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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Korea-U.S. Negotiation Process for AFKN-TV Satellite Broadcasting in 1983

  • Sangkil Yoon (Dept. of Visual Media Communication, Shinhan University)
  • 투고 : 2023.04.14
  • 심사 : 2023.05.11
  • 발행 : 2023.05.31

초록

본 연구는 1983년 10월 4일 AFKN의 위성 중계 방송 실시와 관련한 양국 간의 교섭 추이와 함께, 교섭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등장했던 국내 여론의 반발과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AFKN의 위성 중계 방송 실시를 둘러싼 양국 간의 교섭과정을 문화적 세계화라는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하는 데 필요한 역사학적 사실의 단초를 마련하고자 했다. 연구방법으로는 외교사료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아카이브 문서를 중심으로 역사적 문헌 연구 방법을 사용하였다. 연구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는 사실과 함께, 미디어에 대한 권위주의적 통제를 가하고 있던 국내 정치적 조건에서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사회 내 여론의 움직임은 정권 보호라는 정권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우발적인 요소로 작용했음을 밝혔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통해, 본고는 한국 정부의 사전 동의 없이 미 국방성 계획에 의해 실행되었던 AFKN-TV의 위성 중계 방송은 한국이 미국 주도의 문화적 세계화 질서에 '반강제적으로' 편입되었음을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해석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progress of negoti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regarding the implementation of AFKN's satellite broadcasting on October 4, 1983, as well as the opposition of domestic public opinion, which emerged as an important variable in the negotiation process. Through this, it was intended to lay the foundation for the historical facts necessary to interpret the negotiation process between the two countries over the implementation of AFKN's satellite broadcasting in the context of world history of cultural globalization. As a research method, the historical literature research method was used, focusing on archive documents stored in diplomatic archives. The study revealed that public opinion's movement toward cultural imperialism under domestic political conditions, which had authoritarian control over the media, served as an accidental factor to help carry out the regime's interests of regime protection. Through these findings, this paper interpreted that AFKN-TV's satellite broadcasting, which was implemented under the U.S. Department of Defense plan without the prior consent of the Korean government, clearly shows that Korea has been "semi-forced" into the U.S.-led cultural globalization order.

키워드

I. Introduction

본 연구의 목적은 1957년 9월 15일 개국한 미군 방송인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TV가 1983년 10월 4일부터 직접 위성 중계 방송으로 운영되기 시작함에 따라 야기된 한미 양국 간의 갈등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데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AFKN의 위성 중계 방송 실시와 관련한 양국 간의 교섭 추이와 함께, 교섭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등장했던 국내 여론의 반발과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1980년대 세계의 미디어 환경과 한국의 미디어 환경은 큰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1980년대 세계의 미디어 환경은 위성방송과 비디오 테크놀로지 등의 도입으로 점차 ‘매체문화의 세계화’ 단계에 접어들었고[1], 한국 또한 1980년 언론 통폐합과 함께 다채널 미디어인 유선방송에 대한 법제 정비가 이뤄졌고 1986년 미국의 통상압박에 따른 미디어 관련 시장에 대한 개방 압박이 거센 상황이었다[2]. 즉, 1980년대 초반기 전 세계 국가들은 문화적 세계화의 징조를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등장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고 있었고, 한국 사회 또한 이러한 문화적 세계화의 파고에 점차 휩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1980년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보자면, (본고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하고자 하는) 1983년 10월 AFKN-TV의 위성 중계 실시에 더불어, 비슷한 시기인 ‘1984년 1월 일본의 직접 위성 방송 실시 및 그에 따른 전파 월경(電波越境)’[3]은 한국 사회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차 ‘매체 문화의 세계화’ 흐름에 편입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수행되었던 AFKN-TV와 관련된 연구들에서는 AFKN-TV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도[4-8], 정작 AFKN 방송을 둘러싼 한미 간의 갈등에 대해선 거의 주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83년 AFKN-TV의 위성 중계 방송 실시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예외적으로 권태동의 연구에서 AFKN-TV의 법적 지위를 검토하면서 “AFKN은 문화적 영향을 논의하기 이전에 이미 주권국가와 주권국가 간의 국제법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한국과 미국 간의 전통적 우호관계 때문에 그간 한국 정부의 규제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9]는 주장을 하고 있긴 하지만, 1983년 10월 AFKN-TV의 위성중계 실시와 관련된 양국 간의 교섭 과정이나 한국 사회 내 반응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부재하다. 한편 윤상길의 연구에서는 1977년에 실시된 AFKN-TV의 컬러화를 둘러싼 한미 간의 교섭 과정에 대한 분석을 수행하면서 “1970년대 말 한국 정부의 방송주권에 대한 의지가 역사적 유산으로 이어져 1980년대에 다시 미국 정부를 겨냥하게 되었다”고 언급하며, 1977년 AFKN-TV 컬러화를 둘러싼 경험이 1983년의 위성중계 문제의 처리방식에도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바 있다[10]. 그렇지만 이 두 연구의 연구시각에서는 1983년 AFKN-TV의 위성중계 실시가 당대의 문화적 세계화 국면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한계점을 가진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먼저 예비적 고찰로서 문화적 세계화와 관련된 기존 논의와 함께 1970,80년대 문화적 세계화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후 1983년 AFKN-TV의 위성중계를 둘러싼 한미 간의 교섭 과정과 위성중계 실시에 따른 국내 여론 동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거의 사실 규명이 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이 본고의 연구목적인 만큼, 본 연구에서는 외교사료관과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정부문서(1차 사료)를 대상으로 한 아카이브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시기적 국면에 따라 양국 간의 교섭 과정 및 여론 추이 등을 사실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II. Preliminaries

