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I QR코드

DOI QR Code

A Study on Activities of Architecture Craftsmen and Major Carpenters of Court Palace Performance Stag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조선후기 궁중 연희무대 건축 장인(建築匠人)의 활동과 주요 목수(木手) 연구

  • Received : 2019.02.15
  • Accepted : 2019.06.04
  • Published : 2019.06.30

Abstract

A major performance stage carpenter, Jang Insang led performance stages from the 1719 Sukjong Royal Banquet and was confirmed by historical records to be the first craftsman. Lee Wandeuk led the Hwaseong Fortress performance stages of the Jeongjo period and Gichuk Jinchan performance stages of the Sunjo period. The carpenter techniques he used during the Jeongjo period were succeeded to the Sunjo period. Ahn Sungil was the head craftsman who led the performance stages of Jagyeongjeon Jinjak, Muja Jinjak, and Gichuk Jinchan of the Sujo period, under which the foundation for court palace performances was laid. The progression of major carpenters includes Jang Insang of the Sukjong period, Jeon Yoochu of the Yeongjo period, Ahn Sugil of the Sunjo period, Yoon Seoksin of the Heonjong period, Kim Yoonsik of the Gojong period, Lee Jongyoon, Kim Soongil, Seo Sangmook, and Han Sujoon. In addition, the Major Repair of Injeongjeon Hall (1857) of the Cheoljong period was the most important palace construction project for transferring the carpenters' skills. Through this project, Ahn Sungil of the Sunjo period, Kim Myeonggap, Yoon Seoksin of the Heonjong period, Kwon Deuknyang, and Kim Sungil of the Gojong period were able to interact with each other. That is, this major repair project of Injeongjeon Hall reflected the major carpenters' best techniques through performance stage construction, showing the progression of Ahn Sungil, Yoon Seokshin, and Kim Sungil, who led the constructions of Gichuk Jinchan of the Sunjo period (1829), Mushin Jinchan of the Heonjong period (1848), and Jeonghae Jinchan of the Gojong period (1887), the most impressive performance stages of the late Joseon period. The carpenters of the court performance stages participated in important construction projects of the royal palace, reflecting the superior technical skills of the carpenters in the construction of court palace performance stages. The carpenters who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construction of performance stages were able to interact with one another and transfer their excellent technical skills, providing the driving force that allowed court performance stages to blossom into splendid and high-quality court stag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Keywords

1. 서론

조선시대 왕실은 국가기반의 확립과 존재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하여 다양한 연희를 베풀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전기 보다 조선후기의 궁중연희에서 매우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관련 사료들은 왕실에서 거행된 연희무대의 건축적 특징까지도 상세하게 전해준다.

특히, 순조 이후 급격하게 증가하는 궁중연희 행사와 더불어 궁중무대를 설치하기 위한 장인의 기록이 확인된다. 궁중 연희무대 건축에 참여한 장인들은 다양한 궁중 의례에도 참여하였다.

궁중연희무대와 관련된 선행 연구로는 연희와 관련된 연구1)와 왕실 의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건축 장인을 분석한 연구2)가 있다.

궁중연희는 규모와 절차에 따라 進宴, 進饌, 進爵, 受爵3) 등으로 거행되었다. 연구는 연희를 위해 무대를 건축한 장인을 살펴보고 그들의 왕실 활동과 관계를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사료로 확인 가능한 연희무대 장인은 숙종시기부터 고종시기이다.

外宴4)의 무대 장인은 기록이 부족하지만 확인 가능한 사료를 분석하였고, 內宴5)의 장인은 순조이후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 사료를 바탕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앞서 언급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전에 주목하지 못했던 조선후기 궁중 연희무대 건축에 참여한 장인들의 기록을 조선 왕실의 의궤로 분석하여 외연, 내연 관련 장인의 특징과 주요한 장인들이 활동한 왕실행사와 주요 목수와 관련하여 상호 관계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2. 궁중 연희무대를 건축한 장인

2-1. 외연 연희무대를 건축한 장인

外宴의 연희 무대는 정전의 월대를 중심으로 무대를 조성하거나, 補階6)를 배설한다. 외연의 보계는 내연에 비해 크게 조성된다.

보계의 기능은 일차적으로 왕실과 참여자의 위차를 구분한다. 궁중무용이 呈才7)가 거행되기 위한 물리적 공간을 제공하는 것에 있다.

그림 1. 『己丑進饌儀軌』, 明正殿外宴, 1829, 서울대규장각

월대와 전각 뜰인 殿庭에는 地衣8)를 배설하여 신분과 위계에 맞는 공간으로 구획한다. 또한, 막 구조 형식의 大遮日을 전정의 상부에 구축하여 외연은 개방적인 무대로 <그림 1>과 같이 구성되었다.

이런 연희무대를 건축은 장인이 담당하였다. 외연 건축에 참여한 장인이 담당한 공종을 살펴보면, 木手는 보계를 배설하고 톱을 다루는 장인은 무대에 사용되는 목재를 재단한다. 屛風匠은 왕과 왕세자의 座와 小次 9)등에 설치되는 병풍을 제작한다.

朴排匠과 소목장은 필요한 곳에 창호 등을 假漆匠은 자재의 마감, 茵席匠은 지의를 만드는 공종에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鍊竹匠10)은 숙종과 영조시기 외연에만 기록되어 있다. 白木大遮日을 배설하기 위해 대나무를 다루는 기술력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연의 연희무대를 건축한 장인의 기록은 많지 않지만 숙종시기 기해진연으로 장인을 알 수 있다.

