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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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소장 미술품의 4·19 이후 처리경위 -대통령기록관 소장 「이박사(李博士) 재산태장(財産台帳)」(1970)의 검토 (The Management of Artworks in the Collection of Ihwajang House after the April 19 Student Revolution: An Examination of the "Property Ledger of Dr. Rhee" (1970) in the Collection of the Presidential Archives)

  • 윤인수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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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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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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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고에서 소개할 자료는 1970년 청와대 비서실에서 작성된 「고이박사 재산처리」의 첨부문서인 「이박사(李博士) 재산태장(財産台帳)」이다. 이 자료는 1970년 2월 청와대에서 소장하고 있던 집기와 미술품을 이승만 전대통령의 유족에게 인계하면서 작성된 목록으로 총 311점이 기술되어 있다. 이 자료가 작성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60년 4·19이후 이화장에 소장되어 있던 미술품을 포함한 동산은 이후 조사가 진행되었고 한때 국립박물관으로 이관을 검토하였으나 일괄하여 청와대에서 활용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63년 이를 다시 국립박물관으로 이관하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이 중 사유물로 분류된 것은 이화장으로 반환한다. 1970년에는 청와대에서 소장하고 있던 집기·미술품에 대해서도 이화장으로 반환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 「이박사(李博士) 재산태장(財産台帳)」은 당시 작성된 목록이다. 본 대장에는 조선시대부터 당대를 아우르는 작가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나 사진이 첨부되어 있지 않고 기술사항도 소략하여 개개작품을 식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960년 전후 경무대·이화장 소장 미술품의 규모를 일정부분 확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또 이들 미술품의 소유권 귀속을 둘러싼 시비와 그 전개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

제주의 불교미술과 자복미륵 (A study of Jeju Buddhist art and Bok-sin Maitreyas)

  • 이경화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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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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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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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제주 불교미술에 대한 관심은 한국미술에서 조금 소외되어 있는 편이다. 이 글은 주요 제주 불교미술에 대한 서술과 자복미륵에 중점을 두어 분석하였다. 제주의 불교문화는 고려후기에 흥기하였다. 법화사는 원 황실의 원찰이자 고려의 비보사찰이었다. 묘련사에서는 1296년에 고려 조정에서 내린 불전을 받들어 제주도판을 다시 새겼고 이는 제주의 지식문화를 시사한다. 수정사 청석탑 부재에 새겨진 금강역사상은 고려 후기의 회화로 주목된다. 불탑사 오층석탑은 제주 현무암으로 만들어졌고 14세기 전반경의 체화된 제주불교미술이다. 제주의 조선시대 불교미술에서 자복미륵은 민간신앙화된 미륵의 세 유형을 합성하여 독특한 모습이다. 자복미륵은 원정모와 관복을 착용하였으며, 석인상형 미륵처럼 좌우에 놓여 지역을 살피고 지키며, 튀어나온 눈으로 호위하는 역사(力士)인 신장상형 미륵의 특징을 수용하였다. 따라서 자복미륵은 조선시대 세속화된 미륵의 유형을 분석하는 데에 의미 있는 형식이다. 자복미륵을 이해하는 데에 특기할 불상이 1471년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병립상, 1491년경 옥천 대성사 석불, 광주 십신사지 석불 등이다. 원정모형 보개를 지닌 불상은 조선전기에 집중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미륵을 조선으로 끌어들여, 조선을 건설한 신진사대부의 모습에 기인하여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 진다. 공교롭게 옥천 대성사 석불입상의 조성에 제주목사를 역임하는 육한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복미륵은 그러한 불상들의 지역에 따른 변형에도 불구하고 연결고리를 확인하여 주었다.

