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um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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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서지학적 기록을 통하여 인삼의 기미(氣味)변화를 고찰하고자 한다. 한국 산양삼(山養蔘) 재배는 A.D. 1000년 경 고려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A.D. 1500년-1600년 경 조선시대에 인삼재배 기술이 확립되었다. 이 무렵 집 근처 밭에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가삼(家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삼재배는 A.D. 1790년 경 전국으로 확대되었다고 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인삼의 기미는 A.D. 250에서 A.D. 1600년까지 대부분 동양의학서적에 미한(微寒)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A.D. 1600년 이후에는 미온(微溫) 또는 온(溫)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삼의 기미변화를 인삼재배역사 기록을 통하여 고찰해보면, A.D. 1600년 경 이전의 미한(微寒)의 기미 인삼은 산삼 또는 산양삼으로 인식할 수 있고, A.D. 1600년 경 이후의 미온(微溫) 또는 온(溫)의 기미 인삼은 가삼으로 인식할 수 있다. 또한, 기미를 미한(微寒)으로 표기하였던 한의서의 효능은 오장을 주로 보하고, 정신을 안정시킨다는 효능을 위주로 하였으나, 온(溫)으로 표기한 1600년대 이후의 한의서의 효능은 원기를 보하고, 진액을 생성시킨다는 효능이 주로 또는 추가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결과는 재배환경이 산에서 들로 바뀌면서 인삼의 성질(기미)과 효능의 변화가 온 것으로 판단된다. 향후, 재배환경에 따른 성분변화가 효능차이에 미치는 연구가 고려인삼의 정체성 확인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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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선조인 여진족은 그들이 거주하는 만주의 자연환경에 따라 채집과 수렵활동을 주된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여진족의 거주지는 대부분 삼림이 울창하고 하천이 발달하여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로는 적합했지만 농경에는 맞지 않았다. 여진족 사회조직 역시 채집과 수렵활동에 적합한 방식으로 형성되었고 그것은 이후 청나라 고유의 사회 군사조직인 팔기제도로 발전했다. 한편 채집과 수렵으로 획득한 자연자원을 주변의 농경사회과 교환하는 일은 여진 사회의 발전에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인삼을 비롯한 만주의 자연자원을 중원의 한인들과 교역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대외무역이 여진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만큼 확대된 것은 16세기의 현상이었다. 당시 외부에서 유입된 은은 중국 내지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나아가 만주를 비롯한 명의 변경지역의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만주의 자연환경에 기초한 수렵 채집활동이 16세기에 이르러 중원에서 유입된 은과 조우하여 변경 사회를 자극했고, 분산되어 있던 여진 부락은 경쟁과 통일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만주족으로 변모하여 1636년 청나라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1644년 만주족은 중원 정복에 성공하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중원으로 들어간 후에도 청황실의 만주족은 만주 인삼의 가치를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7세기 말까지 만주 인삼은 만주족의 제도인 팔기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만주에 주둔한 팔기 병사들은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여 인삼의 생산지를 한인의 접근으로부터 보호했다. 만주 인삼의 채취는 황실 내무부, 부트하 울라 총관, 성경상삼기 등 황제에게 직속된 기구에서 담당했다. 이들은 부트하 병정이나 팔기 병정을 파견하여 지정된 장소에서 정해진 액수의 인삼을 채취하여 납부하게 했다. 황실의 귀족만이 만주에 사람을 보내 인삼을 채취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고, 그조차 엄격히 제한되었다. 18세기도 만주의 인삼은 여전히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관리되었다. 청의 인삼 정책은 황실의 발상지인 만주와 그 자연자원을 민간인의 침탈로부터 보호하고 만주족 고유의 전통을 유지한다는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동시에 만주의 인삼은 국가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으로 개발되었다. 