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산재는 1800년대 중반에 조성된 민가 정원이다. 북으로 지리산 줄기를 등지고 남으로는 섬진강을 내려다보는, 전형적인 한국의 배산임수 형국을 이루는 터에 입지하고 있다. 조성된 이후 6대를 거쳐 오면서도 정원에 큰 변화 없이 조선 후기 민가 정원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는 정원이다. 본 연구는 현장 조사와 인터뷰, 작정자의 유고집과 편액, 주련의 내용 분석을 통해 역사 정원으로서 쌍산재의 변화하는 경관에 대해 고찰하였다. 완만한 구릉지에 위치한 쌍산재는 크게 내원과 외원으로 분류되며, 내원은 진입 공간, 주거 공간, 전이 공간, 후원 영역으로 구분된다. 후원은 서당채와 그 정원, 경암당 등으로 구성되며 외원인 사도저수지 영역으로 이어 진다. 쌍산재의 특징적인 식생 경관은 13,000m2의 죽녹차밭과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길 양쪽에 열식된 모란과 작약, 그리고 동백이나 사철나무의 휜 가지가 보여주는 액경, 마지막으로 탱자나무와 대나무로 이뤄진 생울타리를 꼽을 수 있다. 쌍산재는 지형과 원식생(原植生)을 고려한 공간 구성과 배치가 돋보인다. 주요 건축물은 후손들이 선대의 아호를 따 이름 지었는데,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은일하며 후학을 양성하고자 했던 선대 조영자들의 철학관이 묻어난다. 오주석 선생이 세운 입석과 하얀 경계석은 쌍산재만의 독특한 정원 시설이다. 현 소유자가 가족들과 방문객의 편의를 위해 조성한 석상, 돌의자, 수영장 등 또한 특징적인 경관을 연출한다. 쌍산재는 거주자에게는 살림집이자 친우들과의 교류의 장, 수신(修身)과 은일(隱逸)의 장이었으며, 아이들에게는 배움의 장이었다면 현재는 여러 사람들이 힐링할 수 있는 민가 정원으로서 성격을 갖는다. 2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쌍산재의 내외원의 경관은 일부 변화를 겪었다. 이렇듯 변화하는 속성을 가진 역사 정원의 특성은 살아 있는 유산으로서 정원 고유의 속성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쌍산재를 조경학 관점에서 다룬 최초의 연구로서, 현존하는 조선조 민가 정원이 매우 적다는 점에서 앞으로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아울러 현재 점차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정원 관광 상품으로서 역사 정원의 가치와 효용을 가늠해 볼 여지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의 검무는 조선시대까지 의례, 민속예능, 궁중연향, 풍류 등에서 다양하게 추어졌다. 그 중 기생들이 민간과 궁중에서 추었던 여기(女妓) 검무가 현재까지 전승되었는데, 조선 후기 문학작품들에 기록된 검무들은 현행 검무보다 역동적이고 검기(劍氣)를 가득 담은 춤이었다. 하지만 현재 전승되고 있는 기녀 검무들은 의식(儀式)성이 강하고 단아하다. 시대적 변화를 겪으며 검무의 정조(情調)가 변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검무의 핵심적인 구조가 있을 것이라는 가설 하에 검무의 내적 구조를 시론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이를 위해 현행 검무와 조선 후기 검무의 구조를 교차하여 연구하였다. 조선후기 문학작품 중 박제가의 <검무기>와 정약용의 <무검편증미인>을 분석했고, 무보로 "정재무도홀기"에서 <검기무>와 "교방가요"의 <검무>를 분석하였다. 도입과정에서는 춤꾼이 등장하여 절을 하고 춤꾼의 캐릭터를 보여주고, 무진 무퇴하며 손춤이나 한삼춤을 춘다. 전개과정에서는 춤꾼과 검이 만나는데, 검을 잡을 것인지를 갈등하다가 양 손에 칼을 잡고 춤춘다. 절정과정에서 숙련된 검술과 교전(交戰)의 모습을 보여주고, 마지막에 연풍대까지 춘다. 결말과정에서는 궁중에서 추었던 경우 인사를 하고 마치지만, 교방에서 추었던 경우 칼을 던지고 춤을 마무리한다. 검무의 구조를 도입 - 전개 - 절정 - 결말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네 단계의 전개 구조에 현행 검무(진주검무, 통영검무, 해주검무, 호남검무, 국립국악원의 검기무)의 춤사위 진행을 결부시키고, 반주 장단인 염불 - 타령(또는 늦은타령) - 자진타령 - 타령 - 자진타령의 순서에 따라 검무의 전개를 분석해보았다. 도입과정은 염불이나 타령의 초입부분이다. 기생이 등장하면서 캐릭터가 제시되고, 2열로 나뉘어 상대(相對)하며 춤춘다. 염불과 타령의 도입과정은 여유롭고 우아하게 진행된다. 