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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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武王, 1738-1765) 시기 메콩 델타에서의 영토 확장 추이: 제국으로 가는 길, '잠식지계(蠶食之計)'와 '이만공만(以蠻攻蠻)'의 변주 (Territorial Expansion the King Võ (Võ Vương, 1738-1765) in the Mekong Delta: Variation of Tám Thực Chi Kế (strategy of silkworm nibbling) and Dĩ Man Công Man (to strike barbarians by barbarians) in the Way to Build a New World Order)

  • 최병욱
    • 동남아시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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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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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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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베트남이 메콩 델타로 영토를 팽창하는 역사 속에서 완거정은 두 개의 얼굴을 갖는다. 하나는 현재 베트남 영토 내에 있는 메콩 델타 거의 전부를 획득하는 데서 그의 공헌이다. 또 하나는 베트남 역사를 읽는 독자들의 눈을 현재의 베트남 영역에만 머물게 하는 그의 역할이다. 독자들에게 완거정의 메콩 델타 획득은 베트남 남진사의 마지막 단계로 인식된다. 그러나 완거정의 업적은 부분적이었을 뿐이다. 이 연구는 메콩 델타에서의 영토 팽창 추이에서 완거정 보다 무왕에 주목한다. 무왕의 목표는 완거정의 공헌에 의해 성취된 영토 획득보다 더 야심적이었다. 그리고 이 야심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국제 질서를 건설한다는 그의 꿈에 의해 추동된 것이며, 그가 건설한 수도 푸쑤언은 이 새 국제 질서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그는 황제가 되기를 희망했다.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필자는 세 가지의 요소를 검토하고 있다. 첫째는 무왕 왕권의 성격이다. 두 번째는 메콩 델타에서의 군사 작전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셋째는 새로이 무왕의 판도로 편입된 땅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북부 홍하 델타에 근거한 레 황실의 신하를 자처하던 선대 지배자들의 태도와 결별하면서 무왕은 즉위한 지 6년 뒤인 1744년 자신이 왕임을 선포했다. 행정 조직이 개편되었고 의복과 풍속도 북부의 것을 버리고 남국의 것을 제정하였다. 무왕은 캄보디아, 참파, 수사, 화사, 만상, 남장 등 조공국도 충분히 확보했다. 레 왕조와 비교해 이 조공국의 숫자는 더 많았으며 19세기 대남 제국의 조공국 수와 맞먹었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 무왕이 실제로 원했던 자리는 왕이 아니라 황제였음을 지적한다. 비록 무왕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는 자신을 천왕이라고 칭함으로써 통상적인 왕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캄보디아 왕이 캄보디아 영토 내의 참족을 공격한 게 무왕에게는 캄보디아에 개입하는 충분한 이유로 작용했다. 무왕은 이 참족이 자신의 신복이라 여겼다. 왕은 그들이 자신의 판도 내에 있는 참 즉 순성진 참인의 일부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무왕은 1750년에 캄보디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동시에 그는 태국왕에게 외교 서한을 보냈는데 여기서 그는 캄보디아가 자신의 배타적 조공국임을 천명했다. 캄보디아의 영토였던 메콩 델타에의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무왕은 푸쑤언을 새로 건설해 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권력중심지로 삼았다. 인플레이션, 기근, 경제 왜곡 등도 이 시기를 특징짓는 면모였다. 그러나 이 연구는 무왕의 메콩 델타 진출 이유라고 이야기되어 온 이런 경제적인 측면보다 제국 건설자로서 무왕이 보이던 적극적 정책에 더 관심을 가지며 이런 정책에 기초한 영토 팽창의 욕구가 메콩 델타의 광활한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1754년부터 3년 동안 현재 베트남의 영토에 해당하는 메콩 델타 대부분이 무왕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여기에는 완거정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무왕이 차지하고자 한 영역의 범주는 여기에 더해 메콩 오른편에 해당하며 현재의 사이공보다 위쪽에 있는 껌뽕짬, 프레이비엥, 스바이리엥을 포괄했다. 많아진 조공국의 수에 걸맞게 제국의 영토는 넉넉히 확대되어야 했다. 무왕의 전략은 '잠식지계'와 '이만공만'의 변주곡이었다고 이 글은 주장한다. 무왕은 하부캄보디아에 해당하는 델타를 야금야금 차지했다. 이는 누에가 뽕잎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게 일반적인 이해 방식이다. 그러나 무왕의 최종적 목표는 위에서 언급한 메콩 델타 세 개의 주까지 다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다 먹어치운다'는 건 '잠식'의 또 다른 의미이자 적용이었다. 무왕은 현 롱안 지역으로부터 쩌우독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참인을 이용해 캄보디아를 쳤다. 이것은 '이만공만'의 표준적 적용이었다. 이에 더해 그는 막씨가 관할하던 중국인 망명자들을 이용해 하띠엔과 그 주변 지역을 캄보디아 왕으로부터 취했다. '이만공만'의 또다른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19세기에 출현할 응우옌 왕조의 제국 질서 뿌리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주장한다. 제국 질서는 홍하 델타에 근거한 대월 제국 왕조들의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 아니라 푸쑤언에 앉은 무왕의 신 세계질서를 계승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만공만'과 '잠식지계'는 무왕의 후손들에게 여전히 유용했다. 그의 손자인 쟈롱은 타이, 크메르, 라오, 중국인, 산지민, 유럽인 같은 '만'을 이용해 또다른 '만'인 '떠이썬 도적떼(西賊)'를 이겼다. 떠이썬에는 수많은 중국인 및 중국 해적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참인, 산지민이 있었다. 무왕의 증손자인 민망 황제는 화려한 제국을 건설했다. 동시에 그는 캄보디아와 참 영역을 몽땅 먹어치우면서 영토 확장에도 골몰하고 있었다.