국가가 필요한 만큼의 수입을 징수하기 위해서는 인삼을 대량으로 채취해야 했는데, 부트하 병정이나 팔기 병정을 파견하는 것만으로는 안정적인 인삼세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상인들이 인삼업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청의 인삼 정책은 이후 점점 더 상인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청대 인삼의 국가 독점은 1853년에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부유한 상인이 채삼인을 고용하고 인삼을 대신 납부하는 현상은 18세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청대 만주족의 인삼 독점은 사실상 한인 상인의 참여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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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철학자이자 미적분을 발견한 수학자로 잘 알려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가 인삼에 대해 물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럽의 계몽주의를 열었던 라이프니츠는 왜 인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글은 라이프니츠가 남긴 방대한 기록 속에서 인삼을 찾아내고, 개인적 생애와 당대의 지적 흐름을 엮어 그가 인삼에 관심을 갖게 된 경로를 추적한 작업이다. 16세기부터 유럽에서는 약물지와 같은 고대 그리스 텍스트의 재발견과 해외에서 들여온 새로운 식물들로 인해 본초학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구대륙' 중국에서 만병통치약으로 이름을 떨치던 인삼 또한 여행기 등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중상주의 기치 하에 유용한 약용식물에 대한 관심이 커 가던 유럽에서는 과학단체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인삼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라이프니츠는 그런 연구의 중심지였던 왕립학회와 프랑스 왕립과학원을 방문하고 학자들과 교류를 나누었으며 독일에 그와 같은 연구기관을 설립하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 라이프니츠는 로마를 방문했을 때 예수회 선교사들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한층 더 깊어갔고, 그 맥락에서 인삼에 대한 관심도 커갔다. 라이프니츠는 그리말디, 부베 등 중국선교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했던 학자들과 인삼의 효능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게 된다. 이 논문은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인삼이 17세기 말 유럽의 학문적 지형과 지식인들 사이의 교류, 중상주의적 해외팽창을 얽어내는 단초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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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삼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특산물로서 가장 인기있는 건강식품중의 하나로 한반도(북위 33~48도)가 원산지이다. 인삼은 중국 전한 시대 '사유'에 의해 쓰여진 "급취장" (BC 48~BC 33)에 최초로 언급되어 있으며, 1145년 고려시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의약적 치료용으로 중국에 인삼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인삼의 인공재배에 대한 기록은 1596년 중국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이후 야생삼이 감소하는 시기와 맞물려 숙종 13년(1687년) "승정원일기"에 '묘삼'의 기록이 나타난다. 묘삼은 벼의 이앙법을 활용한 독창적인 발명으로 1600년대 초반에 인삼의 인공재배법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한편 홍삼에 관해서는 1123년 중국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숙삼'(인삼을 쪄서 건조한 삼)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것이 홍삼에 대한 최초 기록이다. 조선 중종 17년(1552년) "조선왕조실록"에 '판삼'(삼을 찌고 압착하여 얇은 판처럼 만든 후 풀로 붙인 삼)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선조 35년(1602년)에는 '파삼'(삼을 찌고 압착하여 얇은 판처럼 만든 후 실로 꿰어 붙인 삼)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종(1506~1545) 시기부터 선조(1567~1608) 시기에 홍삼의 제조방법이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홍삼의 제조법은 그 전부터 이루어졌다고 추정되지만 조선 중종~선조 시기에 더욱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홍삼'이란 용어는 정조 21년(1797)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며, 고종 36년(1899)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에는 대한제국 궁내부 내장원 삼정과에서 홍삼을 제조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아울러 순조 10년(1810년)에는 증포소를 개성으로 이전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시기에 대규모 홍삼제조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조선 숙종시대에 확립된 인삼 인공재배기술과 정조시대의 홍삼제조법, 그리고 순조시대의 증포기술 등이 결합하여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후 1916년 '김택영'이 지은 "소호당집"에는 홍삼의 제조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전통적 한국홍삼 제조법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한편 인삼의 효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BC 83-96년 중국에서 저술된 "신농본초경"으로 이 효능은 그 이후 여러 의학서에서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앞으로 고려인삼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은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보존되어야 하며 이러한 서지학적 노력은 과학적 연구결과와 더불어 세계속에 