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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북성 마을제 연구 - 하북성조현범장이월이룡패회중룡신적여인(河北省趙縣范庄二月二龍牌會中龍神的與人) - (A Study of Local Festival for the China Hebeisheng)

  • 박광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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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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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7-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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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China is a country with large agricultural areas and subject to frequent calamities. Drought is the top of them. It has been a key problem for development of agriculture in the country. In the long struggle against drought, Chinese have accumulated many rational and irrational experiences. The Dragon Kings Belief, which is popular in North China and discussed in a thesis, is one of their irrational experiences. The belief was passed together with Buddhism from India to China in the Tang Dynasty. After it settled down, it was incorporated with the local five dragons belief and a set of beliefs in dragon kings came into existence. The emergence of the dragon kings belief ended the history that the title of rain got was not clear in China and Dragon kings finally got the status. Irrigation is the lifeblood of agriculture in China. In a Chinese mind, Dragon kings are the most important gods who take charge of rain and thus offer the lifeblood. In understanding the nature and characteristics of Chinese traditional culture, it is important for us to make clear the origin and evolution of the belief, find out its nature, function and operation. In the every year beginning of February of the Fanzhuang calendar in the people of Hebeisheng Zhaoxian, would all hold a festival to offer sacrifices to the $^{{\circ}TM}^{\prime}longpai$. Longpai was regarded as the core of the temple fair, thus the native sons came to call this festival; "longpaihui". In this region the'Fanzhuang longpaihui'developed into a well knownand grand temple fair. It was able to attract numerous pilgrims with its special magic power, occupying a place in $China^{{\circ}TM}$ 'eryueer'festival with festive dragon activities. The dragon is a common totem among Chinese nationals. The belief worship of the dragon dates from the start time of primitive societies. Dragon oneself the ancients worship's thunder lightning. In the worship of the great universe, at first afterwards this belief with the tribe's totem worships to combine to become the animal spirit. In ancient myths legends, along with folk religion and beliefs all hold a very important position. The longpaihui is a temple fair without a temple; this characteristic is a distinction between longpaihui and other temple fairs. As for longpaihui must of the early historical records are unclear. The originator of a huitou system has a kind of organized form of the special features rather, originator of a huitou not fix constant, everything follows voluntarily principle, can become member with the freedom, also can back at any time the meeting. There is a longpaihui for 'dangjiaren', is total representative director in the originator of a huitou will. 'banghui' scope particularly for extensive, come apparently every kind of buildup that help can return into the banghui, where is the person of this village or outside village of, the general cent in banghui work is clear and definite, for longpaihui would various businesses open smoothly the exhibition provides to guarantees powerfully. Fanzhuang longpaihui from the beginning of February to beginning six proceed six days totally. The longpai is used as the ancestry absolute being to exsits with the community absolute being at the same time in fanzhuang first took civil faith, in reality is a kind of method to support social machine in native folks realize together that local community that important function, it provided a space, a kind of a view to take with a relation, rising contact, communication, solidify the community contents small village, formation with fanzhuang. The fanzhuang is used as supplies for gathering town, by luck too is this local community trade exchanges center at the same time therefore can say the faith of the longpai, in addition to its people's custom, religious meaning, still have got the important and social function. Moreover matter worthy of mentioning, Longpai would in organize process, from prepare and plan the producing of meeting every kind of meeting a longpeng of the matter do, all letting person feeling is to adjust the popular support of, get the mass approbation with positive participate. Apart from the originator of a huitou excluding, those although not originator of a huitou, however enthusiasm participate the banghui of its business, also is too much for the number.

만주족과 인삼 (The Manchus and ginseng in the Qing period)

