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he history of Chu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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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추ㆍ경맥편』과 『상한론』의 양명병에 대한 상관성 연구 (Study of Relationship between the Chapter of Channels in Miraculous Pivot of Emperor′s Classic of Internal Medicine and Yangmyung disease in Sanghanron)

  • 이승렬;신흥묵
    • 동의생리병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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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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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85-1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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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Chang Chung-ching(張仲景) in the Later Han(Eastern Han) Dynasty of Chinese history wrote the treatise on Diseases Caused by Cold Factors(傷寒論; Shang Han Lun) on the basis of the fundamental theory of Emperor's Classic of Internal Medicine(黃帝內經; ECIM) after collecting medical treatment experiences until the Han Dynasty. It had great significance that Shang Han Lun was the origin of treating six-channels(六經) and there showed the peculiar guidelines on the diagnosis and treatment of oriental medicine to divide diseases into six-channels. The oriental medical doctors who had studied Shang Han Run thought highly of meridians and until now it was generally known that the chapter of heat in the Plain Questions of ECIM(黃帝內經, 素問ㆍ熱論) was the basis of Shang Han Run. The chapter of heat in the Plain Questions of ECIM was the first text in which the basic theory on six-channels according to the types of illness was introduced. In my point of view, the theory of treating six-channels had close relation to the Chapter of Channels in Miraculous Pivot of ECIM(黃帝內經, 靈樞ㆍ經脈篇) as well as the chapter of heat in the Plain Questions of ECIM. Therefore I took a look at the origin of treating six-channels in Shang Han Lun and illuminated again the meaning to compare the parts of in Shang Han Lun with the Chapter of Channels in Miraculous Pivot of ECIM. Conclusion: The, symptoms divided into six-channels in the chapter of channels in ECIM gave the fundamental basis of diagnosis and treatment basesd on overall analysis of signs and symptoms(辨證論治) an illness in the Zangfu(臟腑) in respect of meridians. Viewed in the light of diagnosis and treatment basesd on overall analysis of signs and symptoms(辨證論治), the symptoms of YangMing-channel(陽明經) in the Chapter of Channels in Miraculous Pivot of ECIM were, for the most part, accord with those of YangMing-disease in Shang Han Lun. Furthermore, the symptoms in Shang Han Lun were explained definitely and in detail. Therefore the theory of Shang Han Lun has been developed on the basis of ECIM with the changes of the times. YangMing-disease in Shang Han Lun implied medical cases in stomach meridian(胃經) and large intestine meridian(大腸經). Therefore Shang Han Lun was the foundation of treatment basesd on overall analysis of signs and symptoms(辨證論治) in respect of meridian as well as the text in which the steps of infectious diseases(外感病) of human bodies were explained.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피란록(避亂錄)』에 나타난 서술시각과 글쓰기 방식 (Descriptive Perspective and Writing Method in Yeheon's Piranrok)

  • 정우봉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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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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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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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임진왜란의 체험을 다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피란록(避亂錄)"을 주대상으로 하여 작품에 나타난 서술시각과 글쓰기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피란록(避亂錄)"이 조선시대 일기문학사에서 지닌 의의를 밝히고자 하였다. "피란록"의 독특한 특질과 성격을 밝히기 위해 이 논문에서는 서술시각과 글쓰기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피란록"에 나타난 서술시각은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혼란한 시대 현실에 관한 비판적 성찰의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존재 및 상황에 대한 반성적 시각이다. 여헌의 "피란록"은 의론성이 대폭 강화된 점이 글쓰기 방식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피란 생활에서 겪는 개인의 일상을 매개로 하여 여헌은 개인의 출처(出處) 문제, 의병(義兵)의 동향과 전망, 축성(築城)의 이해 득실, 인륜 도덕의 회복, 전란의 원인과 책임 등 다방면에 걸쳐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선명하게 펼쳐내었다. 사회비평적 성격과 철학 담론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작품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여헌의 "피란록"은 임진왜란을 다룬 여타 일기와 달리 의론성의 비중을 크게 높였으며, 인물간 대화와 자문자답의 기법, 피란 고통의 생생한 묘사 등을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그리고 여헌 장현광의 "피란록(避亂錄)"이 지닌 문학사적 위상을 파악하기 위해 여헌의 문인이었던 유진(柳袗)의 "임진록" 및 도세순(都世純)의 "용사일기"와 비교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유진과 도세순의 일기는 청년의 눈으로 비쳐 본 전쟁의 참상과 혼란을 다루고 있으며, 개인의 생생한 체험을 최대한 충실하게 복원하는 데에 서술의 초점이 놓여 있었다. 따라서 개인 서사의 부분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여헌의 "피란록"에서 두드러지는 의론성 부분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고려 무신집권기 호위제도의 경호학적 고찰 (History of Guard System during the Period of Military Rule in the Goryeo Dynasty)

