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숙종(肅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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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두창(痘瘡)에 관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의안(醫案) 연구 (A study on the Clincal Records of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Chosun Danasty』)

  • 고대원;김동율;김태우;차웅석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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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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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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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Smallpox and measles might be the typical epidemics through Choson Danasty. Especially Sookjong was the first king who suffered from smallpox during the period of his reign. This study was examined critically focused on the Clinical Records about Smallpox which occurred in the 9th year of Sookjong's reign. The clinical records in Seungjeongwon Ilgi("承政院日記") was the main source and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was reffered. It tells us that Sookjong caught infectious disease, smallpox spread in town and the whole process of smallpox. Seungmagalgeuntang(升麻葛根湯) and hwadoktang(火毒湯) were given at the early term for treating Sookjong's smallpox, but later on, Bowontang(補元湯) was given for the treatment of smallpox. It showed us the medical view which placed emphasis on the vital force of human body. A dermatologist, Yoo Sang had join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treatment and Siyakchung(侍藥廳) was established for Sookjong. Sasunghoichuntang(四聖回天湯) which was Chunyoohyung(全有亨)'s prescription showed us enough clinical experience and the ways of treatments. At the same time, the medical culture at that time was well known through the fact that smallpox was taboo among the royal family.

호박이 첨가된 발아현미 식빵의 품질특성 (Quality Characteristics on Sprouted Brown Rice-Bread Added with Pumpkin Powder)

  • 주선종;김기식;윤향식;홍지선;김숙종
    • 한국식품저장유통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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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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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3-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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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발아현미와 호박분말이 식빵의 품질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발아현미 $20\%$와 호박분말 0, 1, 3, $5\%$를 첨가하여 식빵을 제조한 후 부피, 색도, 물성, 관능검사와 영양성분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호박분말 첨가량이 증가할수록 부피는 4.68 mL/g에서 3.60 mL/g로 감소하였고, L값은 77.46에서 73.36으로 약간 감소하였으며 b값은 10.97에서 27.01로 증가하였다. 호박분말이 첨가된 식빵의 경도, 부착성, 씹힘성은 감소하였으며 점탄성과 응집성은 일정한 경향을 나타내지 않았다. 관능검사 결과 호박분말첨가량이 증가할수록 향, 색, 맛 및 상품성이 증가하였다.

식품의 이온화 조사기술에 대한 경제성 분석 (Economic Analysis of Irradiation Technology of Food)

  • 이장은;이숙종;이철호
    • 식품과학과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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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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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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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식품의 이온화 조사 처리기술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을 정량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자료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이온화 조사가 허용되었거나 앞으로 허용 가능한 농산물의 수확 후 관리 손실 비용을 분석하고, 가공식품의 저장성 향상에 의한 경제적 이득에 대하여 조사하였으며, 식품의 이온화 조사로 예방 할 수 있는 식중독 사고의 정도와 그 사회 경제적 비용절감을 추산하였다. 신선식품의 연간 수확 후 손실 비용은 감자, 마늘, 양파, 고추에 대해 총 1조 1,251억 원으로 추산되었다. 현재 이온화 조사가 허가된 품목(다류, 장류, 조미식품, 드레싱)의 유통기한 초과로 인한 폐기 손실액은 899억 원으로 조사되었다. 현재 이온화 조사가 허용되지는 않았으나 향후 조사품목을 확대하였을 때 포함될 수 있는 품목(식육과 알 가공품, 어육가공품, 건포류, 축산가공품)의 유통기한 초과에 의한 폐기손실액은 총 1,931억 원으로 조사되었다. 식품의 이온화 조사로 예방 가능한 식중독의 보건 사회적 비용을 추산한 결과 이온화 조사로 사멸효과가 큰 E. coli O157, Campylobacter jejuni, Salmonella spp.에 의한 식중독 감소 효과로 연간 880억 원의 보건 사회적 비용 감소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여지며, 전체 세균성 식중독으로 확대하여 분석 한 결과 1,790억 원의 비용 감소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온화 조사 처리기술은 식중독 예방에 의한 보건의료비의 절감 기능과 아울러 식품산업의 유통손실 절감과 식량 유실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이므로 식량안보적 차원에서 적극 활용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인삼의 유래 및 효능의 서지학적 고찰 (Bibliographic consideration on the efficacy and the origin of Korean ginseng)

