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경국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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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법전에 기록된 산림·조경 분야 시기별 중점 추진 사항 분석 및 의의 (A Significance of Key Milestones for by Period to Create based on the Analysis of the Details of the Forestry and Landscape Fields Described in the Law Codes of the Joseon Dynasty)

  • 이현채;윤정원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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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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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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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조선시대 법전류에 기록된 산림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을 통하여 그 당시 산림문화의 전반적인 사항을 파악 후 국민의 산림문화 충족 욕구에 부응하고자 수행하였다. 조선시대 법전류(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에 기록된 산림 관련 조항을 통해 산림행정과 정책의 변화과정 및 산림의 경관상 변화를 고찰할 수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분석을 통해 특수한 수종이나 특정 지역에만 생산되는 수종에 대한 관리와 특정 지역 경관 관리에 신경을 많이 기울였다는 것, 금산 관리 규정에 있어서 벌채를 금하는 수준을 넘어 재식과 배양뿐만 아니라 경관 조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산림의 사유를 금했었으나. 상·장례에 있어서 분묘 주변의 일정 범위의 산림에 대한 소유를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경국대전』의 기록관리 규정 (A Study on Records Management System through Kyeonggukdaejeon(經國大典))

  • 백선혜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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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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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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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이 글에서 필자는 조선시대 기록관리체계는 어떠하였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경국대전"의 전체 규정을 기록관리의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생산과 관리라는 두 단계의 기록관리로 나누어 검토하였는데, 생산단계는 기록생산자에 의한 생산 및 관리가 이루어지는 단계이고, 관리단계는 사관(史官)에 의한 기록관리가 이루어지는 단계이다. 생산단계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원본이지만 관리단계에서 기록관리는 원본의 '찬집'으로 나타난다는 차이점이 있다. 생산단계의 공기록 규정인 생산 관리 규정, 발송 발급 규정, 업무 담당자 규정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생산단계의 공기록은 자체적인 체계를 갖추고 생산 관리되고, 발송 발급 등의 경로로 행이(行移)되고, 보관 이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관리단계의 공기록 규정인 관리 조직 인력 업무 규정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공기록 관리조직으로서 춘추관은 일정한 정규관원으로 구성된 단일조직이 아니라 15개 중앙행정관서의 관원들이 겸임으로 참여하는 복합조직이었다는 점, 사관의 담당 업무인 사초 작성과 시정기 찬집을 통해 드러나듯이 중앙행정기록을 생산하는 조직으로서의 성격과 관리하는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는 점, 국왕중심역사(왕조실록)편찬의 중심조직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영구보존기록으로서 실록은 기본적으로 접근이 금지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현대의 '이용을 위한 보존기록'의 성격과는 다르며, 또한 원본을 폐기하고 내용을 남긴 점에서 현대의 원본 중심의 기록관리체계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것으로 파악되었다.

무경칠서(武經七書)를 통해서 본 조선전기 무과시취(武科試取)에 관한 연구 (The Study on Mugyeongchilseo through Mukwashichwi in Early Joseon Dynasty)

  • 곽낙현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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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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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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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 연구에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병전(兵典)"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안에서 태조부터 명종시기 기록을 활용하여 조선전기 무과시취(武科試取)에서 무경칠서(武經七書)가 무과시취 도시조(都試條) 강서과목에 지정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과의 시취과목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무예는 활쏘기와 창 쓰기를 중심으로 시행되었고, 강서는 병서와 사서삼경으로 시험을 보았다. 둘째, 무과시취(武科試取)를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병전(兵典)"안에 시취(試取) 무과조(武科條)와 도시조(都試條)를 기준으로 과목과 내용을 살펴보면, 무과조(武科條)는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무예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 등이 동일하며, 특히 전시(殿試)에서만 기격구(騎擊毬)와 보격구(步擊毬)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강서는 복시(覆試)에서만 시행되었는데, 사서오경 중 1서, 무경칠서(武經七書) 중 1서, "통감(通鑑)", "병요(兵要)", "장감박의(將鑑博議)", "무경(武經)", "소학(小學)" 중 1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통해 시험을 보았다. 셋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보이는 무과시취(武科試取)의 경우 강서에는 사서, 오경, "통감(通鑑)", "소학(小學)", "장감박의(將鑑博議)" 등은 공통적으로 보인 반면, "병감(兵鑑)", "병요(兵要)", "진설(陣說)", "진도(陣圖)", "병장설(兵將說)" 등의 병서가 산견되어 보였다. 이처럼 여러 종류의 강서 서적이 나타나는 것은 법제적으로 무과시취(武科試取)의 기준이 정비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된 성종대 이후로는 강서의 기준 서적이 지정되어 시행되었다. 넷째, "손자(孫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위료자(尉?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삼략(三略)", "육도(六韜)" 등 무경칠서(武經七書)는 무과시취(武科試取) 강서에서 다른 병서들과는 달리 모든 시취유형 및 무관 규정 등에서 한 번도 누락된 점 없이 연속해서 무과시취(武科試取)의 강서과목으로 존재했다. 비록 무경칠서(武經七書) 중 "손자(孫子)"를 선정하여 강독한 점은 있지만, 조선의 국왕 및 문무 관료들이 무경칠서(武經七書)에 기재된 전략 및 전술의 내용이 지략을 갖춘 무관을 양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서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十五世紀 朝鮮의 水産業 (A study on fishing and salt industry of Korea in the 15th century, A. D.)