  • 이성진;조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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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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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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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려전기의 궁중호위는 2군6위의 중앙 정규군으로 편성되어 궁궐안의 호위는 내순검군이 담당하였으나, 무신집권기에 이르러 군제는 문란해지고 왕실 호위는 무신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무신들은 왕의 지척에 있는 중방을 중심으로 문신들을 억압하고 왕권을 무력화 시킨 후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무신의 3거두였던 정중부, 이의민, 이고 등의 집권이 단명으로 끝나고 경대승이 집권자의 지위에 올랐을 때, 그는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백 수십인의 결사대를 문하에 두었는데, 이 조직이 도방(都房)이었다. 경대승이 병사함에 따라 도방이 폐지되고, 최충헌 집권시대에 신변보호와 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경대승의 도방을 부활시켜 보완한 6번(番)도방은 규모가 방대하고 더욱더 체계를 잘 갖추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집권기에 6번 도방은 내외도방(內外都房)으로 확장, 강화되었으며, 손자 최항의 집권기에는 한층 더 발전하여 도방 36번제도가 확립되었다. 초기의 도방은 무신 중심으로 도방 주인의 신변안전을 목표로 하였지만 후기에는 문신이 참여함으로써 정보 수집과 선발 경호의 활동을 하였고, 내도방에 해당되는 가병은 사후 위험 방지 역할까지 함으로써 개인의 호위에 만전을 기함은 물론 가문을 지키고 나아가 사회질서와 왕실과 조정을 장악하고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는 포괄적인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최 씨 정권은 사적 친위조직으로서 도방 이외에 마별초(馬別抄)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도방과 함께 기병과 보병(步兵)의 양쪽 날개를 이루었다. 삼별초는 고종 때 최우가 조직한 야별초가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어지고, 여기에 신의군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삼별초가 조직된 이후에는 별초군이 군사와 경찰, 형옥에 이르기까지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무신집권기의 호위 조직이었던 도방과 별초군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설경호기구로 출발하였으나 차츰 왕실 호위 기구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왕실이 도방의 보호를 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설경호경비에 해당되는 현대의 민간경호경비는 영리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특성이지만 공적경호경비와 마찬가지로 범죄예방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신 집권시기의 가병이나 도방 구성원들의 역할과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신집권기의 경호조직은 처음에 개인의 신변 호위를 담당한 도방으로 출발하여 무신들의 참여와 확장으로 공공성을 띠어가게 되었고, 삼별초(三別抄)의 활약에 이르러서는 왕실 호위기구가 담당했던 역할에 근접하는 국가 사회 치안구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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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유적 출토 조선시대 기와의 특성 연구 (A Scientific Study of Roof Tiles in Joseon Dynasty from Dongdaemoon Stadium)

