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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현동(松峴洞) 일원 역사문화경관의 통시적 연구 (A Diachronic Study on Historical and Cultural Landscape of Songhyeon-dong, Seoul)

  • 강재웅;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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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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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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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경복궁 옆 송현동 일원에 문화공원을 조성하기로 계획된 사실을 배경으로 '송현(松峴)'이라는 장소가 인식되었던 조선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관련 문헌과 도면자료를 분석하여 주요 시기의 역사문화경관을 파악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송현동 일원의 경관을 통시적으로 고찰하기 위하여 주요 필지의 소유주를 파악하고 토지이용과 경관구성요소를 추출하였다. 1392년 조선의 건국 이래 송현은 풍수지리사상에 의하여 '경복궁의 내청룡(內靑龍)'으로 이해됨에 따라 국가에 의해 '소나무숲'이 관리되었다. 1410년 태종이 실시한 전제 개혁과 도시계획의 영향으로 국가 창고 '분감(分監)'이 세워지고 영세한 과일가게 '우전(隅廛)'이 조성되었다. 19세기 이후에는 상류층 가옥으로서 '가성각(嘉聲閣)', '창녕위궁(昌寧尉宮)', '벽수거사정(碧樹居士亭)'이 존재하였다. 1919년 조선식산은행이 부지를 매입하면서 대규모 관사단지인 '식은사택(殖銀舍宅)'이 조성되었으며, 이는 1948년 미국으로 이양되어 '미국대사관 직원숙소'로 사용되었다. 둘째, 도출한 시기별 경관구성요소의 존속기간과 함께 위치를 비정하여 물리적 실체를 파악함으로써 시대별 사회상과 결부된 입지관(立地觀)의 변천을 확인하였다. 풍수지리적 세계관 속에서 궁궐의 왼편을 비보(裨補)하는 '내청룡'으로 인식된 소나무숲은 부지 서쪽 고지대에 있었다. 동시기 동쪽의 평탄한 구역은 각종 정부시설과 시장에 인접한 길목에 다양한 계층이 모여드는 '여항(閭巷)'으로 여겨졌다. 19세기 이후 소나무숲에는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원림이 들어서 '성시산림(城市山林)'으로 이해되었다. 오랫동안 도심 속 대형 필지로 존재하였던 송현동 일원은 20세기 일제에 의해 '이상적 건강지(理想的 健康地)'라는 관념 아래 개발되었다. 이로써 조선시대 전통적 복거관(卜居觀)을 고수해 온 송현동 일원의 장소성이 단절된 것이다.

우리나라 해안림조성과 관리의 이론적 고찰 (A Theoretical Review on the Planting and Management of Coastal Forests in Korea)

  • 김용식;김도균
    • 한국자원식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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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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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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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한반도 해안림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해안림의 조성과 관리에 대한 역사, 목적, 주체, 대상지, 규모, 조성방법, 식재수종, 식재지반, 층위구조, 관리제도 등에 대하여 이론적 고찰을 하였다. 해안가의 주민들은 삶의 터인 정주지에 당면한 바닷가의 잦은 자연재해로부터 안전과 풍수지리학적 경관의 비보를 위하여 해안림을 조성하였고, 관청은 자연재해나 군사목적으로 조성하고 관리하였다. 한반도의 해안림은 기록상으로 고려시대와 이조시대에는 민간과 관청이 주도적으로 조성하고 관리하였으나 1970년대 후부터는 민간, 관청, NGO단체, 종교단체, 기업 등이 참여하고 있다. 해안림의 조성과 관리는 기본적으로 해안가의 재난방지, 풍수적 비보, 군사적 이용, 목재생산을 위하여 조성되었지만, 부대적으로 신앙의 장소, 질병감소, 화재의 감소, 임산물 생산성의 증가, 어류의 증가, 풍치 경관 쾌적성의 향상, 관광객과 이주자의 증가, 문화예술의 동기부여, 휴식, 심신단련의 장, 공동체 결속, 전통문화의 계승, 교육, 생물의 서식처, 생물이동통로, 생물다양성 등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해안가로부터 재난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해안림 보전에 대한 인식이 강하고, 해안림을 자자손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유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해안림은 학술적 측면에서 인문, 사회, 문화, 생물, 생태, 풍치적 이용 등에 대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한반도 해안림은 한번 훼손되면 다시 회복되기 어려운 환경압이 높으므로 자자손손 후대에 온전하게 물려주어야 할 사명으로 관리하고 보전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본 연구는 한반도 해안림에 대한 이론적 고찰에 국한된 것으로 실상을 면밀하게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향후 우리나라 해안림에 대한 조성과 관리 그리고 민속과 문화 등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인 현장조사를 통한 연구가 필요하다.