  • 노도양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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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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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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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
  • 금일과 같은 한국 항간의 모든 지리적 구조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15세기 한 이씨조선의 초기는 확실히 한 획기적인 시대가 된다. 15세기 조선의 수산업에 관한 역사는 이조실록.경국대전을 비롯하여 비교적 풍부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 그러한 것이지, 우리 지리학적 입장에서 볼 때에는 대단히 근소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시대의 수산업에 관한 정책적 기록 또는 제도. 징설 등에 이르러서는 어느 정도 깊이있는 연구가 가능하나, 어장과 어류, 어염 등의 기술, 수산업의 지역성 등에 관한 연구는 사료의 제한을 받아 난해한 점이 많다. 15세기 조선의 수산업에는 어업을 비롯하여, 양어. 채곽(해초채집). 제염업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본고에서는 어업과 염업만을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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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의 전제법(田制法)과 산학(算學) (Mathematics in the Joseon farmland tax systems)

  • 홍성사;홍영희;김창일
    • 한국수학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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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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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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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The Joseon dynasty (1392-1910) is basically an agricultural country and therefore, the main source of her national revenue is the farmland tax. Thus the farmland tax system becomes the most important state affair. The 4th king Sejong establishes an office for a new law of the tax in 1443 and adopts the farmland tax system in 1444 which is legalized in Gyeongguk Daejeon (1469), the complete code of law of the dynasty. The law was amended in the 19th king Sukjong era. Jo Tae-gu mentioned the new system in his book Juseo Gwan-gyeon (1718) which is also included in Sok Daejeon (1744). Investigating the mathematical structures of the two systems, we show that the systems involve various aspects of mathematics and that the systems are the most precise applications of mathematics in the Joseon dynasty.

조선시대 능참봉직(陵參奉職)의 조경사적 의의 (A Study on the Landscape Architecture Historical Significance of Reung Chambong in the Joseon Dynasty)

  • 신현실;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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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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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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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의 관리를 담당한 관직인 능참봉직을 소재로 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각종 의궤(儀軌), 능지(陵誌), "일성록", 능참봉 일기 등 관련 고문헌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능참봉의 조경가적 역할을 규명하는 기초연구로 수행되었으며, 요약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능참봉(陵參奉)은 종9품 참봉 2인으로 구성되고 능참봉직은 생원 진사 혹은 유학중에 삼망(三望)을 거쳐 임명이 되는 음직(蔭職)으로 임용기준은 '연소하지 않고 경륜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으며, 왕릉수호의 상징성으로 인해 관직진출의 수단이 되었다. 둘째, 능참봉의 업무체계는 품계서열을 따랐으나 지리상의 여건 등으로 봉심과 능의 공사감독 등 실제보다 많은 권한과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능수호군 관리 및 능지작성 등 조선왕릉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셋째, 능참봉의 조경관련 직무 중 봉심은 능상의 석물이나 사초, 정자각 등을 정기적으로 예찰하여 예조에 보고하는 것이며,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봉심의 체계와 방법 등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넷째, 능참봉의 조경관련 직무 중 수목관리 및 능역공사 감독은 조경식물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관리능력과 건축 토목을 망라한 공간에 대한 다양한 식견이 요구되는 직무로 조선왕릉의 현장관리 실무자로써 지방관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유동성 확보와 산림부산물 처리에서 암묵적 권한과 관리 책임이 부여되었으며, 오늘날 조경가의 직무성향과 관련성이 깊다. 능참봉의 조선시대 조경관련 직무에 대해 좀 더 폭넓은 문헌 발굴 및 고증으로 조선시대 능참봉의 조선왕릉 조경관리자로서의 역할과 능참봉과 조선왕릉의 조경사적 가치 규명을 위한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