  • 정광용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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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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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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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기와의 선후관계, 유물제작기법 및 기술적 속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기와의 물리적 화학적 특성 연구를 실시하였다. 기와의 물리적 특성 연구를 위해 흡수율, 비중, 전암대자율, 시차열분석을 실시하였으며, 화학적 특성 연구를 위해 중성자 방사화분석(NAA), 미세조직관찰, X-선 회절분석(XRD) 등을 실시하였다. 기와편 22점의 중성자방사화분석 및 통계분석결과 각각 기와시료는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제작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또한 희토류원소의 출토지별 평균값을 비교해 보아도 각각 서로 다른 조성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산지가 다른 점토광물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XRD 및 편광현미경 관찰결과 기와의 주요 성분은 석영과 장석이었으며 부분적으로 운모와 일라이트(Illite)가 나타났다. XRD 분석결과 $1000^{\circ}C$의 부근에서 소성되었을 때 나타나는 뮬라이트(mullite)광물 조성이 나타났으며, 시차열분석에서는 $900^{\circ}C$ 부근에서 완만한 발열피크가 나타났다. 이를 토대로 기와의 소성온도를 추정한 결과, 기와는 $900{\sim}1000^{\circ}C$에서 소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암대자율 평균값으로 비교분석하였을 때 출토지별 분류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문양이 파상문, 태상문, 어골문, 격자문, 횡선문인 경우 0.2~0.78(${\times}103$ SI unit)의 낮은 전암 대자율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전체 흡수율은 대체적으로 14%~21% 범위를 보였으며 이는 조선시대 전통기와에서 나타나는 흡수율 14~18%와 유사한 범위를 보이고 있다. 기와시료의 비중은 대체적으로 1.4~2.5g/cm3의 범위를 보여 출토지에 따른 비중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서화가 황씨 사형제의 작품세계 (Artworks of the Hwang Brothers, Writers and Painters)

  • 송희경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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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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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7-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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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우석 황종하(우석(友石), 인왕산인(仁王山人) 황종하(黃宗河) 1887-1952), 우청 황성하(又淸, 黃成河, 1891-1965), 국인 황경하(菊人, 黃敬河, 1895-?), 미산 황용하(美山 黃庸河, 1899-?)는 네 살 터울의 형제들이며 모두 서화가로 이름을 남겼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특별한 교육기관에 몸담지 않고 중국에서 유입된 화보나 선배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지만 각자 선호하는 기법과 잘 그리는 소재가 달랐다. 즉 황종하는 호랑이 그림을, 황성하는 지두화를, 황경하는 인삼도를, 황용하는 사군자화를 잘 그린 것이다. 각종 전람회나 전시회에 참여하는 태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사형제전을 함께 개최하거나 합작도를 자주 제작하면서 형제간의 우의를 쌓아 나갔다. 특히 1922년에 그들의 고향인 개성에서 창립한 ${\ll}$송도서화연구회${\gg}$는 후배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자 스스로의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문화의 장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이렇듯 황씨 사형제는 서로의 생각과 취미를 공유할 수 있었던 친구들이였고, 동시에 각자 개성 있는 작품세계를 펼쳤던 예술가였다. 그리고 구한말에 태어나 역사의 격변시기를 경험하면서도 전통 한국화의 맥을 지켜왔고, 타계할 때까지 평생 지필묵을 고집하면서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며 화제를 썼던 작가들이었다.

한국미술에서의 동양성 개념의 출현과 변형 (Birth and Transformation of the Concept of "Oriental-ness" in Korean Art)