외연의 연희는 성대하게 거행되어 참여자의 공간을 넓게 만들기 위해 장인의 수가 목수를 중심으로 많았다. 외연에 참여한 장인을 과 살펴보면, 肅宗시기 己亥進宴(1719)은 목수 10명, 톱 장인이 21명으로 목재를 다루는 장인이 다수이다. 목재를 다루는 장인은 주로 보계 제작과 排設11)의 공종에 참여한다.

英祖시기에 열린 進宴(1744)은 약 70명이 넘는 장인이 참여하며 목수 13명, 톱을 다루는 장인 21명 참여하였다. 숙종, 영조 시기는 목재를 다루는 장인이 약 30명 연희무대 건축에 참여하며 연희무대 건축의 주를 이룬다.

숙종 시기에 비해 영조 시기는 전체 장인의 수는 늘었지만, 목수의 수는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는 영조시기에 열린 진연(1744)이 영조의 기로소 기념과 숙종 비를 기념하기 위한 연희로 왕과 왕실 여성을 위한 무대 구성을 갖추기 위해 다양한 장인이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의궤에는 기록은 외연과 내연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純祖 시기 외연에서 살펴보면, 己丑進饌(1829) 외연에는 약 48명의 장인이 참여하며 목수가 30명, 船匠이 7명, 引鉅匠 5명, 乬鉅匠 2명 정도 참여한다. 이전 시기에 비해 목수의 수가 급격히 증가된다. 이는 순조 시기 집권한 효명세자가 연희를 왕세자 翌日會酌 등으로 확대하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순조이전 시기에는 무대를 구성하기 위한 기록이 구체적으로 작성되지 않았다. 대리청정으로 정치에 참여한 효명세자는 연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연희와 관련된 부분을 사료에 구체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궁중 연희를 베풀기 위한 기획도 주도적으로 하여 무대는 더욱 발전된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외연 무대가 월대와 전정을 중심으로 구성하던 방식에서 전정에 보계를 적극적으로 배설하는 무대 형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즉, 목재를 다루는 장인의 참여가 급격히 증가되었고 이런 양상을 고종시기의 연희무대에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영조 진연(1744)과 高宗 임인진연(1902)에 참여한 장인 수가 다른 외연에 비해 많다. 이는 외연의 연희가 왕을 주빈으로 하며 왕의 중요한 행사일 경우에 가장 성대하게 거행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순조, 고종시기 외연 장인은 숙종, 영조 시기의 외연에 비해 전체 장인의 수는 증가하나, 장인의 유형이 줄어드는 양상이 나타난다.

숙종, 영조시기에는 외연과 내연을 의례로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거행하였지만, 순조 이후에는 대비의 수렴청정의 정치적 권한이 무대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즉, 무대가 왕이 중심인 외연과 대비가 중심인 내연의 무대로 명확히 구분하여 외연은 간결한 구성요소로 크게 건축된다.

壬辰進饌(1892)은 약 60명이 넘는 장인이 참여하며 목수가 30명, 선장 6명, 岐鉅匠 8명 참여한다. 즉, 순조와 고종시기 외연무대 건축에는 약 44명의 목재를 다루는 장인이 참여하여 숙종, 영조시기에 비해 많이 증가된다.

즉, 왕을 중심으로 한 외연은 규모는 크지만 공종별로 참여한 장인은 목재를 다루는 장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다양한 시설물이 무대에 건축되었던 내연에 비해 건축 공종이 적었고 무대는 간결했다.

외연의 연희무대 건축 장인들의 등급은 숙종과 영조 시기에는 참여 일수로 등급을 정하였다. 궁중무대 조성 작업일 수가 많을수록 一等, 二等, 三等으로 구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숙종, 영조시기의 연희무대에 참여한 장인은 등급으로 관리되었지만, 순조시기부터 木과 布로 지급방식이 바뀐 것으로 추측해보면 연희무대에 참여한 보계입배의 조직은 사공장의 장인이며 이후 순조시기에는 상전의 지급이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표 1. 外宴의 궁중 연희무대를 건축한 장인(의궤를 중심으로 작성함)

2-2. 내연 연희무대를 건축한 장인

內宴의 연희무대는 전정에 배설되는 보계를 중심으로 무대의 크기가 결정된다. 외연에 비해 참여자가 제한적이다. 순조 이후 내연이 대비를 중심으로 거행되면서 규모가 커지고 화려해진다.

우선 내연의 무대 구성을 살펴보면, 대비의 전각을 중심으로 전정에 補階를 단에 차이를 두어 배설한다. 보계의 기능이 왕실과 참여자의 위차를 구분하고 궁중무용이 거행되는 것이지만, 내연에서는 왕과 왕세자, 왕실 여성, 내·외명부 등의 座와 小次, 拜位 등이 배설되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내연의 무대 구성은 시 시기별로 차이가 있지만, 순조시기 구성은 <그림 2>와 같다.

그림 2. 『己丑進饌儀軌』, 慈慶殿內宴, 1829, 서울대규장각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내연 무대의 물리적 한계인 보계가 건축되고 보계 위에 임시 假家 형식의 목구조를 세우고 왕실 발인 朱簾12)을 현수하여 외부와 간접차단을 한다. 주렴은 이전 시기에 비해 순조시기에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왕실 여성의 기품을 반영하며 화려하게 건축된다13). 帳幕14)으로 공간의 가벽을 만든다. 상부에 遮日을 배설하여 임시 실내극장 형식으로 무대공간을 구성했다. 내연은 다양한 가설시설을 이용하여 <그림 2>와 같은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목수는 내연 무대에서 보계를 건축하며, 가설 형식의 목구조를 건축한다. 가설 형식의 목구조는 주렴과 장막의 배설을 용이하게 했다. 또한, 순조시기부터 내연의 거행일이 길어지면서 연희 기간 동안 무대 구조가 유지되어야 했다. 이는 이후 내연의 연희무대가 발전적 형식으로 변화하는 것에 영향을 준다.