19세기 한중(韓中) 묵연(墨緣)의 상징, 매감도(梅龕圖) (Maegamdo(梅龕圖), Symbol of Chinese and Korean Scholary Comespondence in the 19th Century)

  • 김현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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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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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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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매화나무는 동아시아 문학과 예술에서 군자의 덕성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즐겨 애용되었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역시 매화와 관련된 주요한 회화 형식이다. 이 논문은 구리매화촌사도(九里梅花村舍圖)류의 구성상 기원과 해당 그림들이 조선에 알려지는 과정을 밝히고 매감도(梅龕圖)가 제작되는 과정과 그 특징을 논의하고자 하였기에 이들 작품이 속한 매화서옥도의 발생부터 검토하였다. 현재 학계에서는 매화서옥도를 임포고사(林逋故事)와 연결시키고 있다. 물론 매화서옥도와 임포고사 간의 관계가 문인의 은거라는 의미로 연결되지만 작품의 구성 방식에 있어서는 임포고사에 기초한 회화류와 직접적인 비교가 힘들다. 방학도(放鶴圖)나 관매도(觀梅圖) 같은 임포 관련 회화에는 대개 한 두 그루의 매화나무와 학이 그려지고 이에 조응하는 문인이 표현된 반면, 매화서옥도는 문인의 은거가 묘사되면서도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가 가옥을 둘러싸고 있는 구성이 주요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매화서옥도는 매화 애호경향의 발생 이후에 그려진 관련 회화처럼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되지 않았다. 조선에서 매화와 관련된 회화는 세한삼우(歲寒三友)내지 사군자 일종의 매화도를 비롯해 탐매도(探梅圖) 같은 맹호연(孟浩然)고사에 기초한 산수화가 고려 이후 전 시기에 걸쳐 골고루 제작되었다. 그러나 매화서옥도만은 19세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중국의 경우는 조선보다 빠른 17세기부터 성행하였다. 이같은 상황은 매화서옥도라는 유형의 회화가 특정 시기의 문화현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려준다. 조선의 19세기에 매화서옥도가 집중적으로 제작된 원인은 바로 김정희가(金正喜家) 및 신위(申緯)와 오숭량(吳嵩梁)을 비롯해 그의 회화 제작 주문을 전담하여 받았던 장심(張深) 간의 교유 때문이다. 이 교류 속에는 두 종류의 매화서옥도류가 제작되어 오고갔다. 청에서는 부춘산(富春山)아래 동강(桐江)가의 구리주(九里洲) 풍광을 담은 구리매화촌사도가 그려졌다. 구리주는 오숭량이 은거하려고 했던 곳으로, 수십만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오숭량의 매벽(梅癖)과 그의 시를 기념하는 '매감공양(梅龕供養)' 행위가 일어났고 그 모습을 담은 매감도가 제작되었는데, 이 매감도는 구리매화촌사도류에 보인 '만매(萬梅)형식'을 적용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신위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은 <매감시불도(梅龕詩佛圖)>이다. 이 그림은 북경에 소개되어 장심이 그린 매감도들의 구성상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매감도류는 19세기에 조희룡 등에 의해 '만매서옥도(萬梅書屋圖)'라고 별칭되는 매화서옥도의 유행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19세기 후반에 성행한 만매서옥도의 발생을 파악하기 위한 선행단계에 해당된다.

영양 현리와 화천리 삼층석탑 연구 - 탑부조상(塔浮彫像)의 도상 분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f the Three-story Stone Pagodas in Hyeon-ri and Hwacheon-ri, Yeongyang - Focusing on Analysis of the Pagoda Reliefs -)

