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군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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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모델을 통한 북한의 핵 정책 평가와 전망 (Evaluation and Forecast of North Korea's Nuclear Policy through Libya Model)

  • 한승조;신진
    • 융합보안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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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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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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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한반도는 안보문제에 있어서 2018년에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최대의 격변을 겪고 있다. 북한은 정상회담을 통해 기존의 군사와 경제를 병행하여 발전시키려는 노선을 핵 포기를 통한 경제 중심의 노선으로 변경하여 추진하고 있으며, 이는 정상회담을 통해 자국의 경제적인 이득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핵심이다. 이러한 노선의 변화는 리비아의 핵 포기 상황과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으며, 리비아의 사례(모델)을 교훈으로 왜 북한의 노선 변화가 있었고, 이후 북한의 핵 정책을 포함한 국가전략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에 대해 전망이 필요한 시기이다. 리비아 모델은 국제적, 국내적, 국가 지도부의 정세 인식 측면으로 구분하여 분석/구축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북한의 핵 정책 노선을 평가하였다. 또한 리비아의 핵 포기 이후 국가 상황을 북한과 비교하여 일부 전망해 보았다. 리비아 및 북한에게 핵 개발은 국제사회의 외교적, 경제적 압박은 체제의 불안정성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핵을 포기하고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리비아는 경제적 실리와 체제의 안정성은 일부 보장받았지만, 유입된 해외자본 및 사상/문화로 인해 민주주의의 물결 속에서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는 결과가 있었다. 북한은 이러한 리비아의 사례를 기반으로 외교적, 경제적인 실리는 추구하겠지만, 부수적으로 유입될 수도 있는 민주주의 문화, 자유시장의 완전한 개방논리는 최대한 제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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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抗美援朝) 위문단의 실체와 활동 양상 -한국전쟁을 통한 신중국의 문화정치 (A Study on the Identity and Activities of the Anti-US and Pro-Joseon Comfort group - New China's Culture Politics through the Korean War)

  • 이복실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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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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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3-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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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한국전쟁시기에 중국은 총 세 차례 '항미원조' 위문단을 북한으로 파견했다. 그 목적은 하나는 미제국주의와 싸우고 있는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을 위로함과 동시에 국내의 사정을 전달하여 지원군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신중국의 사회주의건설사업에 기여하기 위해서였다. 즉 위문 활동을 통해 직접 보고 들은 다양한 영웅사적과 미제국주의 만행을 중국인민들에게 선전하여 국제주의와 신중국에 대한 애국주의사상을 고취함으로써 전쟁동원과 신중국건설을 효과적으로 진행하려는 것이었다. 위문단 단원은 정치, 군사, 민족, 사회, 문화, 교육 등 국가 제반 구성 분야의 다양한 계층(노동자, 농민, 지식인, 여성, 학생, 군인 등)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활동은 위문과 취재, 각종 좌담회와 공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과정은 그야말로 분노와 동정, 희생과 감동, 전투와 낭만, 감격과 위안의 감정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러한 감정은 귀국한 위문단의 국내 선전 활동을 통해 중국인민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항미원조' 위문단은 조직구성과 구체적인 공연 활동에 이르기까지 신중국의 사회주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민주와 평등, 세계평화와 무산계급 연대를 강조한 국제주의 추구, 공산당정권 옹호를 기반으로 한 애국주의 지향 등이 바로 그 정체성이었다. 위문단은 국경을 넘나들며 신중국의 이러한 정체성 인식을 쌍방향으로 효율적 확산을 이루는 데 한몫했다. 이는 일종의 정치·문화적 퍼포먼스로서 '항미원조' 위문단이 갖는 중요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유엔의 북핵 대북제재조치의 실효성과 북한의 체제생존전략 (Efficacy of UN's Sanctions on North Korea's Nuclear and North Korea's Regime Survival Strategy)