  • 김선민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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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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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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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만주족의 선조인 여진족은 그들이 거주하는 만주의 자연환경에 따라 채집과 수렵활동을 주된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여진족의 거주지는 대부분 삼림이 울창하고 하천이 발달하여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로는 적합했지만 농경에는 맞지 않았다. 여진족 사회조직 역시 채집과 수렵활동에 적합한 방식으로 형성되었고 그것은 이후 청나라 고유의 사회 군사조직인 팔기제도로 발전했다. 한편 채집과 수렵으로 획득한 자연자원을 주변의 농경사회과 교환하는 일은 여진 사회의 발전에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인삼을 비롯한 만주의 자연자원을 중원의 한인들과 교역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대외무역이 여진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만큼 확대된 것은 16세기의 현상이었다. 당시 외부에서 유입된 은은 중국 내지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나아가 만주를 비롯한 명의 변경지역의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만주의 자연환경에 기초한 수렵 채집활동이 16세기에 이르러 중원에서 유입된 은과 조우하여 변경 사회를 자극했고, 분산되어 있던 여진 부락은 경쟁과 통일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만주족으로 변모하여 1636년 청나라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1644년 만주족은 중원 정복에 성공하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중원으로 들어간 후에도 청황실의 만주족은 만주 인삼의 가치를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7세기 말까지 만주 인삼은 만주족의 제도인 팔기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만주에 주둔한 팔기 병사들은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여 인삼의 생산지를 한인의 접근으로부터 보호했다. 만주 인삼의 채취는 황실 내무부, 부트하 울라 총관, 성경상삼기 등 황제에게 직속된 기구에서 담당했다. 이들은 부트하 병정이나 팔기 병정을 파견하여 지정된 장소에서 정해진 액수의 인삼을 채취하여 납부하게 했다. 황실의 귀족만이 만주에 사람을 보내 인삼을 채취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고, 그조차 엄격히 제한되었다. 18세기도 만주의 인삼은 여전히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관리되었다. 청의 인삼 정책은 황실의 발상지인 만주와 그 자연자원을 민간인의 침탈로부터 보호하고 만주족 고유의 전통을 유지한다는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동시에 만주의 인삼은 국가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으로 개발되었다. 국가가 필요한 만큼의 수입을 징수하기 위해서는 인삼을 대량으로 채취해야 했는데, 부트하 병정이나 팔기 병정을 파견하는 것만으로는 안정적인 인삼세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상인들이 인삼업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청의 인삼 정책은 이후 점점 더 상인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청대 인삼의 국가 독점은 1853년에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부유한 상인이 채삼인을 고용하고 인삼을 대신 납부하는 현상은 18세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청대 만주족의 인삼 독점은 사실상 한인 상인의 참여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능참봉직(陵參奉職)의 조경사적 의의 (A Study on the Landscape Architecture Historical Significance of Reung Chambong in the Joseon Dynasty)

  • 신현실;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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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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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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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의 관리를 담당한 관직인 능참봉직을 소재로 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각종 의궤(儀軌), 능지(陵誌), "일성록", 능참봉 일기 등 관련 고문헌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능참봉의 조경가적 역할을 규명하는 기초연구로 수행되었으며, 요약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능참봉(陵參奉)은 종9품 참봉 2인으로 구성되고 능참봉직은 생원 진사 혹은 유학중에 삼망(三望)을 거쳐 임명이 되는 음직(蔭職)으로 임용기준은 '연소하지 않고 경륜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으며, 왕릉수호의 상징성으로 인해 관직진출의 수단이 되었다. 둘째, 능참봉의 업무체계는 품계서열을 따랐으나 지리상의 여건 등으로 봉심과 능의 공사감독 등 실제보다 많은 권한과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능수호군 관리 및 능지작성 등 조선왕릉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셋째, 능참봉의 조경관련 직무 중 봉심은 능상의 석물이나 사초, 정자각 등을 정기적으로 예찰하여 예조에 보고하는 것이며,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봉심의 체계와 방법 등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넷째, 능참봉의 조경관련 직무 중 수목관리 및 능역공사 감독은 조경식물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관리능력과 건축 토목을 망라한 공간에 대한 다양한 식견이 요구되는 직무로 조선왕릉의 현장관리 실무자로써 지방관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유동성 확보와 산림부산물 처리에서 암묵적 권한과 관리 책임이 부여되었으며, 오늘날 조경가의 직무성향과 관련성이 깊다. 능참봉의 조선시대 조경관련 직무에 대해 좀 더 폭넓은 문헌 발굴 및 고증으로 조선시대 능참봉의 조선왕릉 조경관리자로서의 역할과 능참봉과 조선왕릉의 조경사적 가치 규명을 위한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

금영작(金永爵)과 한중 척독교류의 새 자료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 (Kim Youngjak(金永爵) and the new material, 『A Collector of Correspondence from Chinese Intellectuals (中朝學士書翰錄)』)