수구(水口)를 중심으로 분석한 중국 소주고전원림(蘇州古典園林)의 수경관 연출기법 (A Study on the Waterscape Formation Techniques of China's Suzhou Classical Garden Based on the Water Inlet and Outlet)

  • 노재현;려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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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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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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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본 연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중국 강소성(江蘇省) 소재 소주고전원림(蘇州古典園林) 수경관(水景觀)을 조명한 결과이다. 문헌조사 및 현장조사를 통해 입수구와 출수구 그리고 주변 수경요소 간의 상호관련성을 정량적으로 탐색으로써 중국 고전원림 수구(水口) 고유의 객관적 특성을 파악하는 한편, 한국 전통원림과의 차이점을 준거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모색하고자 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소주고전원림의 수공간 평균 면적은 1,680.7m2로 계상되었는데 이는 전체 원림면적의 21.3%를 차지하는 것으로 원림별 큰 편차를 보였다. 원림 대부분은 샘물과 우물을 수원(水源)으로 삼았으나 창랑정은 지표수를, 퇴사원은 계절수를 수원으로 하였다. 한편 원림의 수구는 정수구(正水口)와 가수구(假水口)로 구분되는바 가수구는 단지 의경(意景) 효과를 유도하기 위한 모방수구로, 수체계상의 의미를 중시하는 소주고전원림의 경향과 결착(結著)된 것으로 보임에 따라 궁극적으로 원림의 수구 배치는 전통 '감여이론(堪輿理論)ʼ이 작동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소주고전원림의 인수(引水) 방식은 직인법(直引法), 명거법(明渠法), 침투법(滲透法), 관도법(管道法), 착정법(鑿井法) 등 5가지 유형이 적용되었다. 이중 직인법, 침투법, 관도법은 출수기법에서도 활용되었는 바 소주고전원림에서의 보편적인 물확보 수법인 침투법과 관도법은 국내 구분 방식으로는 집수법(集水法)과 인수법(引水法)에 비견(比肩)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한국 전통정원에서 보이는 현폭(懸瀑)과 비폭(飛瀑) 등의 입수기법은 발견되지 않으며 단지 자일(恣逸)과 잠류(潛流) 그리고 용출(湧出) 기법에 의존한 입수기법이 주로 적용되었고, 무너미를 통한 출수기법은 소주고전원림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소주고전원림의 입수구와 출수구에서 정태수체는 호수, 소(沼)와 담(潭)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동태 수체는 계류, 폭포와 샘으로 분류되는 가운데 3개 원림의 수공간은 원심적분산배치를, 6개소의 수공간은 구심적 집중배치에 따른 수경관 효과가 반영되었다. 그리고 수경관 연출기법으로 입수구에서는 '격(隔)ʼ과 '파(破)ʼ의 기법이, 출수구에서는 '엄(掩)ʼ과 '파(破)ʼ의 기법이 주로 적용되었다. 예컨대 입수구 주변에는 대부분 교량이 건립되고 사(榭), 헌(軒), 각(閣), 정(亭), 랑(廊) 등이 조성되었으며 첩석박안(疊石駁岸)으로 수구를 은폐한 경향이 감지됨에 따라 "비록 인간이 만들었지만 마치 하늘이 내린 것 같다(雖由人作, 宛自天開)"라는 소주원림의 이수사상(理水思想)을 구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마지막으로 입수구와 출수구의 시각구성상 은폐 및 노출 정도를 분석한 결과, 창랑정의 어비정과 환수산장 문천정 조망점에서만 수구가 노출될 뿐 다른 조망점에서는 수구가 가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볼 때 소주고전원림 수구에서는 한국 전통정원에서 적용되고 있는"물이 들어오는 것은 보이나, 나가는 것은 보이지 않게 한다"는 풍수좌향론 관점에서의 '향향팔미법(向向發微法)' 기법은 거의적 용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강원도 내 천연기념물 노거수의 생육환경 및 관리현황 (Growth Conditions and Maintenance of Natural Monument Old Big Trees in Gangwondo)

  • 허복수;김효정;이원호;강희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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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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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2-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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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천연기념물 노거수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 문화와 함께해 온 존재로서 단순한 나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노거수 중에서도 크기뿐만 아니라 진귀성, 상징성, 고유성 등 문화적 자연적 요소가 뚜렷한 것들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본 연구는 천연기념물 노거수 중 강원도내 분포하는 14건의 생육현황과 제원 및 토양환경, 보호시설 현황을 파악하고자 수행하였다. 연구결과, 강원도의 천연기념물 노거수는 78.57% 이상이 보통이거나 보통 이상의 생육현황을 나타내었다. 수고는 평균 18.80m, 근원둘레는 평균 7.34m인것으로 나타났다. 토양환경 분석결과 대부분 전국 산림토양 대비 평균치를 나타내었으나 유효인산은 과영양 상태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보호시설은 대부분 양호한 상태이나 지주대와 쇠당김 시설 일부는 수목에 피해를 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는 강원도 내 천연기념물 노거수의 생육환경과 관리현황 분석을 통한 관리 기초자료 제공에 의의를 두며, 생육에 영향을 주는 환경인자와의 관련성 등은 추후 과제로 남겨둔다.