  • 곽이성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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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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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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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고려인삼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특산물로서 가장 인기있는 건강식품중의 하나로 한반도(북위 33~48도)가 원산지이다. 인삼은 중국 전한 시대 '사유'에 의해 쓰여진 "급취장" (BC 48~BC 33)에 최초로 언급되어 있으며, 1145년 고려시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의약적 치료용으로 중국에 인삼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인삼의 인공재배에 대한 기록은 1596년 중국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이후 야생삼이 감소하는 시기와 맞물려 숙종 13년(1687년) "승정원일기"에 '묘삼'의 기록이 나타난다. 묘삼은 벼의 이앙법을 활용한 독창적인 발명으로 1600년대 초반에 인삼의 인공재배법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한편 홍삼에 관해서는 1123년 중국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숙삼'(인삼을 쪄서 건조한 삼)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것이 홍삼에 대한 최초 기록이다. 조선 중종 17년(1552년) "조선왕조실록"에 '판삼'(삼을 찌고 압착하여 얇은 판처럼 만든 후 풀로 붙인 삼)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선조 35년(1602년)에는 '파삼'(삼을 찌고 압착하여 얇은 판처럼 만든 후 실로 꿰어 붙인 삼)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종(1506~1545) 시기부터 선조(1567~1608) 시기에 홍삼의 제조방법이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홍삼의 제조법은 그 전부터 이루어졌다고 추정되지만 조선 중종~선조 시기에 더욱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홍삼'이란 용어는 정조 21년(1797)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며, 고종 36년(1899)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에는 대한제국 궁내부 내장원 삼정과에서 홍삼을 제조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아울러 순조 10년(1810년)에는 증포소를 개성으로 이전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시기에 대규모 홍삼제조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조선 숙종시대에 확립된 인삼 인공재배기술과 정조시대의 홍삼제조법, 그리고 순조시대의 증포기술 등이 결합하여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후 1916년 '김택영'이 지은 "소호당집"에는 홍삼의 제조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전통적 한국홍삼 제조법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한편 인삼의 효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BC 83-96년 중국에서 저술된 "신농본초경"으로 이 효능은 그 이후 여러 의학서에서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앞으로 고려인삼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은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보존되어야 하며 이러한 서지학적 노력은 과학적 연구결과와 더불어 세계속에 고려인삼의 독창성을 알리고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된다.

건조방법에 따른 검은비늘버섯의 향기특성 (Aroma Characteristics of Pholiota adiposa (Geumbongi) with Different Drying Methods)

  • 윤향식;오은희;주선종;김기식;정은경;장후봉;김숙종
    • 한국식품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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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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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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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검은비늘버섯(Pholiota adiposa)의 향기성분을 조사하기 위해 생버섯을 SDE로 추출하여 농축한 후 GC/MS로 정성하였다. GC/MS로 정성된 화합물은 총 41종이었으며 관능기별로 보면 알콜류 11개(8.23%), 알데하이드류 8개(32.70%), 에스테르류 4개(5.69%), 케톤류 4개(5.42%), 알칸류 9개(17.91%), 기타 5개(11.64%)화합물로 구성되었다. 함량이 높은 화합물로는 hexanal(8.55%), n-heptaldehyde(13.02%), 2-pentyl furan(4.82%), bonzeneacetaldehyde(3.34%), (E,Z)-2,4-decadienal(3.06%)과 hexacosane(5.04%)이었다. 건조방법에 따른 향기성분은 SPME로 추출하여 GC/MS로 분석하였으며 열풍건조시 건조온도가 증가함에 따라 2-phenylethanol, benzeneacetaldehyde 함량은 감소하였으며 $70^{\circ}C$에서는 2(5H)-furanone(0.16%), 2H-1-benzopyran-2-one(7.63%), 2-acetylpyrrole(5.49%), 4-phenyl-pyridine(5.61%)이 높게 나타났다.

