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세종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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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음성학(II): 초성, 종성(닿소리) 제자해에 대한 음성언어의학적 고찰 (Hunminjeongeum Phonetics (II): Phonetic and Phoniatric Consideration for Explanation of Designs of Initial and Final Consonant Letters)

  • 최홍식
    • 대한후두음성언어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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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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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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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Hunminjeongeum had 17 initial consonant letters. Among them, five consonant letters, those are ㄱ (牙音, molar sound letter), ㄴ (舌音, lingual sound letter), ㅁ(脣音, labial sound letter), ㅅ (齒音, dental sound letter), ㅇ (喉音, guttural sound letter), were served as chief consonants. There was no argument that consonant letters were made by symbolizing the shape of vocal organs during phonation of them. It could be phoniatrically explained that all of five chief consonants were morphologically symbolized from left lateral view of vocal tract during articulation. Although 'ㄱ' was known as molar sound, it was not modeled the shape of molar tooth but modeled the shape of tongue at molar teeth bearing area. The same principle applies to 'ㅅ', and it was represented the shape of upper surface of anterior tongue instead of incisor teeth. 'ㄴ' was a lingual sound and directly shaped the shape of tongue. 'ㄷ' was made by addition of a stroke 'ㅡ' meaning hard palate above 'ㄴ'. 'ㅁ' was represented the shape of lateral view of anterior mouth. 'ㅇ' was looked like shaping left lateral view of laryngopharyngeal space.

훈민정음 음성학(I): 중성자(홀소리) 제자해에 대한 음성언어의학적 고찰 (Hunminjeongeum Phonetics (I): Phonetic and Phoniatric Consideration for Explanation of Designs of Middle Vowel Letters)

  • 최홍식
    • 대한후두음성언어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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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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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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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Hunminjeongeum was made by the Great King Sejong, and composed of 17 consonant and 11 vowel letters. All the 28 letters were made according to the shape of vocal organ or space at the point of articulation for each letters. This review article focused on phonetic and phoniatric consideration for explanation of the designs of the middle vowel letters, especially three main vowel letters [ • (天, heaven), ㅡ (地, earth), ㅣ (人, human)] using video-fluoroscopic evaluation as well as computed tomography scanning, etc. During articulating / • / sound, a ball-like space at frontal portion of the oral cavity was found, tongue was contracted, and sound was deep (舌縮而聲深). During /ㅡ/ sound, a flat air space between oral tongue and hard palate was created. Tongue was slightly contacted neither deep nor shallow (舌小縮而聲不深不淺). During /ㅣ/ sound, tongue was not contacted and Sound is light (舌不縮而聲淺). Tongue was moved forward making longitudinal oro-pharyngeal air space. So, I'd like to suggest that we had better change the explanation drawing from a philosophical modeling to a more scientific modeling from real vocal tract space modeling during articulating middle vowels of Hunminjeongeum.

WorldCat과 한국 관련 장서의 분포에 관한 연구 - 청소년 대상 전기를 중심으로 - (An Analysis on the Distribution of Books on Korea in WorldCat: With a Focus on Biographies for Juvenile Readers)

  • 윤정옥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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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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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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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연구의 목적은 WorldCat에 수록된 한국 관련 전기도서를 분석함으로써 한국 관련 인물에 대한 지식 분포 현황 및 확산의 가능성을 전망하는 것이다. 주제에 Korea를 포함하는 전기도서 서지레코드 15,007건과 청소년 대상 전기도서 487권의 언어와 주제, 주제 인물, 미국 내 소장도서관 등 분석하였다. 청소년 대상 영어전기 30권은 미국 내 소장도서관 수가 많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가장 많이 등장한 주제 인물이었다. 한국어전기 457권은 소장도서관 수가 많지 않고, 세종대왕과 이순신이 가장 많은 책에서 다루어졌다. 한국 관련 청소년 대상 전기도서들은 본격 전기보다 초등 저학년 수준 그림책이나 일화 중심 스토리 등 편향성을 보여, 도서관 장서를 통한 한국 관련 인물에 관한 흥미 유발이나 지식 확산의 전망은 제한적이었다. 주제 패싯의 오류, 동일 주제 인물의 분산, 소장도서관 리스트의 부정확성 등 문제점도 확인하였다.

