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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능참봉직(陵參奉職)의 조경사적 의의 (A Study on the Landscape Architecture Historical Significance of Reung Chambong in the Joseon Dynasty)

  • 신현실;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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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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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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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의 관리를 담당한 관직인 능참봉직을 소재로 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각종 의궤(儀軌), 능지(陵誌), "일성록", 능참봉 일기 등 관련 고문헌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능참봉의 조경가적 역할을 규명하는 기초연구로 수행되었으며, 요약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능참봉(陵參奉)은 종9품 참봉 2인으로 구성되고 능참봉직은 생원 진사 혹은 유학중에 삼망(三望)을 거쳐 임명이 되는 음직(蔭職)으로 임용기준은 '연소하지 않고 경륜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으며, 왕릉수호의 상징성으로 인해 관직진출의 수단이 되었다. 둘째, 능참봉의 업무체계는 품계서열을 따랐으나 지리상의 여건 등으로 봉심과 능의 공사감독 등 실제보다 많은 권한과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능수호군 관리 및 능지작성 등 조선왕릉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셋째, 능참봉의 조경관련 직무 중 봉심은 능상의 석물이나 사초, 정자각 등을 정기적으로 예찰하여 예조에 보고하는 것이며,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봉심의 체계와 방법 등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넷째, 능참봉의 조경관련 직무 중 수목관리 및 능역공사 감독은 조경식물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관리능력과 건축 토목을 망라한 공간에 대한 다양한 식견이 요구되는 직무로 조선왕릉의 현장관리 실무자로써 지방관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유동성 확보와 산림부산물 처리에서 암묵적 권한과 관리 책임이 부여되었으며, 오늘날 조경가의 직무성향과 관련성이 깊다. 능참봉의 조선시대 조경관련 직무에 대해 좀 더 폭넓은 문헌 발굴 및 고증으로 조선시대 능참봉의 조선왕릉 조경관리자로서의 역할과 능참봉과 조선왕릉의 조경사적 가치 규명을 위한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

'내자(內子)'명(銘)으로 본 조선 전기 분청사기의 동음오자(同音誤字) 명문 사례와 의의 (Cases and Significance of Inscriptions with Homophonic yet Misspelled Words on Buncheong Ware from the Early Joseon Dynasty: Buncheong Bowl with Inscription of "Naeja")

  • 박정민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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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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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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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분청사기의 명문은 그릇에 대한 정보이자 관물(官物)의 공납(貢納)과 출납(出納)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다. 명문은 당시 그릇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분청사기 인화문 '능성내자(綾城內子)'명 발>(본관13808)은 명문이 뚜렷한 그릇이지만 명문의 내용이 일반적인 분청사기와 다르다. 분청사기에 표시한 명문은 대부분 그릇이 속한 관사명(官司名)이거나 그릇을 만든 지명(地名)이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에 표시된 '내자(內子)'명은 해당하는 관청이 없다. 그릇의 새긴 명문의 구성으로 볼 때 내자(內子)는 내자(內資)의 오자(誤字)인 것이다. '내자(內子)'명은 내자시의 그릇이라는 뜻이다. '내자(內子)'명은 내자(內資)의 틀린 글자이지만 음(音)이 같아 오자임에도 여전히 명문의 기능을 다할 수 있었다. 이처럼 글자가 다르지만 음이 같은 동음오자(同音誤字) 명문이 최근 서울시내 발굴 조사에서 조금씩 출토되고 있다. 내자(內資)를 '내자(內子)'로 표시하고 인수(仁壽)를 '인수(仁守)'로 새긴 동음오자 명문의 분청사기는 작업자가 의도한 것이든 무지(無知)의 결과이든지 간에 실제 관물(官物)로 통용되었으므로 소비지인 서울의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동음오자 명문은 음은 같지만 획수가 적고 간단한 글자를 사용했고 글자의 엉성한 필획이 특징이다. '내자(內子)'와 '인수(仁守)'명을 표시한 그릇들 역시 일반 관사명 분청사기처럼 서울시내 유적에서 출토된다. 동음오자 명문은 조선 전기 공납 분청사기들에 명문을 필각하는 과정에 생긴 오류와 또 그러한 오류가 실제 유통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는 사례이다.