  • 천금매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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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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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7-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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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는 금영작(金永爵)이 중국 문인들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척독집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을 새로 발굴하고 소개한 글로, 정공수(程恭壽), 옹학함(翁學涵), 장병염(張丙炎), 소언한(少言翰)과 자렴함(子廉銜), 이문원(李文源) 등이 김영작에게 보낸 편지 10통, 조정황(趙廷璜)이 김영작의 아들 김홍집(金弘集)에게 보낸 편지 1통 및 시(詩) 5수가 수록되어 있다. 김영작은 많은 중국 문인들과 직접 또는 간접적인 교유를 진행하였다. 그는 연행을 갔다 온 친구 홍양후(洪良厚)의 소개로 중국 문인 이백형(李伯衡), 수방울(帥方蔚)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30여 년간 간접적인 교유를 진행하였다. 1858년에는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 직접 북경에 가서 현지 중국 문사 섭명례(葉名澧), 장병염(張丙炎), 오곤전(吳昆田), 정공수(程恭壽), 조광(趙光) 등과 만나서 교유하고 귀국 후에도 지속적으로 척독교류를 진행하였다. 김영작은 학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나 한중 문화교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김영작이 생면부지의 중국 문사 이백형(李伯衡)과 수방울(帥方蔚)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어 교유를 청하였고 상대방 역시 흔쾌히 답장을 보내면서 평생 편지로만 문학적, 개인적 교류를 진행하였으며, 또한 김영작이 조선의 명문가의 사대부로서 연행사(燕行使)의 부사(副使)라는 높은 신분으로 중국 현지의 문사들과 친밀하게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한중 인사들의 마음이 열려있고 신뢰성과 친숙감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홍대용을 비롯한 많은 선배 문인들의 교유의 전통이 있어 기초를 닦아놓았기에 가능했다. 이런 의미에서 19세기 후반 김영작과 중국 문사들의 교유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그 사실을 보여주는 척독집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도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만으로는 김영작과 중국 문사들이 주고받은(교류의) 내용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자료적 한계를 갖고 있는 점이다. 앞으로 중국 측에 교유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들을 더욱 많이 발굴해낼 것을 기대할 뿐이다.

비황사 사례에 기인한 청주시 PM2.5 고농도 원인 (Causes of High PM2.5 Concentrations in Cheongju Owing to Non-Asian Dust Events)

  • 김다빈;문윤섭
    • 한국지구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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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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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7-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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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연구의 목적은 일기도, 850 hPa 면의 유선, 후방궤적과 기상, 그리고 대기질 모델을 이용하여 비황사기간 동안 청주시 미세먼지 PM2.5의 고농도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다. 청주시 PM2.5 고농도 사례일 동안 시계열과 일기도를 분석한 결과, 중국 또는 주변 지역으로부터 PM2.5의 장거리 수송과 관련된 기상 패턴을 나타내었다. 실제로 PM2.5 시계열에서 자체 기여 농도보다 2-3배 이상 증가한 60-80 ㎍ m-3가 장거리 수송과 관련된 배경농도로 관측되었다. PM2.5의 고농도는 대체로 상층 제트류가 한반도를 통과하면서 지상 고기압과 저기압의 발달 위치에 따라 분포하였다. 결과적으로 청주시 PM2.5 고농도 발생 원인은 중국 북경이나 기타 인근 지역에서 산업, 가정 및 에너지 연소 기원으로 발생한 스모그 형태의 대기 오염물질 덩어리가 장거리 수송의 기압배치에 따라 빠른 풍속 대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이다. PM2.5를 포함한 대기오염물질이 지상 고기압 확장역이나 절리저기압 또는 지상저기압 배치에 따라 벨트나 띠 형태의 오염 덩어리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청주시 분지 지형을 통과하는 M자형 패턴을 나타내거나, 강줄기 형태의 띠들이 바람의 영향을 받아 U자형으로 변하는 점진적 증가형 패턴으로 나타난다.