  • 김주삼
    • 한국과 국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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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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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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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북한은 2006년 1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2017년 9월까지 총 6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적대시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일환으로 체제수호와 방어적 차원에서 핵무장력 담보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핵실험의 전략적 목표가 북미협상을 통해 북한체제 위기를 극복하고 그들의 한반도 사회주의통일을 위한 핵무장력을 완성하는 데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한의 계속된 핵실험은 한반도평화를 위협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고 있으며, 동북아안보 역학구도에 간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엔안보리는 이러한 북한의 무모한 핵실험에 대해 지난 10년 이상 6차례의 유엔안보리 결의로 대북제재조치를 단행해 왔다. 그러나 북한 김정은 정권은 유엔과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핵 경제병진노선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유엔과 미국의 대북제재조치가 북한에 대한 효과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은 북한이 강도높은 핵실험으로 격상시키는데 요인으로 분석된다. 2017년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대북제재 조치 수단 가운데 하나인 대북 군사옵션은 한반도에서의 전면전과 국지전 양상으로 예상된다. 미 트럼프 행정부는 이전의 미국 행정부의 대북제재 조치 양상과는 다르게 세컨더리 보이콧이라는 외교압박전술을 시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유엔과 미국의 대북제재조치에 대해 북 미 간 전면적인 군사대결 입장을 밝히며 '벼랑끝 전술'로 맞서고 있다. 북한은 당분간 체제생존차원에서 핵 경제병진노선을 추진할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체제는 미 중 간의 현실주의적 국가전략 추진으로 체제붕괴 변수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전략적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전환기 미얀마 정치사회변화와 신(新)고등교육 개혁: 정책·지식·권력의 역동을 중심으로 (An Analysis of the Policy-Knowledge-Power Dynamics in Higher Education Reform in Transitional Myanmar)

  • 홍문숙
    • 비교교육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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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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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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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의 목적은 미얀마의 정치 사회변화 속의 고등교육 개혁을 중심으로 첫째,개혁개방이후 고등교육 개혁의 과정을 소개하고, 둘째, 미얀마 개혁개방 시대(1988년~2015년)와 신(新)민주정부시대(2015년~현재)의 고등교육 정책의 내용을 비교 분석하며, 셋째, Thein Sein 정부와 Aung San Suu Kyi 문민정부의 고등교육 정책개혁 과정에서 나타난 정책-지식-권력의 역동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하였다. 연구결과, 대규모의 국제정책협력의 과정으로 수립된 교육분야종합검토(CESR) 및 신(新)국가교육전략 2016~2020(NESP)은 '미얀마 고등교육 거버넌스 및 교육 질과 적절성 개선에 집중하여 향후 5년간 고등교육 법, 정책, 전략, 환경, 역량차원에서 야심찬 개혁을 진행한다'는 목표를 선정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국제공동작업으로 진행된 본 교육개혁안 수립은 미얀마 고등교육의 지형, 구조, 주요 이해관계자들 간의 관계에 큰 변화를 나았다. 현재 결과로 표출되고 있는 연방교육부-고등교육부-대학차원의 교육권력 구조재편은 미얀마 교육의 민주적인 거버넌스 구축에 중요한 첫 단계를 시작한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는데, 특히 수십 년간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되었던 미얀마 교육전문가들에 '국제적인 수준'의 교육정보 및 지식에의 접근성을 높이고 국내외 교육이해관계자간의 네트워크가 강화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였다. 본 교육정책 수립을 계기로 국제적인 지식, 경험, 막대한 재원을 보유한 다자금융기구, 국제기구, 양자기구 및 국제전문가들은 미얀마 교육개혁의 주류담론으로 고등교육 교육국제화(Internationalization) 및 기술화(Technocratization)의 논의를 안착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와같은 미얀마의 교육개혁의 정책담론은 미얀마 지식인, 대학생 그리고 시민사회 등의 교육주체들의 참여가 구조적으로 제한된 본 교육개혁의 권력구조 속에서 군사정권 하에 체계적으로 파괴된 미얀마의 대학사회의 재건 및 미얀마의 신(新)교육철학 수립 등의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판의 견지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본 연구는 개발도상국의 교육개혁의 방향성, 목표, 우선순위 수립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의 역동에 대한 이해가 이제 한 국가 단위의 분석을 넘어 국제-국가-지역차원의 다면적이고 다차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고려시대 공적·사적경호의 특성과 현대경호와의 비교연구 (A comparison study of the characteristics of private and public security service of Koryo dynasty and modern security service)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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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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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7-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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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려건국 후 왕의 측근 친위군에 대한 제도적 정비는 성종시대에 이루어졌다. 건국 후 국가제도를 정비하는 법제의 확립과 더불어 2군 6위에 소속된 금군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금군의 핵심부대는 견룡이며, 그들은 필요에 따라 국왕의 가까운 위치에서 호위하거나 궁성을 수비하고 방어하는 부대로 성장하면서 제도적 위상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사적경호제도인 도방(都房)의 창설은 경대승이 신변 안전을 위하여 자신을 따르는 무술이 뛰어난 군졸들과 침식을 같이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경대승이 병사하고, 그의 도방도 곧 해체되었다. 최충헌은 집권 후 경대승의 도방을 부활시켜 이를 보완하고 발전시켰다. 최충헌은 그의 문하에 문무를 두루 겸비한 문객들이 많은 가운데 유능한 인물을 영입하여 군사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문신들의 조언도 받아들이며 도방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자신의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금군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최우의 집권 이후 6번 도방을 내외도방으로 확장, 개편하여 실질적인 도방으로 발전시켰다. 또 야별초를 창설하여 도방의 위기를 방지하는 효력도 발휘하였다. 고려시대의 공경호인 금군은 왕권이 무력화된 무신집권시대에도 그 제도는 존속되었으나, 군권을 위시한 실권은 사적경호 조직인 도방이 행사하였고 왕은 다만 상징적인 존재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고려시대의 경호와 현대 경호를 비교해 볼 때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으나, 경호의 본질에 있어서는 경호대상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으로는 고려시대의 충성심과 현대의 이익추구가 각각 그 특징으로 대비되며, 고려시대 경호가 무력에 의한 강압으로 다스려진 것이라면, 오늘날의 경호는 자유의지에 의한 의무와 책임감의 수행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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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집권기 호위제도의 경호학적 고찰 (History of Guard System during the Period of Military Rule in the Goryeo Dynasty)