고봉(高峯)의 성리학(性理學)과 수양론(修養論) (Kobong(高峯)'s Philophy and the theory of Self-cultivation(修養))

  • 강희복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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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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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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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논문에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함께 16세기 조선의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인물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사상에 관하여, 수양(修養)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해해보았는데, 이런 논의를 위하여 고봉의 "주자문록(朱子文錄)"의 구성과 특징 및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에 관한 견해도 함께 살펴보았다. 유학은 인학(仁學)(성학(聖學))이며, 이런 유학(儒學)의 문제는 근원 주체 관계로 요약해 볼 수 있고, 수양(修養)란 하늘과 사람의 관계 및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삶의 주체(主體)로서의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은 고봉이 퇴계와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에 관하여 논변(論辯)하기 이전(1557년, 31세)에 주자학(朱子學)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주자의 사상 가운데에서 수양(修養)를 지향하는 심성설(心性說)의 소개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으며, 퇴계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비교해볼 때 고봉의 "주자문록(朱子文錄)"은 문집 전체에서 시(詩)를 제외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보다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퇴계(退溪)와 고봉(高峯)는 약 8년 동안(1559-1566)에 걸쳐 편지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의 문제(정(情)과 선악(善惡)의 문제)에 관하여 논쟁하였는데, 퇴계(退溪)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질적 차이가 있는 감정(이기호발(理氣互發) 칠정대사단(七情對四端))으로 이해하였고 고봉(高峯)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부분과 전체의 관계(이기공발(理氣共發) 칠정포사단(七情包四端))로 이해하였는데,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이발(理發)인가 기발(氣發)인가에 관한 논의는 개념에 관한 논리적 분석이나 이론적 타당성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 결국은 체인(體認) 확충(擴充)과 성찰(省察) 극치(克治)를 내용으로 하는 수양(修養)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性理學)과 "논사록(論思錄)"을 중심으로 하는 경세론(經世論)에 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지만, 그의 수양론(修養論)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다.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은 고봉이 수렴(收斂)의 공부가 부족하고 조존천리(操存踐履)의 공(功)이 없다고 하였다. 고봉은 "이심법설(移心法說)"과 "삼해(三解)"에서 마음(심(心)) 그리고 경(敬)과 성(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심(心))은 몸(신(身))을 주재하며, 활물(活物)로서 광명동철(光明洞徹)하여 온갖 이치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성(性)(체(體))과 정(情)(용(用))을 포함한다. 마음(심(心))은 배(주(舟))와 같고 경(敬)은 키(타(?))와 같으니, 배가 파도에 있을 때에는 키로써 움직이며 마음이 물욕(物欲)에 있을 때에는 경(敬)으로써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성인(聖人)과 중인(衆人)이 동정(動靜)할 때에 성(性)을 온전히 하기도 하고 해치기도 하는 것은 경(敬)과 사(肆) 혹은 성(誠)과 위(僞)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며, 성인의 도(道)로서의 경(敬)(주일무적(主一無適))을 통하여 하늘의 도(道)로서의 성(誠)(진실무망(眞實無妄))을 이룰 수 있는데, '심사명변(審思明辨)'하여 스스로 힘써 그치지 않는 것이 '사성지실(思誠之實)'이라면 정제엄숙(整齊嚴肅)하고 삼가하고 스스로 잘 지키는 것은 '주경지실(主敬之實)'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봉은 책을 읽을 때는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옛사람의 마음을 보아야 하며, 마음으로 견득(見得)해서 삶 속에서 체인(體認)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학(大學)"의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과 "중용(中庸)"의 중화(中和)에 관하여도 시(詩)를 썼다. 이렇게 볼 때 고봉(高峯)은 유학의 수기(修己)(명명덕(明明德))와 안인(安人)(신민(新民))을 전제로, 신(新)유학(儒學)(주자학(朱子學))의 인간관(심(心) 성(性) 정(情)/미발(未發) 이발(已發)/체(體) 용(用))과 수양론(거경궁리(居敬窮理)/정제엄숙(整齊嚴肅) 주일무적(主一無適)/경(敬) 성(誠))을 충실하게 따르며 나름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라야마 슈지(寺山修司)의 '셋교부시(說敎節)에 의한 미세모노(見せ物)오페라' <신토쿠마루(身毒丸)>의 서사 구조 (The Narrative Structure of Terayama Shūji's Sekkyōbushi Misemono Opera Shintokumaru)