지리산 외고개습지의 수문지형특성과 경관변화 (Hydrogeomorphological Characteristics and Landscape Change of Oegogae Wetland in Jirisan National Park)

  • 양해근;이해미;박경
    • 한국지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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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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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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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외고개습지는 지리산국립공원내 아고산대의 산사면에 형성된 습지이다. 외견상으로 보아 외고개습지는 현재 잘 보존된 습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산지습지들이 고산지대의 정상부 등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하여 외고개습지는 비교적 급경사의 산지사면으로부터 평탄한 계곡으로 전이되는 지점에 발달하고 있다. 외고개습지는 현재도 퇴적이 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퇴적층의 두께도 1m를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기반암은 편마암과 편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풍화에 강한 기반암층에 의한 불투수층 형성이 습지형성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습지로부터 유출되는 하천수의 대부분은 습지에서 용출하는 지중수에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갈수기의 경우 하천수의 전부는 지중수의 용출에 기인하고 있다. 풍수기에 내린 강수효과에 의해서 습지의 유출량은 크게 증가하고, 그와 더불어 지중수 용출량의 비중 또한 커진다.

토양 및 식생변화에 따른 토지 사방 공사의 효과에 관한 연구 (Erosion Control Effect by Soil ansi Vegetation Transition in Mountainous Area after Soil Erosion Measures were Initiated)

  • 이천용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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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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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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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 산지사방공사후 시공년수 경과에 따른 토양 및 식생의 변화로서 사방효과를 구명하기 위하여 전국의 대규모 황폐지에 36개소의 plot를 설정하여 사방시공년차별로 식생의 피복도와 출현종 상장 및 토양을 조사하기는 시공후 7년으로 이후 임관의 소개가 필요하다. 1) 하중인관과 상층식생의 피복도가 가장 적당한 시공후 7년으로 이후 인관의 소개가 필요하다. 2) 하층식생의 종수는 임관울폐직전인 6년까지 증가하다가 울폐후 감소하였다. 3) 수고생장은 아까시나무, 물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 순으로 좋았으며 이까시나무는 초기에 왕성한 생장을 보이다 계속 감소하였고, 물오리나무는 시공후 12토양내 양료부족이 가장 큰 원인으로 나타났다. 4) 사방수종은 식재후 8년내에 약 50%가 고사하였는데 물오리나무와 아까시나무는 그 후에는 계속 잔존본수가 감소하였고 리기다소나무는 시공10년후부터 ha당 500 본을 유지하였다. 5) 시공년수가 경과할수록 풍화토실이 깊어지고 견밀도가 낮아져 시공후 14년에는 토양의 물리적인 성질이 어느정도 개량되었다. 6) 토양내 pH는 시공직후 5.3에서 20년에는 5.1로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7) 유기적과 질소함량은 시비의 영향으로 3년까지 급증하다가 그 후부터는 점증하였다. 그러나 임목생육에 필요한 양에는 20년이 되어도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8) 토양내인산함량은 초기에는 시비의 영향으로 높았으나 급격히 감소하여 시공후 5년부터는 절대량이 부족하므로 지속적인 시비가 요구된다. 9) 물질생산량은 아까시나무가 가장 많은 양을 보이면서 20년까지 계속 증가한 반면 물오리나무는 15년간부터 감소하여 갱신이 요구도며 20년된 사방시 1ha의 지상부총물질생산량은 105.7 ton이었다.>$\ulcorner$표현$\lrcorner$의 모습으로, 반면에 농촌취락들에서는 자연의 조건에 공존 또는 의존하는 모습의 $\ulcorner$순응$\lrcorner$적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 우리나라의 취락에 게재된 $\ulcorner$순응$\lrcorner$이란 큰 특징은 풍수적 개념 드에 의해 이루어졌던 형태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민담에서도 풍수가 주제가 되는 경우가 있고, 일반적으로는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통하여 취락민이지녀온 자연요소에 대한 인식관 또는 그러한 생활에서 나타나는 윤리관 등이 암암리에 표현되기도 한다. 민담을 통하여 우리는 주민들 의식 속에 남아있는 취락의 중요한 요소나 장소들을 찾아볼수 있고 더불어 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을지도 모를 생활모습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ulcorner$순응$\lrcorner$의 다른 일면 또는 때에 따라서는 극히 의도적인 $\ulcorner$표현$\lrcorner$적인 한 면모 - 그 대표적인 경우로 정원을 구성하는데 개재된 인간의 의미는 무언가를 표현 또는 표출하고자 함에 있다는 점 -라 볼수도 있을, 예로써 성리학적 사고관념으로써 집과 정사 그리고 주변 경관을 자신의 내적본직 또는 윤리적 영역으로 삼아 묘사.표현.구체화 시켜가기도 한다. 최소한 동족부락의 한두 예들에서 그러한 $\ulcorner$표현$\lrcorner$적 의도에 의한 경관구성의 일면을 확인할수 있지만 엄밀히 생각하여 보면 이러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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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원형경관 고찰 (A Study on Prototype Landscape of Mujang-Eupchi(茂長邑治) during Joseon Dynasty)

