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능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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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D 기반 『화성능행도병 華城陵幸圖屛』 문화유산 MR 콘텐츠 시스템 개발 (Development of MR Contents System for Cultural Heritage based on HMD : Hwaseong Neunghaengdobyeong)

  • 유은지;권도형;유정민
    • 한국정보처리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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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정보처리학회 2020년도 추계학술발표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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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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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두 가지의 HMD를 기반으로 화성능행도병에 관한 문화유산 MR 콘텐츠 시스템을 제안한다. 화성능행도병 중에서 서장대야조도를 대상으로 지류와 실물모형 위에서 3D 모델을 증강하여, 역사적 정보제공과 훈련과정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통해 박물관·미술관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조선 시대 기록화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역사적 기록에 대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색다른 시각적 효과와 흥미 요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 (A Study of sacrificial rites related Royal Mausoleums in early Joseon Dynasty)

  • 한형주
    • 역사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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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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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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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가 풍수·지리학과 미술사 등에 편중된 현상에서 벗어나 국가의례의 관점에서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제도적 마련과 의식 정비, 종묘와의 차별성, 그리고 능행의 정치사적 의미 등을 천착함으로써 왕릉의 역사적 위치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왕릉 제사는 태조 즉위년 추존 4대왕(비)과 신의왕후의 제릉이 조성된 후 능직(陵直)과 수호군(守護軍)이 설정되고, 사맹월(四孟月)·삭망(朔望)·속절(俗節) 등의 제사가 정해지면서 시작되었다. 능제는 태종 초반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에 친제가 거행되면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특히 동왕 8년 태조의 사망으로 건원릉(健元陵)이 조성되어 흉례가 시행되고, 2년 후 3년상이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제사의 시행 및 의식의 정비가 모색되었다. 왕릉 주변의 금지(禁止)설정, 능제의 재정 확보, 건원릉친제의(健元陵親祭儀)와 섭행의(攝行儀)의 제정 등이 그 실례이다. 이후 세종즉위년에 정종, 동왕 2년에 태종비 원경왕후, 동왕 4년 태종이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후릉과 헌릉이 각각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흉례와 관련된 제반 의식들이 재검토되었고, 제사와 관련된 여러 세부 사항들과 배릉의(拜陵儀)가 수정·보완되었다. 그 내용은 이후 부분적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의 길례조와 흉례조에 수록되었다. 왕릉에서 시행된 제사는 사맹월의 시제와 삭망, 속절(정조,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납일) 등 다양한데, 당시 종묘 및 원묘인 문소전에서 시행된 것과 동일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고려 이래의 전통으로 사시제(四時祭)가 능제에서 배제된 중국사의 경험과 달랐다. 그런데 조선의 능제는 국가 사전(祀典)에 대사(大祀)로 편입된 고려시대와 달리 속제(俗祭)라는 별도의 체계속에 포함시킴으로써 국가의 대사인 종묘와 구분되었다. 아울러 능제를 흉례의 체계에 부가(附加)시킨 중국과 달리 왕릉 관련 의식을 흉례와 길례로 각각 구분하여 편입시키는 독자성을 보였다. 왕릉의 제사 시기가 종묘 및 원묘와 동일하다는 사실은 왕의 친행이 종묘보다는 왕릉에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태조~성종의 102년간 종묘의 국왕친제가 41회에 불과한 반면 왕릉에는 170회에 걸쳐 이루어졌고, 문소전에서는 85년간 99회의 친제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원묘인 문소전의 폐지 및 왕릉에서의 사시제 폐지를 주장하는 여론은 조선전기 내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결국 임진 왜란 과정에서 원묘인 문소전은 파괴되었지만 복구되지 못하였고, 왕릉의 사시제는 인조대에 이르러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왕릉제사는 속절제(납일 제외)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조선시대 제사에 왕이 참여한 사례는 예상외로 많지 않다. 