전개과정은 타령의 중간이나 자진타령에 해당한다. 춤꾼들이 검 앞에 앉아 있거나 앉게 되는데, 칼을 잡기(집검(執劍))까지 갈등의 과정이 보여지다가, 결국 쌍검을 잡고 춤춘다. 타령에서 자진타령 장단으로 속도를 점차 높이며 검을 잡는 과정의 갈등과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또 자진타령의 탄력 있는 장단이 춤의 전개를 조금씩 진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속도를 갑자기 늦추어 타령장단이 3~4장단 배치되었다. 자진타령의 빠른 장단에서 타령의 느린 장단으로 전환되는데, 그 이유는 검무의 진전되는 긴장감을 잠시 끌어내 숨을 고르게 했다가, 다시 속도를 높여서, 이 춤이 절정으로 가기 전에 검무의 묘미를 높이는 효과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다시 자진타령으로 속도가 빨라지면 검무의 동작들은 더욱 폭이 크고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고조된 자진타령의 빠르고 힘 있는 장단에 맞춰 추면서 절정과정의 최고조에 이르는 것이다. 마지막 결말은 잦은 타령이 고조되고, 연풍대의 여세를 몰아 일렬로 서서 검을 휘두르며 춤추다가, 인사를 하고 춤을 마친다. 여기까지 자진타령이 이어진다. 이상 검무의 전개 과정에서 염불 - 타령 - 자진타령 - 타령 - 자진타령으로 이어지는 반주음악은 검무의 도입, 전개, 절정, 결말이라는 구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고, 각 과정을 선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후기 문헌에 기록된 기녀들의 검무와 현행 검무가 진행상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검무의 핵심적인 내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옛 문헌과 그림에 담긴 탁족(濯足)의 문화현상과 그 기저에 담긴 배경 및 의미를 고찰함으로써 탁족 문화를 계승하기 위한 조경적 대안을 제안해 보고자 한 것으로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자연 질서에 순응하고 세속으로 부터 초연(超然)한 삶을 비유한 '탁영탁족(濯纓濯足)'의 고사는 '은일(隱逸)'을 통해 유유자적하는 탁족지유(濯足之遊)로 승화되었다. 선비가 유연(柔軟)한 계류에 발을 담그는 것은 자연과 물아일체(物我一體) 함으로써 도(道)와 상합(相合)되고자 하는 것으로 이러한 모습은 자유로운 정신세계인 '유(遊)'의 경지이자 본질과 상통한다. 탁족의 문화현상은 고려 말 이후 조선시대 전래경관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팔경시(八景詩)에 나타난 탁족은 고답적(高踏的)인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에 깃든 생활경이기도 하였다. 탁족도에 묘사된 맑은 물이 흐르는 계류[淸溪]와 바위, 그리고 소나무 등 교목이 우점(優占)하는 산수는 뜻 높은 선비의 은일공간으로 기호화되고, 그 정신세계는 더욱 부상되었다. 중국의 탁족도에서는 '청계(淸溪)'와 '창랑(滄浪)'을 강조함으로써 더러움에 대비되는 청류(淸流)의 이미지와 상고성(尙古性)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반면, 조선시대 그것은 상대적으로 은일과 탁족지유라는 내면적 즐거움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탁족도에 나타난 자연관은 자연의 섭리를 그림 속에 그려진 선비의 상황 및 태도로 비유하여, 산수에 대한 사랑과 그 속에서 여유를 즐기는 가운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를 깨닫게 하는 도가적(道家的) 관점의 표현이 잘 드러난 것으로 이는 중국은 물론 조선의 시대정신과 미의식의 한 단초를 보여준다. 요컨대 양국의 '탁족지유'는 인격수양이나 처신, 또는 은둔과 고답(高踏)의 상징으로 해석되면서 한편으로는 현실세계에서 납량의 수단으로 수용되어 왔다. 