  • 심순희;송석호;김충식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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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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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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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전통도시인 조선시대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특성을 고찰하여 원형경관을 규명하는데 주력하였다. 요약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무장읍치는 태종17년(1417)에 축조된 무장읍성(茂長邑城)을 중심으로 동쪽에 향교를 세워 문묘를 조성하고, 서쪽에 사직단을 두었으며, 읍성 내에 성황사를 세웠고, 북쪽의 진산(鎭山)인 한제산에 성황단과 여단을 배치한 유교적 공간체계를 보였다. 진산에 위치한 성황단의 경우 읍성 내의 성황사와 공존체제를 유지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읍성의 남문 앞으로 V자형 풍수계(風水溪)가 흘러 안산(案山)인 남산 앞에서 수구(水口)를 이루는데, 고을의 기운을 보호하기 위해 남지(南池)인 홍문제(紅門堤)를 조성하고 관풍정(觀豊亭)을 조영하였다. 19세기에 홍문제는 무흥제(茂興堤)로, 관풍정은 무흥당(茂興堂)으로 개칭된 것으로 보았다. 남지에는 원도를 비롯하여 읍수(邑藪)가 식재되고 송덕비와 당산목, 돌당산이 수구막이 역할을 하며 읍치 입구를 비보한 특징을 보였다. 그러나 1955년경에 남지가 매몰되고 이후 시장이 들어서면서 원형의 모습을 잃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 부군면 통폐합(府郡面 統廢合)으로 멸실 위기에 처한 고을의 칠거리 명칭과 위치를 구명하였다. 칠거리당산은 음양론에 따라 주로 할아버지당산 입석과 할머니당산 신목이 구성의 주체가 되었다. 칠거리당산은 마을을 수호하려는 공동체적 신앙장소로서 마을 경계에서 출입을 관장하는 일곱 관문 역할과 읍치내맥을 비보하는 입지특성을 보였다.

순천 초연정(超然亭) 원림의 문화경관 변용 양상 (A Study on the Cultural Landscape Metamorphosis of ChoYeon Pavilion's Garden in SoonCheon City)