들깨속의 수분 및 수정 생리현상에 관한 연구 (Studies on Physiological Appearances of Pollination and Fertilization in Perilla)

  • 정찬식;오기원;이명희;배석복;이유영;안영섭;김정태;박금룡;서득용;김호영
    • 한국작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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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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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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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1. 들깨의 화분은 인공수분 후 30분이면 화분이 발아되고, 1시간 후면 암술 하단부까지 화분관이 신장되었다. 2. 저온에서는 수술이 고사하거나 약벽이 터지지 않는 경우와 약벽이 터지고 약은 형성되었으나 화분관 신장 수가 매우 적은 비정상적인 양상을 관찰할 수 있었고 종자가 맺히는 화방수가 적었다. 3. 들깨속의 수정, 결실은 온도 및 품종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조생종인 YCPL 25는 야간온도가 $15^{\circ}C$ 이하일 경우 크게 떨어졌으나, 만숙종인 YCPL 263은 야간온도 $10^{\circ}C$에서도 그 영향은 미미하였다. 4. 저온에서 종자가 맺히지 않는 꽃에 정상적인 화분을 인공수분 시키면 높은 결실률을 얻을 수 있었다. 5. 화기 발달과정 중 수분 및 수정 시기는 YCPL 177-1등 5품종은 꽃잎이 꽃받침보다 커지는 시기에 화분이 만들어지고 화분관이 발달하였으나, 푸른 차조기인 YCPL 205-1은 이 시기에 화분은 만들어졌으나 화분관은 71%만 발달되었다.

조선후기 영악전(靈幄殿) 기능수용에 따른 정자각 평면변화 고찰 (The study for changes of plane at the Jeongjagak(丁字閣) accepting functions of the Yeongakjeon(靈幄殿))

  • 신지혜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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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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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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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The "Jeongjagak(丁字閣, T shaped building)" was important building from Goryeo Dynasty to Joseon Dynasty. For long period, the scale and form of the building had been changing bit by bit. The change of building results from the function. As the Jeongjagak accepted the functions of the Yeongakjeon(靈幄殿), there appeared changes of plane. The main function of Yeongakjeon was suppling space for the dead king's coffin. The Yeongakjeon was not built in the first year of King Sukjong(1674). At that time, the Jeongjagak was responsible for the function of the Yeongakjeon as an alternative. Starting from this, the Jeongjagak was used as space for the dead king's coffin. Because the coffin should place on from south to north, it demanded long inner space in south-north direction. Therefore the effort to make enough length in south-north direction was begun from the first year of King Sukjong(1674). In order to solve the problem, the Toigu(退構) was made from the reign of King Sukjong to the 28th year King Youngjo(1852). The Toigu was temporary inner space which was made in one compartment at the Baewichung(拜位廳, the part of the Jeongjagak). But the length of the Jeongjagak's south-north direction was reduced to 61.8m(20尺6寸) at the 33th year of King Youngjo(1857) when the "Gukjosangryebopyon(國朝喪禮補編)" was completed. Also it extended to 84m(28尺)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1774~1800). Following these process of extension and reduction, the length was standardized as 72m(24尺) at the reign of King Sunjo(1800~1834). These facts explains that the main cause of plane change at the Jeongjagak was acceptance of functions that was used as space for the dead king's coffin. Also, the important points of change at the Jeongjagak were the first year of King Sukjong, the 33th year of King Youngjo and the first year of King Sunjo. When it was the first year of King Sukjong and the 33th year of King Youngjo, there were two national funerals. Because of concern about the increasing labor and tax of the nation, the scale of the Jeongjagak was changed to decreasing size. Due to the improvement of drawings and annotation on a Eugwe(儀軌) at the first year of King Sunjo, the size of Jeongjagak was standard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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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마을 정량적 기준제시를 위한 마을공동체 활동변화 분석 - 충청남도 부여군을 대상으로 - (Analysis of Changes in Active Village Community for the Quantitative Criteria Presentation of Marginal Village - As a Target the Chungnam Province Buyeo Country-)