  • 강춘애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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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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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9-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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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고는 일본 현대연극이 가타리모노 셋교부시를 수용하여 어떻게 현대화했는가에 주목하여 작품을 분석하였다. 아울러 이를 통하여 '셋교부시에 의한 미세모노(見せ物)오페라' 장르로 탄생하는 과정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중세의 스토리텔링 셋교부시를 현대적 '미세모노 오페라'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 데라야마가 언그라 1세대들과 확연히 다른 점에 대해 논했던 종래의 평가들과는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60년대 일본 언그라운동 1세대 데라야마 슈지(寺山修司)의 <신토쿠마루(身毒丸)>(1978년)는 서사적 이야기에 가락을 붙여 음송하는 가타리모노(語り物) 셋교부시(說經節) <신토쿠마루(俊德丸)>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서, 동아시아 스토리텔링의 현대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셋교 <신토쿠마루>는 계모의 저주로 나병에 걸린 신토쿠마루가 텐노지(天王寺)에서 약혼자 오토히메(乙姬)라는 여성의 헌신적인 사랑과 관음(?音)의 영력(?力)에 의해 구원되는 이야기이다. 데라야마 슈지는 셋교부시의 서사적 형식에 J.A.시저(シ?ザ?본명 寺原孝明)의 주술적인 락(rock)음악을 결합시키고 부제를 '셋교부시에 의한 미세모노 오페라(說敎節による見世物オペラ)'라고 하였다. 근원소재인 모자신 신앙(母子神信仰)의 원리로 보이는 '모도리(もどり; 회귀)' 본능의 중세적 종교 세계를 데라야마 슈지는 모자상간의 세계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셋교부시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복수장면은 신토쿠마루가 계모인 나데시코(撫子)의 복장과 가면을 쓴 드래그 퀸(drag queen: 여장)의 모습으로 이복동생 센사쿠(せんさく)를 근친상간하는 것으로 복수한다. 이 작품은 셋교부시의 전형적인 인과 구조를 따르고 있고, 작품 전반에 개입하여 전체적 서사를 진행시키는 이야기꾼(語り手, 카타리테)과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박사의 등장은 서사 장치인 자기소개 기법과 코러스의 현대적 활용을 보여준다. 특히 코러스 가사에서 데라야마 슈지의 불행한 어린 시절의 기억, 즉 아버지의 부재, 아오모리현(?森?)의 대공습 경험이 자동기술법처럼 묘사되어 내용을 심층화하고 있다. 이후 니나가와 유키오(?川幸雄)의 연출 버전은 초연 때부터의 공동 극작가였던 기시다 리오(岸田理生)가 데라야마의 사후 17년을 경과해 다시 쓴 개정판으로 데라야마 슈지의 원작 <신토쿠마루>를 널리 알렸다. 그러나 그의 연출 버전에서는 데라야마가 이 작품에 붙인 부제의 요소가 전부 삭제됨으로써 극단 연극실험실 '덴조사지키(天井?敷)'가 시도한 다양한 실험연극의 줄기와 본질로부터 벗어나 있다. <신토쿠 마루>는 현대연극의 서사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 단락이 독립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면서도 서로 유기적인 결합이 가능하도록 한 구조를 갖고 있다.

화가(和歌)와 한시(漢詩)의 혼효(混淆) 양상과 특징 (Aspec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Combination(混淆) of Waka(和歌) and Chinese Poetry(漢詩))