종묘제례악 원형과 현행의 비교 고찰 (A Study on Comparing the Original and Current Jongmyo Jeryeak)

  • 문숙희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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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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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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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종묘제례악은 세종 세조 두 대왕에 의해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연주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종묘제례악은 두 왕이 의도했던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으로 변했고, 변화된 종묘제례악이 현재 연주되고 있다. 두 왕에 의해 만들어진 종묘제례악 원형은 현재 고악보에 남아 있다. 따라서 고악보를 바르게 해석하여 원형을 찾아 현행과 비교함으로써 두 음악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대악후보" 종묘제례악을 원형으로 복원하여 현행 종묘제례악의 노래선율과 비교하며 살펴보고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종묘제례악 원형은 '조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가사를 부르기 위해 향악과 고취악에 붙여 만든 일반적인 노래이다. 모든 음악적인 내용이 가사에 맞추어져 있어 자연스럽게 가사의 의미가 전달된다. 장단 박자 음악형식은 가사 형식에 맞추어져 있고 노래의 악상(樂想)은 가사의 내용에 맞추어져 있다. 쉬우면서도 가사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는 이 노래는 세종대왕의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종묘제례악 현행은 가사의 의미 보다는 시김새가 강조되어 있는 특별한 노래이다. 선율들은 일관성 없이 조각나 있고 의미없는 가사 '애'가 무분별하게 첨가되어 있으며, 장단 박자 음악형식 또한 가사의 내용과 무관하여, 가사의 의미는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감행된 이러한 변화는 원 노래의 가사를 훼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일관성 없이 조각난 선율은 시김새로 인해 현재의 신비스러운 제사음악으로 되살아났다. 하지만 이 음악이 완전한 제사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가사의 의미를 살리는 수정이 필요하다.

Research on the history of astronomy and the role of astronomer

  • Lee, Yong Bok
    • 천문학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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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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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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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우리나라의 천문 관측의 기록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사시대에는 천문 현상을 바위나 건축 유물에 기록을 남기고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일반 역사 기록 속에 항상 함께 기록하고 있다. 특히 동양은 역사기록 자체가 인간이 남긴 자취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에 일어나는 다양한 자연 현상도 함께 동시에 남겼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하늘과 땅과 항상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정사로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일식, 혜성 출현, 별똥과 유성우, 달과 행성 운행, 초신성 관측 등 250회 이상의 천문 기록이 나타나며 대부분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천문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천문 기록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중국으로부터 역법을 도입하여 천체 운행을 이용하여 우리 생활에 필요한 시각법을 사용하고 달력을 제작하였다. 특히 달과 태양의 운행 원리를 파악하여 일식과 월식을 직접 추산하였다. 역법의 운용은 천체 운행의 원리를 이해하고 수학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천문 관측과 정확한 시각 체계를 유지하고 정밀한 역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천체를 정밀하게 관측할 필요성이 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천문 관측기기를 개발하고 제작하였다. 천문 의기는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고 천체의 운행을 이용하여 시각 체계를 유지 관리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기기이다. 우리나라 천문학 발달의 네 가지 축인 천문(天文), 역법(曆法), 의상(儀象), 구루(晷漏)등은 조선 초기 세종시대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는 단일 왕조가 이룬 업적으로 다른 문화권에서 볼 수 없을 정도의 우수한 과학 기술의 유산이다. 특히 칠정산내편과 외편의 완성은 중국의 역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역법을 완성하려는 시도였다. 이 모든 것은 당시 이를 주도하던 세종대왕의 지도력과 천문학과 수학에 뛰어난 천문학자가 이룩한 업적이다. 그 후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쇠퇴하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거의 모든 과학기술의 유산이 파괴되거나 유실되었다. 조선 현종 이후에 세종시대의 유산을 복원하려는 노력 중에 중국을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을 도입하게 되었다.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중국의 역법 체계를 바꾸었다. 즉, 일식과 월식의 예측력이 뛰어난 시헌력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헌력에는 서양의 대수학과 기하학을 이용한 다양한 수학적 기법이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 시헌력을 익히기 위한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수학과 기하학을 접하게 되고 새로운 우주 체계를 도입하게 되었다. 특히 서양의 천문도와 지도 제작에 기하학의 투사법이 사용되어 복잡한 대수학적 계산을 단순화시켜 활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전문 수학자뿐만 아니라 많은 유학자들도 서양의 수학과 기하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고천문학 전체를 조망해 볼 때 핵심은 현대의 천체물리학이 아니라 위치천문학이다. 따라서 고천문학을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 운동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과 세차운동에 의한 효과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구면천문학과 천체역학에 대한 원리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접근해야 한다. 고천문학의 중심인 천문(天文), 역법(曆法), 의상(儀象), 구루(晷漏) 등의 내용은 이러한 위치천문학이 그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고려사의 천문 현상을 모아 놓은 천문지(天文志)와 일식과 월식 계산 원리가 들어있는 역지(曆志)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위치천문학의 기본 개념 없이는 연구하는데 한계가 있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고천문을 연구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점이 위치 천문학의 기본 개념 없이 접근하는 것이다. 심지어 조선시대 유학자들조차 저술한 많은 천문 관련 기록을 보면 상당부분 천체 운행 원리를 모르고 혼란스럽게 기록된 내용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 수학사를 연구할 경우 방정식 해법, 보간법, 삼각법, 일반 기하 원리에 대한 것을 연구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천문 현상이나 천문 의기 제작에 사용되는 수학은 천문 현상에 대한 원리를 모르면 접근하기 어렵게 된다. 수학사를 하더라고 기본적인 위치 천문학의 기본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야 폭 넓은 수학사 연구에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의외로 천문 현상 추산을 위해 사용되는 수학이나 기하학 원리가 수학사 연구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더구나 한문으로 기록된 천문 내용을 한문 해독이 능숙한 학자라 하더라도 내용을 모르고 번역하면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천문 현상 기록이나 역법 관련 기록의 번역 내용 중에 많은 오역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는 한번 오역을 해 놓으면 몇 십 년이고 그대로 그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게 되고 사실로서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 선조들이 남긴 고천문 관련 기록에 관한 이해는 우리 현대 천문학자의 역할이 대단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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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후변화와 환경개선사업 관계 - 조선왕조실록의 가뭄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 (Relationship between Climate Change and Environmental Improvement Projects during the Chosun Era - Focusing on Drought-related records of Chosunwangjoshillok -)

