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묵인응답

검색결과 4건 처리시간 0.018초

응답자의 성격특성과 응답스타일 (Personality Traits and Response Styles)

  • 김석호;신인철;정재기
    • 한국조사연구학회지:조사연구
    • /
    • 제12권2호
    • /
    • pp.51-76
    • /
    • 2011
  • 본 연구는 조사항목에 체계적으로 응답하는 경향인 응답스타일과 성격특성과의 관련을 탐색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내용에 관계없이 설문문항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는 경향인 묵인응답스타일(ARS)와 가장 극단의 응답범주를 지지하는 경향인 극단응답스타일(ERS)이 외향성, 친화성, 성실성, 정서적 안정성, 경험에 대한 개방성 등 성격 5요인 모형에 의해 어느 정도 설명되는지를 검증한다. 2009년 일반종합사회조사의 자료를 이용하여, 응답자의 특성과 면접상황의 효과를 통제한 상태에서, 성격특성변수가 ERS와 ARS 성향에 미치는 효과를 분석하였다. 분석의 결과, ERS의 발생은 응답자의 외향성, 개방성, 친화성, 성실성과 정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ARS는 성격특성과의 관련이 발견되지 않았다. 분석결과의 함의와 함께 응답스타일에 따른 편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과 그 한계점이 논의되었다.

  • PDF

R&E 수행과정에서 과학영재고 학생의 연구윤리 준수 실태 조사 (The Survey of Gifted Students' Scientific Integrity and Perception of Scientific Misconduct in R&E Program)

  • 이지원;김중복
    • 영재교육연구
    • /
    • 제25권4호
    • /
    • pp.565-580
    • /
    • 2015
  • 이 연구에서는 R&E 등을 통해 연구 수행과정을 경험하고 있는 영재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과학 영재 267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연구윤리를 잘 준수하고 있는지, 또 연구윤리를 잘 알고 있는지의 여부와 연구윤리를 학습하고 싶은지, 만약 그렇다면 어떤 내용을 배우고 싶은지를 설문을 통하여 알아보았다. 그 결과, 과학영재는 위조, 변조, 표절, 부당한 논문저자표시, 연구부정행위의 묵인 항목에 대하여 45.31%가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였으나, 과학자의 연구윤리에 대해서는 90% 내외의 학생이 제시된 항목에 대해 자기표절을 제외하고 모두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응답하였다. 즉 이들은 연구부정행위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반 가까운 학생이 연구윤리를 위반한 경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연구윤리를 배우고 싶다고 응답한 학생은 28.83%뿐이었고, 이들은 좀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준수방법을 알고 싶다고 응답하였다. 따라서 과학영재들이 책임감 있는 연구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하려면, 영재교육연구자들은 이러한 과학영재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연구윤리교육방안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임상실습 중 간호대학생의 폭력 경험과 대처 행동 (Exposure to Violence and Coping Behavior during the Clinical Practice of Nursing Students)

  • 오진환;김옥선;이기령
    •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 /
    • 제16권8호
    • /
    • pp.5325-5335
    • /
    • 2015
  • 본 연구는 임상실습 중 간호대학생이 경험하는 폭력과 폭력 경험 후 대처 행동을 파악하고자 시행된 서술적 조사연구이다. 2014년 11월 10일부터 12월 10일까지 250명의 간호대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이용하여 자료수집 하였다. 설문지에 응답한 231명의 자료를 서술적 분석, t-test, one-way ANOVA를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연구결과, 대상자의 98.7%가 임상실습 중 폭력 경험을 했고, 폭력 발생 장소로 정신과 병동, 폭력 가해자로 환자가 가장 많았다. 폭력의 유형 중 언어폭력이 가장 많았고(97.4%), 다음으로 신체적 위협(76.2%)이었다. 폭력 경험 후 대처행동으로 '반응하지 않고 임상실습을 지속함'이 87.8%로 가장 높았고, '대처 없이 묵인하고 가해자로부터 피함'이 83.2%로 그 다음 순으로 높았다. 본 연구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임상실습 동안 폭력을 경험하였다. 이에 임상실습 중 발생할 수 있는 폭력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육기관과 실습기관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며, 또한 폭력 예방과 대처 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강구되어야 한다.