  • 최귀묵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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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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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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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글에서 필자는 대략 10~17세기에 걸쳐서 일본의 상층 귀족이 화가(和歌)와 한시(漢詩)를 '혼효(混淆)'하여 창안해서 향유한 세 가지 양식의 양상과 특징을 살펴보았다. 세 가지 양식이라고 한 것은 '화한낭영(和漢朗詠)', '시가합(詩歌合)', 그리고 '연구연가(聯句連歌)'를 가리킨다. '화한낭영'은 10세기에, '시가합'은 12세기에, '연구연가'는 14세기에 각각 등장했으며, 그 후 일본 문학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화한혼효가 진행되면서 화가와 한시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둘이 결합해서 한 작품을 이루게 되었다. 즉 화가와 한시는, 낭영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라고 해서 한데 모였고(화한낭영) 경합을 위해 작품 대 작품으로 맞섰으며(시가합) 종국에는 장시(長詩)를 구성하는 행으로 갈마드는 데까지 이르렀다(연구연가). 화한혼효는 자국어 노래를 한시에 손색이 없게 만들고자 하는, 중세 동아시아 문학사의 공통된 움직임의 일본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한시가 화가와 병렬, 경합 교대, 결합되면서 어떤 위상 변화가 나타났는지 확인함으로써 세 가지 양식이 존재한 시기의 한시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 거기에 상응해서 발현된 일본 한시의 특징에 대해서도 논의할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나'가 아닌 '좌중'의 기호, 시인의 내면이 아닌 시대가 숭상하는 내용과 표현, 자기표현이라는 서정시의 본령이 아닌 즐거운 오락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이 중세 전 후기 일본 한시의 특징이고, 이러한 특징은 일본 한문학사의 저층을 흐르는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동아시아 문학사의 관점에서 중세 시기 일본 한문학사를 논할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평화통일국민협약' 추진의 법제도적 과제 (Legal Issues and Tasks for the Establishment of National Contract for Peace and Unification)

  • 최철영
    • 법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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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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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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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한국 사회의 내적 신뢰위기, 특히 한반도정책에 있어 남한의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남남갈등은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한반도 평화통일정책의 추진력을 크게 약화시켜 왔다. 한반도의 새롭고 대담한 평화를 위한 남북관계의 대전환기에 지속가능한 평화통일정책의 추진기반으로서 국민적 합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 국민 모두의 안위와 미래에 직결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문제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협의체제로서 통일국민협약이 요구되어 왔다. 평화통일국민협약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평화와 통일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의 형성을 넘어 구체화된 한반도정책의 원칙과 방향 그리고 실천적 과제에 대하여 각 참여주체가 합의하고 합의된 협약에 대하여 준(準) 입법적 구속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비공식적 법규범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평화통일국민협약은 개념적 측면에서 과정과 결과 모두를 포함하는 '국민의 합의'로서 한반도평화번영과 통일의 '합의된 방향과 원칙'을 담고 있는 협약이며, '목표달성의 장기성과 참여주체의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다. 법적인 측면에서는 비공식적 법규범으로서 종전선언 전후에 추진되어야 할 관련 국내법제의 종합적 정비와 국제법적 합의의 정당성 근거를 제공하여야 한다. 또한 '국민의 법'으로서 평화통일국민협약의 법적 성격은 '정치적 강령'이나 사회적 합의의 차원을 넘어 합의의 내용이 관련 법제의 제정이나 개정의 법원(source of law)으로서 의미를 갖으며 조직화된 시민사회의 평가를 통해 협약으로부터의 이탈이 억제되고 구속력이 담보되어야 한다. 동시에 국민협약은 그 자체는 법규범이 아니지만 국민협약의 이행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독립적 행정조직에 의하여 이행되는 연성법(soft law) 규범으로서 역할을 하여야 한다. 평화통일국민협약의 성립과 이행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협약에 참여하는 국민적 대표의 범위결정과 협약추진 절차 그리고 협약의 추진과 협약체결 이후 이행을 위한 기구의 설립과 조직구성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 정부의 독립행정위원회 조직으로 '(가칭)평화통일협약국민회의'의 설치와 '(가칭)평화통일협약국민회의법'을 통한 평화통일국민협약 추진법제의 입법이 요구된다.

『경제문감(經濟文鑑)·별집(別集)』에 나타난 주례(周禮) 이념 (Idea of Jurye Shown on GyeongJeMunGam and GyeongJeMunGamByeolJip)