1. Cultural Globalization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처럼, 세계화(globalization)의 역사와 개념은 광범위하다. 이건욱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차와 말을 교역했던 ‘차마고도’(車馬古道)라는 가장 오래된 교역로를 구축했고, 실크로드는 서양과 동양을 잇는 무역 교역 통로이자 문화를 전파하는 창구였다. 유럽은 15세기부터 대항해 시대를 열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를 누비며 때로는 잔혹한 정벌을, 때로는 서양의 문화와 종교를 전파했다[11].

그간 세계화에 대한 수많은 정의와 설명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집단들과 사회들 간의 상호의존성이 심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12].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국가 간 교류 가 증대하여 개인과 사회집단이 갈수록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삶을 영위해 가는 과정을 지칭한다[11].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폴 호퍼(Paul Hopper)가 지적하듯, “세계화 과정이 문화 혹은 문화들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 의해 형태를 갖추게 된다”[13]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비록 최근의 세계화가 경제적 측면이든 문화적 측면이든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의 기술적인 발전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전자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생산, 유통 그리고 소비되는 정보 그 자체가 단순히 공학적인 차원에서의 기술 체계가 아니라 문화와 연관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세계화는 정보의 기술적 토대를 기반으로 시공간을 압축하는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네트워크로 이해된다[14].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문화적 세계화는 세계화와 문화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파악하고자 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상용화되기 시작한 직접 위성 방송 기술은 직접적으로 문화적 세계화를 촉진하는 기술적 발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 Progress of Cultural Globalization in the 1970s and 1980s

문화적 세계화의 기원과 발전을 추적하고자 할 때, 여러 개의 국면을 통해 그 진전을 생각해 보는 것이 유용하다. 거칠게 얘기하자면, 문화적 세계화의 국면은 크게 前근대(premodern, 1500년 이전), 근대(modern, 1500-1945), 그리고 동시대(contemporary, 1945년 이후) 국면으로 범주화될 수 있다[15]. 특히 동시대 국면에서의 문화적 세계화가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의 기술적 발전들에 의해 추동된 바가 크다고 이해될 때, 여타의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의 기술적 발전보다 1945년 무렵 뉴미디어로 등장했던 텔레비전과 이의 제도화는 문화적 세계화의 핵심기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 역사학자 브라이언 윈스턴(Brian Winston)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라디오방송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시각적 이미지를 전송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사실상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의 발전이 지연된 것은 사실상 미디어 기업들의 탐욕과 내분 때문이었다[16]. 그 결과 미국에서는 1939년에 이르러서야 NBC가 뉴욕 국제박람회장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축사와 함께 방송을 개시함으로써 비로소 최초의 정규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될 수 있었고, 194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마침내 네트워크 TV가 미국 대중들의 삶에 직접 다갈 수 있었다[17].

특히 냉전 시기 자유진영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미국의 거대 미디어 기업들은 국내 시장을 분할 점유함과 동시에 미국 문화를 세계 곳곳으로 나르고 있었다. 냉전 이전시기 표면적으로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상업 매체의 생산물을 수출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전 지구적인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여기에 미국의 외교정책은 세계 전역에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이러한 경향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18].