  • 정형민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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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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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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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Orientalness is a concept that expresses the collective identity of the Orient in relation to the West. The concept itself is mutable and defined b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regions at different points in time. Changes in the concept depend on a number of factors, such as cultural influence, the political balance of power between the two regions, and on the interpretative scheme that defines the relationship. In addition, the geographical notion of the concept evolves culturally, socially and politically. During this process, Oriental-ness becomes Oriental-ism at times. I will attempt to survey and measure the progression of Orientalness from its emergence in early 17th century to its subsequent transformation in modern Korea as reflected in art theory and art works. The recognition of the comparative characteristics of Oriental art began when the Orient was exposed to the art of the West in the late Ming dynasty during the early 17th century. The changes in the artistic climate in China affected the late Chosun. I will start with a brief introduction of this time and the birth of Orientalness. The concept gradually changed during the period of Enlightenment(開化期) towards the end of the 19th century, and during the colonial period( 1910-1945) it took on a new form. Establishment of the concept of "Orient"as a single, unifying concept spanning across cultures and national boundaries has been attributed to late Meiji period Japan, whose intention at that time is believed to have been to build a pan-Asia(亞細亞) empire with Japan at its commanding center. It has been stressed that the real motive behind the formation of one single cultural unit, where the shared common written language was Chinese and Confucianism and Taoism were the common metaphysical traditions, was to build one political unit. When the notion of a geographical unit of Asia was replaced by the concept of Asia as a cultural and political unit, a massive growth of interest and discourse were provoked around the concept of Orientalism. When Orientalism was being formulated, Korea automatically became member of "one Asia" when the country became colonized. For Koreans, the identity of the Orient had to be defined in cultural terms, as the political notion of a nation was non-existent at that time. The definition of identity was pursued at two levels, pan-Asian and local. If Orientalism was an elite discourse centered in pan-Asian philosophical and religious tradition, localized Orientalism was a popular discourse emphasizing locality as the byproduct of natural geographic condition. After the liberation in 1945 from colonial rule, a thrust of movement arose towards political nationalism. Two types of discourses on Orientalism, elite and popular, continued as central themes in art. Despite the effort to redefine the national identity by eradicating the cultural language of the colonial past, the past was enduring well into the present time. As discussed above, even when the painting themes were selected from Korean history, the tradition of using history painting as a manifestation of political policy to glorify the local identity had its founding during the Meiji period. The elevation of folk art to the level of high art also goes back to the colonial promotion of local color and local sentiment. Again, the succession of the past (colonial) ideal was defended as the tradition assumed a distinct modern shape that was abstract in style. The concept of the "Orient" is of relative and changing nature. It was formulated in relation to Western culture or civilization. Whatever the real motive of the adoption of them had been, the superiority of the Orient was emphasized at all times. The essence of the Orient was always perceived as the metaphysical tradition as a way to downgrade Western culture as materialistic. This view still prevails and the principle of Orient was always sought in Confucianism, Taoism, and Buddhism. Even when Orientalism was employed by imperialist Japan in an effort to establish her position as the center of the Orient, the spiritual source was still in Chinese philosophy and religion. In art also, the Chinese literati tradition became the major platform for elite discourse. Orientalism was also defined locally, and the so-called local color was pursued in terms of theme and style. Thus trend continued despite the effort to eradicate the remnants of colonial culture long after liberation. These efforts are now being supported politically and also institutionalized to become the aesthetic ideal of the modern Korean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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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춘추정신(春秋精神)과 도학사상(道學思想) (The thought and spirit of Sunbi of Kwon Sang-Ha(1641-1721))

  • 김문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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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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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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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수암 권상하(1641-1721)는 우암 송시열(1607-1689) 이후 조선 후기의 학계와 정치계를 대표하는 山林이다. 그는 송시열 이후 노론계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우암학파의 학문과 사상 및 사업을 전승하였으며, 그 학문과 사상을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권상하의 사상과 학문은 조광조-송시열로 이어지는 한국정통 도학의 '명천리(明天理) 정인심(正人心)' '벽리단(闢異端)' '양이적(攘夷狄)' '존왕도(尊王道)' '천패술(踐覇術)' '상정학(尙正學)' '척리교(斥異敎)' 정신으로 집약할 수 있다. 권상하의 학문과 사상, 그리고 평생 사업은 위와 같은 정신에 입각하여 송시열의 학문과 사업을 계승하여 직(直)의 심법(心法)과 춘추의리(春秋義理)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는 스승인 송시열이 생존할 당시에는 그를 도와 주자서를 정리하여 오류 없는 의뢰서(義理書)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송시열의 사후에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짓고 대보단을 쌓는 등 대의를 드러내는 일에 일생의 노력을 기울였다. 권상하는 이러한 사업이 구세(救世)하는 도(道)(세도(世道))를 확립하는 일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존주자(尊朱子)와 명천리(明天理) 정인심(正人心)의 학문정신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등 그의 문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인물성동리(人物性同異) 논쟁에서 한원진의 인물성 이론을 찬성하여 엄정한 가치 판별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정치적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송시열을 옹호하는 변론에 적극 나섰는데, 그 이유는 스승에 대한 사정(私情) 때문만이 아니라 '세도(世道)'와 '사문(斯文)'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권상하는 직(直)의 심법과 춘추사상(春秋思想)으로 자신의 내적 도덕성을 삼았으며, 현실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부조리에 대항했다. 적극적으로 불의(不義)에 항거했던 송시열의 직(直)철학이나 북벌(北伐)의지는 권상하를 통하여 기호학파 노론 계열의 상전(相傳) 심법(心法)과 사업(事業)이 되었다.