  • 한재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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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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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0-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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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경상북도 영양의 <화천리 삼층석탑>(보물 제609호)과 <현리 삼층석탑>(보물 제610호)은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 양식을 계승한 석탑이다. 두 탑은 이중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양식이나 기단부 결구(結構) 방식 등을 고려하면 늦어도 9세기 중·후반 무렵에는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석탑의 탑신부와 기단부의 탑부조상으로도 확인된다. 사천왕상과 십이지상 부조는 8세기 후반의 <원원사지 삼층석탑>에서 처음으로 조합되어 나타났고, 팔부중상도 9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유행한 탑부조 신중상이다. 그런데 영양석탑 두 기는 사천왕상(탑신)-팔부중상(상층기단)-십이지상(하층기단)이 조합되는 특징적인 장엄을 갖추었고, 또한 석탑에 사용된 석재도 일반적인 화강암이 아닌 영양 지역 지질층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사암 계통의 퇴적암이다. 이렇게 세 종류 도상의 신조합과 팔부중상이 좌상에서 입상으로 변화한 점 등은 지역 자생적인 재료로 석탑을 구축한 사실과 함께 영양의 불교 신앙과 문화적 위상을 드높이려는 의도로 읽힌다. 영양석탑의 팔부중상은 기존 팔부중 석탑의 두 가지 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일부 도상을 새로운 방위로 재배치하였다. 동면에는 아수라-건달바, 남면에는 용-마후라가, 서면은 천-가루라, 북면에 긴나라-야차로 구성된 이 형식은 영양 지역만의 독특한 '팔부중 제3형식 배치'로 분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팔부중상 배치 형태와 자세의 변화는 탑부조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건달바상과 야차상이 각각 동면과 북면에 조각된 것은 이들이 지국천왕(동)과 다문천왕(북)의 권속이기 때문이며, 용상과 마후라가상이 남면에 조각된 것은 반변천 북변이라는 두 탑이 처한 지리적 위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통일신라 전형 양식 석탑의 '구조'와 새로운 형식의 탑부조상 '장엄'을 함께 갖춘 <현리 삼층석탑>과 <화천리 삼층석탑>은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는 한편 지역적 특성도 뚜렷한 9세기의 중요한 방계(傍系) 석탑으로 평가된다.

공공재를 활용한 도시유산의 경관 보전 및 관리개선방안 - 서울시 사적을 중심으로 - (Measures to Implements the Landscape Conservation and Management Urban Heritage Utilizing Public Goods: Focused on the Historic Sites of Seoul)

  • 문영숙;정기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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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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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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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급변하는 도시 환경에 노출된 도시유산의 경관 보전 및 관리개선을 위한 방안으로 공공재를 활용한 도시유산의 확대와 도시유산과 도시공간과의 연계방안을 제시하고자 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연구결과, 첫째, 도시공간에서 유산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고시도면인 지형도면과 현상변경허용기준,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문화재보존 관리지도를 이용하여 1:1,000지도에 도시유산을 작성하고 주변에 위치한 모든 공공시설을 파악하여 기본도를 작성하였다. 둘째, 도시유산의 현황도 작성을 위해 도시유산과 유산 주변의 현황 및 변화상을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의 사적분과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을 분석하여 도시유산 주변의 개발행위를 파악하였으며, 도시유산 주변의 보전 가능 지역 및 도시 내 도시유산의 잠재력을 상살 시킬 수 있는 지역을 찾아 활용할 수 있도록 도시유산 주변의 토지이용을 살펴보았다. 또한 현황도 작성 시 도시유산 주변지역의 입지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단면도를 작성하였으며, 도시유산 주변의 현장 기록화를 위해 유산 및 공공시설의 주요 지점에서 사진촬영을 하였다. 셋째, 도시유산과 유산 주변의 공공시설과의 거리, 위치, 기능, 분포 등의 관계에 의해 도시유산에 미치는 영향 및 잠재적 자원으로서의 기능을 시각적 특징과 동선에 의해 분석하여 도시유산의 전면경관과 유산을 포함한 역사문화경관의 보호방안을 도출하였으며, 또한 공공재의 도시공간에서의 역할 및 도시유산 주변의 활성화 방안을 도출하였다. 넷째, 도시유산 주변의 공공시설 중 도시유산에 직접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주는 공공재를 선정하고, 공공재가 도시유산에 미치는 시각적, 면적, 선적 요소들을 통해 공공재의 역할을 파악하였으며, 이를 통해 도시유산의 경관 및 관리 개선 방안을 제시하였다.

고려시대 화물표 목간의 특징에 대한 고찰 - 중국 송·원대(宋·元代) 목간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Goryeo dynasty cargo tag mokkans In comparison with mokkans of the Song and Yuan dynasty)