  • 유재심;성종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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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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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7-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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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가뭄으로 인한 기후변화가 인지되고 기후 재난을 겪게 되었을 때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환경적으로 어떻게 적응하는 행동을 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 진행을 위해 '환경개선사업은 기우제 설행 빈도보다는 기후재난 빈도가 높을 때 더 많이 시행된다.'는 가설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뭄을 대표하는 변수로 기우제 빈도를 선택하였다. 기후재난과 환경개선사업을 표현하는 단어들의 샘플을 추출하고 빈도를 측정하여 가뭄, 기후재난, 환경개선사업의 관계를 회귀분석하였고, 연구 가설을 검정하여 기후재난과 환경개선사업 관계를 기후변화 속에서 설명하였다. 가뭄을 대표하는 기우제의 빈도 측면에서 세종대왕, 숙종, 영조의 순서로 나타냈다. 기후 재난은 중종, 성종, 그리고 태종의 순서로 빈도를 보였고, 환경개선 사업은 영조, 성종, 그리고 태종의 순서로 나타났다. 조선 전기보다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가뭄 발생으로 인한 환경개선사업보다 기후재난에 대한 환경개선사업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 환경개선사업과 기후재난의 관계는 환경개선사업= 0.632기후재난의 선형 회귀모형으로 설명되었다. 기후재난을 경험한 비율이 높을 때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환경개선 사업이 더 많이 시행한다는 연구가설은 유의했다. 따라서 기후 재난을 인식하고, 환경개선사업을 시행한 비율이 높았던 조선 후기에 연구가설이 통계적으로 더 잘 설명되었다.