  • 이성진;조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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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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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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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려전기의 궁중호위는 2군6위의 중앙 정규군으로 편성되어 궁궐안의 호위는 내순검군이 담당하였으나, 무신집권기에 이르러 군제는 문란해지고 왕실 호위는 무신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무신들은 왕의 지척에 있는 중방을 중심으로 문신들을 억압하고 왕권을 무력화 시킨 후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무신의 3거두였던 정중부, 이의민, 이고 등의 집권이 단명으로 끝나고 경대승이 집권자의 지위에 올랐을 때, 그는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백 수십인의 결사대를 문하에 두었는데, 이 조직이 도방(都房)이었다. 경대승이 병사함에 따라 도방이 폐지되고, 최충헌 집권시대에 신변보호와 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경대승의 도방을 부활시켜 보완한 6번(番)도방은 규모가 방대하고 더욱더 체계를 잘 갖추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집권기에 6번 도방은 내외도방(內外都房)으로 확장, 강화되었으며, 손자 최항의 집권기에는 한층 더 발전하여 도방 36번제도가 확립되었다. 초기의 도방은 무신 중심으로 도방 주인의 신변안전을 목표로 하였지만 후기에는 문신이 참여함으로써 정보 수집과 선발 경호의 활동을 하였고, 내도방에 해당되는 가병은 사후 위험 방지 역할까지 함으로써 개인의 호위에 만전을 기함은 물론 가문을 지키고 나아가 사회질서와 왕실과 조정을 장악하고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는 포괄적인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최 씨 정권은 사적 친위조직으로서 도방 이외에 마별초(馬別抄)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도방과 함께 기병과 보병(步兵)의 양쪽 날개를 이루었다. 삼별초는 고종 때 최우가 조직한 야별초가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어지고, 여기에 신의군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삼별초가 조직된 이후에는 별초군이 군사와 경찰, 형옥에 이르기까지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무신집권기의 호위 조직이었던 도방과 별초군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설경호기구로 출발하였으나 차츰 왕실 호위 기구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왕실이 도방의 보호를 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설경호경비에 해당되는 현대의 민간경호경비는 영리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특성이지만 공적경호경비와 마찬가지로 범죄예방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신 집권시기의 가병이나 도방 구성원들의 역할과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신집권기의 경호조직은 처음에 개인의 신변 호위를 담당한 도방으로 출발하여 무신들의 참여와 확장으로 공공성을 띠어가게 되었고, 삼별초(三別抄)의 활약에 이르러서는 왕실 호위기구가 담당했던 역할에 근접하는 국가 사회 치안구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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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왕실호위제도의 사적 고찰 (Historical Review on the Security Service for the Royal Household in the "Goryeo" Era)

  • 이성진;김의영;이종환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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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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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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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고려시대의 왕실 호위라 함은 오늘날로 보면 국가원수에 대한 경호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의 독특한 정치제도가 완성되기까지는 신라시대나 태봉국의 제도를 답습하여 왕의 신변을 중심으로 경호가 실행되었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과 6위라는 8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2군은 6위보다 위였으며 이는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으로서 이를 근장(近仗)이라고 불렀다. 이를 오늘날의 공경호와 관련을 지어보면 근접경호에 해당된다. 고려 귀족 사회의 안정기에 귀족문화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그 뒤로 귀족분열과 상극대립으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무신란이 일어나고 무신들이 집권함으로서 왕의 신변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최씨 무인집권시대에 이르러 무인집권의 안전을 위하여 도방을 설치했고 최우 시대에는 그의 문객들을 모아 사병들뿐만 아니라 정방, 서방, 등의 문신을 거느려 인사행정을 담당케 했다. 몽고에 항쟁하던 시대에는 무신통치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를 중심으로 항쟁했다. 최씨 정권시대의 그들 나름의 국가관과 국가 호위의 정신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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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의 사대부(士大夫) 인식(認識)과 그 특징(特徵) (King Jeongjo's recognition on Neo-Confucian literati and it's historical meaning)