대표적인 제사대상인 종묘의 경우에도 대략 2~3년에 한번씩 왕의 친행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반면에 왕릉의 친제는 매년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누대의 선왕이 모여 있는 혼전(종묘)보다는 육신이 안치된 개별 능에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끼고, 능행중에 원찰에의 행행이 쉬웠으며, 능제가 속제이기 때문에 제사과정이 간략하다는 이유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장엄한 의장을 갖추어 진행된 능행은 일반 민에게 우리의 '왕'을 알리는 동시에 그들의 생활상을 왕이 직접 관찰하여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던 중요한 정치적 행위였다. 아울러 초기의 국왕들은 능행의 과정에서 강무(講武), 대열(大閱), 진법(陣法) 등 군사훈련을 상시적으로 시행함으로써 그들의 군사통수권을 과시하는 정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조선시대 파주목 관아의 위치 추정과 공간구성 연구 (A Study on the Location Estimation and Spatial Composition of Paju Mok Government Office of Joseon Dynasty)

  • 백종철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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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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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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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파주목은 경기 서부의 행정 및 교통의 중심지로서 조선시대 지방행정처로, 왕의 능행 시 행궁의 역할을 하던 장소이다. 조선시대 한양과 의주를 잇는 의주로에 인접한 파주목 관아는 경기 북부 지역의 중요 장소로서 왕이 황해북도 지역에 위치한 제릉과 후릉, 파주 영릉과 장릉을 능행할 때 머물던 장소이다. 파주목 관아는 1900년대 이전까지 유지되어 오다 일제강점기 이후 관아 건물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며 행궁으로서의 기능이 훼손된 것으로 보이며, 한국 전쟁에 의해 대부분의 건축물이 사라지며 현재는 파주목 관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소실된 파주목 관아의 복원을 위해서는 파주목 관아가 위치한 위치와 주요 건축물 등 관아 공간구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파주목 관아와 관련된 고문헌과 고서화의 조사 및 분석, 일제강점기 시절 지형도와 지적도, 토지조사부 등을 분석하여 파주목 관아의 위치를 추정하고 공간구성, 규모 등을 밝혀낸다면 파주목 관아 복원 시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릉 조성 및 관리에 따른 식재유형 고찰 (A Study on the Type of Planting according to the Establishment and Management of the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김은경;배준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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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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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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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왕릉의 조성 및 관리에 따른 식재 유형에 대해 문헌 기록을 분석하고, 향후 조선왕릉 수목관리를 위한 사적(史的) 자료로 활용하는데 있다. 조선왕릉 42기 중 40기를 대상으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한 편년체 사료와 "능지(陵誌)" 중심으로 식재와 관련한 키워드를 분석하였다. 능역의 수목식재는 정식(定植)과 보식(補植)으로 나눌 수 있다. 정식(定植)은 능침 조성 당시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진행한 식재를 말한다. 능역 조성 후 이루어지는 모든 식재는 추가 식재 즉 보식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릉의 조성 및 관리에 따른 식재 유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능역 조성 과정 중 조경을 위한 1차 식재가 이루어졌다. 둘째, 산릉 조성 이후 모든 식재는 추가식재로 능행 중 왕명에 의한 식재가 실행되었다. 셋째, 조선후기 산림황폐화로 인하여 능침의 수목 희소처에 추가식재가 이루어졌다. 넷째, 자연재해로 인한 수목 훼손 후 보토공사와 함께 수목식재가 행해졌다. 다섯째, 정조 22년 모든 왕실가족의 무덤에 정기적인 식재가 법으로 정해졌다. 본 연구는 조선왕릉 능제복원을 위한 역사경관림 관리의 사적고증으로서 향후 조선왕릉에 식재된 개별 수종과 능역 내 공간별 식재에 대한 문헌 고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 궁중 행사도의 의궤(儀軌) 도식(圖式)과 도병(圖屛)에서 찾아 본 전통 꽃꽂이 양식 (Traditional Style of Flower Arrangement According to Diagram of Royal Protocol and Folding Screen in the Late Joseon Dynasty)

  • 한상숙;이부영
    • 한국화예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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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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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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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시대 의궤(儀軌) 도식(圖式)과 도병(圖屛)등에서 꽃꽂이의 양식을 찾아보았다. 