이와 같은 ‘이윤 추구와 정치의 결탁’은 그렇지 않아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해 있던 뉴스와 오락 산업 복합체가 초국적 산업으로까지 재구조화될 수 있게 했던 자양분이 되었다. 1940~50년대 사이에 미국의 통신회사들과 잡지출판사, 텔레비전 스튜디오, 영화사들은 빠른 속도로 전 지구적인 통제권을 장악했다. 1960년대에 들어, 미국의 미디어 헤게모니에 대한 우려가 전 세계에 확산되자, UN에서는 미디어 시장 문제를 다루기 위한 일련의 특별회의들을 잇달아 소집하게 되었다. 유네스코(UNESCO) 또한 서로 다른 문화적 정체성들의 보호를 목적으로 일련의 정책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이 훈령들이 어떤 구속력을 지녔던 것이 아니라 해도, 이것은 수많은 국가들이 절감하고 있는 ‘문화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라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19].

이러한 우려는 하나의 국가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기본 교의, 즉 영토(뚜렷한 경계선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 및 주권(그 경계 내에서 정부가 행할 수 있는 권위) 개념과 관련되어 있었다. 방송 기술과 관련한 1972년의 ‘정보의 자유 유통 선언’(Free Flow of Information Declaration)에 “직접 위성방송에 관해서는 전송 당사국이 아닌, 그 수신국의 사전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가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식으로 계속되었던 문서 발표는 1980년 국제 커뮤니케이션 연구 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for the Study of Problems in Communication)의 보고서, 이른바 맥브라이드 보고서라고 일컫는 성명에서 정점에 달했다. 맥브라이드 보고서 이후 몇 년간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미 대륙과 유럽공동체 및 전 세계적으로 국가 간의 경계가 점점 느슨해지면서, 지배적인 몇몇 국가가 주도하는 문화제국주의의 발생은 날로 심화되었다[20].

유네스코 선언이 발표된 이후, 미국은 그 문화적 공습의 강도를 한층 더 높여갔는데, 1989년 캐나다 및 멕시코와의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하면서 이 같은 행보는 절정에 달했다.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있어 이 같은 조치는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우려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21].

지금까지 미국의 미디어 패권을 중심으로 정리한 1970,80년대 문화적 세계화의 진전과 그에 따른 미국의 동맹들의 반응은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찌 보면, 1장 도입부에서 언급한 윤상길의 연구에서 AFKN-TV의 컬러화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양국 간의 교섭을 “정부 차원에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방송주권의 문제를 사상 처음으로 제기했던 사례”라고 평가한 것은 미국의 미디어(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정부 차원의 우려 표명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III. The Negotiation Process between Korea and the U.S.

주한미군방송 AFKN-TV는 (위성 중계가 시작된 1983년 10월 4일 이전까지) LA에 소재한 AFRTS(Armed Forces Radio Service, 1943.12.15.설립)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항공편을 이용, 직접 운송(輸送) 방영하여 왔는데, 미 국방성은 TV프로그램을 해외 주둔 미군에게 바로 보여주기 위한 Satellite Network 계획을 세우고, 1979년 3월 용산에 미군 전용 지구국 건설을 추진하면서 관련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한국 정부와 교섭을 시작하였다. 여기서는 주요 국면별로 양국 간의 교섭 과정을 살펴본다.

1. Until the agreement of a memorandum of understanding between KTA and the United States on July 23, 1983

1970년 6월 2일 금산 지구국의 개통으로 그 전까지 일본을 경유해야 했던 미국 등 각종 국제 통신도 미국의 통신 위성을 통해 직접 송수신이 가능해졌고, 이후 유럽·중동 및 아프리카 국가 등이 무역 거래국으로 다변화됨에 따라 인도양 지역 통신위성을 이용한 직통회선 확보의 필요성에 의해 1977년 9월 금산에 제2지구국이 설치되었다[22].