무대 보계 위의 목구조는 순조시기부터 임시 실내극장 형식을 갖추게 되며, 헌종시기에 정착되고 고종시기에 확장되어 구축된다. 톱을 다루는 장인은 무대에 사용되는 목재를 재단하고, 병풍장은 대비, 왕, 왕비, 왕세자의 座와 小次15) 등에 설치되는 병풍을 제작한다. 박배장과 소목장은 필요한 곳에 창호, 난간 등을 담당한다.

가칠장은 자재의 외부 마감, 인석장은 방석과 지의를 만드는 공종에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塗褙匠은 1900년 이후 내연 무대 장인으로 기록되어 나타나며 주로 창과 지의를 수리하거나 제작한다. 洋鐵匠은 비에 대비하기 위해 양철로 빗물받이 용기를 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연의 무대 장인 가운데 工匠 소속이 아닌 분야는 가벽의 형식으로 殿庭에 구획되거나, 전각에 懸垂되어 구획되는 주렴과 장막이다. 주렴은 주로 상의원 소속이었던 주렴장이 제작하였고, 장막은 장흥고에서 조달하여 배설방에서 무대에 배설하였다.

대비를 위한 내연에서는 왕실의 여성을 위해 무대 장인 유형이 다양해진다. 내연의 궁중무대 조성에 참여한 장인을 로 살펴보면 慈慶殿進爵(1827)에는 인거장을 비롯하여 걸거장과, 기거장, 선장, 칠장이 참여한다. 戊子進爵(1828)은 목수, 선장, 박배장, 병풍장이 참여한다. 특징적인 것은 선장을 포함하여 대다수가 목수로 구성되었다. 무자진작에 인거장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자경전진작시에 인거장이 새로 준비한 목재를 재사용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기축진찬에는 병풍장, 치장, 가칠장, 인석장 등 대략 25명의 장인이 참여한다. 참여 장인의 인원수는 무자진작과 비슷하지만, 목수의 참여는 선장을 포함하여 5명 정도로 나타나며 무대를 꾸미기 위해 의장을 담당하는 장인이 나타난다. 기축진찬은 이전 연희에 비해 규모가 확장되며 참여하는 장인의 분야가 다양해졌다.

목수의 수가 현저히 적게 나타나는 것은 필요한 만큼의 목재만 소인거장이 준비하고 무자진작 무대에 재사용하여 원목을 새로 재단하는 일이 줄어든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戊申進饌(1848)은 참여한 목수의 수가 이전 시기보다 큰 폭으로 증가하며 참여 장인의 수도 약 43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이는 무신진찬이 확장되고 정형화를 구축하면서 고급자재인 수장판 등을 사용해 연희무대가 고급화 되어지는16) 것과 연관이 있다.

丁亥進饌(1887)은 선장을 포함한 목수가 15명 정도인데 선장의 수가 10명으로 나타난다. 참여 장인의 수는 대략 45명으로 내연에 참여하는 장인 수가 가장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정해진찬은 신정왕후의 팔순을 기념하는 가장 성대한 연희로 많은 참여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가설시설물이 확장되어 배설되어졌으며 또한 견고성이 요구되었던 것과 연관이 있다.

1900년 이후 설행되는 申丑進饌과, 壬寅進宴은 인거장과 박배장이 나타나지 않지만, 목수는 증가되어 나타난다. 이는 이전 해에 설행된 자재를 다시 사용하여 새로운 목재를 만들어내는 일이 줄어든 것으로 목수들이 이전 자재로 연희무대를 구축하는 작업에 대거 참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도배장과 洋鐵匠이 새롭게 등장한다.

즉, 톱을 주로 다루는 인거장은 새로운 연희무대에 필요한 새로운 목재의 구축이 필요할 때 등장하며, 대인거장은 큰 부재를 새롭게 만들어야 할 때 나타나며, 소인거장은 새로운 목재가 조금 더 필요할 때 등장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기거장과 걸거장은 인거장과 함께 나타나는 양상을 보인다. 목수는 이전에 사용한 연희무대의 목재를 재사용하여 무대를 구축한 것으로 판단된다.

외연과 내연의 특징을 기축진찬으로 외연과 내연의 장인 참여수를 비교하면, 기축진찬 외연의 장인 수는 약 48명으로 기축진찬의 내연 참여 장인 약 23명과 현 \저하게 차이가 난다. 다만, 기축진찬 내연은 장인의 유형이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내연은 왕실의 여성을 위해 무대 구성이 다양해지는 것과 연관이 있다.

壬辰進饌 외연 장인 수는 약 66명이지만, 내연 장인의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 장인의 수를 알 수 없다.

내연의 무대는 외연에 비해 공간이 적고 참여자가 제한적이었지만 형식과 구성은 장인이 다양하게 건축하였다.

표 2. 內宴의 궁중 연희무대를 건축한 장인

종합해보면, 외연의 연희는 성대하게 거행되어 참여자의 공간을 넓게 만들기 위해 목수를 중심으로 한 장인이 많았다.