의궤의 도식과 도병에서는 국연(國宴)이 열리는 궁궐 정전(正殿) 중앙의 어좌(御座) 좌우를 장엄하는 선형, 둥근형, 타원형의 준화(樽花)을 확인, 음식 위를 장식하는 상화(床花), 관이나 모자 등을 장식하는 잠화(簪花), 화안(花案)이라고도 하며, 궁중 행사시 차일을 받쳤던 기둥장 식인 화가(花架) 등의 양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가는 초기에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1848년 무신진찬도병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1795년 원행을 묘정리의궤와 화성능행도병에서는 테이블장식과 현대 공간장식으로 볼 수 있는 바닥공간장식과 어사화, 왕이 하사한 꽃을 지팡이에 묶은 꽃 장식등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조대(正朝代) 장용영(壯勇營)의 경호학적 가치 (King Jeongjo's Jangyongyoung and its Value in Terms of Security)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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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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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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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상정조대 장용영(壯勇營)은 정조 즉위 후에 신변안전(身邊安全)과 왕권강화(王權强化)를 이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친위부대(親衛部隊)였다. 이는 경호학적 관점에서 볼 때 경호제도 발전과 호위(扈衛) 성과, 경호환경(警護環境)조성의 문화적 가치가 있다. 장용영은 조선 후기의 호위제도의 변화 속에서 정조의 정치적 개혁을 실천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합당한 제도로 거듭났다. 인조반정 이후에 역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호위청(扈衛廳)과 어영청(御營廳) 발족, 그리고 효종 때의 군사력 증강을 목표로 금군을 발전 시켰던 제도들은 임시변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장용영은 숙위소${\blacktriangleright}$장용위${\blacktriangleright}$장용영의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지속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제도로 거듭나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에 대한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는 데 실질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친위부대로 발전하였다. 장용영의 제도에는 효율적인 조직과 운영이 내포되어 있다. 장용영 조직의 특성은 통합성, 전문성, 대규모성을 지닌 것으로서 현대경호의 특성을 드러냈다. 장용영의 군사훈련(軍事訓鍊)과 호위(扈衛)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호위 작용에서도 정적인 신변보호(身邊保護)와 숙소경비(宿所警備)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이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폭넓은 활동의 범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사태에도 충분히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잦은 능행과 대규모의 화성행차 및 병사들의 훈련 참관 등의 폭넓고 자유로운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장용영은 단순히 군사적 기능만을 발휘한 부대가 아니고 문화적 기능을 발휘하여 왕실과 백성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 왕의 행차(行次)에 참여하고 왕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왕과 병사가 하나가 된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부대로서의 위용(偉容)을 보여줌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하나가 되는 경호문화행사(警護文化行事)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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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당진찬(奉壽堂進饌)의 무대와 공연 요소 분석 (Analysis of the Stage and Performance Elements for Bongsudang-jinchan Banquet in Joseon Dynasty)

  • 송혜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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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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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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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에서는 1795년 화성 행궁에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열린 봉수당진찬의 의례와 악무를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및 "정조실록", "홍재전서(弘齋全書)"등의 봉수당진찬 의례기록과 <화성능행도병>등의 도상자료, 일기체의 한글가사 작품인 이희평(李羲平)의 <화성일기(華城日記)>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무대와 공연요소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잔치의 주인공에게 충(忠)과 효(孝)의 의미를 담은 음악과 춤, 꽃과 음식, 술과 글을 예를 갖춰 올리는 궁중연향은 예악(禮樂)의 원리에 바탕을 둔 국가의례로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고유한 음악문화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예'라는 상징적이며 총체적인 틀 안에서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있던 연례의 음악과 춤들이 개별 악곡과 춤으로 해체되어 '작품화'되었고. 