이와 같이 추가적으로 위성지구국이 설치되자, 미군 측은 녹화 필름의 항공편 송부 등으로 인한 시차 관계, 분실 문제 등으로 초래되는 불편 및 금산지구국을 AFKN 단독으로 이용할 수 없는 점을 고려하여, 독자적인 지구국 설치를 추진하였다. 당시 미국이 염두에 둔 위성 중계 방송은 직접위성수신방식(DTH, diect-to-home)이 아니라 ‘LA AFRTS → 위성 → 용산지구국(24시간 수신) → 프로그램 선정 → 테이프녹화 → 프리뷰(preview) → 방송’의 절차였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요청은 국제전기통신연합(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ITU)의 관계 규정 상 불가했다[23]. 이에 1979년 3월 16일 미국 측은 SOFA공동위원회를 통해 예비용 지구국(이동)을 對美 제공(안테나 설치 포함)을 위해 미국 측의 비용 부담으로 용산 미8군 영내에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24]. 이에 1979년 4월 13일 외무부는 “주한미군의 예비용 지구국 설치는 SOFA 협정 제2조 2항의 새로운 시설 제공에 해당되며, 또한 동 협정 3조 2항(나) - 한미행정협정의 제3조 ‘시설과 구역(보안 조치)’ 제2항 나호의 규정, “전자파 방사장치용 라디오 주파수 또는 이에 유사한 사항을 포함한 전기 통신에 관한 모든 문제는 양 정부의 지정 통신 당국 간의 약정에 따라 ‘최대의 조정과 협력의 정신’으로 신속히 계속 해결하여야 한다”[25] - 에 규정된 한미 양 정부의 지정 체신 당국 간의 약정에 따라 해결해야 할 전기통신에 관한 문제이므로 이는 양국 간의 협의를 거쳐 결정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의견으로 체신부의 검토를 의뢰했다[26].

이러한 미국 측의 의뢰에 대한 체신부의 구체적인 대응이 어떤지에 대한 정부 공식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외무부 문서에는 “체신부가 내부 검토에 들어갔고 우리 측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여 논의가 지지부진했다가, 1980년 2월 29일 재차 미국 측이 추진하여 체신부에서는 미군 목적을 위하여 평상시 이동지구국이 가능하다고 결론짓고, 미국 측에 소요기능에 대한 사양서(仕樣書) 제출을 요청”[24]했다는 교섭 경과에 대한 짧은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체신부가 이렇게 미국 측의 요구에 전향적으로 응했던 것은, 1977년 AFKN-TV 컬러 방송을 둘러싼 양국 간의 교섭 과정에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던 문화공보부와 달리 체신부가 상대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견지했던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27].

이에 1981년 6월 7일에는 미군이 제출한 사양서에 대한 조정과 기술 검토가 완료되었다. 더구나 1982년 1월부터 한국(전기)통신공사(KTA)가 체신부에서 분리되면서 AFKN-TV 위성중계를 위한 예비용 지구국 설치와 관련된 사항을 담당하게 되면서, KTA 주도로 1983년 7월까지 이동지구국에 TV중계설비에 설치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미 국방성과 사용료 및 운영조건을 협의하는 실무차원의 교섭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8]. 이윽고 1983년 7월 23일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와 주한미군 간의 상기 예비용 지구국의 사용에 관해 협의한 결과로, 양측 간에 양해각서(MOU)를 체결키로 합의하였는데[29], 이 양해각서는 금산 제3지구국의 비상용 회선을 330만 불에 5년 간 미군측이 대여받기로 한다는 내용이었다[30].

2. The beginning of the conflict between Korea and the U.S., signing MOU, and launching direct satellite broadcasts, 1983.8.1.~1983.10.4

한미 양국 간의 본격적인 교섭은 7월 23일 KTA가 양해 각서 체결을 합의한 직후, 8월 1일 KTA가 예비용 지구국 이용과 관련된 양해각서 체결을 승인해 줄 것을 체신부에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후 양국 당사자와 관계부처(체신부와 문화공보부, 외무부) 협의과정에서 양국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던 것이다.

먼저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상부 기관인 체신부는 문공부 등 관련부처와의 협의결과, 다음과 같은 규정이 동 양해각서에 삽입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들어 양해각서 체결연기를 지시하였다[29].

a. AFKN의 한국방송관계 법규 및 관행 준수, 위성으로 수신된 내용 중 한국 정부에 해로운(detrimental) 내용의 방송 절대 금지.

b. 전쟁과 같은 국가비상시, 예비용 지구국의 한국 측에 대한 반환

무엇보다 양해각서 체결을 연기할 것을 지시하는 데 힘을 실어준 부처는 안기부와 문화공보부였다. 특히 안기부는 AFKN-TV의 위성방송 실시로 인해 5공화국 체제를 위협하는 방송을 우려했다[31].