의성 사촌리 가로숲의 현황 및 천연기념물 명칭에 관한 고찰 (Current State of the Roadside Forest in Sachon-ri, Uiseong and the Perspectives on the Name of the Natural Monuments)

  • 최재웅;김동엽;김미희;강방훈;정명철;조록환;김상범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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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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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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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전통마을숲인 당산숲 비보숲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으로서, 수백 여년 전 마을주민들에 의해 조성된 후, 현재까지 주민들에 의해 보전 관리되고 있는 국가적 문화자산이다. 천연기념물 제405호(명칭: 의성 사촌리 가로숲(義城 沙村里 街路숲))로 지정되어 있는 경북 의성군 사촌리 전통마을숲은 당산숲으로서, 사촌리 입향조에 의해 600여년 전 조성된 유서 깊은 숲으로 알려져 있다. 숲에서 지내던 당산제는 1700년대에 기령산 자락의 당집으로 옮겨 지내게 되었고, 현재도 이 당집에서 지낸다. 숲 안에서 지내던 당산제가 숲 밖으로 바뀌어졌다고하여, 당산숲으로서의 성격, 위상이 상실된 것은 아니라고 파악된다. 그러나, 현재 이 숲은 당산숲으로서 이해되지 않고 있으며, 가로숲이라는 이름으로 비보숲으로서만 소개되고 있다. 문화유산이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진정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문화유산의 크기와 특색의 관계를 바꾸는 새로운 축조, 파괴 또는 변형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부여된 의미, 가치가 변형되지 않아야 한다. '의성 사촌리 가로숲'은 약 $920{\times}90m$ 규모로서, 건개천인 하천변 양쪽에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회화나무 위주의 낙엽활엽수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학자수(學者樹)로 알려진 회화나무 거목을 통해 이 숲의 역사, 유래가 유교문화(儒敎文化)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촌리 당산숲은 하천변 수변림(水邊林, riparian buffer)으로서 현재의 명칭인 가로숲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명칭인 '의성 사촌리 가로숲'은 '의성 사촌리 당산숲'으로 변경할 필요가 있다. 이곳은 현재 가로숲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당산숲으로서 올바로 명명되어 전통문화 유산으로서의 위상과 가치가 보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경복궁 자경전(慈慶殿) 꽃담의 내력과 도상(圖像) 구성에 관한 재고 (A Study on the History and Iconological Composition of Jagyeongjeon Hall's Flowered Wall in Gyeongbokgung Palace)

  • 오준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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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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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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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본고는 문화유산의 보존관리적 측면에서 논란이 되었던 경복궁 자경전(慈慶殿) 꽃담을 대상으로 주요 내력과 도상(圖像) 구성의 실제를 조명하였다. 자경전 꽃담이 현재 모습으로 변형된 시기와 계기를 파악하는 한편 변조 또는 소실된 문양을 확인하고, 의미상 곡해된 축원(祝願) 문구를 재검토하였다. 연구 결과는 향후 자경전 꽃담의 복원을 위한 논의가 이루어질 경우 유의미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자경전 꽃담은 크고 작은 부침을 겪으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지만, 지대한 영향을 미친 변곡점은 1929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박람회로 판단된다. 자경전 일곽의 담장이 조선박람회 준비 중 전시관 건립을 위해 철거되었고, 행사 종료 이후에 다시 복구되었기 때문이다. 자경전 꽃담을 구성하는 문양의 변조와 소실 역시 대부분 조선박람회 종료 이후의 복구 과정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전쟁 직후 이루어진 보수 과정에서 현재 모습으로 변형되었다는 시각도 있지만, 신빙성을 갖춘 정황과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경도문-여강문 구간의 내벽에는 「성인도리(聖人道理)」로 알려진 문자문이 배열되어 있지만, 도안 형태와 용례를 고려하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라는 문구로 판독할 수 있다. 