고려인삼의 독창성을 알리고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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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nseng has been recognized as a lifespan extending medicine which has been regarded as one of the medicines classified as top medicines, as the Boncho (medical herbs) study which is influenced by the idea of guidance's costume and food concept mainly in China is gaining its bona fide form. As the demand for ginseng has been expanded to other levels, the demand for ginseng has been increasing. Ginseng from the nature reached its supply chain limit due to its extinction and difficulty of picking, so it translated into ginseng cultivation of economy rather than harvesting in nature. After the start of ginseng cultivation, the ginseng cultivation was further enhanced by the rapid development of processing methods such as white-ginseng and red-ginseng, and the surge of consumption due to the traditional belief in ginseng drug efficacy and support of scientific research. In the Joseon Dynasty, the name Gasam (cultivated ginseng) had been created as ginseng was cultivated on farmland after the stage of SanYang (wild cultivated ginseng), the purpose of the new name Gasam is to differentiate from natural ginseng, and natural ginseng lost its firm position as the genuine ginseng as the Gasam replaced the genuine ginseng, and the natural ginseng got a new name of SanSam (wild ginseng). Because the real ginseng substance concept dissipated, and as Gasam is being called ginseng, the name Gasam was also disappeared. As a result, it was possible to grow large quantities according to the arrival of the Gasam era, and it was possible to supply the demand for ginseng, and it could become one agricultural industry. In this ginseng cultivation, in Japan where ginseng did not grow naturally, it was difficult to obtain ginseng from Joseon and faced with a shortage of ginseng at all times. Therefore, the shogun cultivated the Gasam systematically at the national level by the inside of the shogunate. However, since the natural ginseng is native to China and Korea, there is a concern about the deterioration of the quality of natural ginseng due to the incorporation of cultivated ginseng (Gasam). To protect the interests, the cultivation of ginseng was subject to control. For this reason, the lack of historical information on Gasam cultivation, which had to be started secretly, would be a natural result. In this paper, althouh not sufficient enough, the historical informations were used to summarize the history of ginseng cultivation in China, Japan and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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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797년 고려홍삼 무역이 포삼제(包蔘制)라는 공식적인 제도로 시행된 이후 그 수출량과 홍삼세의 규모를 살핌으로써 고려홍삼 무역의 변동과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19세기 조선의 고려 홍삼무역은 조선 정부가 받아들이는 세금만으로도 공무역의 비용을 능가하였다. 조선은 인삼을 재배하는 농업기술과 저장 기간을 늘리는 홍삼 증포 기술을 바탕으로, 은화의 유출을 막고 중국의 완제품 및 원료를 들여와 국내 상업계와 수공업 및 광업부문을 자극했다. 더우기 조선정부는 고려 홍삼수출로 19세기 후반 매해 20만 냥에 달하는 재정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한때는 중국에서 말굽 모양의 은을 사와서 호조에 비축하기도 했다. 세도정권하에서도 상업계가 전반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개성상인 의주상인 서울상인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이러한 사정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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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의 교역은 활발하지 않았다. 