내연의 무대는 외연에 비해 참여한 장인의 수가 적었지만, 목수를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외연에 비해 왕실의 여성을 위한 무대 구성을 위해 다양한 장인이 참여하는 특징이 나타난다. 또한, 내연의 연희무대를 구성하는 장인은 헌종시기부터 외연의 무대를 구성하는 장인의 수만큼 증가되었다. 이는 조선후기에 궁중 연희가왕을 중심으로 한 외연보다 대비를 主賓으로 설행하는 연희를 많이 거행하였고 규모도 외연보다 성대해지고 화려해지는 양상으로 변화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내연의 궁중무대 건축의 장인의 처우는 순조시기 안순길이 목 2필, 포 2필로 가장 높게 기록되어 있다. 무신진찬으로 장인의 처우를 살펴보면 목수는 도편수에게 무명 2필을 지급하고 목수, 선장의 순으로 무명1필과 베 1필을 상전으로 지급하였다. 다른 장인들은 무명1필씩을 동일하게 지급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목수의 위계가 장인 조직에서 상위 등급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급은 戶曺에서 담당하였다.

3. 궁중 연희무대를 건축한 장인의 왕실 활동

궁중 연희무대를 건축한 장인은 왕실의 다양한 의례에도 참여하며 분야에 맞는 기술력을 제공하였다. 연희무대에 참여한 장인의 기록이 제한적이지만, 기록된 장인의 활동을 정리해보면 과 같다.

정조 시기에는 영건공사에 참여하며 순조 시기에는 더욱 다양한 분야에 장인이 참여하며 진작, 진찬 등의 연희에 참여하는 횟수가 증가된다. 헌종과 철종 시기는 재위 기간이 짧은 것과 연관되어 장인이 참여하는 행사 비중이 낮게 나타나지만, 고종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고종시기에 들어서는 중건공사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장인이 활동한다. 특히 연희에 참여하는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순조와 고종시기는 연희의 설행 비중이 늘어나게 되고 이에 따라 장인의 참여 빈도가 증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장인의 인력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중이 높은 의례에 우선적으로 참여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순조, 고종 시기의 장인이 가장 다양한 왕실의 행사에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순조, 고종시기 진작과 진찬의 연희가 빈번하게 설행된 것과 연관이 있다. 또한 정조, 순조, 고종시기에 장인들은 왕실 영건 공사에 참여하는 특징이 있다.

연희 무대를 건축한 장인들은 다양한 궁중 의례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왕실 의례에서 가장 중요했던 상례에 연희무대 장인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장인들은 왕실 의례에서 주로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활동하지만, 상황에 따라 인력이 부족한 비슷한 공종에 참여하기도 했다. 장인의 활동 가운데 장인 개인이 참여한 특징을 살펴보면, 崔順起는 기해진연에 소인거장으로 참여하고 정조 시기에는 기거장으로 활동한다.

金命甲은 안순길과 함께 기축진찬의 船匠17)으로 참여하고 이후 인정전중수공사(1857)에서는 목수로 참여한다. 徐相黙은 이종운과 함께 임진진찬(1892)의 내연무대 제작에 참여한다.18) 신정왕후국장도감(1892)의 공사에도 목수로 참여한다. 하지만 이후 효정왕후국장도감의 기록에는 乬鉅匠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이에 목수가 걸거장으로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19)

池淳永은 무신진찬(1848)에는 박배장으로 참여하고 인정전중수공사(1857)에서는 소목장으로 참여했다.

黃仁成은 순조시기에는 목수로 활동하지만, 헌종 무신진찬의 연희무대 제작에서는 대인거장으로 참여했다.

劉龍伊는 기축진찬(1829)에는 소인거장으로 활동하고 효명세자빈궁(1830)에서는 목수로 참여한다.

李敬孫은 순원왕후인릉산릉도감(1857)에서 목수로 참여한다. 효명세자빈궁혼궁에는 순조시기 목수 김덕인, 이완득과 병풍장 정도흥, 소인거장 류용이 등 다수가 참여하여 당시 효명세자의 위상을 알 수 있다.

金善鎬는 고종시기 禮葬廳謄錄20)의 도배장으로 참여하고 신축진찬과 임인진연의 연희에서도 도배장으로 참여한다. 다만, 효정왕후국장도감21)에서는 병풍장으로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장인의 활동을 정리해보면, 연희무대를 건축한 목수는 인거장, 걸거장, 선장의 공정에 참여하기도 한다. 박배장은 소목장으로 참여하며, 도배장은 병풍장으로 비슷한 공종에 참여한다.

연희무대를 구축하기 위해 장인들은 비슷한 공정에 참여하며 상호 보완하는 형식으로 융통성 있게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궁중 연희무대 뿐만 아니라 왕실의 다양한 의례 행사에 담당 분야에 참여하여 왕실 의례 행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 한 것을 알 수 있다.

표 3. 外宴과 內宴의 연희무대 장인들이 왕실 의례에서 활동한 기록 (儀軌를 중심으로 작성함),  네모.PNG 이미지 : 연희무대 조성에참여한 부분

표 4. 연희무대 장인이 활동한 궁중 의례(儀軌를 중심으로 표. 3을 요약하여 작성함)

숙종시기부터 고종시기까지 다양한 의례와 연희무대에 참여한 장인들은 숙종과 영조시기에는 진연 등 연희의 참여보다는 빈전, 혼전, 책례, 국장, 산릉 등의 의례에 참여하는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 것을 <표 4>로 알 수 있다.