일반적인 벽돌담장으로 남아 있는 여강문-연수문 구간의 내벽은 본래 꽃담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 「계계승승(繼繼繩繩)」과 「천세(千世)」로 비정되는 문구가 배열되어 있었다. 연수문-함규문 구간의 경우 현재 무문(無紋) 상태로 남아 있는 내벽 역시 당초에는 기하문과 문자문으로 구성되었으며, 「천수(千壽)」와 「만세만수(萬世萬壽)」로 특정되는 문구도 실존하였다. 연수문-함규문 구간의 외벽에서는 「낙강만세(樂彊萬歲)」로 알려진 문구를 「천세만세(千歲萬歲)」로 판독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며, 현재 하나의 도곽(圖郭)으로 이루어진 벽면에는 본래 두 개의 도곽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었다.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조성기 「시주질(施主秩)」 분석 (Analysis of the Shijujils(施主秩), the records on the creation of Buddha statues, of wooden seated Vairocana Buddha Triad of Hwaeomsa Temple)

  • 유근자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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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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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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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논문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가운데 좌존(左尊) 노사나불상과 우존(右尊) 석가불상의 복장에서 수습한 2점의 불상 조성기인 「시주질(施主秩)」을 분석한 것으로, 두 자료는 2015년 9월과 2020년 7월의 복장조사를 통해 나온 것이다. 2015년 9월에 수습한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한동안 미공개로 화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다가 2020년 7월 노사나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이 발견되면서, 2021년 9월 '지리산 대화엄사' 특별전을 통해 함께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화엄사 두 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17세기에 조성된 불상에 관한 기존 조성기의 일반적인 낱장 또는 두루마리 형식과 다르게, 선장(線裝) 방식으로 가철(假綴)된 책자 형식으로 되어 있다. 노사나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1책 19장 38면으로,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1책 11장 22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주질(施主秩)」의 내용은 불상 조성의 목적, 제작 시기, 봉안(奉安) 연도 및 봉안처(奉安處), 존명(尊名), 소임자(所任者), 조각승(彫刻僧), 시주(施主) 물목(物目), 시주자(施主者) 등을 담고 있다. 이밖에도 당시 화엄사에 주석하고 있던 승려들까지 수록하고 있는 점에서 「시주질(施主秩)」은 약 400여 년 전 화엄사의 중창 불사 당시의 상황을 오늘날에 소상하게 알려주는 타임캡슐(time capsule) 같은 것이다.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 및 노사나불상의 대좌 기록에 의하면, 1634년(인조 12) 3월에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해 8월에 완성한 후, 1635년(인조 13) 가을에 대웅전에 봉안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제작 시기를 1634년으로 특정할 수 있게된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은 중관(中觀) 해안(海眼)이 1636년(인조 14)에 저술한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에 의존해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 시기를 1636년으로 추정해 왔는데, 이제는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제작 시기를 1634년으로 특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엄사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벽암(碧巖) 각성(覺性)의 역할을 잘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벽암 각성은 1630년에 화엄사 동오층석탑을 중수할 때는 '대공덕주(大功德主)'였고, 1634년 삼신불상을 조성할 때도 '판거사(辦擧事)' 또는 '대공덕주(大功德主)'였으며, 1653년 영산회 괘불탱을 조성할 때 역시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 등 17세기 화엄사 중창 불사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화엄사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벽암 각성과 왕실과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불상의 조성과 관련하여 왕실 인물인 선조의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과 사위 신익성(申翊聖),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화엄사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 연도, 벽암 각성과 왕실의 관계 및 벽암 각성의 역할 등, 17세기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담고 있어 미술사뿐만 아니라 향후 화엄사의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용주사(龍珠寺)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 연구의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검토 (A Review Examining the Dating, Analysis of the Painting Style, Identification of the Painter, and Investigation of the Documentary Records of Samsaebulhoedo at Yongjusa Temple)