이렇게 관련부처와 협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8월 31일 (당초 합의한 양해각서 상에서 8월 1일부터 AFKN 위성 중계 방송을 개시할 것을 기대했던) 미국 측은 AFKN 위성 중계 방송의 지연 이유를 상세히 듣기 위해 외무부를 방문하여 외무부 미주국장을 면담하였다. 주된 방문 목적은 이 문제를 좀 더 고위층 수준의 논의로 끌고 가는 것에 대한 외무부의 입장을 청취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위 두 항을 양해각서에 삽입할 것을 요구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반박하는 주요 논거를 다음과 같이 전달하였는데, 핵심은 기술적 계약과 방송 문제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 즉 “금번 체결협정의 내용은 순전히 기술적인 것이므로, 상기 a항과 같은 방송 프로그램에 관련되는 내용의 규정 삽입은 부적당하다”는 것이었다[29, 32].

- 상기 b항의 양해각서 내 삽입은 무방하나, a항은 미헌법에 규정된 언론·표현의 자유 및 정보자유법 등 관련 법규에 위배되므로 삽입 불가.

- 녹화 테이프를 위성으로 수신후 즉시 방영하는 것이 아니라, 주한미군 측에서 필요한 프로그램을 선정, 방영하므로, 이 과정에서 허위 보도 등은 배제될 것임[29].

문화공보부와 주한미군 간의 교섭 과정을 중재하는 입장에 서 있던 외무부는 “설사 a항이 금번 협정에 삽입된다 하더라도, 위성중계 외에 우편의 방법 등 여타 방법에 의해 입수되는 녹화 테이프의 내용은 규제할 수 없으므로, 동 조항의 효율성이 의문시”된다는 신중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33].

한편, 주한미군 측은 9월 1일자 한국전기통신공사에 보낸 텔렉스를 통해, 미 국방성의 AFKN에 대한 지시사항 – 1) 해외 근무 국방성 직원 및 동 부양가족 에 대해 검열, 선전, 조작을 거치지 않은 정보와 여흥 프로그램의 자유로운 전파를 보장할 것, 2) 주재국의 ‘민감성’에 유의할 것. 주재국에 대해 민감한 영향을 끼친다고 간주되는 프로그램 내용은 AFKN에서의 방송을 제한해도 可하며, 그러한 제한은 미 대사관의 공식적 결정에 따라서만 행해져야 함 – 을 전하는 한편,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삽입 요청 조항에 대해서도 “AFKN은 KTA 측 예비용 지구국의 공식 사용자로서, 또 신뢰받는 동맹국을 대표하는 방송국으로서, 주재국의 민감한 측면과 관련되는 국방성의 관계규정을 준수할 것이고, 국가 비상시, 예비용 지구국을 한국 측에 반납하는 경우에는, 미국 측 소유 지구국을 한국에 반입한다는 조건을 첨가한다”고 밝힘으로써 한국 정부의 입장을 일부 수긍하는 뜻을 보였다[34].

이에 대해 9월 9일 문화공보부는 (양해각서와 별개로 체결될) “운용 협정에 ‘한미 간의 우호 친선과 이해 증진을 기한다’는 기본 정신을 삽입”하고, 양해각서에 “주재국의 정세 및 정부에 미묘한 효과를 갖는 프로그램 주제는 AFKN에 방송되는 것을 억제한다”는 조항을 삽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외무부에 전달하였다. 반면 이러한 문화공보부의 의견에 대한 체신부의 검토의견은 “운영 협정은 KTA와 미국 측 통신회사인 COMSAT社(Communication Satellite Co.) 간의 요금, 기술협력 등에 관한 순전히 기술적인 차원의 협정이고, 또 정부 간이 아닌 업체 간에 체결된 것이므로, 동 협정에 ‘한미 간의 우호 친선과 이해 증진을 기한다’는 기본 정신의 삽입은 부적당하기 때문에 이를 KTA와 AFKN 간의 양해각서에 삽입하는 것이 적당할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문공부 측이 양해각서에 삽입코자 하는 조항은 당초 보다 매우 완화되고 절충적인 내용이므로 미국 측의 수락을 기대”한다는 입장을 취했다[35].