탁족 행위에는 선비들의 이상과 상고주의(尙古主義) 정신이 깃들어 있을 뿐 아니라, 일반 서민의 더위를 이기는 지혜가 담겨 있음은 깊이 되새겨 봐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환경적 지원성에 입각한 수공간과 탁족바위 그리고 물의 활용은 휴양 레크레이션 공간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대상이며, 탁족 행위에 깃든 정신이야말로 고전적 치유(治癒)의 정신문화였음을 일깨워 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청화백자투각연당초팔괘문연적(수정147)을 대상으로 CT 조사를 실시하고 복제품을 제작하여 구조와 제작방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CT 조사를 실시한 결과, 접합선이나 기공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하부 동체부 틀을 사용하여 한 번에 찍어 빼낸 후 상부 틀로 찍어 뽑아낸 상부 뚜껑을 서로 접합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하부 동체부의 내기 상면과 연접한 뚜껑 하단면이 서로 접합이 잘 되도록 내면 가운데를 대나무 칼로 거칠게 돌려 깎아 접합면이 누수 되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처음 제작할 당시 물을 담는 연적의 내기(內器)는 도량형 규격에 맞고 틀을 뽑아내기에도 용이한 원통형(圓筒形)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상부면과 동체부를 붙이는 과정에서 형태가 사다리꼴로 변형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실리콘 복제를 이용하여 원통형 내기로 다시 제작한 후 내기의 용량을 비교 측정한 결과, 3D프린팅을 이용해 복제한 유물 내기의 용량이 152.5㎖인데 반해 원통형 내기의 용량은 대략 168.6㎖로 조선시대 도량형 기준인 '량(量)'의 단위로 3홉(약 174㎖)과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원통형 내기의 용량이 조선 후기 도량형 기준과 부합하므로 실제 도공이 팔괘문연적을 제작할 당시 원통형내기를 가진 연적으로 제작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천약(崔天若 1684경~1755)은 동래(東萊) 출신 무인(武人)으로 1713년부터 왕실의 공역을 담당한 별간역(別看役)이었다. 그는 능묘석물, 건축, 옥공예, 주조(鑄造) 등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해 당시 사대부들은 '최천약은 형태가 없는 물건을 잘 창조한다[천약선창의(天若善創矣)].'라며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1713년 옥보(玉寶)의 거북이[귀구(龜瞿))를 깎는 것을 시작으로 왕실 공역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1720년대에는 자신만의 옥보 거북이 양식을 만들어 냈다. 왕실 공예품 중에서 동인(銅人 1741년)은 우리나라 유일의 금속제 침구동인상(鍼灸銅人像)으로 인체 각 부분의 표현이 사실적인 작품으로 최천약이 감동(監董)한 작품이다. 1731년 인조 장릉 병풍석에 십이지신상 대신에 모란과 연꽃을 조각한 최천약은 이때부터 왕릉 및 사대부묘 석물에 감동을 시작하여 단경왕후 온릉(1739년), 의소세손묘(1752년)에서 초상조각에 가까운 문인석을 제작하기도 했다. 최천약은 공민왕릉 무인석을 모델로 조현명묘 무인석(1752년)을 제작하고, 그가 1755년 사망하자 후배들은 조현명묘 무인석을 계승해 박문수묘(1756년)와 정성왕후 홍릉 및 인원왕후 명릉 무인석(1757년)을 조각한다. 그 결과 14세기 말 공민왕릉 무인석의 충갑(衷甲), 흉갑의 매듭, 대(帶)의 화문(花紋) 등이 18세기 무인석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의소세손묘 문인석 조현명묘 무인석 등 최천약이 제작한 문무인석들은 초상조각으로도 손색 없으며, 조선 후기 조각의 대표작으로 김하정(金夏鼎) 변이진(卞爾珍) 등 별간역(別看役)들과 김천석(金千碩) 박필심(朴弼深) 등 최고의 석수(石手)들이 있었기에 제작 가능한 작품들이었다. 이러한 최천약이 제작한 다른 문무인석의 발굴 및 다른 별간역들의 활동과 작품 등의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 능묘석물의 실체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지칭될 만큼 독자적 서풍을 창안한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5)은 '법고(法古)'를 중시하였는데, 한위대(漢魏代) 서예를 근본으로 하고,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를 마음의 스승으로 삼아 수련하였다. 만년에는 올바른 필법 전수를 위해 『창암서결(蒼巖書訣)』을 저술하여 보편적 서예의 기본원리와 자신의 서예관을 피력하였다. 창암(蒼巖)이 지향하는 서체는 해서(楷書) 근골(筋骨)의 확립을 통한 초서(草書)로 완결된다. 