한국 인삼시의 전개와 의미망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 하응백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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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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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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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한민족은 역사 기록 이전부터 인삼을 복용했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한시(漢詩)는 신라, 고려, 조선 지식인들의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문학 양식으로 발전, 전개되었다. 본 논문은 '인삼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한 한국인의 한시는 어떤 것이 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 인삼(人蔘), 산삼(山蔘), 홍삼(紅蔘), 백삼(白蔘) 등을 키워드로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를 검색해 인삼에 관한 시를 찾아내어 그 의미망을 살펴보았다. 인삼관련 한시를 편의상 '인삼시(人蔘詩)'로 명명(命名)했다. 2021년 11월 현재, 검색을 통해 찾아진 '인삼시'는 삼국시대 2편, 고려시대 2편, 조선시대 23편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삼시의 시초는 6세기경 고구려에서 백성이 노래로 불렀던 「고려인삼찬(高麗人蔘讚)」이란 시다. 고려시대 인삼시는 안축(安軸)의 시로 대표된다. 안축은 인삼 조공의 부작용을 사실적인 관점에서 노래했다. 조선시대의 인삼시는 전기 서거정과 후기 정약용으로 대표된다. 서거정의 인삼시는 인삼의 신비적인 약리작용을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다. 용재 성현의 「인삼(人蔘)」이라는 시도 인삼의 신비한 약효를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다. 다산 정약용의 인삼시는 실학자답게 대단히 실용적이다. 다산은 가장 많은 다섯 편의 인삼시를 남겼다. 다산은 직접 인삼 농사를 시도했고 그 과정을 시로 남겼다. 그 시에서는 인삼 농사 실패와 성공의 스토리를 지켜볼 수 있다. 다산의 인삼 농사는 정조 이후 자연삼의 고갈과 재배삼의 보편화에 따른 전국적 현상이기도 했다. 19세기 초반부터는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로 인삼 농사가 성행했고, 여타 지역에서도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특이한 것은 김진수의 시다. 청나라의 수도 북경 동인당에서 조선의 인삼이 '松嶽山蔘(송악산삼)'이란 상표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시로 표현했다. 매천 황현도 1900년 한시로 된 인삼시를 남겼다. 한국 한시의 전통에서 인삼시의 전개를 의미망으로 파악하여 도식화하면 이렇게 된다. 1) 위민(爲民) 정신의 인삼시 - 고려의 신흥사대부(안축) 2) 낭만적 인삼시 - 조선 초기의 관학파(서거정, 성현 등) 3) 실용적 인삼시 - 조선 후기의 실학파(정약용, 김진수, 황현 등) 한국 인삼시의 전개를 살피면서 그 의미망을 추출해 보았다.

중국 연변 쇼시난차 반암동 광상의 광화작용 및 변질작용: 유체포유물 및 황동위원소 연구 (Alteration and Mineralization in the Xiaoxinancha Porphyry Copper Deposit, Yianbin, China: Fluid Inclusion and Sulfur Isotope Study)

  • Seong-Taek Yun;Chil-Sup So;Bai-Lu Jin;Chul-Ho Heo;Seung-Jun Youm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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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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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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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중국 북경에서 북북동쪽으로 800 km에 위치한 길림싱의 쇼시난차 동-급 광상은 섬록암에 배태되어 있다. 쇼시난차 동-금 광상의 광석은 망상세맥상으로 산출되며, potassic 및 phyllic변질대에 농집되어 있다. 쇼시난차 동-금 광상의 남측 및 북측광체의 품위는 각각 0.8% Cu, 3.64 g/t Au 및 0.63% Cu, 3.80 g/t Au이다. 본 광상의 열수변질 작용은 암주에 집중되어 있고, 암주의 정치와 폭넓게 관련되어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초기 열수변질 작용은 K-변질작용이 지배적이며, 시간이지나면서 프로필라이트화 작용으로 전환되는 양강을 보인다. 본 광상에서는 적철석과 수반된 휘동석이 채광품위의 동을 산출하고 있으며, 황동석, 반동석, 석영, 녹염석, 녹니석 및 방해석의 광물조합이 전형적으로 관찰된다. 상기 광물조합외에 본 연구에서 인지된 기타 광물들에는 황철석, 백철석, 자연금, 에렉트럼, hessite, hedleyite, volynskite, galenobismutite, covellite및 goethite등이 있다. 유체포유물 자료에 의하면, 본 동-금 광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고 차가운 천수의 혼입에 의한 냉각작용의 결과로 형성되었음을 지시하고 있다. 광화시기별로 보면, 광화 2기 초기에는 약 497$^{\circ}C$에서 비등현상이 발생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균질화 온도가 10$0^{\circ}C$정도 낮은 암염을 배태하고 있는 제3형 유체포유물이 포획된다. 그리고, 광화 2기 맥내 제 3형 유체포유물의 염농도는 383$^{\circ}$~459$^{\circ}C$의 균질화 온도에서 54.7~66.9 wt.%의 상당염농노에 해당되며, 1 km이하의 생성심도를 지시하고 있다 광화 3기맥의 제 1형의 함동 유체는 168$^{\circ}$~3$65^{\circ}C$의 균질화온도와 1.1~9.0 wt.% 상당 염농도를 보이며, 해당 유체포유물들은 심하게 균열된 각력암을 배태하고 있는 석영맥내에 포획되어 있다. 이는 비등증거를 강하게 지시하고 있으며 50~80 bar의 정수압에 해당된다. 본 광상의 황화물의 $\delta$$^{34}$ S 값은 후기로 가면서 미약하게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며, 계산된 $\delta$$^{34}$ $S_{H2S}$값은 0.8~3.7$\textperthousand$에 해당한다. 산소분압이 감소했으리라는 광물학적 증거는 없으며, 광화유체의 산소분압은 자철석과의 반응을 통해서 완충되었으리라 사료된다. 이와같은 사실을 종합해 본 결과, 황화물이 $\delta$$^{34}$ $S_{H2S}$값은 쇼시난차 동-금 광상의 함동금 열수유체에 두 가지 정도의 황source가 병합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첫번째 source는 동위원소적으로 가벼운 1~2$\textperthousand$$\delta$$^{34}$ S값을 지닌 광화작용과 관련된 중생대 화강암이다. 이는 본 광상지역의 모암으로서의 섬록암이 plagiogranite를 관입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추론 가능하다. 그리고, 두번째 source는 >4.0$\textperthousand$$\delta$$^{34}S$ 값을 지닌 동위윈소적으로 더욱 무거운 source로서, 산출이 미약하여 지질도상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국부적인 반암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 있다.