  • 강병선;이승연;신상섭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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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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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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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순천시 송광면 삼청리 왕대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초연정이 왕의 피난처, 제각, 별업, 강학공간으로 변모되는 양상에 착안하여, 시기별로 변모되는 장소성과 문화경관의 변용양상을 탐색하고 그 의미를 추적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연재 송병선이 명명한 '초연'이란 정자명칭은 노자의 도덕경에 연원하는데, 순천 초연정을 비롯하여 포천 초연대, 가평 초연대, 창덕궁 후원 초연대, 유성 옥류각의 초연물외 등 정(亭), 대(臺), 각(閣) 등 공간속에 다양하게 투영되고 있어 도가적 풍류가 유가적 공간에 자연스럽게 접목되는 유불도 습합양상을 도출할 수 있다. 둘째, 초연정은 모후산 풍수경관과 수목석이 어우러진 계류풍광과 암경, 월출경, 도가적 이상향을 반영한 동천복지, 성리학적 이상향을 반영한 구곡처 등 승경향유의 요처에 절묘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왕대마을(왕의 주둔지), 유경(留京), 왕대사적 바위글씨, 그리고 오장대(장군기를 꽂아 놓은 자리), 모후산 등 고려말 공민왕의 피난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장소성을 갖는다. 셋째, 초연정의 아름다운 계류 암벽 바위글씨(趙鎭忠別業, 宋秉璿)를 통해 유가적 가치를 반영한 거점(별업)뿐만 아니라 도가적 동천복지로서의 영역성(1km 이내에 월청, 풍청, 수청 각자와 삼청동천), 그리고 외원권역을 확장하여 수변계류에 9곡 <세록교(洗鹿橋) 봉일대(捧日臺) 자미구(紫薇鳩) 운매대(雲梅臺) 와룡총(臥龍叢) 광석대(廣石臺) 은선굴(隱仙窟) 벽옥담(碧玉潭) 와석포(臥石布)>을 설정하고 산수유상과 강학, 경관미학적감수성 제고 등 수심양성을 위한 성리학적 낙토를 원림속에 담아낸 복합 문화경관 향유 양상을 보여준다. 넷째, 초연정은 1778년 대광사 승려의 수도처(水石亭)로서 선원 기능을 하던 장소인데, 1836년 조진충이 선조의 묘 앞에 제각을 지어 별업을 초창했고, 1864년 조재호는 기와로 중수하여 선조를 기리는 별업기능과 도가적 은일처로 활용하는 확장성을 추적할 수 있다. 이후 1890년 조준섭은 스승 연재 송병선에게 '초연'이라는 정자 명칭을 받아 강학처로 활용하는 등 (1)불교 수도처${\rightarrow}$(2)유교 별업처${\rightarrow}$(3)별업+도교적 풍류처${\rightarrow}$(4)별업+도교적 풍류처+강학처(성리학적 낙토)로 용도가 확장 변용되는 양상을 추적할 수 있다.

누항도(陋巷圖)와 누항록(陋巷錄)을 통해 본 이만부의 공간철학과 식산정사의 원형경관 (A Study on Lee, Man-Bu's Thought of Space and Siksanjeongsa with Special Reference of Prototype Landscape Analyzing Nuhangdo(陋巷圖) and Nuhangnok(陋巷錄))

  • 강병선;이승연;신상섭;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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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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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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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천운정사(天雲精舍)'는 식산 이만부가 1700년에 건립한 식산정사이다. 본 연구에서는 식산정사와 관련한 이만부의 생애와 은일관을 알아보고, 그의 정사경영의 결과물인 「누항록」과 《누항도》를 분석해 정사의 풍수적 입지와 영역성 및 원형경관을 추정하고, 은거한 선비가 자신의 공간에 담고자 했던 철학을 고찰하여 다음의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식산 이만부는 조선 후기 대표적 은둔형 유학자이다. 정사의 이름이자 이만부의 호인 '식산'은 마을의 뒷산(主山)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는 생각(思), 몸(躬), 말(言), 사귐(交) 네 가지를 쉬고자 했다. 다난했던 숙종년간 남인 집안의 이만부는 '식산'이라는 호를 통해 은둔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표상하였다. 둘째, 이만부는 식산정사의 입지, 공간구조, 건축물 및 조경시설물, 수목, 주변경관, 이용행태 등을 「누항록」에 기록하였고, 《누항도》화첩을 남겨 원형에 가까운 식산정사 복원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셋째, 이만부는 외노곡이 밖에서 보면 사면이 두로 막혀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아늑하고 깊숙하며 멀리까지 내다보인다는 풍수적 지리관을 언급하고 있으며, 노곡마을 전체를 일컬어 식산정사라 했는데 이는 명명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영역을 형성·확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식산정사의 공간구성은 연식공간, 교육공간, 후원공간, 휴식공간, 채원 및 약초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당과 루, 연지로 구성된 연식공간은 개인적 공간으로 호연지기, 천인합일의 흥취, 군자의 도리, 인을 생각하는 이만부의 거처이자 강학을 베풀던 공간이다. 다섯째, 양정재 영역은 교육공간으로서 양정재는 주역 몽괘에서 취한 이름으로 어린 학생들의 학문과 덕이 크고 밝게 성장하기를 기원한 이름이다. 여섯째, 간지정, 고반대, 세한단 등으로 구성된 후원공간은 식산정사 가장 안쪽의 숲이 우거진 곳을 정리하고 자연 입석과 고송을 병풍삼아 작은 정자를 지을 축대를 쌓은 곳으로, 멈춤의 미덕과 은자의 여유, 군자의 지조 등에 관한 뜻을 담고 있다. 일곱째, 식산정사 담장 밖 동쪽 시내 건너 고목이 우거진 곳에 단을 조성하여 영귀사라 하고 괴석을 쌓고 화초를 심어 휴식의 장소로 삼았다. 여덟째,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채소와 약초의 효능을 상세히 알고 있던 이만부는 정사 내에 채원과 약초밭을 가꾸었다. 아홉째, 식산 이만부는 식산정사의 각 공간별 건축물과 조경시설물에 대한 명명을 통한 의미 부여와 고사(古事)를 따른 식재를 통해 자신의 정사에 성리학적 이상향을 실현했음을 알 수 있다.