목수와 함께 목재를 다루는 장인이 의례에 참여한 공종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이를 추정해볼 수 있다. 우선 연희무대에서 목수는 무대의 木構造23)와 補階24), 層橋 등 주요 부분을 건축하였다.

연희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지원하고 보조하는 공간인 熟設所假家25)의 건축에도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숙설소는 크게 음식을 조리하고 보관하는 곳, 조리에 필요한 도구나 연료 등을 관리 보관하는 곳, 각종 연향 보조자들의 처소, 연향 참례자나 보조자들의 음식을 차리는 곳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숙설소의 건축을 담당한 역군들의 사용 공간이 별도로 조성되었다.26)

<그림 3>을 살펴보면, 왕세자가 연희를 준비하면서 거처한 공간에서 자경전으로 이동하는 공간에 가설로 설치된 假複道가 자경문 밖에 구획되어 있다.

그림 3. 『己丑進饌圖』, 慈慶殿內宴, 1829, 호암미술관소장

즉, 연희무대에서 목수는 주요 무대를 건축하는 공종 외에 연희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공간을 임시로 구획된 숙설소와 왕실의 이동에 필요한 假複道27) 등 가설 건축에도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국장, 산릉, 빈전, 혼전 등에서는 정자각, 재실 등 건축물과 의례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동안 <그림 3>과 같이 필요한 內人假家, 陵上閣, 甕家와 隧道閣, 廬幕28) 등 假家 건축에도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가례와 책례 등에서는 의례가 열리는 공간에 보계를 배설하고 행사에 필요한 가가 등 가설 시설을 건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왕실 의례에서 목수들은 주요 건축물을 축조하거나 의례공간과 어울리도록 공간을 구획하고 행사에 필요한 보조공간도 건축한다.

그림 4.『純元王后仁陵山陵都監儀軌』, ‘上-內人假家間架圖’, 下-陵上閣, 隧道閣, 1857, 서울대 규장각

4. 궁중 연희무대를 건축한 주요 木手의 흐름

조선후기 궁중연희 무대는 내연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연희무대를 조성한 장인의 사료는 제한적이어서 흐름을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표 3>으로 숙종시기부터 그 흐름을 일부 파악해볼 수 있다.

張仁尙은 숙종시기 기해진연(1719)에 一等 목수로 참여하며 숙종29)과 영조30) 시기에 활동한다. 이는 사료로 확인되는 최초의 연희 무대 건축 목수이다.

田有秋는 영조시기 진연을 이끈 一等 목수로 영조시기 왕실 의례에 활발하게 활동하며 영조시기 연희무대에서 비중 있는 목수로 확인된다.

崔世光은 영조시기 활동한 장인으로 영조 수작(1765)의 연희무대의 목수로 안덕흥과 함께 영조산릉도감(1776)에 참여한다.

崔致良은 정조건릉산릉(1800)에 참여한 목수로 정조 시기부터 활동한 목수로 생각된다. 순조시기에는 인정 전영건(1805)에 목수로 이완득, 김덕인과 함께 참여한다. 자경전진작(1827)에서 연희무대 조성의 목수로 안순길과 함께 참여한다. 혜빈현륭원원소도감(1816)에서 도 이완득과 작업에 참여하며 이완득과의 교류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李完得은 1796년 정조시기 화성성역축조에 一等공장 소속31)으로 기록되어 있다. 『園幸乙卯整理儀軌』의 시상기록에 있다.32) 또한, 순조시기에는 인정전영건(1805)에 목수로 참여한다. 또한 연희무대의 참여는 기축진찬의 외연에 참여하고 태묘증수공사(1836)에도 참여했다.

金德仁은 이완득33)과 함께 인정전영건공사에 목수로 함께 참여한다. 이들은 이후 기축진찬의 연희무대에 각각 외연과 내연무대의 목수로 화려한 기축진찬의 무대 구축에 기여한다.

이들은 국가의 중요한 건축공사에 참여하고 이후 연희무대의 공사에도 관여하여 왕실 공사에 참여했던 수준 높은 장인들의 기술이 궁중에서 구축된 연희무대에도 반영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의 장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순조시기 주목해야 할 목수 安順吉은 순조시기 적극적인 활동을 한 목수이다.

○ 內外補階入排時, 戶曹判書金鏴, 正郞洪羲錫, 各內下冠 帶次, 表裏一襲, 計士·書吏·使令·工匠以下, 竝從厚施賞, 自本所頒給, 木手安順吉.34)

안순길은 순조시기 禮樂이란 무기를 꺼내들고35) 연향을 확대함으로써 왕실의 위엄을 한껏 드높인 효명세자가 직접 기획한 연희인 자경전진작(1827), 무자진작(1828), 기축진찬(1829)의 연희무대에 참여한다.

연속적으로 설행된 무대는 모두 다르게 구성되었다. 특히, 기축진찬은 외연과 내연이 성대하게 거행되며 무대의 형식도 외연과 내연이 다르게 구성되었다.