1910~20년대 시인의 전통 한시 국역 양상과 의미 연구 - 최남선, 김소월, 김억, 이광수를 중심으로 - (A Study on Korean Language Translation of Chinese Traditional Hansi in the 1910s and 1920s)

  • 정소연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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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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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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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고는 20세기 전반기에 하나의 문학사적 현상으로 나타난 시인들의 한시 국역 현상에 주목하고, 이 중에서도 1910년대에 최남선의 한시 국역 7수, 1920년대에 김소월의 6수, 김억의 6수, 이광수의 3수에 주목하고 그 문학사적 의미를 탐색한 것이다. 그 국역의 구체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20세기에 한시 국역을 처음 한 1910년대의 최남선은 이백, 두보 등의 유명 당시(唐詩) 및 근체시, 특히 7언시를 국역하였다. 원시(原詩)는 노래의 성향을 적지 않게 띠고 있으나 최남선은 음보율에 더 나아가 음수율에 가까운 형식을 추구하고 행말이 명사나 부사어로 끝나게 국역한다거나 문장으로 기록된 문체로 바꾸는 등 읽고 보는 시(詩)를 지향하였다. 또한 원시보다 행수가 같거나 더 짧게 국역해서 축약함으로써 군더더기나 부연을 줄이고 독자가 시어들 간의 해석에 적극 개입하고 해석하는 여지가 마련한 점도 기록문학의 특성을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1920년대에 첫 한시 국역을 한 김소월도 이백, 두보 등 유명 당시(唐詩)를 대상으로 하였고, 노래의 성향을 적지 않게 띤 중국 한시를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최남선과 반대로 원시보다 더 행수나 정보량이 길어지게 국역하여 부연이나 첨가의 내용이 추가되게 하였고, 단연체 시를 다연체 시로 국역하였다. 특히 감탄구나 의성어, 동어 반복 등으로 일상 구어에 가까운 구술성을 강화하고, 보편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화자 등의 시어를 바꾼 점은 노래로서의 성격을 지향하는 국역 방식을 보여준다. 셋째, 1920년대의 김억도 이백, 두보 등 유명 당시(唐詩) 및 절구를 대상으로 국역했다는 점에서 앞의 시인들과 같으나 고려 정지상의 <송인>이 한 편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합쇼체의 경어체로 국역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김소월처럼 단연체의 한시를 다연체로 국역하였고, 또 특정 율격을 추구하지 않고 내용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일대일 대응이 되는 국역을 한 점이 이후 김억의 700여 수에 가까운 한시 국역과 다른 이 시대의 특징이다. 넷째, 1920년대의 이광수도 당대(唐代) 시인인 두보의 한시를 국역하면서 다연체로 바꾼 점이 다른 1920년대 시인들과 같다. 이 외에도 대화체 및 현장감을 높이는 방식으로의 국역은 다른 1920년대 시인들과 같이 기록문학으로서의 시보다는 구술성을 추구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 네 시인은 전통시대에 국어시가보다 위상이 높았던 중국의 옛 한시를 도리어 국어시가화하되, 1910년대의 최남선은 국문전용시대의 우리 근대시가 나아갈 방향이 기록성과 문자성을 추구하는 것이라 여겼다면 1920년대의 김소월, 김억, 이광수는 다수가 공감하며 보편성을 높일 수 있는 일상 구어 기반의 노래[歌]로서의 존재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시의식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시인들이 생각한 근대 한국시의 지향점으로서 기록문학성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구술문학으로서의 특성도 포함한 시가(詩歌)를 근대시로서 인식한 것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한자로 되지 않았으나 근대 국어로 된 시에도 한시가 지속되고 있다는 시가사적 지속성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비록 22수에 불과하지만 1930년대나 40년대에 더 활발하게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다른 특성을 보이게 되는 전통 한시 국역 양상의 문학사적 흐름을 살펴보는 기반으로서의 의의도 가진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도의 우리나라 문화재 정책에의 수용과 발전방안에 대한 시론적 연구 (A Preliminary Study on Domestic Embracement and Development Plan Regarding UNESCO World Heritage Programme)