한중일 동북아 중심의 역사 서술과 지리적으로 멀어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동남아 국가 중에 베트남은 한국 사신들과 교류가 많았다. 유권 문화권, 한자 문화권으로 정서가 통하고 언어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베트남 양국은 서로 관심을 보여 왔으며 사신들의 활발한 접촉으로 국교 수립과 관계없이 문물이 전파되고 우호적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세기 전반 베트남의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명으로 꼽히는 민망시대에 고려인삼은 지금의 한류처럼 인기를 끌었다. 142명의 자손을 둔 민망황제의 정력이 인삼에 기인한다고 믿었다. 민망황제는 공을 세운 신하나 연로한 신하에게 선물로 인삼을 하사하여 충성을 유도했다. 이같은 전통은 후대 황제에게 까지 이어졌다. 또한 태국, 캄보디아, 프랑스와의 전쟁에 파견된 장군 및 병사들에게도 인삼은 지급되었다. 베트남은 국가 이념강화에 인삼을 적극 활용했다.이 같은 전통으로 고려인삼은 베트남에서 프리미엄 인삼으로서 인식되었다. 인삼의 베트남 유입은 1) 중국 황제의 하사 2) 북경으로 조공을 간 베트남 사신의 구매 3) 사무역 4)국제 무역이 활발했던 류큐, 일본의 중계무역 5) 조선-베트남 사신의 교유 등 5가지 경로를 유추할 수 있다. 베트남이 인삼을 본격 구매하기 전에 인삼의 효능에 대한 인식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 이는 교역으로서가 아니라 양국 사신들의 교유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5세기에서 18세기 말까지 북경에서 조선과 베트남의 사신, 선비들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1760년 북경에 온 베트남 고관 여귀돈이 조선사신에게 편지를 보내 고려인삼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은 18세기에 이미 베트남에서 고려인삼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았음을 확인해준다. 양국 사신의 교유를 통해 상대 나라의 풍습과 특성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베트남 황실에서도 인삼에 대한 지식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경으로 사행을 간 사신들 중에 인삼에 조예가 깊은 서거정, 서호수 등 실학자들이 많았음은 이를 뒷받침한다. 베트남에서는 신라 시대에 인삼에 대한 인식이 성립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9세기 중반 안남도호부의 책임자로 파견돼 베트남을 10년간 통치했던 당의 고병은 신라인 최치원과 친밀한 관계로 고병이 인삼에 대한 지식을 베트남 상류층에 전했을 수도 있다. 이로써 베트남의 인삼인식은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멀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베트남의 인삼 인식시기 추정은 양국의 접촉 과정에 유추한 가설로서 이를 문헌으로 실증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특히 베트남의 역사서와 문집에서 인삼의 흔적을 찾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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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미국에서 생산되는 미국삼이 19세기 서구 약전에서 퇴출된 이후, 20세기에 수출 상품으로서 위기를 겪고, 결국은 '식이보충제'로서 미국 사회와 군대 내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먼저 1994년의 <식이보충제 건강 및 교육법>이라는 법령의 제정은 인삼을 비롯한 식물성 식이보충제들이 미국의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해줬고, 그 결과 인삼은 과거 약전에서의 퇴출 이후 '식이보충제'로서 <미국 약전 및 국민 처방집>에 다시 등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인삼과 기타 식물성 식이보충제들의 완전한 연착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식물성 식이보충제들의 무차별적인 확산을 경계한 미국의 의학계에서는 끊임없이 '위험 담론'을 제기하면서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식이보충제 활용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이것은 <식이보충제 건강 및 교육법>의 느슨한 검증 제도로 인한 근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중들이 전문 의료인들을 찾기보다는 직접 식물성 식이보충제에 대한 정보를 얻어 그것을 통해 본인의 건강을 돌보고자 하는 새로운 분위기와도 관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옹호 담론'을 펼치는 식이보충제 제조업자 및 식물 약재 관계자들의 주장은 다소 여유로워 보였다. 소비자들이 '옹호 담론'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옹호론자들은 식물성 식이보충제들이 오랜 세월 아무런 문제없이 세계적으로 활용되어왔으며, '천연의' 원료로 만들어졌다는 점만 강조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인삼을 비롯한 식물성 식이보충제들이 사회 내의 담론 충돌 속에서도 식품 통제에 엄격한 미군의 식이보충제 매뉴얼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내의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살펴본 미군의 초창기 식이보충제 매뉴얼에서 인삼은 여러 식물성 식이보충제 가운데 가장 자세하게 다뤄지고 있었다. 물론 그 속에는 사회 내에 존재하는 '안전성에 대한 우려'도 다소 섞여있었지만, 효능에 대한 충실한 과학적인 설명이나 인삼의 미국 사회 내 성행과 영향력에 대한 언급도 분명히 함께 이뤄지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식이보충제로서의 인삼'에 대한 미국 사회의, 그리고 미국 군 내부의 관심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