순조시기 궁중 연희무대가 정착되는 시기에 외연과 내연 무대의 건축에 참여하며 조선후기 궁중의 내연무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궐영건(1830)에 참여한 안순길은 창경궁영건공사(1834)에도 참여한다.36)

헌종시기에는 산릉도감37), 태묘증수도감38)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간다. 철종시기 빈전소39)의 패장으로 왕실 공사에 참여한다. 특히, 인정전중수공사(1857)에서도 활동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신 元世顯은 삼가 襃貶의 일을 아 룁니다. 삼가 갖추어 啓聞합니다. 방답진 防踏鎭水軍僉 節制使 安順吉…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40)

右司把摠 安順吉은 戶曹의 관문에 따라 仁政殿 重修에 看役都牌將으로 상경하였기 때문에 그 鎭에서 군병을 취점하는 것은 그 진의 留鎭將 金景式으로 하여금 대행 하도록 하고 신의 수영에서 대솔 군관 전 낭청 申懋熙 를 파견하여 같이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41)

절충 장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신 尹 신의 수영 관하 위도진 蝟島鎭水軍同僉節制使에 새로 제수된 安順吉이 올해 戊午年 9월 29일 政事에서 本職에 제수되어 11월 초6일에 조정에 하직인사를 하고 떠나 같은 달 14일에 임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42)

안순길은 서궐영건, 창경궁영건, 인정전중수 등 왕실의 중요한 영건공사에 비중 있게 참여한다.

인정전중수공사는 철종시기의 營建으로 안순길이 헌종시기의 도편수인 윤석신, 권득량과 고종시기 도편수인 김순길과 함께 교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며, 조선 후기 연희무대의 도편수들이 참여한 수준 높은 영건공사인 것을 알 수 있다.

인정전중수도감의 各色工匠匠料式은 장인들에게 지급한 급료 규정이다. 장인 종류 별로 등급을 두어서 목수, 선장 등은 가장 높은 보수인 3전 8푼을 지급받았고, 인장은 가장 낮은 보수인 3전을 지급받았다.43)

元百乭은 무자진작, 창경궁영건공사44)에 참여하며 순 조시기 중요한 공사를 안순길과 함께 한다.

尹錫信은 헌종무신진찬(1848)의 도편수로 순조시기 이후 헌종시기 궁중 연희무대가 고급화되고 정형화되는 과정을 이끈 장인이다. 이후 철종시기 안순길, 권득량, 김순길, 김명갑과 함께 인정전중수공사에 같이 참여한다. 또한, 고종시기 왕실의 중요 의례인 존호도감, 휘경원천봉도감(1863)에 목수로 참여하고 이후 경복궁 중건공사(1865)의 왕실 영조건축에 참여하는 장인으로 헌종시기 연희무대와 철종, 고종시기 대규모의 건축공사에 참여한다.

權得良은 순조시기 수빈박씨의 혼궁 수리 공사에 참여하였다.45) 이후 궁중무대의 고급화와 세분화를 가져온 헌종무신진찬에서 윤석신과 함께 목수로 참여한다. 또한, 인정전중수공사에 참여하여 안순길, 윤석신, 김순길과 교류한다.

金順吉은 무진진찬(1868), 계유진작(1873)을 이끈 도편수로 헌종 시기의 연희무대가 고종시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여러 분야46)에 활동한 장인이다.

김순길은 활동 초기에는 김명갑, 윤석신, 권득량과 함께 인정전중수공사47)에 참여했다. 이후 휘경원천봉도감에서는 甕家와 隧道閣의 구축에 참여한다. 휘경원천봉도감에서는 헌종시기 무대건축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윤석신과 함께 활동하며 기술력을 교류하고 고종 시기 신정왕후의 팔순으로 설행된 가장 성대한 연희인 정해진찬(1887)의 연희무대를 도편수 이종운과 함께 협력한다.

李鍾雲은 고종시기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다. 무대건축에 참여한 기록은 계유진작(1873)부터 나타나며, 정축진찬(1877), 정해진찬(1887),에서는 도편수로 조직을 이끈다. 임진진찬(1892)의 외연과 내연 궁중무대 제작에 참여한다. 정해진찬은 보계입배의 건축조직이 가장 다양하게 나타나는 연희로 규모가 크고 성대한 연희이다. 정해진찬의 궁중무대는 도편수인 이종운이 중임을 수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종운은 명성왕후국장도감, 신정왕후부묘도감, 영조 묘호도감, 왕세자가례도감 등에 看役牌將으로 활동한다. 李鍾雲은 연희무대의 목수 가운데 높은 관직에 임명된 기록이 있다.

국장도감 별단에 대해, 총호사인 특진관 조병세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看役牌將 李鍾雲은 영선사에 조용하라.48) 영선사 주사에 이종운을 임용하였다.-營繕司主事 에 李鍾雲을 임용하고49)

당상인 장례원 경 이호익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慶基 殿令) 具源謨, 9품 李根宇는 모두 6품으로 올리라. 정3품 李完夏, 회계원 검사과장 吳顯耆, 6품 李鍾雲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50)

6품 李鍾雲을 준경묘영경묘영건청 별감동에 임명하였다.51)

정3품 李鍾雲을 延安南大池築垌派員에 임명하였다.52) 山陵都監別單...從二品 李鍾雲53)

인정전중수공사(1857)는 철종시기의 영건으로 순조시기 도편수인 안순길과 김명갑은 헌종시기 도편수인 윤석신, 권득량과 고종시기 도편수인 김순길이 모두 참여한 왕실공사이다. 즉, 연희무대를 이끈 목수들이 가장 많이 참여한 공사이기도하다.

그림 5. 木手들의 관계도 (의 내용을 정리하여 왕실 의례에서 한번 이상 교류한 목수들을 정리함)

즉, 인정전중수공사는 조선후기 연희무대를 이끈 목수들이 교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며, 조선후기 연희무대의 도편수들이 참여한 수준 높은 영건공사인 것을 알 수 있다.

궁중 연희무대 주요 목수가 서로 교류한 관계를 정 리해보면 <그림 5>와 같다.