기문(記文)을 중심으로 고찰한 임대정원림(臨對亭園林)의 입지 및 조영 특성 (Location and Construction Characteristics of Imdaejeong Wonlim based on Documentation)

  • 노재현;박태희;신상섭;김현욱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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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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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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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임대정원림은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사평리 상사마을 끝자락에 서북향하여 자리하는데, 16C 남언기에 의해 조성된 고반원을 기반으로 1862년 사애 민주현에 의해 작정되었으며, 봉정산과 사평천을 배산임수하여 풍수적으로 번영과 행복을 상징하는 학체형국(鶴體形局)의 서출동류하는 길지이다. 공간구성은 '사애선생장구지소'로 각자된 표석과 향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앞뜰(전원(前園))과 정자와 방지원도형 연못을 포함하는 '대상부(臺上部)'의 내원(內園), 신선도를 둔 2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진 '대하부(臺下部)'의 수경원(水景園) 그리고 봉정산 수림과 외남천(사평천) 및 농경지를 포함하는 외원(外園) 등 총 5개 권역으로 구성됨으로써 임대정을 중심으로 위요 중첩된 원림적 속성이 강하게 표출된다. 시문과 현장조사 결과, 임대정원림은 안분지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기임 등 임수대산(臨水對山)한 터에 수심양성의 거점을 경영코자 했던 은일처로서의 장구지소, 귀거래를 위한 별서원림, 대자연의 도와 일체화를 이루고자 한 세심처(洗心處) 등의 작정동기가 확인되며, 애련설에 근거한 향원익청(香源益淸)적 개념의 피향지와 읍청당, 방지원도 그리고 도합 3개로 이루어진 삼신선도의 신선사상 등 다양한 의경 요소가 함축된 원지(園池)를 보이고 있다. 임대정원림의 경관처리기법으로는 봉정산의 원경과 달빛 투영미를 의도한 인경(引景), 사방에 펼쳐진 산수경관과 문화경관의 환경(環景), 대경(對景)으로서 도입된 목가적 전원의 차경, 수륜대로의 앙경(仰景)과 연못으로의 부경(俯景), 정자와 오솔길에서 취할 수 있는 정관(靜觀)과 동관(動觀), 계류수와 연못 등 수경공간의 인경(隣景), 버섯 또는 우산처럼 보이도록 유도된 임대정으로의 관경(觀景), 버드나무 어우러진 연못의 간경(看景), 격물치지의 의미를 담아 관념을 대입한 암각글씨의 의경(意境), 해돋이와 해넘이를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취경(取景) 등이 중첩되어 펼쳐지는 다양한 경관기법이 발견된다. 건립 초기에는 주로 은행나무, 대나무, 버드나무,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뽕나무, 가래나무, 오동나무 그리고 매화와 연 등의 식물이 도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전반적으로 유가적 품격을 반영하거나 도가적 풍류관, 미래번영을 염원하는 봉황사상 등이 내재된 의미경관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연못 주변에 도입된 열식법, 정자 주변에 펼쳐진 총식과 환식법, 녹음수를 활용한 점식법, 기념식수한 오동나무 등의 고식법, 소나무와 전나무를 양과 음으로 대응시킨 대식법 등 다양한 식재기법을 추적할 수 있다.

별서 명승 김천 방초정(芳草亭)과 최씨담(崔氏潭)의 입지 및 조영 특성 (Geographic Conditions and Garden Designs of Byeol-seo Scenic Site of Gimcheon Bangcho-Pavilion and Mrs Choi's Pond)