궁중음악과 춤의 철학이나 원리, 시공간에 대한 이해는 현저히 축소된 채, 음악과 춤의 전통은 형식과 예술적 표현 중심으로 변화해왔다. 1990년대 이후, 궁중의례 전통의 재현(再現)을 목적에 둔 연구와 행사가 추진되면서, 이와 연관된 공연예술 활동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며, 특히 봉수당진찬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무대화 하고 있다. 그러나 원전(原典)의 재현(再現) 및 복원(復原) 문제, 완성도 및 예술성에 대한 문제는 과제로 남아있으며, 지금까지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의주의 외형적 재현에 관심을 두었을 뿐, 무대조건이나 공연요소에 중점을 둔 심도있는 분석은 부족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 무대구성과 공연요소 중심으로 분석해 본 결과, 조선시대 궁중연향 중에서 유일하게 '행궁'에서 개최된 봉수당진찬은 '예악의 정치'를 의례와 악무로 구현하는 궁중연향의 기본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군신동락(君臣同樂)'의 친화의 비중이 높은 연향이었음을 밝혔다. 내연과 외연의 성격이 섞인 봉수당진찬에서는 가림막을 최소화하여 신분의 차서(次序)와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원리를 충족시키면서도 삼면에 둘러친 휘장 안에 외빈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술과 음식, 음악과 춤을 다 같이 공유하도록 배치되었다. 또한, 연향공간의 상징성을 내포한 차일을 백관들의 공간에 치고, 임금이 솔선하여 선찬(膳饌)과 산화(散華)를 명함으로써 군신동연(君臣同宴)의 의미와 범위를 확장시킨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봉수당진찬이 '예악의 원리'가 강하게 드러나는 여느 궁중 연향에 비해 '정(情)'을 나누는 화친(和親)에 기반을 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봉수당진찬에서는 여느 내연에서보다 임금의 역할과 비중이 높았으며, 특히 의주 외의 기록으로 전하는 여러 가지 상황 - 7작 이후에 정조가 신하들을 가까이 불러 나눈 대화, 신하들에게 음식과 꽃을 내림, 잔치를 주제로 직접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도 이에 화답하게 한 일 등-은 의주에 따른 단선적인 연향의 진행에 변화를 주고, 연향의 의미를 확장시키는데 한 몫 하였다. 이밖에, 봉수당진찬의 주악과 정재의 구성을 분석해 본결과 연향에서 여러 인물들의 대화와 움직임이 매우 절제된 것은 여느 궁중연향과 비슷하지만, 춤과 음악을 통해 구현된 소리와 색채감은 매우 다채로웠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봉수당진찬에서는 정조 이전에 치러진 내연에 비해 다양한 종류의 정재를 상연하였고, 이 중에는 새롭게 초연된 레퍼토리도 있었으며, 또 기존의 공연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선유락>이나 <검무> 등, 지방 관아 및 민간의 레퍼토리를 궁중연향으로 수용한 점, 풍류방에서 즐겨 연주되기 시작한 생황을 <학무> 와 연계한 것은 전통적인 규범과 관습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궁중연향의 '열린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관왕묘의 어제(御製) 현판(懸板)의 유형과 내용 분석 (An Analysis on Types and Contents of Hanging Boards Inscribed with King's Writings in Donggwanwangmyo[East Shrine of King Guan Yu])

  • 장경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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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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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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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관우를 모신 동관왕묘에는 51점의 현판이 소장되어 있다. 이것들은 조선의 국왕이나 명 청대 사신 및 장군들이 쓴 것이다. 그동안 현판에 대한 연구는 궁궐에 소장된 것들이 주로 연구되었고, 동관왕묘의 것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국왕의 글씨로 만든 현판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그 내용과 형식을 분석하였다. 내용상으로는 현판의 제작자와 제작시기 및 제작배경을, 형식상으로는 현판의 유형과 재료 및 시기별 양식 변천을 밝혀 보았다. 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동관왕묘에 국왕 글씨로 만든 현판은 총 7점이 현존하고 있다. 숙종이 쓴 1점, 영조가 쓴 4점, 고종이 쓴 2점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건물의 이름을 쓴 편액(扁額)과 동관왕묘에 방문한 느낌을 시로 쓴 시액(詩額)으로 나뉘었다. 특히 후자는 국왕이 봄과 가을에 능행(陵幸)하면서 동관왕묘에 들렀을 때 썼으며, 관우의 의리와 충성을 통해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의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 국왕의 현판은 명 청대 사신이나 장군의 것들과 비교할 때 재료나 형식면에서 차별화되었다. 바탕은 청색[회회청(回回靑) ]이나 주색[주칠(朱漆)] 및 옻색[흑칠(黑漆)]으로서, 먹색[묵(墨)]이나 흰색[분질(粉質)]으로 된 현판보다 고급 재료로 칠하였다. 글씨는 양각으로 새긴 위에 금(金)으로 칠하였다. 현판의 형식은 4면이 모판처럼 $45^{\circ}$로 비스듬하며 단청기법으로 꽃문양이나 칠보문양을 그렸고, 그 좌우와 아래로 길게 빼 당초문양을 장식하였다. 이것은 '사변형(斜邊形)'이라고 부르는 형식이며, 나머지 3종류의 형식보다 품격이 높아 최고 수준의 것이었다. 이처럼 국왕의 글씨를 새긴 현판의 존재를 통해 조선후기에 동관왕묘는 국왕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군인들의 충성심을 강조한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위상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밖에 명대 사신이나 청대 장군의 글씨로 제작된 현판과 형식 비교나 시기별 양식적 변천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