이렇게 그간 문화공보부와 미군 당국 간에 벌어진 네 차례 걸친 의견조정의 결과, 1983년 9월 12일에 외무부는 문화공보부의 4차 의견으로 조정키로 합의하여 양해각서 4항(‘프로그램의 방송 및 비상시 운용’ 항목)에, “가. AFKN은 양국 간의 친선과 이해증진을 기하기 위하여 주재국의 민감성을 준수한다. 나. 국제통신의 두절, 전쟁의 발발, 기타 비상시 전기통신공사가 필요로 할 때에는 전용 대여를 중지하고 현 위치 또는 타 지역으로 이동하여 본래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내용을 삽입하였고[36], 이 양해각서에 의거하여 10월 4일 AFKN-TV가 위성중계를 공식적으로 개시함으로써 양국 간의 짧지만 격렬했던 교섭 과정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3. Public concern about AFKN's cultural imperialism and the U.S. policy not to do it

1983년 10월 4일 AFKN-TV의 위성중계 실시는 1977년 컬러 방송 실시 때와 달리 한국 내 여론의 역풍을 맞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양국 간의 교섭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게 되었다.

AFKN의 위성중계가 개시된 직후인 10월 5일, 국내 주요 언론은 AFKN의 위성중계로 인한 “거대한 미국 매스컴의 엄청난 정보의 일방적 흐름은 한국의 국익은 물론 방송 정책과도 충돌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철저한 선별과 함께 한국민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검토와 대응책이 있어야 한다는 게 중론”이라고 하면서[37], AFKN의 위성중계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짚어봐야 할 사항은 이러한 언론보도가 언론사 자율에 의해 작성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문화공보부가 여론을 동원하기 위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지 여부이다. 당시 언론 통폐합 이 후 정부에 의한 언론 통제가 일상화된 상황이라는 점에서 보면 후자의 가능성이 크지만, 이는 확증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문화공보부의 의도 개입 여부와 상관없이 중요한 점은 당시 미국과의 직접적 교섭을 담당하고 있던 외무부로선 언론의 반응을 ‘예기치 못했던 사례’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0월 6일 문화공보부는 외무부에 보내는 ‘AFKN 방송편성 운용에 관한 협의절차’라는 제목의 공문을 통해, “AFKN이 1983년 10월 4일부터 24시간 종일 방송으로 실시함에 따라 문화생활의 배경이 다른 미국의 방송이 위성을 통해 국내에 방송됨으로써 우리 국민에게 미칠 영향이 클 것이므로, 한미 간에 AFKN 방송운용에 관한 협의 절차가 필요하게 되었”고, “AFKN이 우리의 전파를 이용하고 있음을 감안, 현행 한미행정협정 상 방송주파수 사용에 관한 협의 절차와 같이 방송시간, 편성내용 및 운용 등에 관해서도 별도로 협의할 수 있도록 외교적 경로를 통하여 추진”해 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달한 바 있다. 당시 이 공문을 접수받은 외무부 국장의 지시사항을 적은 메모에는 ‘예기치 못했던 사태’라고 적혀 있었고, 외무부 권순태 안보과장을 통해 언론보도와 문화공보부의 ‘AFKN 방송편성 운용에 관한 요청’을 SOFA합동위원회의 미국 측 간사인 C.B. 하지스(Hodges) 박사를 초치(招致)해 설명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38]. 이 지시에 따라 10월 11일 안보과장은 AFKN 방송편성 운용에 관한 사항을 협의할 채널을 구성하고자 하는 문화공보부의 의사를 전달하였다[39].