  • 이연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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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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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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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2007년부터 2011년에 걸쳐 충남 태안에서는 태안선과 마도 1호, 마도 2호, 마도 3호 등 4척의 고려시대 선박이 발견되었고 동시기 목간 175건이 함께 출수되었다. 태안의 목간은 고려시대 목간의 유일한 발견 사례이며, 서사 재료로서 종이가 목간을 대체한 시점에서 화물표[하찰목간]라는 특수한 용도로만 쓰이던 목간의 사용 실태를 보여준다. 태안 목간에는 운송과 관련한 연대, 수취인, 발송지, 화물 종류, 수량 및 단위, 발송 또는 선적 책임자 등의 정보가 적혀 있어 화물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으며, 목간 내용의 기재 방식, 형태, 재료와 제작 방법 등의 고찰을 통해 고려 사람들이 선호했던 목간의 형태와 특징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태안의 목간은 기재 양식상 정해진 틀이 없이 자율적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화물에 부착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형태인 상단에 홈이 있는 목간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제작 과정에서 작업의 효율성 제고, 제작 공정의 간소화를 우선시하였다. 태안의 목간은 같은 시기, 동일한 용도의 신안선 및 중국 복건성(福建省) 천주만(泉州灣) 해선(海船)의 목간과 비교해볼 수 있다. 기재 내용과 양식 면에서 중국의 목간은 화주(貨主)를 중심으로 표기하고, 태안의 목간은 수취인과 함께 다른 정보도 비교적 자세히 기재하였다. 형태 면에서 중국의 목간은 두께 1cm 이하이고 하단부를 뾰족하게 다듬었으나, 태안의 목간은 두께와 하단부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제작 방법과 재료 선택에서도 중국과 한국의 목간은 차이가 있다. 이는 국내 화물 운송용이었던 고려 선박과 국제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중국 선박의 운항 거리, 화물의 성격, 운송 관리 체계, 화물 포장 방식, 운송 주체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과의 비교는 대상 연구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단편적이라는 한계가 있으나 향후 고려 목간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기초 자료가 되기를 기대한다.

15세기 초반 경상도 상주목 일대 화기(花器)의 감조(監造) 배경과 견양(見樣)으로서의 의미 (The Influence and Implications of Flower Vessels (花器) Supervised Process of Produc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the Early 15th Century)

  • 오영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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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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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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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문은 1411년 감조된 화기의 실체에 주목하여 화기가 감조된 배경과 견양으로서의 의미에 대한 규명을 시도한 글이다. 이를 위해 상림원에 진공된 화기의 용도와 성격 규명을 필두로 "세종실록" "지리지"와 "경상도지리지", 상주 일대 자기 가마터의 실물자료에 주목하여 화기의 종류와 제작 양상을 유추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화기의 제작 시점을 추정하고, 화기의 제작에 관여한 조선 왕실의 상황과 의중을 밝히며 이후 화기 제작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15세기 초반 조선 왕실은 관제를 개편하고 예제를 정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왕실과 관련한 건축물이나 구조물 축조, 의례 절차 및 준비에 별도 감독관을 두어 관여하였고, 제기와 무기 제작 시 별도의 감조를 명하였다. 1411년 화기가 감조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자, 왕조가 지향하는 이념에 적합한 대상으로 화기가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화기의 제작은 자기소가 군집하였던 상주목에서 1411년의 감조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어 상림원에 진공될 화기로 분청사기상감화분 및 청자화분받침이 제작되었다. 15세기 중반 가마를 비롯해 관요에서는 상주목 일대에서 제작된 화기와 매우 흡사한 예가 제작되었다. 즉 1411년 감조된 화기가 이후 견양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조선 왕실은 명 황실로부터 전해 받은 기물을 그대로 견양으로 삼거나, 별도 제작한 그림이나 실물을 검토하여 견양을 정하였고, 이를 전국 각지에 보내어 제작의 범으로 삼도록 하였다. 일찍이 견양은 자기 제기 제작에 영향을 미쳤고, 매년 사옹원 관원이 어용 자기를 감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견양'이 자기의 명문으로 별도 표기되기도 하였다. 당시 이러한 여건 하에서 1411년 내수에 의해 감조된 화기 또한 정밀한 제작 규범을 제시한 화기의 견양으로 평가된다.