  • 강관식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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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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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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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용주사 <삼세불회도>에 대한 연구는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네 가지 핵심 사항이 실증적인 근거와 일관된 논리 아래 모두 일치되도록 정합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용주사 <삼세불회도> 연구에서 제기된 19세기 후반 화승 제작설과 1790년에 제작된 원본을 1920년대에 일반화가가 서양화법으로 개채한 것이라는 소론은 실증성과 논리성이 결여되어 성립되기 어렵다.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祝願文)은 세자(世子) 책봉을 받지 않은 원자(元子)만 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관습대로 의례적인 삼전(三殿) 축원문을 썼다가 이를 주사로 지우고 다시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자궁저하수만세(慈宮邸下壽萬歲), 왕비전하수만세(王妃殿下壽萬歲), 세자저하수만세(世子邸下壽萬歲)"라는 특별한 내용과 예외적인 순서로 개서(改書)했는데, 이는 조선후기 불화의 축원문 형식과 내용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정조대 왕실의 전례(典禮)를 면밀히 분석해 볼 때, 현존하는 <삼세불회도>가 1790년의 창건 당시에 그려졌던 원본 진작임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객관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삼세불회도의 형식(形式)과 도상(圖像), 양식(樣式), 미감(美感), 화격(畫格) 등을 18~19세기 불화나 궁중화원 양식과 다각도로 비교분석해 보면 용주사 <삼세불회도>는 1790년경 전후에만 나타나는 특징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축원문(祝願文)에 대한 분석 결과와 일치한다. 특히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종교적 위상에 따라 존상의 크기가 결정되고 화면 구성도 근하원상(近下遠上)의 고식(古式) 원근법에 따라 관념적, 평면적 조형 위주로 이루어져 왔으나 이 <삼세불회도>는 투시법적 원근법의 논리에 따라 구축된 입체적 공간 속에 존상들을 매우 체계적으로 배치한 뒤 서양화(西洋畫)의 음영식(陰影式) 명암법(明暗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며 흰색 하이라이트와 그림자까지 표현함으로써, 마치 삼세불회(三世佛會)의 장엄한 세계가 눈앞에 실제로 펼쳐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투시법적 원근법의 내적 질서와 음영식 명암법의 외적 착시는 골육합체(骨肉合體)처럼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흰색 하이라이트만 떼어내서 후대에 개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더구나 이 <삼세불회도> 같은 고도의 서양화법과 높은 화격(畫格)의 창의적 융합은 조선후기 회화사상 김홍도와 이명기, 김득신 같은 정조대의 궁중화원만이 이룩할 수 있는 고도의 양식이자 화격이다. 용주사 주지 등운(等雲)이 창건 이래 용주사에 전해져온 기록을 토대로 『용주사사적(龍珠寺事蹟)』을 정리하며 김홍도가 <삼세불회도>를 그렸다고 기록한 것은 이것이 당시의 역사(歷史)이자 실상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공식 기록인 『일성록(日省錄)』과 『수원부지령등록(水原府旨令謄錄)』에는 김홍도와 이명기, 김득신이 감동(監董)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의례 화승(畫僧)들이 그려왔던 불화를 관원 신분의 화원에게 그리도록 하는 것이 엄격한 관직 체제나 운영상 부당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명분상 감동으로 발령한 뒤 실제로는 불화를 직접 그리도록 했던 데서 나타난 결과였다. 영정조대의 어진(御眞) 도사 과정에서 감동으로 불러들인 문인화가 조영석(趙榮祏)과 강세황(姜世晃)에게 국왕이 직접 그릴 것을 요구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감동(監董)'과 '집필(執筆)'은 경우에 따라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개념으로서 '감동'이 '집필'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주사사적』의 기록은 『일성록』이나 『수원부지령등록』은 물론 황덕순의 「닫집 원문」 기록과도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행간의 의미를 찾아 복합적으로 읽으면 각각의 맥락과 필요에 따라 동일한 내용의 표리를 다르게 기록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용주사 <삼세불회도>의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네 가지 핵심 사항을 모두 실증적인 근거와 일관된 논리 아래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생물다양성에 대한 기후변화의 영향과 그 대책 (Effects of climate change on biodiversity and measures for them)

