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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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광화문 월대(月臺)의 난간석 복원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Restoration of Stone Railings at Gwanghwamun Woldae in Gyeongbokgung Palace)

  • 전나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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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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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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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경복궁 광화문은 고종 연간인 1866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함께 설립되었다. 광화문 남쪽으로 너른 단인 월대를 설치하여 위계를 드러냈다. 광화문 월대는 좌우에 난간석을 설치하였고, 중앙에 어로를 두었으며, 남쪽으로는 계단과 경사면을 설치하였다. 월대 어로와 이어진 남쪽 경사면에는 좌우에 용두석을 설치하여 왕의 길이라는 점을 조형적으로 표현하였다. 광화문 월대 중앙에 있던 어로는 1915년 조선진흥공진회가 경복궁에서 개최됨에 따라 넓혀졌고, 1925년경 월대가 훼철되었다. 이후 광화문 이전에 따라 그 형상을 찾을 수 없었다. 경복궁 광화문처럼 월대를 설치하는 모습은 다른 궁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월대 좌우에 난간석을 설치한 모습은 광화문이 유일하다. 현재 광화문 월대의 난간석과 경사로에 위치한 석수가 남아 있지 않지만, 사진을 토대로 비교한 결과 광화문 월대의 난간석은 19세기 조선 왕실에서 제작한 석물의 양상을 보이며, 용두석 역시 대한제국 시기에 조성한 상징물에서 유사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한편 동구릉에는 능에 배치되지 않는 여러 석물이 남아 있는데, 홍예석, 문소전 구기비뿐 아니라 난간석의 부재인 난간석주, 동자석, 죽석이 전해진다. 조선왕릉봉분 주변에 설치하는 난간석은 민무늬로 된 석물이 없는 반면, 궁궐 주변에 설치된 금천교에서는 문양이 없는 난간석을 설치하는 경우가 다수 남아 있다. 동구릉에 있는 난간석과 용두석은 광화문 월대의 석물로 보이는데, 시대적 양식 분석과 근대 사진과의 비교를 통하여 광화문에 설치했던 석물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경복궁 광화문 월대의 석물은 1915년 공진회 때까지는 본래의 위치에 남아 있었지만 1920년대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고 전차가 부설됨에 따라 훼철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위치에 자리한 영제교도 이 시기에 훼철되었으며, 1930년대까지 경복궁 지역에 남아 있다가 동구릉 지역으로 함께 옮겨지게 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 현재 광화문 월대 복원을 추진하는 시점에서 복원의 단초가 되길 기대한다.

경복궁(景福宮) 배수시설(排水施設)의 조성원리(造成原理)에 관한 연구 - 경복궁 발굴조사 자료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omposition Principle of the Gyeongbokgung Drainage Facility - Focused on the review of Gyeongbokgung excavation survey -)

  • 김태민;남호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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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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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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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의 목적은 유구의 발굴조사로 확인된 자료를 활용하여 경복궁의 배수시설을 파악해보는 데 있다. 궁궐의 원활한 배수를 위한 여러 노력은 창건기 경복궁에서부터 지속되었음을 사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창건기 당시 경복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도형은 남아있지 않지만, 영조대 이후 제작된 도형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으며, 중건 이후의 모습은 "경복궁전도", "경복궁도", "북궐도형"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청이 고종대 중건 경복궁을 복원 기준으로 삼고 있기에, 본고 역시 고종대의 경복궁 배수 시설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중 본고에서는 침전, 태원전, 건청궁, 소주방, 함화당 집경당 영훈당, 흥복전 등 여섯 권역의 집수정과 암거를 분석해 보았다. 경복궁은 중심전각과 주변행각으로 구성된 여러 개의 권역으로 구성되는데, 배수 역시 각각의 행각과 전각에서 시작하여 권역별 중심배수로로 합수되는 방식임이 확인되었다. 기본적으로 중심배수로는 개방형 어구로 연결되고 어구로 나온 물은 최종적으로는 수문으로 출수되는 형태가 확인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경복궁의 구지형을 이용한 자연배수와 인공배수를 조화하기 위한 배치로 보인다. 배수가 시작되는 집수정은 생활하수가 다수 발생하는 지역에 설치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행각과 행각, 행각과 담장이 접하는 모퉁이에 주로 설치되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이는 지붕의 낙수 처리와 생활하수 처리를 고려한 배치로 판단되며, 특히 생활하수의 처리를 위해 행각이 끝나는 부분에 주로 주(廚)칸을 설치하는 모습도 관찰되었다. 이러한 배수시설의 설치는 경복궁의 배수가 일련의 계획 하에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궁궐정원의 원형경관 복원을 위한 제안 (A Proposition on Landscape Restoration of Joseon Dynasty's Palace Gardens)