  • 김인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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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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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3-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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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논문 ""경제문감 별집"에 나타난 주례 이념"을 고찰한 글이다. 주지하다시피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후세의 평가가 어떻든간에 조선의 건국이념을 제시하고 관료 체제의 정비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정도전은 "주례"를 사회개혁의 이념 모델로 삼아 태조 3년(1394)에 "조선경국전"을 찬진(撰進)하였다.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신왕조의 문물제도를 정하는 일환으로 저술한 새로운 법전(法典)의 지침서(指針書)로서, 신왕조의 지배 사상인 유교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에 비해 "경제문감"은 "조선경국전" 치전(治典)의 내용을 보완한 것으로, 주로 재상의 직책과 재상의 직무를 비롯해 대간(臺諫)과 감사(監査)는 물론 지방 수령의 직책에 대해 논했다면, "경제문감별집"은 임금의 도리를 논한 "군도(君道)"와 임금의 도리를 역철학(易哲學)의 입장에서 부연한 "의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경제문감"이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재상 제도의 변천과 득실(得失)은 물론 재상의 직책과 진퇴의 자세를 상세히 기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간(臺諫), 위병(衛兵), 감사(監司), 수령(首領)의 직책과 직무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경제문감별집"은 군주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군주수신(君主修身)을 통해 마음을 바로잡고 덕을 닦아 어질고 유능한 재상을 임명해 정치하게 하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기능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국 조선족 유수아동의 내재화 문제행동에 관한 구조모형 (A Structural Equation Modeling of Internalizing Problem Behaviors of Korean Chinese'left-behind'Children in China)

  • 현미나;박지선;신동면
    • 한국사회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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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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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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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부모들이 외지에 있는 중국 조선족 유수아동들의 문제행동 예방을 위한 지원체계 방안을 제시하고자 중국 조선족 유수아동의 문제행동 실태와 원인을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중국 조선족 집거지인 연변 3개 지역 학교에서 유수아동과 비유수아동 39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설문내용은 응답자의 일반적 특성, 내재화문제행동, 사회적지지, 자아존중감, 자아탄력성으로 구성하였다. 분석방법은 첫째, 문제행동 실태를 살펴보기 위해 유수아동집단과 비유수아동 집단의 주요변수에 대한 차이검증을 실시하였고, 둘째, 유수아동의 문제행동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 문제행동, 자아존중감, 자아탄력성, 사회적지지 간 구조적 인과관계와 직간접효과를 구조방정식모델을 사용하여 검증하였다.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수아동 집단은 비유수아동 집단과 비교하여 내재화 문제행동의 사회적 위축과 우울에서 그리고 외현화 문제행동의 비행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였는데, 양부모 부재 유수아동 집단 > 한부모 부재 유수아동 집단 > 비유수아동 집단 순으로 문제행동의 평균값이 높게 나타났다. 둘째, 유수아동 집단은 비유수아동 집단과 비교하여 자아탄력성과 사회적 지지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으나, 자아존중감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나타냈다. 자아존중감의 긍정적 요인에서 비유수아동 집단 = 한부모 부재 유수아동 집단 > 양부모 부재 유수아동 집단 순으로 높은 점수를 보였고, 부정적 요인에서는 양부모 부재 유수아동 집단 > 한부모 부재 유수아동 집단 > 비유수아동 집단 순으로 높은 점수를 보였다. 셋째, 유수아동 집단에 대한 사회적 지지는 내재화 문제행동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직접적인 부(-)의 영향을 미치며, 동시에 자아탄력성을 통해 내재화 문제행동에 간접적인 부(-)의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유수아동의 문제행동 완화 및 예방을 위한 사회적지지 체계 확립의 필요성과 자아탄력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 마련의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유수아동의 문제행동을 완화시키기 위한 중국의 사회적지지체계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학문(學問) 개념의 근대적 변환 - '격치(格致)', '궁리(窮理)' 개념을 중심으로 - (How has 'Hakmun'(學問, learning) become converted into a modern concept? focused on 'gyeogchi'(格致) and 'gungni'(窮理))