북한춤의 해외전파 :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North Korea's Overseas Transfer Dance - Focusing on Japan and China -)

  • 김채원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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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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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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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해외교포사회에 북한춤이 전파되는 과정과 그 발전양상을 살펴보는데 목적을 둔 것으로, 해외에 거주하는 민족집단으로서의 재외동포들의 무용문화, 특히 재중, 재일조선인들의 무용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필요성을 생각해보았다. 문헌연구 중심으로 살펴본 논점의 결과, 재일조선인사회와 중국조선족자치구의 무용문화의 출발점엔 공통적으로 최승희춤이 있었으며, 두 민족집단은 최승희로부터 직접·간접적으로 춤을 배우거나 작품을 전수받았으며, 최승희가 정리한 조선무용기본을 기초훈련으로 하여 무용을 습득했다. 또한 무용전수 및 훈련기관은 재일조선인사회의 경우 북한의 체계와 같이 무용소조를 따로 두고 그곳에서 무용훈련을 통해 재능있는 인재를 배출하여, 전문예술단에서 활동하게 하는 시스템을 유지해 왔다. 이에 반해 중국조선족자치구는 연변대학과 중앙민족대학내에 무용학과가 배치되어 있어 그곳에서 조선춤을 전수 교육함으로써 재능있는 무용인재들을 배출해 왔으며, 한국의 무용교육체계와 유사한 면을 볼 수 있다. 무용기초훈련과 작품의 경향면에서는 재일조선인사회에서는 북한에서 실천하고 있는 무용기초훈련과 기본훈련을 그대로 전수하고 있으며, 작품도 북한춤을 대표하는 명무나 민속무용을 그대로 전수받아 공연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자치구에서는 최승희가 정리한 조선무용의 기초와 작품을 그녀로부터 직접 훈련받거나 전수받았으나, 최승희의 제자들은 그녀가 세운 무용기초를 발전시켜 중국소수민족의 춤기법 등을 접수하면서 중국조선족만의 무용훈련체계를 세워나가면서 한국춤과의 교류도 성사시켜 북한춤보다는 자유롭게 창작성을 가미한 중국조선족 무용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전수된 시기로 보면, 재일조선인사회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1970년대에 들어서는 직접적인 평양방문을 통해 전수와 교육을 받았고, 1990년대에는 북한무용가를 직접 일본으로 초청하여 무용기초훈련을 교육받음으로써 북한춤에서 볼 수 있는 스펙터클한 양상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하겠으나, 중국조선족자치구에서는 1950년대에 평양과 북경에서 최승희로부터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고, 이후에는 북한무용가들로부터의 직접적인 지도보다는 북한예술단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무용영향을 받는 한편, 1990년대 이후부터는 한국춤을 흡수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조선족만의 색다른 무용문화를 창조해 왔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살아가는 지역과 그 지역을 구성하는 민족집단의 구성체계 및 정치체제에 따라 북한춤의 전수과정 및 발전양상도 유사하지만 각각의 아이덴티티를 보장하는 독자적인 특색을 지닌 무용문화를 형성하며 발전시켜 왔음을 알 수 있으며, 재일조선인사회의 무용문화는 조총련의 통제하 강제적 문화접변에 의한 무용문화의 변동을, 중국조선족자치구의 무용문화는 자발적 문화접변에 의한 자유로운 차용과 발전으로의 변동을 살필 수 있었다.