  • 안계복;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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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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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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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궁궐의 원형 복원문제와 관련된 논리적 판단의 준거들을 추출하고, 이를 경복궁과 창덕궁에 적용시켜 봄으로써, 그 효용성을 확인하는데 있다. 또한 궁궐의 원형 복원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 방향을 제안하는데 의의가 있다. 우선 원형을 판단하기 위한 준거로는 "통시성과 공시성, 시원성과 시대성, 불변성과 변형성"의 6 개념을 추출하였다. 현재 경복궁은 1888년을 시대성 기준으로 복원하고 있지만, 1395년의 시원성을 갖는 원형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현재 경복궁의 복원은 건물 위주로 복원하고 있지만, 추후 연구에서는 근대 촬영된 경복궁 사진을 밑바탕으로 경복궁의 원형경관이 복원될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창덕궁 존덕정 일원은 약 240년 동안 통시적 불변성을 지닌 원형이 1884년경에 변형된 것이다. 1884년이라는 시대성보다는 통시적 불변성을 더 중요하므로 동궐도의 원형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창덕궁 연경당 일원 원형에 대한 문제는 효명세자의 시원적 원형과 고종 때의 시대적 원형이 동일한 지역에 중복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이므로 복원을 위해서는 새로운 해결 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옥류천 지역은 1636년(인조 14년)에 시작하여 숙종, 정조를 거치면서 적어도 1884년(고종 21년)까지 약 250년간 불변성(不變性)과 통시성이 돋보이는 원형이다. 1884년 이후 옥류천 지역에 이루어진 변형은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옥류천 지역의 원형 회복을 위해서는 동궐도를 기준으로 변형된 경관을 복원해야만 한다. 그 밖에 옥류천을 건너는 다리, 샘, 담장, 초가들도 동궐도 기준으로 원형을 복원해야만 한다.

중건 경복궁 후원 오운각(五雲閣) 권역으로 조명한 조선시대 궁궐 별원(別苑)의 특성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Byeolwon (別苑: A Separate Garden Made Away from Living Space) in Palace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 Illuminated by the Oungak Area at the Rear Garden of Reconstructed Gyeongbokgung Palace)