목수 장인상은 숙종시기 진연에 중요한 목수로 사료로 확인 할 수 있는 궁중 연희무대 최초의 장인으로 숙종, 영조시기에 활동한다.

전유추는 영조시기 성대한 진연에 참여한 일등 목수로 평가할 수 있다. 영조시기에 활동한 최세광과 안덕흥은 정조시기 함께 영조산릉도감에 활동한다. 이는 영조와 정조시기 연희무대 목수 관계를 직접적으로 알 수 없지만, 영조시기 목수가 정조시기에도 활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최치량은 이완득과 교류가 있었으며 순조시기 안순길, 이완득, 김덕인과 함께 한다. 활동초기는 정조시기로 생각되며 순조시기에 활발한 활동을 한다.

이완득은 정조시기에 활동한 수준 높은 장인으로 순조시기의 중요한 왕실 행사에 참여하며 이후 순조시기 연희무대의 대표적 도편수인 안순길로 이어지는 역할을 한다.

순조 시기는 내연의 무대가 이전 시기보다 발전하여 정착하는 시기로 시기이다. 이는 효명세자 대리 청정기에 정립된 형식으로 내연무대의 과도기적 형식을 구축하는 시기이기도 하다.54)

안순길은 내연 연희무대의 건축에 선두적 역할을 하며, 순조 시기 가장 화려했던 기축진찬의 외연과 내연 연희 무대에서 활동한 장인이다.

또한, 순조, 헌종, 철종 시기에 활동한 목수로 대비의 수렴청정과 세도정치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왕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효명세자의 정치적 의도를 반영하여 이를 궁중무대에 구현한다. 이런 시도는 왕과 왕비, 왕세자 등이 주빈인 연희에서 왕실 위차를 연희무대의 예제에 반영하여 발전시켰다.

안순길이 교류한 목수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정조시기 최치량과 이완득, 김덕인과 함께 활동하며 기술을 교류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헌종시기 궁중무대 도편수 윤석신과 함께 철종시기 인정전중수공사에서 김명갑, 윤석신, 권득량, 김순길과 등과 교류한다. 이는 헌종시기 윤석신과 고종시기 김순길로 이어진 궁중 무대 흐름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무신진찬의 도편수 윤석신은 순조시기 활동한 권득량과 협동하며 순조시기 기술력을 이어 철종, 고종시기까지 활약한다. 윤석신의 기술은 교류가 있었던 김순길에게 전수되는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권득량은 순조시기의 기술력을 헌종시기로 전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도편수 이종운은 고종시기의 중요한 연희무대를 구축한 장인으로 계유진작(1873), 정축진찬(1877), 정해진찬(1887), 임진진찬(1892)의 외연과 내연무대 제작에 참여하여 고종시기 연희무대가 확대되어 확장되는 과정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한다.

궁중의 연희무대를 건축한 주요 목수의 관계를 <그림 4>로 정리해보면, 목수가 처음 활동한 시기로 숙종시기 장인상, 영·정조시기 전유추, 안덕흥, 최세광, 이완득, 최치량, 김덕인 순조시기 안순길, 권득량 헌종, 철종시기 윤석신, 김순길 고종시기 김윤식, 이종운, 서상묵 순으로 정리 할 수 있다.

또한, 순조시기는 연희무대를 건축한 목수들이 왕실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며 교류를 했던 시기인 것을 알 수 있다.

궁중 연희무대의 목수는 왕실의 중요한 영건공사에 참여하며 이들의 뛰어난 기술력은 연희무대 건축에 반영되었다. 사료의 한계가 있지만, 조선후기 궁중 연희 무대 건축에 참여한 목수의 관계와 흐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다.

5. 결론

조선시대에는 궁중무대를 건축하기 위해 장인들이 참여하였다. 사료로 확인 가능한 숙종 시기부터 고종시기까지 연희무대에 참여한 장인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궁중 외연 무대의 건축 장인은 사료의 한계가 있지만 숙종시기 己亥進宴(1719)으로 알 수 있고, 내연무대의 건축 장인은 순조시기 慈慶殿進爵(1827)부터 알 수 있다.

둘째, 外宴과 內宴에 참여한 장인은 숙종과 영조 시기에는 외연에서 많았지만, 순조시기부터 내연에서 증가된다. 이는 순조시기부터 내연의 연희무대가 발전적 형식으로 변화되면서 나타나는 양상이다.

셋째, 장인의 유형은 숙종, 영조 시기에는 외연에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己丑進饌(1829)부터 내연에서도 다양한 장인의 유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는 무대에 왕실 여성을 참여하며 이를 반영하여 구성한 것과 연관이 있다.

넷째, 연희무대의 장인은 전문분야를 비롯하여 비슷한 공정에 참여하며 인력의 수급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였다.

다섯째, 왕실 활동에서 숙종, 영조 시기는 왕실의 의례에 참여하는 빈도가 높았고, 순조시기부터 연희에 참여하는 빈도가 증가 된다. 이는 대비를 主賓으로 하는 내연의 설행횟수가 증가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여섯째, 고종시기에 가장 많은 장인이 연희무대에 참여하는 것은 연희의 규모가 성대해지면서 무대의 형식도 확장된 것과 연관이 있다.