이를 위해 한위(漢魏)의 서체를 전범(典範)으로 제안하였는데, 온후간원(穩厚簡遠)한 한위근골(漢魏筋骨)은 무위자연적(無爲自然的) 무법(無法)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로 보아 창암(蒼巖) 서예론의 핵심이자 궁극적 지향점은 '자연(自然)'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법의 극치에 이르러 다시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여기에서 음양(陰陽)이 생성되고 형(形)·세(勢)·기(氣)가 부드러움을 도모하면 기괴(奇怪)함이 생겨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고법(古法)에 얽매이지 않고 우졸(愚拙)한 자연천성(自然天成)을 발현하면 장법과 포치가 일운무적(逸韻無跡)한 득필천연(得筆天然)을 이룬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는 이 연구에서 그의 서체가 자연을 예술로 승화하면서, 조선 고유의 서예미를 끊임없이 접목·시도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근골이 풍부하고 생명력과 역동감이 넘치는 형세를 이룬 일운무적(逸韻無跡)을 체화(體化)하였고, 득필천연(得筆天然)한 극공(極工)의 심미경지를 이루어 독창적인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로 구현하였고 마침내 호남지방에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서풍과 서예정신을 더욱 창달시켰다.
문화콘텐츠는 '창조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창조와 실천, 그리고 차이의 이해가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콘텐츠는 융복합지식의 콘텐츠 대중적이면서도 감성과 지식을 채워주는 질 좋은 콘텐츠를 선정해야 한다. 동아시아 인문주의 창제자인 공자는 의식주의 철학과 조선 후기 식생활에 영향을 끼쳤다. 공자는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유학뿐만 아니라 음식관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중 정조지(鼎俎志)"는 음식과 요리에 대한 백과사전으로 7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음식의 재료, 조리법, 효능 및 금기 등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육류요리, 채소요리뿐만 아니라 청량음료 달인음료 등의 각종 음료나 꿀과자 설탕과자 등의 과자류, 그리고 술 빚는 방법까지 천 여 가지의 레시피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그가 72세까지 살아오면서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무엇을 조심하고 어떻게 잘 해야 하는지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언급하고 있다. 공자의 일상에서 기록해 온 식문화가 조신시대까지 이어와 영향을 받은 풍석 서유구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통해 동양의 식문화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대중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본고는 고소설에 표출된 영웅의 시대별, 남녀별 차이에 드러나는 영웅의 유형화와 소설의 개별적 양상과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최고운전>, <전우치전>, <전관산전>, <일념홍>, <여영웅>을 텍스트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주인공들을 '문화영웅-최치원, 민중영웅-전우치, 내조(가정) 영웅-정소저, 친일 개화 영웅-일념홍 이형경'으로 유형화하였다. 또 이 영웅의 유형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서술하여 본고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중국과 조선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서로의 관계가 불편했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것이 바로 <최고운전>의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신라의 대문장가였기에 중국 문사와 한 수 우위의 시문수창을 할 수 있었다. 