  • 박성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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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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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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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정조는 척족이 특권세력으로 발호하던 영조대 후반의 탕평정치에서 아버지를 여읜 피해자였다. 노론의 거센 방해공작을 뚫고 왕위에 오른 정조의 목표는 왕권 강화였다. 정조는 탕평정책을 영조 50여년 치세의 대업적으로 칭송하고 척신과 탕평당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신하들에게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국변인(國邊人)'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정조가 즉위 직후부터 설치 운영한 규장각(奎章閣)은 겉으로는 어제(御製)의 봉안 등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정조의 우군을 양성하기 위한 기구였다. 그만큼 정조가 외척들을 누르고 어떻게 사대부들을 포섭하는가 하는 문제는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본고에서는 정조가 사대부들을 어떻게 굴복시키고 포섭하려 했는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하였다. 그것을 통해서 정조가 시도한 왕권강화책의 논리와 방법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정조는 경학(經學)의 본질은 성리학이 아니라 실생활과 절실하게 관련된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이념적 근거를 붕괴시키고자 하였다. 정조가 사대부들의 풍기와 세도를 비판하고 그들의 학문인 주자성리학의 의미를 축소했던 것은 사대부들을 왕권에 복속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붕당론이나 성학론을 기본으로 하는 사대부들의 정치 이념과 학문적 근거를 반박함으로써 공론(公論)의 주체로서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려고 하였다. 정조가 영조의 '군사(君師)' 개념을 계승하고 왕호도 '홍재(弘齋)'에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바꾼 것은 그의 사대부 비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울 송현동 일대의 문화 헤게모니와 장소성 변화 분석 (An Analysis of Cultural Hegemony and Placeness Changes in the Area of Songhyeon-dong, Seoul)

  • 최지영;조경진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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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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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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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서울 송현동에 역사문화공원과 이건희 기증관이 조성될 예정이다. 송현동의 역사성은 조선 시대부터 현대까지 정치적 판도에 영향을 받은 시련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장소성 분석은 역사적 맥락보다는 토지소유자와 용도 변화에 국한해서 다루어졌다. 그래서 본 연구는 현대문화지리학과 비교역사학 관점을 활용하여 송현동의 장소성이 문화 헤게모니에 따라 변화한 맥락을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역사적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중화주의, 대항해, 시민혁명, 제국주의, 민족자결주의, 민족주의, 대중예술, 신자유주의 같은 범세계 차원의 문화 헤게모니는 송현동을 비롯한 북촌 일대에 새로운 지식인층을 만들어냈고, 사회제도와 공간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송현동의 장소성은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첫째, 송현의 소나무숲은 이상적인 유교 국가를 목표로 했던 조선 건국세력이 왕조의 영속을 기원하며 만든 비보숲이었고, 내사산의 지맥을 보호하는 사산금표제로 관리되었다. 세계적으로 대항해시대를 맞이한 조선 후기에는 연행이 늘며 청나라 문화를 향유하는 경화세족의 정원이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주택단지개발로 소나무 숲과 정원은 사라졌지만, 인공적인 정원과 외부의 자연을 조화롭게 연결했던 차경의 경관적 미학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가치가 있다. 둘째, 세계의 근대화 물결은 북촌 일대에 신식학교를, 친일파 소유의 송현동에는 하숙집을 만들었다. 송현동 옆의 안국동천길은 시민혁명과 민족자결주의를 접한 사상가들이 교류했던 장소였고, 최대규모의 하숙집이었던 송현동은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며 학생운동문화가 발아한 계기가 되었다. 안국동천길은 옛길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어 광화문-북촌-인사동-돈화문로를 연결하는 역사 도심 보행 재생의 한 부분으로 의의를 지닌다. 셋째, 조선총독부의 문화 통치기부터 군사 정권기까지 송현동은 조선식산은행의 서구식 문화주택과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가 들어서며 서구문화의 통로였다. 주변 지역은 고미술과 현대미술이 공존하며 근현대 미술시장이 형성되었다. 이건희 기증관은 북촌한옥마을, 공예박물관, 현대미술관, 갤러리와 문화벨트를 이루며 시민의 공간으로 변모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같이 장소를 이루었던 숲과 정원, 시민탄생의 거리, 근·현대 미술의 진원지로서 의미가 새롭게 조성될 역사문화공원과 미술관 그리고 주변 보행 네트워크와 조화롭게 재창조될 수 있도록 담론과 도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