  • 정우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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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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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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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고종 연간 경복궁 후원의 북쪽에 조성된 오운각 권역의 특성과 창덕궁 후원 옥류천에 구비되어 있던 기능적 요소가 경복궁 후원으로 치환되었던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오운각 권역은 샘과 천하제일복지 각자가 있던 기존의 공간을 활용하여 왕의사적인 공간으로 정비된 공간이었다. 고종은 오랫동안 창덕궁 옥류천이 담당했던 왕실의 휴식과 위락기능을 중건 경복궁에 그대로 옮기려 하였다. 그 결과, 옥류천과 유사한 기능을 하도록 조성된 오운각 권역이 후원의 별원으로 개발되었다. 양자 간에는 후원의 최북단에 조성된 입지 외에도, 건물의 구성 및 유배거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관상용 수경설계 등에서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오운각 권역은 옥련정, 오운각, 벽화실과 천하제일복지천의 수경시설로 구성되었다. 이중에서 벽화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옥류천과 직간접적인 관련성을 갖되, 지형의 굴곡, 경사, 수계의 상황 등 주어진 입지조건에 따라 조성되어 색다른 정감을 갖는 공간으로 개발되었다. 먼저, 옥련정은 남산에 이르는 서울의 경관을 조망하기 위해 높은 언덕에 입지하였고, 천하제일복지천의 독특한 형식의 수로는 위이암의 유배거의 기능을 모방한 형태로 추정된다. 한편 오운각은 옥류천의 농산정과 같이 주거가 가능한 집으로 조영된 것이었다. 이러한 구성요소는 다분히 옥류천의 기능과 위상을 경복궁에 치환하기 위한 조성목적을 표출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 궁궐 후원의 기능 공간이었던 별원의 특성을 잘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조경 관리자 인터뷰를 통한 청와대 시기 경복궁 후원의 변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nges in the Back Garden of Gyeongbokgung Palace during Cheongwadae Period through an Interview with Landscape Manager)

  • 김규연;이시영;최재혁;최종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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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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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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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는 경복궁 후원의 경관을 보존·관리·활용하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하고자 전·현직 청와대 조경 관리자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시행하였으며, 요약된 주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복궁 후원의 지형은 노태우 대통령 당시 본관과 관저를 신축하며 절토와 성토가 이루어지며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계는 과거 경복궁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단절된 상태이다. 둘째, 식재의 경우 가장 중요한 원칙은 대통령의 경호와 의전이었으며 이에 따라 수목이 배치되거나 관리되었다. 수목은 여러 지방에서 우수한 수목들을 도입하여 심었으며, 야생화와 지피식물들도 계절에 따라 자주 교체하였다. 셋째, 시설물 및 동선은 점경물과 휴게시설 등이 대통령의 의전이나 취미, 근무자들의 휴식을 위해 배치되었으며, 백악산 산림지역의 방재를 위해 소방시설을 설치하였다. 넷째, 청와대 시기 경복궁 후원 조경의 가장 큰 변곡점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 본관과 관저 신축으로 인한 지형의 변화, 노무현 대통령 시절 공간을 분리하던 A, B 철책의 제거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시절 G20 정상회의를 위해 수행된 대대적인 공간 정비로 파악된다. 경복궁 후원 영역이 2022년 5월 10일 시행된 청와대 국민 개방으로 인해 또 다른 변곡점을 맞을 것으로 예상되며, 현황을 잘 보존하면서 경복궁 후원이 가진 역사적·학술적·경관적 가치를 평가하는 작업이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경관 프로슈머로서 한복나들이 향유계층과 방문 장소 특성 연구 - 경복궁을 대상으로 - (Characteristics of Places to Visit and Hanbok-Trip Class as a Landscape Prosumer - Focused on Gyeongbokgung Palace -)