  • 이행훈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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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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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7-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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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근대 이전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지적 체계와 학문은 인간과 자연을 통일체적으로 사유하는 가운데 인간의 본성을 발현함으로써 사회적 실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특히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송대 신유학은 '이기(理氣)' 개념으로 인간과 사회, 우주와 자연을 일통의 유기적 구조로 설명하였으며, 이러한 철학체계 내에서 인간학과 자연학은 통합되어 있었다. 동서의 충돌과 교류는 동아시아의 지적 체계에 균열을 일으켰고, 전통적 학문 개념의 전이와 변용을 가져왔다. 개화와 진보의 욕망을 내면화하고, 동도(東道)와 서기(西器), 신학(新學)과 구학(舊學) 논쟁을 거치면서 유학은 비판과 쇄신, 부정과 폐기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 본성의 자각과 도덕 실천의 이상(理想)은 문명개화와 근대 국가 설립의 제한적 수단으로만 논의될 뿐 더 이상 학문의 본령으로서 위상을 갖지 못했다. 서구 근대의 광휘는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를 규준했던 학문의 내용과 방법은 물론 목적까지 변화시켰다. 근대 계몽기 서구 문명 수용과정에서 한자(어)로 구성된 전통 학술 용어나 개념은 외래 학문을 번역, 소개하는데 여전히 유효한 기제였다. '격치(格致)'와 '궁리(窮理)'는 자주 인용되었는데, 인간과 우주 만물에 내재한 본성을 탐구하는 전통적 의미는 점차 퇴색되고, '격치학(格致學)', '궁리학(窮理學)' 등 개별 학문을 지칭하는 명사로 변환되었으며, 때때로 철학(philosophy), 과학(science) 등 상이한 학문 영역을 넘나들며 사용되었다. 학문 개념과 지적 체계의 이러한 변동은 외래 학문의 수용 양상을 보여주는 한편 동아시아 전통 학문이 지닌 특성을 드러낸다. 이제 가치와 사실의 분리, 인간학과 자연학의 분리, 학문의 분과화를 진행해 온 근대학문은 또 하나의 전통이 되었고, 계승과 극복의 양가적 대상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실학적(實學的) 설계(設計) - 『역학도설(易學圖說)』과 위기지학(爲己之學) - (Yeoheon Jang Hyun Gwang's Design of Self-organization for Completion of Confucian Truth)

  • 유권종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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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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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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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여헌의 "역학도설"이 사실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것을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저술이라는 점을 논증한 것이다. 그 논증의 방식은 공자로부터 송대로 이어지는 위기지학의 개념화 과정, 그리고 특히 남송 시대의 주희와 그의 문인들에 의하여 시도된 위기지학의 체계화 과정을 논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여헌의 "역학도설"이 그러한 위기지학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위기지학은 공자 이래로 유학의 맥락에서 유학적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 개발하고 전승하면서 체계화하여 온 실학적 방법론이라는 관점을 채택하였고, 여헌의 "역학도설"은 바로 이러한 실학적 방법론을 발전시켜서 더 실현력이 높은 방법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라는 관점을 취한 것이 본 연구이다. 특히 그가 "역학도설"에서 성현의 사업 내지 우주 사업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렇게 볼 수 있는 점이다. 이러한 논의는 아직까지 위기지학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더 많은 구체적이고 상세한 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를 통해서 제시하고자 했던 여헌의 "역학도설"의 저술적 지향성이나 학문적 내용의 특성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들이 주로 역학이라는 경학적 분야에서 이루어진 성과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과 차별화된 관점을 제시하는 데에는 작은 기여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여헌의 "역학도설"은 따라서 역학의 원리와 체제에 근거하여 설계한 위기지학의 교과서로서의 성향과 구도를 두드러지게 갖추고 있는 저술이다. 중국 송대부터 이어지면서 발전해온 위기지학이 여헌의 단계에 이르러서 역학의 방식에 의하여 재구성되었다는 점에 중요한 발전이 있는 것이다. 즉 여헌의 "역학도설"은 경학과 위기지학을 통합하고, 비로소 경학의 지혜를 우주 사업의 역량으로 내면화하고 양성할 수 있는 체계적인 방법을 세웠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것은 중국의 송대의 유학자들이 위기지학의 중요성을 절감하면서도 경학의 숲에 매몰되어서 경학과 위기지학의 병행상태에 있었던 것과 다르다.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들도 성학의 명칭을 사용한 저술로써 위기지학을 체계화하였지만 그것들이 입문의 방법을 제시하는 점에서는 과거 선유들의 언급을 되풀이하는 것과도 다르다. 여헌은 그가 터득한 역(易)의 이치와 그것을 다루는 역학(易學)의 이치(易簡)를 매우 간결하게 요약하였고, 동시에 천지의 도에 두루 통할 수 있도록 인간사의 다양한 과정과 변수들을 통괄하여 섭렵하고 통달할 수 있는 공부의 과정을 설계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헌의 "역학도설"이 위기지학의 전개과정에서 중국의 전통을 잘 발전시켜서 완결된 체계를 구성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