Indonesia, Malaysia Airline's aircraft accidents and the Indonesian, Korean, Chinese Aviation Law and the 1999 Montreal Convention

  • Kim, Doo-Hwan
    • 항공우주정책ㆍ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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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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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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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인도네시아의 에어 아시아 QZ8501 제트여객기가 2014년 12월 28일, 오전 5시 35분에 인도네시아, Surabaya도시에 있는 Juanda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같은 날 8시 반 싱가포르 Changi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에어아시아(에어버스 A320-200) 여객기는 인도네시아 제 2의 도시인 수라바야공항에서 승개 162명을 태우고 싱가포를 향하여 비행도중 동년 12월 28일 Java 바다에 추락하였다. 인도네시아의 에어아시아 제트여객기의 잔해가 Juanda 국제공항에서 약 66 마일 떨어진 위치에서 발견되었으며 이곳에서 12월 28일 지상에 있는 항공교통관제관 (ATC) 과 조정사간에 교신이 끊겼다. 레이더에서 사라진 여객기 (QZ 8501)에는 승객 155명과 승무원 7명이 탔으며 희생된 여객 가운데에는 155명의 인도네시아어인, 3명의 한국인, 싱가포르인, 말레이시아인, 영국인이 각각 1명이었다. 말레이시아여객기 추락사건을 살피어 본다면, 말레이시아 여객기 (MH370)는 현지 시간 2014년 3월 8일 밤 12시41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같은 날 새벽 6시 30분 (현지시간) 중국 베이징수도국제공항에 착륙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여객기 (MH370) 는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베이징수도국제공항을 향하하여 비행도중 (쿠알라룸푸르와 북경 간에 비행거리: 4,414km 2,743마일) 갑자기 살아져 3월 8일 남인도양에 추락하였다. 이 말레이시아여객기는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을 이륙한 후 1시간 만에 지상에 있는 항공교통관제관 (ATC) 과 조정사간에 교신이 두절되었으며 이 여객기에 227명의 승객 (15개국)과 12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상기 227명의 승객가운데에는 중국인 153명, 말레이시아인이 38명, 인도네시아 인이 7명, 호주인이 6명, 인도인이 5명, 프랑스인이 4명, 미국인이3명, 이란인이2명, 캐나다인이2명, 뉴질랜드인이 2명, 우크라이나인이 2명, 러시아인이 1명, 네덜란드인이 1명, 대만인이 1명이었음으로 중국인 승객이 거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본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 여객기 추락사건에 있어 승객 및 승무원들은 전원 사망하였고 가해자(국)인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뿐만 아니라 피해자(국) 인 중국, 한국, 호주인, 인도, 프랑스, 미국,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 등이 모두 1999년의 몬트리올조약의 가맹국이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의 항공사들은 동 조약 제21조에 따라 손해배상금액으로서 113,100 특별인출권 (SDR, 계산단위, 미화 155,000달러)를 유족들에게 무조건 지급하여야만 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 여객기 추락사건에 있어 유족들은 상기 배상금액에 만족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승객사망자에 대한 유족들의 손해배상청구소송 사건에 있어 일부 유족들은 자국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보다는 손해배상금액을 많이 탈수 있는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국제항공운송에 있어 항공여개운송인의 책임이 국제조약에 따라 유한책임 제도를 채택하고 있지만 국내항공운송에 있어서는 항공여개운송인의 책임이 무한책임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현재 미국법원은 국제 및 국내항공운송을 막론하고 항공여객운송인이 Wilful-misconduct (인식이 있는 중대한 과실) 범하였을 때에 무한책임을 인정하여 손해배상금액에 관한 판결내용이 30만 달러 내지 500만 달러를 상회하고 있음으로 유족들은 몬트리올조약 제33조 (재판관할권) 및 미국에서 제조한 여객기의 결함을 이유로 한 "제조물책임법"에 근거하여 본 소송사건에 있어 일부 유족들은 미국이변호사에 소송사건을 의뢰하여 미국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사건을 제기한바 있다. 한편 필자의 의견으로는 1999년의 몬트리올조약 제17조에 규정되어 있는 국제항공운송인의 손해배상책임사유로 bodily injury라고 신체상의 상해만을 규정하고 있어 피해자 보호에 만전을 기할 수가 없음으로 앞으로 ICAO 법률위원회에서 가까운 장래에 몬트리올조약을 개정 할 때에 이 문구를 피해자의 정신적손해도 다 포함될 수 있도록 personal injury 라는 문구로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한국과 중국 소비자의 쇼핑 경험가치 지각과 브랜드자산 및 점포충성도의 관계에 관한 비교 연구: 대형 할인점을 중심으로 (Study on the Relationships Among Perceived Shopping Values, Brand Equity, and Store Loyalty of Korean and Chinese Consumers: A Case of Large Discount Store)