조선이 중국보다 문화가 우수하다는 자부심을 표현하기 위해 문화영웅 최치원이 필요했다. 조선은 반상제도가 뚜렷한 유교사회였다. 그렇다보니 모든 중심은 양반에 치우쳐 있어서 민중들은 양반에 의해 핍박을 받았는데 이 때 민중의 영웅이 필요했다. 그가 바로 <전우치전>의 전우치다. 전우치는 도술을 통해 민중들의 원한과 바람을 해결해 주는 진정한 민중영웅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전란을 체험한 여성들이 남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렇다 보니 <강도몽유록>이나 <박씨전>, 그리고 <이학사전>과 같은 여성영웅소설이 등장한다. 무능한 남성들로 인해 울분에 찬 여성들에게 당시 작가는 작품에서나마 희망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전관산전>의 정소저는 고소설에 충실한 여성주인공보다는 진취적이지만 남편을 위한 내조를 담당하는 가정영웅이다. 조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의 마수에 걸려든다. 이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조로 맺은 뒤 통감부 정치를 실시한다. 이 때 친일을 부각하고자 친일신문을 발간하고 친일 소설을 연재한다. 바로 <일념홍>과 <여영웅>인데 친일개화 영웅이다.
본고에서는 영남에서 인지도가 높았던 방산 허훈의 "방산집"을 중심으로 II장에서는 방산 허훈의 삶과 학문적 연원을 살펴보고, III장에서는 본격적으로 허훈의 산문 중에서 잡저(雜著)에 실려있는 작품 몇몇을 선정하여 그 내용을 분석하고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II장에서는 방산의 삶과 학문적 연원을 살펴보았는데, 방산은 평생 정치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처사적 삶을 살았다. 방산의 학문적 성향에 대해서는 근기와 영남학파, 두 진영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룩하고자 노력하였다. 방산의 학문적 계보는 근기학파의 개산지조(開山之祖)인 미수(眉?) 허목의 학문이 곧 한강(寒岡) 정구에게서 나왔고 한강의 학문은 퇴계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방산의 학문에 직접 영향을 준 성재(性齋) 허전(許傳)은 순암 안정복계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방산은 성재를 통하여 순암계 우파를 퇴계학의 정통이라 생각하여 영남학파보다는 근기학파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방산의 저술에는 실용적인 측면이 많다. III장에서는 방산의 한문산문 작품의 내용을 분석하여 근기학파의 학문 전통 고수와 자주국방의 인식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근기학파의 학문 전통 고수에서는 실증주의, 실용주의에 입각한 서술을 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을 가지고 대의 중심으로 한 글을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속에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정당하다고 보지 말고 예부터의 일을 상고하여 바로 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방산의 사고에는 퇴계를 중심으로 하는 근기남인의 학문 성향이 짙게 베어 있다고 하겠다. 자주국방인식에서는 <포설>과 <거설>을 통해 병가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강조하고 있다. 방산이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새로운 장비에 대한 정보와 이에 대한 교육과 구축이다. 그러면 조선은 군사력이 강력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조선 인조대에 경기(京妓)가 폐지된 이후 생긴 향기(鄕妓)의 선상제도(選上制度)로 인하여 지방에서 공연되어 지던 교방정재(敎坊呈才)가 궁중으로 유입되어 궁중정재로 채택, 궁중연향에서 연행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종목 중 하나가 선유락(船遊樂)이다. 선유락은 정조19년(1795)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에 최초로 기록된 이후 조선후기 궁중연향기록인 각종 의궤의 정재종목으로 빠짐없이 등장한다. 