한편 이와 동시에 국가안전기획부는 AFKN 위성 중계 실시에 따른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13일자 외무부 내부 공람문서에 국가안전기획부가 발간한 참고정보자료가 존재하는데, 이 자료에는 상황에 대한 기초 정보와 함께, 직접 중계에 따른 관련 반응, 예상 문제점, 검토 의견이 담겨져 있다. 이 중 주목할 것은 당시 한국 정부가 AFKN 위성 중계 실시에 따른 사회 각계 각층의 반응을 면밀히 파악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신문계의 주된 반응은 “미국이 한국을 경시한 결과로서 우리 정부가 지나치게 나약하게 대응한 점이 아쉬우며 한미 간의 양해각서를 교환하였다고는 하나 주권 인정으로 볼 수 없고, 방송 내용을 사전 검토 선별할 수 있기 때문에 전파 침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으며, “비판 능력이 없는 청소년층의 무분별한 서구 문화 모방으로 우리 문화에 악영향 파급이 우려되는 바, 부분적인 규제가 가능토록” 미국 측과 재협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방송계의 경우엔, “국내 방송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어 시청률 저하 초래 및 국가 홍보 성과 감퇴가 우려되며, 자유, 언론, 사상의 무비판적 확산으로 정국 안정 저해 요인이 될 가능성을 감안하여” 미국 측과 재협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지식인들의 견해에선, “세계 각국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 접근 용이 등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미국의 대중문화가 무비판적으로 국내 가정에 전파됨으로써 우리 전통문화의 붕괴 및 괴리 현상이 초래될 우려가 있고, 특히 지식층 및 학생들이 미국식 관점에서 평가된 정보를 접함으로써 정부시책에 대한 비판 소지 노출 예상”된다는 것이었다[40]. 또한 비슷한 시기에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문서에는, 언론인과 대학교수는 물론 정치인, 종교인, 대학생, 일반인 등의 여론도 광범위하게 수집, 분석하였다. 특히 AFKN-TV의 위성 중계를 통해 여과 없이 방송될 가능성이 있는 해외 체류 반체제 인사들의 활동상이 국내에 방송될 경우 체제 안정을 위협할 개연성에 대한 우려 또한 제기되었다[41]. 요약하자면, 전반적인 여론동향은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반발심과 함께 (표면적으로 국익을 세우지만 사실상) 정권적 안정에 대한 우려였다고 평가해 볼 수 있다[41].

이후 한국 정부의 교섭 방향은 상설협의기구 구성과 함께 한미행정협정 규정의 개정으로 설정되었다. 실제로 10월 25일 문화공보부는 10월 19일에 이뤄진 미국 측의 한국 관계자 초청 브리핑 및 토의 실시 제안에 대해[42], “방송 운영에 관한 제반 사항은 상기 제의와 같은 비공식이며 임시적인 조치로서는 양측 간의 충분한 협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되는 바, 방송운영(편성, 내용, 시간)에 관한 협의 절차 규정을 마련하거나, 한국 및 주한미군 측 관계관으로 구성된 상설협의기구를 구성, 이를 통해 제반 사항을 협의 처리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란 견해를 외무부에 전달하고, 이후의 교섭방향을, 상설협의기구 구성과 함께 SOFA 규정 제 3조 2항 ‘라’목의 개정 - “대한민국의 주파수를 할당받아 합중국 군대가 운영 관리하는 방송국의 편성, 운용에 관한 문제는 양국 정부의 지정 방송 당국 간의 약정에 따라 최대의 조정과 협력의 정신으로 신속히 계속 해결하여야 한다” - 으로 설정, 추진되었다[43].

이 기간 동안 양국 간의 교섭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해외 반체제 인사의 활동상이 국내에 알려질 것에 대한 한국 정부의 우려가 실제적인 사건으로 현실화되었다는 데 있다. 1983년 11월 12일에 예정되어 있던 레이건 미 대통령의 방한과 관련하여 미국의 NBC-TV가 1983년 11월 14일 08:00시에 ‘Today’라는 아침프로그램(한국시간 11.14. 22:00)에 김대중, 솔라즈 의원, 김경원 대사 간의 대담 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한국 정부는, 11월 4일 외무부를 통해 이 프로그램에 김대중 관련 부분 및 한국의 국익에 반하는 내용이 방영되지 않도록 조정 요청하였고[44], 이 요청에 대해 주한 미국대사관은 이미 오래 전에 AFKN의 프로그램 방영금지를 결정하였다는 답변을 전달했다[45]. 그 밖에도 김대중이 출연하는 ABC-TV의 특별대담 프로그램에 대한 또 한 차례의 조정 요청이 이뤄졌고, 이 또한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해 방영금지 조치가 내려졌다[46].

이후 AFKN 프로그램 편성과 관련된 한국 정부의 상설협의기구 구성 및 한미행정협정 개정은 수차례(1983년 11월 16일, 1984년 1월 12일, 2월 14일, 2월 25일, 3월 12일)에 걸친 교섭을 통해 추진되었고[47], 1984년 3월 12일에는 최종적으로 미국 측 담당자를 초치해 교섭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48], 결국 3월 23일 “AFKN 방송은 과거 30여 년간 언론 자유에 관한 미 헌법상 원칙 및 주재국 민감성 존중에 관한 미 국방성 원칙에 따라 운영되어 왔으며, 의도적으로 주재국 민감성을 훼손하거나 왜곡된 정보를 제공한 적이 결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 우려가 있다면 이를 협의키 위해 한국 정부 대표들과 만날 용의가 있으나, 미 헌법상 AFKN 방송내용 심의를 위한 상설협의기구 설치는 불가능”[49]하다는 간략한 내용의 미국 측 서한이 도착함으로써 사실상 SOFA 개정은 물론 상설협의기구 구성도 실현되지 않았다.