  • 황순호;오종철;윤성준
    • Asia Marketing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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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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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9-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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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가격, 제품의 품질 등 실용적 가치 보다 쇼핑의 즐거움, 라이프스타일의 구현, 매력적인 점포쇼핑환경, 브랜드 애착심 등의 정서적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소비자들은 단순히 상품만을 구매하기보다는 다양한 가치를 얻기 위해 쇼핑을 한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에서 제안되었다(안광호와 이하늘 2011; Mathwick 등 2001). 이렇듯 소매점포 선택과 관련한 소비자행동차원의 쇼핑경험가치와 브랜드자산에 대한 중요성과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관련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며 이와 관련한 비교문화적 연구는 매우 미비한 실정이다(황순호 2010). 본 연구는 한국과 중국의 소비자들의 소매점포 선택과 관련한 소비자행동연구의 필요에 의해 시작되었다. 또한 소비자행동분야에서 소비자 경험이 중시되면서 소매점내 쇼핑경험가치에 초점을 맞추었다. 본 연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한국과 중국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대형할인점 소매점포에서 고객들이 지각하는 쇼핑 경험가치와 브랜드자산과의 관계를 밝혀내고 이를 통해 점포 충성도와의 관계를 찾아내어 소매점의 쇼핑 경험가치와 관련된 시사점을 찾아내기 위한 국가 간 비교 연구를 시도하였다. 본 연구는 이론적 배경으로 쇼핑가치와 유통브랜드 자산, 그리고 점포 충성도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소개하였으며, 가설 검증을 위한 자료 수집을 위하여 한국과 중국의 대형할인점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국과 중국의 대도시 (서울 과 북경) 소비자들을 표본프레임으로 설정하고, 대면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연구의 결과 한중간 소비성향 차이 비교에 대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소비자와 중국 소비자 간의 소비성향차이를 검정한 결과 중국 소비자들은 심미적 소비성향과 상징적 소비성향의 평균값이 한국 소비자들에 비해 높게 나타났으며 한국 소비자들은 쾌락적 소비성향이 중국소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대형할인점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브랜드 자산 지각에 대한 연구결과 중국에 비해 한국 소비자들이 브랜드 인지와 브랜드 이미지를 모두 높게 지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한국과 중국에서 편의점과 할인점 이용 고객들이 지각하는 소매점에서의 쇼핑경험에 대한 탐색적 요인분석결과 각각의 국가에 따라 각기 다른 쇼핑경험가치가 나타났다. 한국의 할인점에서는 소비자이익 가치, 심미성가치, 유희성 가치가 중요한 쇼핑가치로 도출되었다. 또한 중국의 할인점에서는 유희성 가치, 심미성 가치, 소비자이익 가치, 서비스우수 가치가 중요한 쇼핑경험가치로 도출되었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바탕으로 한국과 중국의 대형할인점 소비자들의 쇼핑경험가치과 브랜드자산을 바탕으로 한국의 대형할인점에 있어서 경험가치의 이론적 중요성에 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여 주며 충성도 제고에 있어서 브랜드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이론적 시사점을 제공하여 준다. 이와 더불어 유통의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대형할인점의 국제화에 요구되는 한국과 중국 간의 고객 가치의 차이점에 대한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중요한 실무적 시사점을 제시한다. 즉, 해외유통전략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쇼핑가치에 기반한 현지화 전략의 중요성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하여 주며 국가차원에서의 차별적 유통전략의 개발 필요성을 제안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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