웹기반 정간보 사보 프로그램 설계 (Designing a Web-Based Jeongganbo Notation Program)

  • 심인섭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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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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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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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최근 문화의 세계화와 K-컬처의 세계적인 유행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더욱 발전시키고 알릴 수 있는 좋은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음악에는 세종대왕이 개발한 정간보라는 우수한 기보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기보법의 보편성으로 점차 사용되지 않고 있는 추세이다. 하지만 7차 교육과정 이후 초등 음악교육에서 정간보의 소개와 활용 비중이 늘어나고 있고, 이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 기보법을 다시금 보편화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반면 기보법의 해석에 관한 연습 이외에 정간보 사보의 실습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더욱 다양한 도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본 연구는 설치나 다운로드가 없이 웹에서 정간보를 사보할 수 있는 웹 프로그램에 대한 설계를 연구하였다. 또한 정간보를 사보하는 과정에 사용자의 편의성을 증대하기 위해 자판을 건반처럼 활용하여 입력하는 방안과 입력된 음악 정보를 MIDI 기능을 통해 청취하고 파일로 저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계하고 제안한다. 본 연구를 통해 누구나 쉽고 간단히 접근하여 실습하고 사보할 수 있는 웹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으며, 이는 향후 국악의 기보 실습 혹은 전통음악 사보에 유용한 도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광화문광장의 인식 분석 연구 - 텍스트마이닝과 소셜네트워크 분석을 중심으로 - (Study of Recognition and Spatial Attributes of Gwanghwamun Square - With a Focus on Text Mining and Social Network Analysis -)

  • 우경숙;민병욱;김진표
    • 환경영향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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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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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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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는 광화문광장의 이용자들이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광화문광장의 공간적 속성을 도출하였다. 광화문광장의 공간적 속성은 4가지로 역사적 환경의 보존, 주변경관의 아름다움, 휴식 공간으로서의 적합성, 레크리에이션 활성화이다. 첫 번째 속성인 역사적 환경의 보존은 광화문광장의 고유한 특성을 반영하고 문화와 공감대를 가진 공간과 관련된 것으로 청와대, 북악산, 경복궁, 육조거리, 세종대왕, 이순신 등의 키워드를 포함하고 있다. 두 번째 속성인 주변경관의 아름다움은 주변경관을 방해하지 않고 풍부한 녹지와 자연환경 제공과 관련된 것으로 풍경, 하늘, 녹지 등의 키워드를 포함한다. 세 번째 속성인 휴식공간으로서의 적합성은 방문객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각종 조경시설 및 서비스로 테이블, 의자, 그늘, 화분, 휴식공간, 분수 등의 키워드를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레크리에이션 활성화이다. 다양한 경험 제공으로 전시, 공연, 체험, 구경 등의 키워드를 포함한다. 본 연구에서 도출된 광화문광장의 속성을 활용하여 추후 광화문광장의 가치 평가 및 추정 연구로 유형별 선호의 차이를 검증하는 연구가 진행된다면 광화문광장의 재조성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것이다.

성주지역 문화재 지정(보호)구역 내 외래식물의 현황 (Status of Exotic Plant Species with in the Cultural Properties in Seongju-gun, Gyeongsangbuk-do)

  • 신현탁;김용식;이명훈;윤정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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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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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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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경상북도 성주군에 분포하고 있는 주요 문화재 지정(보호) 구역을 중심으로 식물상 조사 결과를 토대로 외래식물 및 귀화식물의 현황을 분석함으로써 전통문화공간의 정체성을 알리고 이에 따른 보전방안 수립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관속식물상은 세종대왕자태실의 경우 50과 93속 94종 16변종 4품종으로 114분류군이었으며 이 중 외래식물은 15분류군, 귀화식물은 16분류군으로 귀화율 14.04%, 도시화지수 5.90%를 나타냈다. 성주향교는 40과 64속 57종 8종 4품종으로 68분류군이었으며 이 중 외래식물은 17분류군, 귀화식물은 30분류군으로 귀화율 44.12%, 도시화지수 11.07%로 나타났다. 성밖숲은 34과 58속 55종 5변종 1품종으로 61분류군이었으며, 이 중 외래식물은 10분류군, 귀화식물은 17분류군으로 귀화율 27.87%, 도시화지수 6.27%로 나타났다. 한개마을은 92과 183속 182종 1아종 32변종 14품종으로 230분류군이었으며 이 중 외래식물은 28분류군, 귀화식물은 85분류군으로 귀화율 37.12%, 도시화지수 31.37%로 나타냈다. 성산고분군은 55과 107속 106종 19변종 6품종으로 131분류군이었으며 이 중 외래식물은 18분류군, 귀화식물은 22분류군으로 귀화율 16.79%, 도시화지수 8.12%로 나타났다. 성주향교의 경우 귀화율이 가장 높았으며, 한개마을의 경우 귀화율 및 도시화지수에서 모두 높은 값을 나타내고 있었다. 5개 지역 모두 외래식물 및 귀화식물에 대한 대책의 수립이 필요하며 특히 한개마을의 경우 마을 전체에 대한 관리계획의 수립이 필요하다. 또한 성주향교 및 한개마을 지역에서 모두 생태계교란야생동식물 중 하나인 돼지풀의 출현을 확인한바 이에 따른 관리대책이 요구된다.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 (A Study of sacrificial rites related Royal Mausoleums in early Joseon Dynasty)