  • 강경환;김정동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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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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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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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유네스코 세계유산(World Heritage) 보호 제도는 인류 공동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197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보호협약 채택에 따라 도입된 제도이다. 40여 년이 채 안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890건의 세계유산이 등재된 가장 성공적인 유네스코 문화 분야 사업 중의 하나이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의 체계적 보호관리를 위하여 등재기준의 체계화, 보존관리계획의 중요성 강조, 모니터링의 제도화, 세계유산기금의 운영 등을 통하여 세계유산을 단순히 뛰어난 문화재의 목록화 작업의 수단이 아니라 보존계획 도구(preservation planning tool)로 활용함으로써 유산 보호관리 시스템의 체계화, 선진화에 기여하였고, 이러한 세계유산 정책은 각국의 문화재 보호제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도 2009년 조선 왕릉이 등재됨으로써 총 9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세계유산 등재가 우리 문화재의 독창성과 우수성의 홍보, 문화국가로서의 위상 증진 등에 기여하였지만 이제는 세계유산의 등재전략을 다시 점검하고 체계적인 보존관리 시스템의 확립을 위한 다양한 법적, 제도적 개선방안을 강구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그동안 문화재보호법을 개정하여 세계유산의 등재 및 보호에 관한 근거규정을 마련하고,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세계유산 관리 전담기구를 설립하는 등 노력을 하였으나, 보다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세계유산 정책 개선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1) 세계유산 보존관리 특별법 제정, 2) 각 지자체별로 세계유산 보호를 위한 조례 제정, 3) 문화재청과 지방자치단체의 세계유산 정책 및 관리기능 강화, 4) 세계유산 보호재원의 획기적 증대, 5) 세계유산 보존관리 계획 수립 의무화, 6) 세계유산 활용을 위한 지원 확대, 7) 세계유산 등재 내실화, 다양화, 8) 지자체 간 세계유산 관리정보 및 경험의 공유, 9) 세계유산 종합 아카이브 설치, 10) 시민협력과 주민참여 활성화, 11) 세계유산 보호를 위한 전문인력 배출 12) 지속가능한 세계유산 관광 활성화 등 세계유산 정책역량 강화를 위한 분야별 사업과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이를 위한 체계적인 추진이 필요하다. 세계유산 정책이 국내적으로 어떻게 수용되고 앞으로의 변화와 발전방향에 대하여 분야별로 유형화하여 세계유산 정책이 보다 체계화, 과학화, 전문화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안하였다. 앞으로 세부 분야별로 보다 심도 있고, 전문적인 조사와 연구가 진전되어야 할 것이다.

초정(艸丁) 김상옥(金相沃) 시조(時調)에 나타난 자연관(自然觀) (A Study on the View on Nature in Ch'o-Jung's Three-Verse Poems(Sijo))