과시된 효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연구 (Showing Filial Piety: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재호
    • 미술자료
    • /
    • 제96권
    • /
    • pp.123-154
    • /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덕수5520)는 그림과 발문(跋文) 열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으로, 작가는 조중묵(趙重黙)(1820~1894 이후), 주문자는 박경빈(朴景彬)(생몰년 미상), 발문을 쓴 사람은 홍선주(洪善疇)(생몰년 미상), 제작연대는 1868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낱장으로 보관되어 온 <인왕선영도>를 병풍으로 복원하고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최초로 공개하였다. <인왕선영도>에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홍은동을 아우르는 인왕산 서쪽 실경이 묘사되어있고 원경에는 북한산 연봉이 그려져 있다. 화면 속에는 인왕산(仁旺山), 추모현(追慕峴), 홍재원(弘濟院), 삼각산(三角山), 대남문(大南門), 미륵당(彌勒堂)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있다. 이 지역을 나타낸 조선후기 지도와 비교해보면 지형 표현과 지명 표기에 유사성이 있다. 조중묵은 넓은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지도의 지리정보를 숙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경의 현장을 답사한 결과, 조중묵은 각각의 경물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였고 수평의 화면에 나열식으로 조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조중묵은 남종화풍 정형산수에 뛰어났던 화가로, <인왕선영도>의 세부 표현에서 사왕파(四王派) 화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도화서 화원들이 화보를 활용하여 가옥을 그리거나 토파에 호초점을 찍고 당분법(撞粉法)으로 꽃을 나타내는 등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한 경향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인왕선영도>에는 바위를 짙은 먹으로 쓸어내리듯 붓질한 기법, 산세의 괴량감, 가로로 붓을 대어 단순하게 그린 소나무 등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의 개성적 양식도 가미되어있다. 조중묵은 인왕산 실경산수로 유명한 정선의 양식과 권위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유기적 공간감과 현장의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연폭 화면이라는 매체도 조중묵의 개인 양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인왕선영도>는 발문의 텍스트와 화면의 이미지가 잘 조응하는 작품이다. 발문의 내용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①무덤의 주인공과 이장 경위, ②무덤의 입지와 풍수, ③묘제(墓祭)와 신이(神異)한 응답, ④무덤 관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 ⑤병풍 제작의 동기인 박경빈의 효성과 수묘(守墓), ⑥발문을 쓴 의의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용이한 ②의 내용은 화면에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인왕선영도> 제작의 직접적 동기인 ⑤를 보면 주문자 박경빈이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다."라 하여 <인왕선영도>에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경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듯 나열한 구도는 회화미는 떨어지더라도 무덤의 풍수지리를 전달하는 데는 더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산도(山圖)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목판본 선영도로서, 족보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기록에서는 족자 선영도를 첨배(瞻拜)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선영도 첨배는 현실적으로 수묘(守墓)가 곤란할 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의례로 인정되었다. 한효원(韓效元)(1468~1534), 조실구(曺實久)(1591~1658) 등이 선영도를 제작한 후 당대의 명사에게 서문을 요청하고 효심을 과시한 사례는 <인왕선영도>의 선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개인 소장),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선영도는 아니지만 계회도 형식의 족자이고 풍수를 도해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선영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인왕선영도>는 첨배라는 측면에서 초상화와도 의미가 비슷했다. 발문의 "부친의 기침소리를 직접 접하는 듯하고, 그 태도와 몸가짐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는 표현과 부친의 초상에 조석 문안을 올린 서효숙 고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경빈이 일반적인 선영도 형식이었던 족자나 목판화 대신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를 주문한 의도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사례(四禮) 의식에 다수의 병풍을 배설(排設)하였는데, 의례의 성격에 따라 그림의 주제를 반드시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인왕선영도> 또한 여러 의례에 두루 배설하거나 장식 병풍으로도 사용하기 위해서 선영 그림이라는 주제를 실경산수화 이미지 아래에 가렸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왕선영도>의 핵심 소재인 무덤 봉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것은 사산금표(四山禁標)의 금제 위반을 숨기기 위함일 가능성이 있다. <인왕선영도>에 묘사된 인왕산 서쪽 산기슭은 분묘 조성 금지구역이었다. 1832년에 금표 내에 몰래 쓴 묘를 적발하여 즉시 파내고 관련자를 엄히 처벌한 사례로 볼 때, 19세기 중엽까지도 사산금표 내의 분묘 금제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장지를 얻기 위해 쏟은 정성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장지조성에 마을사람들의 협조와 묵인이 필요했던 것은 금표 구역 내에 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인왕선영도>와 비교 가능한 동시대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로 이한철(李漢喆)(1808~1880)이 그린 <석파정도(石坡亭圖)>(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를 들 수 있다. <석파정도> 제작시기를 전후한 1861년에 이한철과 조중묵은 철종어진도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조중묵이 이한철의 <석파정도> 제작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조중묵이 몇 년 후 <인왕선영도>를 주문받았을 때 <석파정도>의 인상적인 연폭 실경산수를 본 경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작품의 화풍 차이는 주문자의 취향과 제작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는 실경산수화와 선영도의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지식수준과 주문자와의 친분, 관람에 들이는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과 자호, 본관이 일체 작성되지 않은 채 '박공(朴公)'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주문자인 박경빈의 인적 사항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다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가계를 미루어 볼 때 재력이 있음에도 지배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발문을 쓴 홍선주 또한 사대부로 보기 어려우며, 『승정원일기』 기록에 나타나는 경아전 서리일 가능성이 있다. 박경빈은 상류 계층에 진입하고 싶은 욕망으로 보수적인 가치인 효(孝)를 강조하여 부친의 무덤을 명당으로 이전하고 <인왕선영도>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금제위반 적발에 대한 우려, 병풍의 다목적성 등의 이유로 본래의 제작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모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병풍이 제작된 지 47년 만에 각 폭이 분리된 채 미술상을 통해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이 된 상황을 보더라도, 박경빈이 <인왕선영도>에서 꿈꾸었던 명당 발복과 가문의 신분상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