정병 받침그릇(淨甁 承盤) 살핌 -고려불화(佛畵)-수월관음그림(水月觀音圖)으로 - (A Study on the "Holing-Bowl(받침그릇, 承盤) for the Jung-Byoung(정병, 淨甁)" or The Sacred Water-pot)

  • 강순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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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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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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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Among many different types of wares, we have amazing Sacred Water-pot(따르개, 注子) from Goryo-period(고리, 高麗, 918-1392). The stylistic peculiarity of Jung-Byoung(정병, 淨甁) is described in "Goryo-Dhogyoung, 고리도경, 高麗圖經", the classical design canon. It is said, "A sharpened mouth with narrow and prolonged neck is attached upon the broad mouth with thicker and even longer neck of the pot whose body intimates to the shape of melon." One could find this Jung-Byoung similar to the Indian drinking water jar, Kundika, which has been. even today, an everyday article in houses as well as in temples. In the early Buddhist cult, the object had been adopted as personal belonging of the Bodhisattvas(보살, 菩薩), especially of the Bodhisattva Avalokitesvara(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In short, the purifying character of water is met by the sacred ware to deliver the refreshing Sweet-Water(Holy-Water, 깨맑물, 단물, 단이슬물, 정수, 감로, 감로수, 성수, 淨水, 甘露, 甘露水, 聖水): For the holy purpose of fulfilling the thirst of people, of symbolozing the virtuous dharma. Thus, Ggamslkh-Byoung(깨맑병,淨水), the literal Korean name, denotes purifying and clarifying and clarifying water-pot to us. Among many other Asian countries, India, China, Korea, and Japan have a profound cult of the sacred water-pot(Ggamalkh-Byoung, Jung-Byoung, 깨맑병, 정병, 정수병, 감로병, 감로수병, 淨甁, 淨水甁, 甘露甁, 甘露水甁). Therefore, this charming holy object drew much attention not only from master artisans to shape and deliver them to people but also from painters and sculptors for their endowment of the sacred images dedicated to Buddha(부처,佛,佛陀). In China, the sacred water pot emerged in the period of Tang(당, 唐, 618~907)-Period and underwent much sophistication later on, I. e., from earthenware, ceramic-porcelain, bronze, and silver. However, the following represents a challenge to the well-known Goryo-Thangka(고리불화, 高麗佛畵) Painting of Bodhisattva Avalokitesvara to our speculation on the Sacred Water-pot(정병, 淨甁). The image suggests, when examined closely, that the Sacred Water-pot has been accompanied by, or placed in, a transparent glasswere(유리그릇) or crystalbowl(수정그릇)! We have no other physical proof of the existence of such a Holding-Bowl(받침그릇, 承盤), except for in this particular painting. This Holding-Bowl would have not been a mere elaboration on the practicality of controling the drips from the mouth of the pot. As in the chapter on Tang-ho(탕호, 湯壺), or thermal bowl, in the "Goryo-Dhogyoung" it advises readers that this style of bowl is to be filled with hot water, and thus function as a preserver of heat in the water inside the pot. As an offering to the Buddha, the Sacred Water-pot could have been used for serving him hot tea. Hence the sacred bottle is to contain the refreshing water, the water transcends to nectar, and the nectar is prepared as a nectar tea to offer the Buddha. For both the Holding-Bowl of Ggamalkh-Byoung(Jung-Byoung)and the Celestial-Robe(날개옷, 天衣) of the Bodhisattva Avalokitesvara, whose specified character is the Water-Moon(수월, 水月) in this particular Thangka(불화, 佛畵) painting, the transparency is essential. This is to refer to the purity and the lucid clarity of Bodhisattva Avalokitesvara and at a deeper level, to refer to the world of Buddhas-the Tushita(Paradise, Heaven, Eden, 극락, 불세계, 極樂, 佛世界). Howerver, without the discovery of an actual Holding-Bowl, accompanied by a Sacred Water-pot, such speculation will necessarily remain hypothetical. Nevertheless, there is an abundance of evidence of our ancient craftsmanship in jade and ctystal, dating back to the Bronze Age(1000~2B.C.) in Korea. By the time of the Three Kingdom-Period(삼국시대, 三國時代, 57B.C.~935A.D.), and especially the Silla(신라, 新羅, 57B.C.~935A.D.)-Empire, the jade and crystal ornamentation had become very intricate indeed. By the Goryo-Period(918~1392) and Chosun-Period(조선, 朝鮮,1392~1910),crystal-ware and jade art were popular in houses and Buddhist temples, whose master artsanship was heightened in the numerous Sarira-Cases(사리그릇, 舍利器), containing relics and placed inside Stupas(탑, 투, 搭)! Therefore, discovering a tiny part of the crystal or jade Holding-Bowl for the Sacred Water-pot and casting full light on this subject, would not be totally impossible. Lastly the present article shares the tiny hope for a sudden emergence of such a Holding-Bowl.