  • 전성연;성종상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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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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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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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한복나들이의 행위 주체인 한복나들이객과 그들이 방문하고, 선호하는 장소의 특성을 밝힘으로써 경복궁에 한복나들이객이 집중되는 요인을 규명하는 것이다. 한복나들이객의 자발적 취미활동을 경관 프로슈머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도시경관적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한복나들이객을 대상으로 심층인터뷰, 현장인터뷰, 현장관찰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복나들이객은 다양한 층위가 있었다. 한복나들이객은 한복에 대한 인식, 이용방식, 활동에 따라 선도그룹, 진입그룹, 단순체험그룹으로 구분되며, 선도그룹과 진입그룹은 한복나들이 활동의 지속성에 따라 자발적 취미계층으로 분류된다. 한복나들이 장소로서 경복궁 방문 목적과 요인에 그룹별 차이가 있었다. 선도그룹은 홍보, 모임, 문화 활동을 위한 장소와 주변 목적지에 방문하기 위한 집결장소로 경복궁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경복궁의 전통적인 경관 외에 교통 편리성, 경복궁과 주변지역의 전통문화 전시 및 행사가 주 요인으로 나타났다. 진입그룹은 경복궁의 전통적인 경관과 주변 문화시설 이용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체험그룹은 경복궁의 전통적인 경관과 한복 착용자가 많은 점이 방문 요인으로 작용했다. 단순체험그룹은 한복나들이 장소로 경복궁을 최초로 방문하고 있어, '한복나들이 입문 코스', '한복놀이터'로서 경복궁의 새로운 장소성을 확인하였다. 한복나들이 향유계층은 오프라인의 실제 장소에서 장소와 경관을 소비하고, 동시에 새로운 경관을 생산하며, 소셜미디어와 1인 미디어 등 온라인에서 경관 이미지를 생산함으로써 '경관 프로슈머'적 성향을 지닌다. 이들의 다채롭고 자발적인 움직임은 도시경관에 역동성을 부여하며, 이는 도시의 새로운 문화자산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국내외 소비자학 및 마케팅 분야에 국한되어 연구된 프로슈머의 개념을 한복나들이객이라는 자발적 취미계층을 통해 '경관 프로슈머'를 개념화하고, 도시경관적 의의를 고찰하였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의의가 있다.

고종조 중창된 경복궁 후원 영역 및 건축 규모 분석 연구 -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본 북궐후원도형 및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Area of Rear Garden and its Architectural Dimension at Gyeongbok Palace Constructed during King Gojong's Reign)

  • 김성도
    •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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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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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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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This thesis aims to determine the size of the rear garden and its architectural dimension at Gyeongbok Palace constructed during King Gojong's reign by analyzing Bukgyeol dohyeong(Site plan of Gyeongbok Palace) and Bukgyeol huwon dohyeong(Site plan of Rear Garden of Gyeongbok Palace) applied of scale unit and made from 1905 untill 1909. The results of this study were as follows; With respect to its site, the maximum horizontal length is estimated to be around 448m, the maximum vertical length is around 544m, and the entire area is around $203,905m^2$. Concerning the architecture, the total number of the buildings made up of one or more gan(間) is 32 and the total number of its gan is 292.5, etc.

경복궁 녹산(鹿山)의 성립과 경관적 의의 (A Study on the Formation and Landscape Meaning of Noksan in Gyeongbokgung Palace)

  • 이종근;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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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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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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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녹산은 경복궁 내부에 위치한 구릉 형태의 녹지로서 문화재공간으로 주목받지 못한 장소이다. 이에 본 연구는 녹산이 성립된 배경과 변화 양상을 고찰하여 경관적 의의를 도출하고자 실록, 지도류, 사진에 대한 문헌 분석과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연구 결과 녹산의 정체성은 풍수적 내맥(來脈), 소나무림, 사슴과 관련되며, 경관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복궁전도」 외 다수의 고지도에는 백악으로부터 경복궁 내부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들이 묘사되었는데, 그중에서 녹산은 강녕전과 문소전으로 이어지는 내맥에 위치함으로써 형성된 숲이다. 북궐도상에서 녹산에는 육우정(六隅亭), 남여고(藍與庫), 녹직처소(鹿直處所), 그리고 남북 방향의 어구와 담장이 표현됨으로써 최소한의 시설과 숲으로 구성된 원형경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세종대에 경복궁의 북쪽 궁장이 건설되었으며, 경복궁 창건 시기에 연조 뒤쪽부터 신무문 안쪽을 후원으로 인식했던 반면에 경복궁 중건 시기는 신무문 밖에 새로운 후원 영역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녹산만 내맥의 산줄기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신무문 밖 후원에 대규모 관사가 건립되고 경무대 부지에 총독관저와 도로가 개설되면서 지형이 크게 변화되었다. 여기에 1967년 청와대와 녹산 사이의 청와대로가 신설되면서 녹산은 백악산록과 단절되었다. 셋째, 내청룡에 해당하는 경복궁 북동쪽의 풍수적 형세가 부족하여 소나무를 심어 지맥을 배양하였던 점과 임진왜란 이전 경복궁 배치도에 '소나무밭(松田)'이라고 표현된 사실에서 녹산의 원형이 된 숲의 주요 성상을 파악하였다. 발굴조사로 확인한 상수리나무, 벚나무, 느릅나무, 밤나무가 어우러진 소나무림을 원형 식생경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녹산에는 성토로 인하여 어구가 사라지는 등 지형이 바뀌고 아까시 등 외래수종과 관상용 향나무 등이 식재되었다. 현재는 소나무림의 비중이 줄고 상수리나무림, 낙엽활엽수혼효림, 일부 가죽나무림과 버드나무림으로 구성된 숲을 이루고 있다. 넷째, '녹산(鹿山)'이라는 명칭이 신령, 장수, 영생, 왕권을 상징하는 사슴으로부터 유래된 사실을 '경복궁 녹원에서 기르던 사슴 일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굶어죽었다'는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통해서 확인하였다.