궁중정재 선유락을 담당한 여기(女妓)들이 당시 평안도 의주, 안주, 성천 등지에서 올라온 선상기(選上妓)들이었음을 고려할 때 이들에 의해 관서지방의 교방정재인 배따라기가 궁중으로 유입되고 궁중 정재 선유락으로 정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궁중정재 선유락의 형성에 영향을 준 관서지방 교방정재인 배따라기는 명·청교체기후금이 요동지역을 장악하자 명나라 사행(使行)을 바닷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수로조천(水路朝天) 당시의 일을 바탕으로 하여 교방의 기녀들에 의해 공연물로 탄생되었다. 관서지방은 중국으로 사행을 떠나는 사신들이 거쳐 가야 하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사신들을 위한 연향이 많았고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들을 위한 전별연(餞別宴)에 교방청 기녀들에 의해 험난한 사행길을 떠나야 하는 이별의 애끊은 아픔과 사신들의 무사귀환을 축원하며 배따라기가 연행되었다. 관서지방 배따라기 관련 많은 문헌에서 교방정재 배따라기가 수로조천 당시 배가 떠나가는 (船離) 이별의 아픔을 처절한 성조(聲調)와 행위로 공연작품속에 담아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을 토대로 살펴본 관서지방 배따라기는 무구로 사용되는 그림배(畵船)가 등장하고, 동기 한 쌍을 뽑아 군사인 소교(小嬌)로 분장시킨 후 군례를 올리고, 행군을 의미하는 고취악을 연주, 행선 전 부르는 노래와 음악반주, 행선의 모습을 극적(劇的)으로 표현, 무사귀환을 축원하는 이별가(배 떠나는 노래)를 부르는 형식으로 공연을 구성하고 있다. 명·청 교체기 수로로 사행을 떠나는 사신을 이별하며 바닷가에서 배를 떠나보내며 벌어진 실제 상황을 이렇듯 악·가·무와 극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공연물로 탄생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탄생된 관서지방의 교방정재 배따라기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을 위한 각종 연향에서 공연되어졌고 선상기들의 활동에 의해 궁중정재 선유락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궁중연향을 마친 선상기들의 귀향(歸鄕)으로 인해 다른 지방에도 유사한 형태의 공연물(『교방가요(敎坊歌謠)』 소재 「선악(船樂)」, 『이재난고(頤齋亂藁)』 소재 「행선곡무(行船曲舞)」)로 정착되어 지방의 연향에서 그 지방의 특색을 담아 서로 다른 절차로 공연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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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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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조 (개인정보의 보호 및 사용)
당 사이트는 관계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회원 등록정보를 포함한 회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회원 개인정보의 보호 및 사용에 대해서는 관련법령 및 당 사이트의 개인정보 보호정책이 적용됩니다.
제 8 조 (이용 신청의 승낙과 제한)
① 당 사이트는 제6조의 규정에 의한 이용신청고객에 대하여 서비스 이용을 승낙합니다.
② 당 사이트는 아래사항에 해당하는 경우에 대해서 승낙하지 아니 합니다.
- 이용계약 신청서의 내용을 허위로 기재한 경우
- 기타 규정한 제반사항을 위반하며 신청하는 경우
제 9 조 (회원 ID 부여 및 변경 등)
① 당 사이트는 이용고객에 대하여 약관에 정하는 바에 따라 자신이 선정한 회원 ID를 부여합니다.
② 회원 ID는 원칙적으로 변경이 불가하며 부득이한 사유로 인하여 변경 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해당 ID를
해지하고 재가입해야 합니다.
③ 기타 회원 개인정보 관리 및 변경 등에 관한 사항은 서비스별 안내에 정하는 바에 의합니다.
제 3 장 계약 당사자의 의무
제 10 조 (KISTI의 의무)
① 당 사이트는 이용고객이 희망한 서비스 제공 개시일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② 당 사이트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보안시스템을 구축하며 개인정보 보호정책을 공시하고 준수합니다.