  • 노재현;이현우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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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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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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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문헌고찰과 현지조사를 통해 김천 방초정의 입지, 누정과 지당의 조형성 그리고 누정제영시의 경관의미 등 정원의장적 특질을 추적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방초정이 입지한 원터마을은 금잠낙지형(金簪落地形)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풍수형국으로, 방초정은 소통과 교유문화의 거점공간으로 자리 잡아 왔다. 연안이씨(延安李氏)의 본제(本第) 정양공종택(靖襄公宗宅)과 약 150m 이격된 누정형 별서 방초정의 당호 '방초'에는 "향긋한 풀이 무성한, 앵무가 사는 곳을 희구하겠다"라는 군자(君子)의 지조가 새겨져 있다. 둘째, 중앙 온돌방에 사방분합문을 달고 마루를 가설한 누각형 구조의 방초정은 열린 경관을 추구한 적극적 조망의지 뿐 아니라 "가례증해(家禮增解)" 간행 등 공적 용도의 공간성 또한 주목된다. 셋째, '최씨담(崔氏潭)'은 현존하는 국내 지당 중 전형적 '방지쌍원도(方池雙圓島)'를 갖는 유일한 정원유구로, 지당 내 공존하는 두 개의 섬은 주종(主從) 간의 의리와 부부애를 형상화한 정원시설일 뿐 아니라, 3개소의 입수구와 감천으로 향한 1개의 출수구는 저류 및 생태적 재처리 등 마을방죽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최적합화된 정원의장이다. 넷째, "방초정8영(芳草亭八詠)"과 이를 확대 재생산한 "방초정10경(芳草亭十景)"에서는 방초정을 중심으로 김천과 구성면의 자연 및 취락의 목가적 전원경(田園景)이 적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방초정 집경시는 사계사시(四季四時)와 기상현상 및 팔방(八方)을 고려한 경물포치를 통해 방초정과 원터마을을 소우주의 중심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는 지역의 거점 문화공간으로서 방초정별서명승에 대한 경관인식의 현현(顯現)이다.

경복궁 후원 수림의 변화과정 및 주요 노거수군의 역사적 가치규명 (A Study on the Historical Values of the Changes of Forest and the Major Old Big Trees in Gyeongbokgung Palace's Back Garden)

  • 신현실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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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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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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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고는 최근 74년만의 개방으로 수많은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는 청와대 경복궁 후원 공간의 변화과정을 통하여 후원 경관의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고자 조선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도성대지도, 북궐도형, 경복궁 복원기본계획 등의 사료와 도면 등을 근거로 경복궁 후원의 시원과 발달과정을 고찰하였고 이를 통하여 다음의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은 고려시대부터 명당으로 이름난 지역이었고 당시 남경으로 명명되며 신궁이 조성된 지역이었고 고려시대 이미 풍수도참사상과 주국의 고공기의 영향을 받아 궁성과 궁궐이 조영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전기 경복궁 후원은 궁궐의 후원으로 각광받지 못하였으나 고종 시기부터 현재까지 국가 통치권자의 생활공간으로서의 장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둘째, 후원의 경계는 도성지도, La Coree, 경무대일원, 일본지리풍속대계, 한국사진첩, 조선건축도집, 경성부 도시계획 조사서 등의 문헌을 통해 신무문 밖 현재의 청와대 권역이 경복궁의 경외에 조성된 후원임을 규명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황폐화된 지역을 고종시기 중건과정을 거쳐 공사(公私)가 결합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후원의 전각들이 이건되거나 훼철되며 법궁의 후원으로서의 장소성이 훼손되었으나 광복 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며 다시금 통치자의 장소라는 가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셋째, 경복궁 후원은 왜란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공간의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지형적 변화가 가장 큰 곳은 조선총독부관저가 건립되었던 경농재 일원으로 토지의 용도변화가 빈번하였다. 반면 현 경무대지역과 소정원 옆 수림과 백악의 수림은 전통적 수림의 형태를 계승하며 보존되었다. 이를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1:1200의 경무대관저경내부지배치도와 위성사진을 신무문 기준으로 중첩하였고 그 결과 백악에서 발원한 물길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존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물길을 따라 오늘날까지도 수림지역이 변화하지 않고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넷째, 전통적 수림경관이 계승된 지역들은 지형의 기능적 변화가 미비하였고 더불어 주요 노거수군이 존치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노거수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는 지표수종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녹지원에 자리한 반송은 융문당 옆 식재된 반송 중 일부가 보존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며 국가원수와 중요 귀빈들의 만찬 시 포토존으로 활용되어온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청와대 내 경복궁 후원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사료들에 대한 발굴을 통해 공간의 가치를 명확히 규명하고 시대별 정원고고학적 층위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또한 경복궁으로부터 청와대로 이어지는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역사경관을 보존하기 위한 근거는 과거부터 영속되어온 청와대 경복군 후원 노거수군의 영역대를 훼손하지 않아야하며 청와대 내 수림을 전수 조사하는 후속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