일곱째, 연희무대에서 목수의 참여 공종은 연희 주요 무대인 임시 실내극장 형식을 건축하는 것과 연희가 설행되는 동안 필요한 가설시설인 假家 등도 건축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덟째, 궁중 연희무대 장인은 왕실의 중요한 의례 행사에도 다양하게 참여한다. 國葬, 山陵 등에서는 정자각등 주요 건축물과 假家의 건축에 참여하고 嘉禮, 冊禮 등에서는 보계와 假家 등을 건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주요한 목수로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仁政殿重修營建(1857)은 철종시기의 영건으로 순조, 헌종, 철종, 고종시기에 활동한 연희무대의 주요 목수들이 서로 교류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영건공사이다.

둘째, 순조 시기는 궁중 연희무대를 건축한 목수들이 왕실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며 교류를 했던 시기로 판단된다.

셋째, 張仁尙은 숙종 기해진연의 목수로 사료로 확인 할 수 있는 궁중 연희무대 최초의 장인으로 평가 할 수 있다.

넷째, 李完得과 崔致良, 金德仁은 정조시기에 활동하며, 순조시기 연희무대 건축에 참여한다. 이는 정조시기 기술이 순조시기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섯째, 安順吉은 효명세자 집권기 연속 설행된 연희무대 건축에 계속 참여하며, 순조시기 성대하게 발전한 외연과 내연의 무대를 구축한 목수이다.

또한, 중요한 왕실 영건공사에 참여하며 조선후기 궁중무대에 참여한 목수들과 가장 많은 교류를 한다. 즉, 조선후기의 궁중 연희무대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려 궁중 연희무대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섯째, 李鍾雲은 고종시기 궁중 연희무대가 확대되어 확장되는 과정에서 위계의 맞는 무대를 조성하였다.

일곱째, 조선후기 궁중연희에서 가장 성대하고 화려하게 설행되었던 3대 진찬인 순조 己丑進饌(1829), 헌종 戊申進饌(1848), 고종 丁亥進饌(1887)을 이끈 도편수는 서로 교류한 경험이 있는 安順吉, 尹錫信, 金順吉인 것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 설행되는 연희무대를 구축한 건축 장인은 자신의 분야에 체계적으로 참여하며, 수준 높은 기술로 화려한 궁중 연희무대를 구축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궁중 연희무대의 목수는 왕실의 중요한 전각의 영건 공사에 참여하고 상호보완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목수의 뛰어난 기술력이 궁중 연희무대 건축에 반영되어 나타나게 된다.

즉, 연희무대 건축에서 중임의 역할을 수행한 목수와 각 분야의 장인들은 서로 교류하며 뛰어난 기술력을 잘 전승하여 조선후기 임시 가설시설로 건축된 궁중연희무대를 궁중 실내극장 형식의 수준 높은 무대로 끌어올리는데 원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References

  1. 조선왕조실록
  2. 승정원일기
  3. 己亥進宴儀軌, 1719
  4. 進宴儀軌, 1744
  5. 慈慶殿進爵整禮儀軌, 1827
  6. 戊子進爵儀軌, 1828
  7. 己丑進饌儀軌, 1829
  8. 戊申進饌儀軌, 1848
  9. 戊辰進饌儀軌, 1868
  10. 溪由進饌儀軌, 1873
  11. 壬辰進饌儀軌, 1892
  12. 申丑進饌儀軌, 1901
  13. 壬寅進宴儀軌, 1902
  14. 仁政殿營建都監儀軌, 1805
  15. 西闕營建都監儀軌, 1830
  16. 昌慶宮建都監儀軌, 1834
  17. 宗廟永寧殿增修都監儀軌, 1835
  18. 仁政殿重修都監儀軌, 1857
  19. 景福宮營建日記一, 1865, 와세다대학소장본
  20. 神貞王后國葬都監儀軌, 1892
  21. 孝定王后國葬都監儀軌, 1905
  22. 中和殿營建都監儀軌, 1901
  23. 慶運宮重建都監儀軌, 1906
  24. 各司謄錄, 1878
  25. 이의강 역, 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26. 송방송 외 역, 國譯純祖己丑進饌儀軌卷一. 卷二. 卷三, 민속원, 2007
  27. 전통예술원, 국역 헌종무신진찬의궤 卷一. 卷二. 卷三, 민속원, 2007
  28. 國譯華城城役儀軌, 수원시, 2006
  29. 인남순 역,국역고종정해진찬의궤, 보고사, 2008
  30. 김동욱, 조선조 17세기 궁궐건축공사에 종사한 목수 편수에 대하여, 건축역사연구, 제1권, 제1호, 1999
  31. 주남철, 한국의 목조건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32. 경세진.조재모,조선후기 궁중연향 시 숙설소와 중배 설청의 배치와 운영에 관한 연구 : 궁중연향의궤를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제24권 제6호, 2015, 73쪽
  33. 이연노,조선후기 장인의 담당 공종에 관한 연구 : 영건의궤 기록을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25권, 제8호, 197-204쪽, 2009
  34. 이상명,조선후기 왕릉 조성 시 목공사 장인의 배정과 조달 방식, 건축역사연구, 제26권, 제4호, 19-34쪽, 2017 https://doi.org/10.7738/JAH.2017.26.4.019
  35. 석진영, 한동수,조선후기 궁중의례에 사용된 보계(補階)의 유형과 세부구조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제27호, 제2호, 86-100쪽, 2018
  36. 석진영.한동수,순조 궁중연희 내연무대의 朱簾, 甲帳에 관한 연구 : 修理,排設부분을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제26권, 제6호, 67-76쪽, 2017 https://doi.org/10.7738/JAH.2017.26.6.067
  37. 장경희,의궤속의 장인 1, 2, 솔과학, 2013
  38. 이상각, 효명세자, 서해문집,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