③ 당 사이트는 회원으로부터 제기되는 의견이나 불만이 정당하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될 경우에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 즉시 처리하여야 합니다. 다만, 즉시 처리가 곤란한 경우는 회원에게 그 사유와 처리일정을 통보하여야
합니다.
제 11 조 (회원의 의무)
① 이용자는 회원가입 신청 또는 회원정보 변경 시 실명으로 모든 사항을 사실에 근거하여 작성하여야 하며,
허위 또는 타인의 정보를 등록할 경우 일체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② 당 사이트가 관계법령 및 개인정보 보호정책에 의거하여 그 책임을 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회원에게 부여된
ID의 비밀번호 관리소홀, 부정사용에 의하여 발생하는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회원에게 있습니다.
③ 회원은 당 사이트 및 제 3자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제 4 장 서비스의 이용
제 12 조 (서비스 이용 시간)
① 서비스 이용은 당 사이트의 업무상 또는 기술상 특별한 지장이 없는 한 연중무휴, 1일 24시간 운영을
원칙으로 합니다. 단, 당 사이트는 시스템 정기점검, 증설 및 교체를 위해 당 사이트가 정한 날이나 시간에
서비스를 일시 중단할 수 있으며, 예정되어 있는 작업으로 인한 서비스 일시중단은 당 사이트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에 공지합니다.
② 당 사이트는 서비스를 특정범위로 분할하여 각 범위별로 이용가능시간을 별도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 그 내용을 공지합니다.
제 13 조 (홈페이지 저작권)
① NDSL에서 제공하는 모든 저작물의 저작권은 원저작자에게 있으며, KISTI는 복제/배포/전송권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② NDSL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상업적 및 기타 영리목적으로 복제/배포/전송할 경우 사전에 KISTI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③ NDSL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보도, 비평, 교육, 연구 등을 위하여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게 인용할 수 있습니다.
④ NDSL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무단 복제, 전송, 배포 기타 저작권법에 위반되는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
저작권법 제136조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제 14 조 (유료서비스)
① 당 사이트 및 협력기관이 정한 유료서비스(원문복사 등)는 별도로 정해진 바에 따르며, 변경사항은 시행 전에
당 사이트 홈페이지를 통하여 회원에게 공지합니다.
② 유료서비스를 이용하려는 회원은 정해진 요금체계에 따라 요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제 5 장 계약 해지 및 이용 제한
제 15 조 (계약 해지)
회원이 이용계약을 해지하고자 하는 때에는 [가입해지] 메뉴를 이용해 직접 해지해야 합니다.
제 16 조 (서비스 이용제한)
① 당 사이트는 회원이 서비스 이용내용에 있어서 본 약관 제 11조 내용을 위반하거나,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경우 서비스 이용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 2년 이상 서비스를 이용한 적이 없는 경우
- 기타 정상적인 서비스 운영에 방해가 될 경우
② 상기 이용제한 규정에 따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회원에게 서비스 이용에 대하여 별도 공지 없이 서비스 이용의
일시정지, 이용계약 해지 할 수 있습니다.
제 17 조 (전자우편주소 수집 금지)
회원은 전자우편주소 추출기 등을 이용하여 전자우편주소를 수집 또는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없습니다.
제 6 장 손해배상 및 기타사항
제 18 조 (손해배상)
당 사이트는 무료로 제공되는 서비스와 관련하여 회원에게 어떠한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당 사이트가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손해발생을 제외하고는 이에 대하여 책임을 부담하지 아니합니다.
제 19 조 (관할 법원)
서비스 이용으로 발생한 분쟁에 대해 소송이 제기되는 경우 민사 소송법상의 관할 법원에 제기합니다.
[부 칙]
1. (시행일) 이 약관은 2016년 9월 5일부터 적용되며, 종전 약관은 본 약관으로 대체되며, 개정된 약관의 적용일 이전 가입자도 개정된 약관의 적용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