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udy about the ruling policy of Government-General of Chosun and its use of films for the political propagand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1910-1945)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통치정책과 영화의 활용에 관한 연구

  • 조희문 (상명대학교 영상학부 영화)
  • Published : 2006.12.31

Abstract

Japan started to colonize Korea in 1910. It's when It forced and made Chosun sign on the Treaty of Protectorate. The Chosun faithfully practiced Japan's colonial policy over Korea. Futhermore, it stopped many Koreans from an anti-Japanese movement and tried to make Koreans have a positive attitude towards Japan. For this, Japan advertised the policy called Nae-sun-il-che which meant Korea and Japan were a community together from the same root. Ultimately, it targeted on absorbing Korea within their territory. With this goal, Japan kept on practicing the policy to acculturize and brainwash Koreans, totally depending on force and pressure from 1910 to 1919. However, this policy had changed by the overall anti-Japanese movement happening on March 1st 1919. Saito, the third governor-general who was appointed laster on, made an effort to win over He favor of Koreans in a less forceful way of the cultural politics. The change of policy had been specified in diverse actions such as permitting civil mass-media bodies forming the observation groups and opening conferences. In the case of daily newspapers, Japan had permitted only the ones by the Government-General of Chosun such as Maeil-shinbo, Kyunsung-ilbo, and Seoul Press before, but then other civil newspapers In Korean stated to be released. Along His Japan formed both Korean and Japanese observation groups to promote the mutual understanding and showed off Japan's goods in the propaganda films by implementing a film department. It's because Japan totally recognized and understood the impact of films. Therefore, Japan distincitively established a film agency for the production of propaganda movies while it banned the civil film production after 1937 when Japan started the war against China and USA in row. So, only one film agency, ruled by the Government-General of Chosun, produced movies from 1942 to 1945.

일본은 1910년, 한국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것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통치를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 내에서 입법, 사법, 행정력을 독점한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일본의 한국지배는 194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조선총독부 또한 그때까지 존속했다. 조선충독부는 일본의 한국통치 정책을 충실하게 집행하는 기관이었으며 한국인의 반일, 항일 행위를 무마하고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갖도록 하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나갔다. 이를 위해 일본은 일본과 한국은 같은 뿌리에서 탄생한 공동운명체라는 개념을 의식화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궁극적으로는 일본과 한국이 하나의 국가라는 개념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이같은 방침에 따라 일본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나갔는데, 1910년부터 1919년까지는 억압적인 통제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는 1919년 3월 1일을 기해 대대적으로 일어난 항일 민중봉기에 의해 전면적인 전환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에 취임한 3대 총독 사이토(濟藤實)는 보다 우호적인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한국인을 적극적으로 회유하고자 했다. 정책의 변화는 여러 가지 후속 조치들로 구체화 되었는데 민영 언론매체의 설립 허용, 시찰단 구성, 박람회 개최 같은 일들이 그것이다. 일간신문의 경우 이전에는 매일신보 경성일보, Seoul Press 등 총독부 기관지만 발행되었으나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한국어 신문이 허용되었으며 잡지들도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일본파 한국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일본과 한국시찰단을 구성하여 상호방문하는 사업을 펴기도 했고, 박람회를 개최해 일본의 우수한 문물을 한국인들에게 과시하려는 시도도 나왔다. 이같은 조치의 기저는 '주지(周短)와 선전(宣衝)을 보다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영화였다 조선총독부가 활동사진반을 설치하고 홍보 선전 영화의 제작과 배급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영화의 선전기능과 효과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만주), 미국과 차례로 전쟁을 시작한 1937년 이후에는 민간의 영화제작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한편 선전영화 제작을 위한 영화사를 별도로 설립했다.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 는 조선총독부의 조종을 받는 한개 영화사만이 존재해 선전영화만을 제작했다.

Keyw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