경복궁 후원 수림의 변화과정 및 주요 노거수군의 역사적 가치규명 (A Study on the Historical Values of the Changes of Forest and the Major Old Big Trees in Gyeongbokgung Palace's Back Garden)

  • 신현실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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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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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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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고는 최근 74년만의 개방으로 수많은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는 청와대 경복궁 후원 공간의 변화과정을 통하여 후원 경관의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고자 조선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도성대지도, 북궐도형, 경복궁 복원기본계획 등의 사료와 도면 등을 근거로 경복궁 후원의 시원과 발달과정을 고찰하였고 이를 통하여 다음의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은 고려시대부터 명당으로 이름난 지역이었고 당시 남경으로 명명되며 신궁이 조성된 지역이었고 고려시대 이미 풍수도참사상과 주국의 고공기의 영향을 받아 궁성과 궁궐이 조영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전기 경복궁 후원은 궁궐의 후원으로 각광받지 못하였으나 고종 시기부터 현재까지 국가 통치권자의 생활공간으로서의 장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둘째, 후원의 경계는 도성지도, La Coree, 경무대일원, 일본지리풍속대계, 한국사진첩, 조선건축도집, 경성부 도시계획 조사서 등의 문헌을 통해 신무문 밖 현재의 청와대 권역이 경복궁의 경외에 조성된 후원임을 규명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황폐화된 지역을 고종시기 중건과정을 거쳐 공사(公私)가 결합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후원의 전각들이 이건되거나 훼철되며 법궁의 후원으로서의 장소성이 훼손되었으나 광복 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며 다시금 통치자의 장소라는 가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셋째, 경복궁 후원은 왜란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공간의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지형적 변화가 가장 큰 곳은 조선총독부관저가 건립되었던 경농재 일원으로 토지의 용도변화가 빈번하였다. 반면 현 경무대지역과 소정원 옆 수림과 백악의 수림은 전통적 수림의 형태를 계승하며 보존되었다. 이를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1:1200의 경무대관저경내부지배치도와 위성사진을 신무문 기준으로 중첩하였고 그 결과 백악에서 발원한 물길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존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물길을 따라 오늘날까지도 수림지역이 변화하지 않고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넷째, 전통적 수림경관이 계승된 지역들은 지형의 기능적 변화가 미비하였고 더불어 주요 노거수군이 존치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노거수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는 지표수종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녹지원에 자리한 반송은 융문당 옆 식재된 반송 중 일부가 보존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며 국가원수와 중요 귀빈들의 만찬 시 포토존으로 활용되어온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청와대 내 경복궁 후원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사료들에 대한 발굴을 통해 공간의 가치를 명확히 규명하고 시대별 정원고고학적 층위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또한 경복궁으로부터 청와대로 이어지는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역사경관을 보존하기 위한 근거는 과거부터 영속되어온 청와대 경복군 후원 노거수군의 영역대를 훼손하지 않아야하며 청와대 내 수림을 전수 조사하는 후속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