조선시대 능참봉직(陵參奉職)의 조경사적 의의 (A Study on the Landscape Architecture Historical Significance of Reung Chambong in the Joseon Dynasty)

  • 신현실;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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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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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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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의 관리를 담당한 관직인 능참봉직을 소재로 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각종 의궤(儀軌), 능지(陵誌), "일성록", 능참봉 일기 등 관련 고문헌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능참봉의 조경가적 역할을 규명하는 기초연구로 수행되었으며, 요약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능참봉(陵參奉)은 종9품 참봉 2인으로 구성되고 능참봉직은 생원 진사 혹은 유학중에 삼망(三望)을 거쳐 임명이 되는 음직(蔭職)으로 임용기준은 '연소하지 않고 경륜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으며, 왕릉수호의 상징성으로 인해 관직진출의 수단이 되었다. 둘째, 능참봉의 업무체계는 품계서열을 따랐으나 지리상의 여건 등으로 봉심과 능의 공사감독 등 실제보다 많은 권한과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능수호군 관리 및 능지작성 등 조선왕릉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셋째, 능참봉의 조경관련 직무 중 봉심은 능상의 석물이나 사초, 정자각 등을 정기적으로 예찰하여 예조에 보고하는 것이며,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봉심의 체계와 방법 등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넷째, 능참봉의 조경관련 직무 중 수목관리 및 능역공사 감독은 조경식물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관리능력과 건축 토목을 망라한 공간에 대한 다양한 식견이 요구되는 직무로 조선왕릉의 현장관리 실무자로써 지방관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유동성 확보와 산림부산물 처리에서 암묵적 권한과 관리 책임이 부여되었으며, 오늘날 조경가의 직무성향과 관련성이 깊다. 능참봉의 조선시대 조경관련 직무에 대해 좀 더 폭넓은 문헌 발굴 및 고증으로 조선시대 능참봉의 조선왕릉 조경관리자로서의 역할과 능참봉과 조선왕릉의 조경사적 가치 규명을 위한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

『무예도보통지』 무예 인류무형유산 등재 과제 (A Task for Listing Martial arts of 『Muyedobotongji』 on the UNESCO Representative List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 곽낙현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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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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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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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연구의 목적은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위한 과제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예도보통지"는 1790년(정조 14)에 편찬되었다. "무예도보통지"의 24가지 무예는 기본적으로 찌르는 방식의 자법(刺法), 찍어 베는 방식의 감법(坎法), 치는 방식의 격법(擊法)의 세 가지 방식으로 구분하였다. 둘째, "무예도보통지"의 무예가 무예사적 가치로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18세기 한국 중국 일본의 동양 삼국 무예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새로운 안목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종합한 것이다. "무예도보통지"가 세계기록유산으로 갖는 가치는 장교와 군졸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실용성을 강조하면서 만든 무예 서적이라는 점이다. 셋째,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절차는 준비 및 제출, 심사, 결정의 세 단계로 진행되며, 소요되는 기간은 2년이다. 특히 심사보조기구는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 산하 기구로서 24개 위원국 가운데 각 지역별로 1개국씩 전체 6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넷째,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인류무형유산 등재 과제는 다음과 같다. (1) "무예도보통지" 소장본에 대한 전수조사가 필요하다. (2)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시 도무형문화재 또는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필요하다. (3) "무예도보통지" 무예 기법 및 동작에 대한 실기 표준화 작업이 필요하다. (4) "무예도보통지" 무예 복장 및 무기에 대한 고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5) "무예도보통지" 무예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야 한다. (6) 문화재청 세계유산팀, 외교부 등 관련 부처와 긴밀한 협조 체제를 이루어야 한다. (7) 유네스코 등재기준과 충족을 위한 국내외의 "무예도보통지" 무예 관련 자료 수집을 포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8) 인류무형유산 등재유형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