  • 한형주
    • 역사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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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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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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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가 풍수·지리학과 미술사 등에 편중된 현상에서 벗어나 국가의례의 관점에서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제도적 마련과 의식 정비, 종묘와의 차별성, 그리고 능행의 정치사적 의미 등을 천착함으로써 왕릉의 역사적 위치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왕릉 제사는 태조 즉위년 추존 4대왕(비)과 신의왕후의 제릉이 조성된 후 능직(陵直)과 수호군(守護軍)이 설정되고, 사맹월(四孟月)·삭망(朔望)·속절(俗節) 등의 제사가 정해지면서 시작되었다. 능제는 태종 초반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에 친제가 거행되면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특히 동왕 8년 태조의 사망으로 건원릉(健元陵)이 조성되어 흉례가 시행되고, 2년 후 3년상이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제사의 시행 및 의식의 정비가 모색되었다. 왕릉 주변의 금지(禁止)설정, 능제의 재정 확보, 건원릉친제의(健元陵親祭儀)와 섭행의(攝行儀)의 제정 등이 그 실례이다. 이후 세종즉위년에 정종, 동왕 2년에 태종비 원경왕후, 동왕 4년 태종이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후릉과 헌릉이 각각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흉례와 관련된 제반 의식들이 재검토되었고, 제사와 관련된 여러 세부 사항들과 배릉의(拜陵儀)가 수정·보완되었다. 그 내용은 이후 부분적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의 길례조와 흉례조에 수록되었다. 왕릉에서 시행된 제사는 사맹월의 시제와 삭망, 속절(정조,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납일) 등 다양한데, 당시 종묘 및 원묘인 문소전에서 시행된 것과 동일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고려 이래의 전통으로 사시제(四時祭)가 능제에서 배제된 중국사의 경험과 달랐다. 그런데 조선의 능제는 국가 사전(祀典)에 대사(大祀)로 편입된 고려시대와 달리 속제(俗祭)라는 별도의 체계속에 포함시킴으로써 국가의 대사인 종묘와 구분되었다. 아울러 능제를 흉례의 체계에 부가(附加)시킨 중국과 달리 왕릉 관련 의식을 흉례와 길례로 각각 구분하여 편입시키는 독자성을 보였다. 왕릉의 제사 시기가 종묘 및 원묘와 동일하다는 사실은 왕의 친행이 종묘보다는 왕릉에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태조~성종의 102년간 종묘의 국왕친제가 41회에 불과한 반면 왕릉에는 170회에 걸쳐 이루어졌고, 문소전에서는 85년간 99회의 친제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원묘인 문소전의 폐지 및 왕릉에서의 사시제 폐지를 주장하는 여론은 조선전기 내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결국 임진 왜란 과정에서 원묘인 문소전은 파괴되었지만 복구되지 못하였고, 왕릉의 사시제는 인조대에 이르러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왕릉제사는 속절제(납일 제외)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조선시대 제사에 왕이 참여한 사례는 예상외로 많지 않다. 대표적인 제사대상인 종묘의 경우에도 대략 2~3년에 한번씩 왕의 친행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반면에 왕릉의 친제는 매년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누대의 선왕이 모여 있는 혼전(종묘)보다는 육신이 안치된 개별 능에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끼고, 능행중에 원찰에의 행행이 쉬웠으며, 능제가 속제이기 때문에 제사과정이 간략하다는 이유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장엄한 의장을 갖추어 진행된 능행은 일반 민에게 우리의 '왕'을 알리는 동시에 그들의 생활상을 왕이 직접 관찰하여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던 중요한 정치적 행위였다. 아울러 초기의 국왕들은 능행의 과정에서 강무(講武), 대열(大閱), 진법(陣法) 등 군사훈련을 상시적으로 시행함으로써 그들의 군사통수권을 과시하는 정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