이동식발전설비의 기동전동기용 전자식 시동 제어장치 개발 (Development of an Electronic Starting Controller for Starting Motor of Packaged Power Systems)

  • 김종수;윤경국;서동환
    • Journal of Advanced Marine Engineering and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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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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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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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동식발전설비에서 시동장치의 핵심기술은 피니언기어 쉬프팅 장치와 초기 기동전압을 제한하는 것이며 기존의 제품에서는 기계적 주접점을 이용한 시동 제어장치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완전한 피니언기어 쉬프팅 후 시동전동기의 기동의 불확실성이나 대전류에 의한 주접점의 아크손상 등의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동의 불확실성 제거를 위한 피니언기어 쉬프팅 제어회로, 대전류에 의한 접점의 아크손상 방지를 위해 반도체 소자를 이용한 시동 제어시스템, 직권전동기의 소프트 스타팅을 위한 기동 안전장치 등을 새롭게 설계, 제작하여 안전성과 신뢰성을 얻고자 하였다. 또한, 피니언기어 제어회로와 전동기 전원회로를 분리하여 전기적 안전성을 확보하였다.

조선후기 호위제도의 고찰 (Study on the Guarding System in the latter "Choson" era)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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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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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9-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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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조선시대의 경호제도는 경국대전 세조, 예종 때에 완비되고 성종 때에 보충됨으로 써 이 법전을 근거로 하여 우수한 군사를 선발하여 근접경호를 담당하는 금군과 수도 방위와 시위임무를 담당하는 중앙군에 편성함으로써 왕실호위체계가 확립되었다. 임진왜란을 기준하여 볼 때, 전기에는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정로위로 구성되었던 금군이 후기에 들어 상황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였다. 조선전기에 국왕의 신변보호와 수도권 방위에 주력하던 금군의 임무가 임 병 양란의 영향으로 변란과 외적침입을 막아내는 전쟁을 아울러 수행 하는 상황에서 전에 임시방편적으로 설치되었던 비변사의 역할이 확대되는 등의 군사제도의 변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5군영제의 실시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3 군영이 국왕 호위와 수도방위를 담당하였고, 총융청, 수어청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수도권외곽의 방어를 담당케 하였다. 따라서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금군의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인원이 대폭 증가되고 현실인식과 자아각성으로 인한 서민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왕실과 국가의 호위체제에도 상황에 따라 변화가 잦게 되었다. 그러나 종전에 있던 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어 실제로 호위를 맡은 군사보다 명분상의 숫자가 늘어난 결과가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호위청, 금군청, 숙위소, 장용영 등의 금군의 재편성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뒤따르는 재정적 뒷받침에도 문제가 되는 가운데 기존의 기본조직들의 위상에 대한 변화도 심해졌다. 정조의 등극은 호위제도의 변화에 획기적인 시대였다. 정조는 친족들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숙위소를 신설하고 장용영을 강화하여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고 당대에 한했지만 왕권을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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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기록관리 체계의 이해 (An Understanding of the Archival Management in Early Joseon Dynasty)