  • 엄성준;리신호;김숙종;정상숙
    • 농촌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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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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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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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The aim of this study is to suggest the quantitative standard of a marginal village. For the purpose, the study selected 43 villages with the population of 50 or less, the classification of a marginal village in accordance with advanced research and 47 villages with the population over 50 in Buyeo-gun region. The common reason of occurrence of a marginal village suggested by advanced research is a characteristic of a village or decline and extinction of a village rather than a simple index of population or aging rate. Therefore, the study assumed that decline of functions of the village would be caused by decline a function of communities consisting of the villagers. The study then assumed that the relatively low or 0 number or rate of participants would result in community functions. The study conducted t-test on basis of population and aging rate and an analysis to find the range with relatively large differences in the number of communities, participants and the rate of the participants, etc. The result showed that the community function began to decline when the population was less than 60~70 and the aging rate over 75%~85%. As the decline of functions of communities began in population of 70, the critical point was met when the population was 40 or less. With population of 40 or less, the young and the old group communities became extinct or showed rapid decrease in the number of participants. The study assumed that decline of functions of a village, a reason of occurrence of a marginal village would be decline of functions of communities, but there was no further analysis on decline or extinction of a village with population of 40 or less. There shall be further studies about whether a village of population of 40 or less is led to decline of a function or extinction of village communities.

조선후기 영남 문집 목판본 간행의 확산 양상에 관한 연구 -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책판을 중심으로 - (Spread of Publication of the Literary Collection by Wood-block printing in the Late of Joseon Dynasty - Centered on wooden blocks for printing housed in KSAC -)

  • 손계영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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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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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7-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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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이 논문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목판본 문집 간행의 문화적 양상이 시기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에 관한 연구이다.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명현의 글을 보존하기 위해 문집 간행의 필요성이 계속적으로 부각되었으며,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문집 간행을 주도하였다. 16세기부터 18세기 초반에는 감사 수령이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어 그들의 주도에 의해 지방관아에서 문집이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다. 17세기를 거쳐 18세기 초중반에는 부세 제도 변화로 지방관아의 재정이 제한되어 문집간행 사업이 현격하게 줄어든 반면, 숙종대에 서원의 수가 폭증하자 지방관 중심의 문집 간행이 18~19세기에는 서원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이전 시기의 형태들이 여전히 존재하였던 반면, 서원의 제도권에 속하지 못하거나 서원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던 사족들의 문집 간행이 19세기 말부터 폭발적으로 이루어져 양반층 전반의 문화로 확산되어 갔다.

皇龍寺 49萬소斤 巨鐘은 어디로 (The Whereabout of the Bell Imperial-Dragon-Temple)

  • 이병호
    • 한국음향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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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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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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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작금에 皇龍寺 49萬소斤 巨鐘의 행방이 문제가 되는 것은, 최근 경주시가 그 종을 찾아서, 우리 민족 문화의 국보를 되살리고, 이를 경주 황룡사 종루에 복원하면 그 종소리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라는 데 있다. 그리하여 해군에서도 최신 장비를 동원하여 그 종이 빠졌다는 동해구를 뒤지고 있다. 그러나, 그 종은 고려 숙종조에 녹여 져서 신종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이 三國遺事 卷三, 皇龍寺 鐘條에 나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니 皇龍寺 巨鐘: 무게 41.0 ton, 높이 3.14 m, 구경 2.44 m 皇龍寺 新鐘: 무게 7.4 ton, 높이 2.07 m, 구경 1.61 m임이 드러났고 종의 收率(종의 무게/입증)이 聖德大王 神鐘은 34.7 %, 皇龍寺 巨鐘은 13.6 % 임을 알았다. 그리고, 1103년에 皇龍寺 新鐘(7.4 ton)이 원 황룡사 거종이 달려있던 자리에 매달려 있다가, 1238년 11월에, 몽고 제3차 침입군에 의하여 황룡사 전체는 타 버리고, 그 新鐘은 지금의 ④번 國道의 course를 따라 토함산맥 제일 낮은 고개를 넘어, 보문양북면 大鐘川동해구로 끌려가서 동해구에서 몽고행 배에 싣다가 그 곳에 빠뜨렸다고 보여진다. 이번에 잘하면 해군이 7.4 ton의 황룡사 신종을 건질 수 있을런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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