IV. Conclusions

본 연구는 외교사료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아카이브 문서를 중심으로 AFKN의 위성 중계 방송 실시와 관련한 양국 간의 교섭 추이와 함께, 교섭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등장했던 국내 여론의 반발과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에 본고는 한미 간의 교섭 과정을 세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로 교섭이 벌어지게 된 당시의 상황적 맥락과 교섭 내용, 그리고 양국 정부의 상황인식 등을 살펴봄으로써, AFKN의 위성 중계 방송 실시를 둘러싼 양국 간의 교섭 과정을 문화적 세계화라는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하는 데 필요한 역사학적 사실의 단초를 마련하고자 했다.

1983년 10월 4일에 공식적으로 개시된 AFKN의 위성 중계 방송을 둘러싼 양국 간의 교섭 과정은, 1977년 AFKN-TV 컬러 방송 실시를 둘러싼 교섭 과정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양국 간 교섭 상의 쟁점이 다소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방송정책 주무부처인 문화공보부는 방송주권을 내세우며 AFKN 프로그램에 대한 규제를 시도하였던 데 반해, 미국은 지속적으로 법률적 객관성을 근거로 반박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것인데, 교섭 과정에서의 양국간 의견 대립은 기술의 문제와 방송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례는 모두 미국의 일방적인 통보로 교섭이 마무리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1983년의 양국 간 교섭 과정이 1977년의 그것과 차별되는 결정적인 요소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1977년 AFKN-TV 컬러 방송을 둘러싼 한미 간 교섭 과정에서 정부 차원에서 방송주권의 문제를 제기했던 것과 달리) 사회적 차원에서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1983년 10월 4일 AFKN 위성 중계 방송의 실시는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미국 대중문화의 제국주의적 침투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는 계기였고, 이는 1980년대 미국의 주요 동맹국 내의 미국 주도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우려 제기와도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는 양국 간 교섭 과정에서 국내적인 정권적 이해관계가 발현되었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방송주권이라는 견지에서 SOFA규정의 개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보다는 단기적인 대책(양해각서 내 조항 신설이나 상설협의기구 구성)을 추진한 문화공보부의 교섭 전략은 권위주의 국가의 전체주의적 미디어통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 헌법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법률을 따르고자 하는 미국 측의 입장과 대립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이 AFKN 위성 중계 방송 실시가 가져올 변화 중에서 특히 가장 우려했던 것은, (김대중이 출연하는 미국 방송사 프로그램에 대해 프로그램 조정을 요청했던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언론 통폐합 등의 조치를 통해 미디어에 대한 권위주의적 통제를 가하고 있던 국내적 조건에서 AFKN의 위성 중계 방송 실시가 정부의 미디어 통제의 고삐를 느슨하게 만듦으로써 정권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AFKN 위성 중계 방송 실시가 가져올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사회 내 여론의 움직임은 정권 보호라는 정권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우발적인 요소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종합해 보자면, 방송기술과 관련한 1972년 유네스코의 ‘정보의 자유유통선언’에서 “직접위성방송에 관해서는 전송 당사국이 아닌, 그 수신국의 사전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사전동의 없이 미 국방성 계획에 의해 실행되었던 AFKN-TV의 위성 중계 방송은 한국이 미국 주도의 문화적 세계화 질서에 ‘반강제적으로’ 편입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고의 연구결과가 (라몬 로바토(Ramon Lobato) 등과 같은 학자들이 2010년대 말부터 제기한)[50] 넷플릭스 등의 인터넷 배급 텔레비전 서비스에서 나타나는 미국의 문화적 지배현상에 대한 오늘날의 우려가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님을 환기시켜준다는 점에서 볼 때 , 본고의 논의는 OTT의 세계화를 둘러싼 담론을 이해하는 데 큰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위성방송 이외의 미디어 영역에서 이뤄진 문화적 세계화 과정에 대한 추가적인 작업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ACKNOWLEDGEMENT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Shinhan University Research Fund,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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