  • 오항녕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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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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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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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고에서는 조선전기 기록관리 체계의 윤곽을 살펴보면서 그 성격을 검토하였다. 먼저 과거의 기억, 당대 기록의 작성, 기록을 통한 미래의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실록의 성격에 대하여 기록학 개념을 통해 점검해보았다. 조선전기 과거의 정리는 기존 역사서의 연구와 간행을 병행하면서 진행되었다. 국사(國史) 영역에서는 정사(正史)인 "고려사", 편년인 "고려사절요", 통사인 "동국통감"으로 귀결되었다. 동아시아사 편찬은 "치평요람"으로 나타났다. 조선초기에는 국사와 동아시아사에 관한 정사와 통사가 편찬됨으로써 과거 경험의 활용이라는 실제적인 필요에 부응하였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이전 시대인 고려와 중국의 역사기록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정은 자연스럽게 조선의 정통성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관료제는 조선 정부의 기록관리 체계를 더욱 발전시켰다. 직무의 연속성과 증거능력을 중시하는 관료제는 필연적으로 문서 생산을 증대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중국 명(明)의 "홍무예제"를 차용하기도 했으나, 곧 "경국대전"에서 조선 나름의 행정문서 관리 방식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조선의 당대 기록관리는 이원적인 구조로 이루어졌다. 일반 행정문서는 생애주기론에 따라 살펴보았을 때 근대 기록관리와 큰 차이가 없었다.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사초의 작성과 실록의 편찬이었다. 그래서 사초와 실록의 편찬을 기록학의 원본성과 신뢰성 개념을 통하여 검토하였다. 공적 권한을 가진 사관에 의해 생산되는 점에서 사초와 실록의 원본성은 물론이고, 형식과 생산 절차를 고려해보았을 때 이들 기록의 신뢰성도 인정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다만, 역사학의 사료비판에서 말하는 1차 사료/2차 사료라는 기준은 좀더 개념화가 필요하며, 그 이후에 기록학의 개념과 유용한 조정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조선전기 사람들에게 과거의 기억과 당대의 기록은 곧 미래를 전망하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는 조선 건국 이래 향후 조선을 이끌어갈 정책과 이념을 창출하였으며, 당대 역사를 기록하고 관리했던 체계인 사관제도는 문한(文翰) 기구로써, 조선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지탱하는 제도였다. 그 정착과정에서 나타났던 갈등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의 상반된 역사해석조차 동시에 남기는 문화적 풍토, 즉 조선후기 수차례 실록의 수정에도 불구하고 먼저 편찬된 실록을 함께 남기는 '주묵사(朱墨史)'로 상징되는 기록문화를 창출하였다. 변전하는 현실 정치 세력의 이해조차 역사와 기록을 통하여 남기고, 뒷사람들에게 그 평가를 위임하였던 역사의식의 소산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평정모(平頂帽)의 명칭 검토와 제작방법 (Name Review, and Production Method of Pyeongjeongmo, Housed by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 이은주;진덕순;이정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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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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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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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6점의 '평정모' 유물에 대한 명칭을 검토하여 그간 사용해 온 '평정모'라는 명칭의 오류를 바로 잡고 유물을 토대로 제작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유물 재현에 활용하거나 궁중의례 재현용 관모 제작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평정모'라는 명칭은 '평정건'에서 유래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녹사(錄事)는 유각평정건(有角平頂巾)을 쓰고, 서리(書吏)는 무각평정건(無角平頂巾)을 쓴다고 하였으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평정모 유물은 녹사나 서리가 사용하였던 평정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오히려 세자궁 빈궁의 별감(別監)이나 수복(守僕) 등이 사용하던 흑주두건(黑紬頭巾), 또는 조건(?巾)에 해당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유물 조사를 통해 재단 방법과 바느질 방법, 완성된 형태와 접어 보관하는 방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정모의 구조는 동일하나, 접었을 때 정면에 드러나는 형태에서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를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평정모는 한 조각으로 평면 재단하여 접는 방법으로 입체적인 모자로 만들었는데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조를 이루었다. 머리둘레는 55~59cm이며, 높이는 19.4~21.5cm이다. 1장으로 재단하기 위하여 머리둘레에 해당하는 부분을 식서 방향으로 재단하였다. 유물 <창덕 23820>을 토대로 재료 준비, 배접하기, 중심 장식 만들기, 바느질하기, 접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재현품을 제시하였다. 미리 계산된 독특한 형태로 재단된 흑색 주(紬) 겉감에 삼베를 배접하여 재단을 마무리하였다. 머리 윗부분은 검정색 실로 징궈 주었고 뒤 중심선은 소색 면사를 사용하여 3.5~4cm 간격의 블랭킷스티치로 고정하여 형태가 완성되었다. 앞 중심의 접힌 부분 안쪽에는 착용 시 앞쪽 형태를 곧게 유지하기 위하여 대나무 심을 넣고 흰색 면사로 일정한 모양의 스티치를 해서 고정시켰으며 뒤쪽에는 망건에 고정할 수 있는 길이 2.5cm, 너비 0.6cm 크기의 대나무 첨자(籤子)를 달아 착용 시 벗겨지지 않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