점차 서구식 건축양식으로 변화했다.

청대 훈춘의 인삼과 범월 (Ginseng Poaching and Border Trespassing in Hunchun during the Qing Period)

  • 김선민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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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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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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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1749년 훈춘의 두만강 인근에서 청나라의 채삼인 6명이 조선 병사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청나라 채삼인과의 물물교환 과정에서 쌀값을 제대로 받지 못한 조선인들이 분개하여 청나라 채삼인을 습격하면서 발생했다. 조선인 범인 7명은 결국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6개월 후에 처형되었다. 조선과 청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고 해결하기 위한 과정, 양국 사이에 오간 문서 등이 조선의 『동문휘고』(同文彙考),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청대 만주어 자료인 『혼춘부도통아문당』(琿春副都統衙門檔)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살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청의 지방관은 피살자의 신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책임 소재를 확인하고 이들이 남긴 재산을 처리하는 데 집중했지만, 조선 조정은 국경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 청 정부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사건의 정황을 신속히 보고하고 범인을 체포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사건에 관한 양국의 기록은 당시 두만강 국경 주변에서 양국 주민들의 교류, 월경, 물물교환, 채삼 규정, 국제 범죄인 인도와 심문, 국경의 관리 등 당시의 사회상과 양국의 정치적 사회적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청과 조선의 여러 계층 사람들이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각자의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