  • 안지홍;임치홍;정성희;김아름;이창석
    • 한국습지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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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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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4-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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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에서는 지구적 차원에서 생물다양성의 성립 배경과 그동안 일어난 변화 그리고 기후변화가 생물다양성 및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고 그 영향을 줄이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생물다양성은 생명체의 풍부한 정도이며, 생물을 구분하는 모든 수준에서의 다양성을 종합적으로 의미한다. 즉, 생물다양성은 유전자, 종 그리고 생태계 전반과 그들의 상호작용을 아우른다. 이는 생태계의 기반을 구성하며, 모든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의존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생물다양성은 주로 인간 활동에 의해 점점 더 위협받고 있다. 지구상의 생물은 생명이 탄생한 이래 약 40억년의 역사를 통해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한 결과, 약 1000만 내지 3000만종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생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생물다양성을 구성하는 무수한 생명들은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관계 속에 얽혀 있다. 우리들이 현재 생활하고 있는 지구의 환경도 이러한 생물체의 방대한 연관성과 상호작용에 의해 긴 세월 동안 만들어져 왔으며, 인류도 하나의 생물로서 다른 생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주위의 생물들이 없다면 사람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인류는 최근 수 백 년 간 과거의 평균 멸종속도를 1000배 가량이나 가속시켜 왔다. 우리는 미래 세대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라도 생물다양성을 보전하는 한편, 지속가능하게 이용할 책임이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어왔으나, 동시에 이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반도 국가라는 지리적 특성에 의해 본래 풍부했던 생물다양성을 빠르게 소실시키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한국인은 오랫동안 농업, 임업 그리고 어업을 해오는 과정에서 자연과의 공존을 통해 독특한 고유의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근래 서구문명의 유입과 과학 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이러한 자연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으며, 자연과 문화 사이의 조화로운 조합에 의해 창출된 고유한 풍토는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인구는 세계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과는 반대로 점차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구 감소에 의한 자연의 회복에 발맞추어 급속한 인구 증가 및 경제 성장으로 인해 훼손된 생물다양성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한 이래 다섯차례의 대멸종이 있었다. 현대의 대멸종은 매우 급속히 진행되고 있으며, 인간 활동에 의한 영향이 주요 원인인 점에서 이전의 것과 구분된다. 기후변화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며, 생물다양성은 이러한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 만약 생명체가 변화하는 환경에서 '진화를 통한 적응', '생존가능한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 등과 같은 생존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들은 절멸할 것이므로, 기후변화가 지속된다면 생물다양성은 극도로 훼손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훼손정도를 최소화하기 위해 기후변화가 생물다양성에 미치는 영향을 보다 적극적이고 심도있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생물계절의 변화, 식생 이동을 비롯한 분포 범위의 변화, 생물 간 상호작용의 부조화, 먹이 사슬 이상에 기인한 번식 및 생장률 감소, 산호초 백화현상 등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으로 등장하고 있다. 질병의 확산, 식량 생산 감소, 작물 경작지 범위 변화, 어장 및 어업시기의 변화 등은 인간에 대한 영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우리는 온실 가스 배출량을 감소시켜 기후변화 완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온실가스 배출을 당장 멈추더라도, 기후변화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런 점에서, 기후변화 적응 전략을 준비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 될 수 있다. 생물다양성에 대한 기후변화 영향의 지속적 모니터링 및 보다 적합한 모니터링 체계 구축이 선행과제가 될 수 있다. 생물다양성이 성립할 수 있는 생태적 공간의 확보, 이동 보조 및 남북을 이어주는 수평 및 저지대와 고지대를 이어주는 수직적 생태네트웍이 기후변화에 따른 생물다양성의 적응을 돕는 대안으로 추천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