  • 최흥열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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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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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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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 글은 초정(艸丁)의 초기 시조집(時調集)인 "초적(草笛)"에서 마지막 시조집인 "느티나무의 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발견(發現)되는 자연관(自然觀)을 형식주의적(形式主義的) 방법(方法)과 구조주의적(構造主義的) 방법(方法)을 참고로 하여 자연관(自然觀)을 탐색(探索)하는데 목적(目的)을 두고자 한다. 이 연구의 대상은 시조시인(時調詩人)의 자연(自然)을 인식(認識)하는 사유체계(思惟體系)로서 기존(旣存)의 성과(成果)들을 수용하면서 사상적(思想的) 배경(背景)으로 고시조(古時調)에 나타나는 전통적(傳統的) 자연관(自然觀)의 동질성(同質性)이나 유이성(類似性)을 염두에 두면서 이질성(異質性)도 살피려 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 수행은 초정(艸丁)시조의 내적(內的) 감정의 지향성(指向性)을 자연(自然)의 형태를 빌어서 살펴봄으로서 전통(傳統)의 계승과 발전적(發展的) 측면을 확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초정(艸丁) 시조(時調)에 나타나는 자연관(自然觀)의 고찰(考索)은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 할 것이다. 전통적(傳統的)인 동양(東洋)의 자연관(自然觀)과 맥을 같이하는 고시조(古時調)에 나타나는 자연관(自然觀)의 흐름과 그 전통에 주목하면서 고시조(古時調)와 초정(艸丁) 시조에 나타나는 자연관(自然觀)을 천착(穿鑿)한 결과 고시조(古時調)에서 추출(抽出)되는 자연관(自然觀)은 첫째, 심성수양(心性修養)의 자연관(自然觀)으로 16세기의 자연관은 혼탁(混濁)한 정치현실과 대립되는 심성수양(心性修養)의 자연관, 둘째, 한거(閑居) 노동(勞動)의 자연관으로 17세기에 이르면 도학적(道學的) 우주론적(宇宙論的)인 전범성(典範性)이 쇠퇴(衰退)하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자연관(自然觀)에서 약화되고 강호(江湖) 한거(閑居)의 감흥이나 전원생활(田園生活)의 구체적(具體的) 노동 공간으로 시적 관심사(關心事)가 나타난다. 셋째, 은일적(隱逸的) 격리(隔離) 공간의 자연관(自然觀)으로 19세기에 오면 중앙정치에서 소외된 사족(士族)들은 정권에 참여하려는 꿈을 접고 향촌(鄕村)에서 기득권(旣得權) 보전에나 힘쓰면서 세도가문(勢道家門)의 정국주도권(政局主導權)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넷째, 자유분방(自由奔放)의 자연관(自然觀)으로 조선 후기로 넘어 오면서 도시(都市) 상업문명(商業文明)의 발달과 중간층(中間層)의 사회적(社會的) 부상(浮上)으로 시조의 형유층(享有層)이 사대부(士大夫)의 독무대에서 중간층(中間層)이 새로운 시조의 형유층(享有層)으로 부상하는데 가객(歌客)의 등장이다. 문화적(文化的)으로 성장한 중간층(中間層) 지식인들은 시조를 자신의 예술적(藝術的) 교양물(敎養物)로서 애호(愛好)하며 창작(創作)한 그룹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초정의 시조에서 발견(發現)되는 자연관은 첫째, 전통적(傳統的)인 관념논적(觀念論的) 자연(自然)인식으로 꽃을 빌어 사친(思親)을 연역하여 내는 데 있어 인생논적(人生論的) 의미는 배제되고 그 대신 객관적(客觀的) 사물성(事物性)으로 치환(置換)하여 간접적(間接的)으로 표현(表現)하고 있다. 둘째, 서정적(抒情的) 사향(思鄕)과 동경(憧憬)의 대상이다. 초정의 서정(抒情)의 지향성(指向性)과 모더니즘적 기교(技巧)가 보여 시각적(視覺的) 이미지로 고향의 그림이 보이고 있다. 셋째, 근원적(根源的) 사친(思親)의 인식(認識)을 보인다. 넷째, 유기체적(有機體的) 생명성(生命性)을 보인다. 다섯째, 노장적(老莊的) 정적미(靜寂美)를 표출(表出)하고 있다. 정적미(靜寂美)의 인식 대상은 구름 달 눈 낙수 산 낙엽 숲 하늘 봄 됫뫼 꽃 강남 강 바다 바람과 같은 원초적(原初的) 자연(自然)으로서 사물화(事物化)하고 이것을 다시 계절 감각으로 포착(補捉)하는 이원적(二元的) 표현(表現) 구조(構造)를 보인다. 마지막으로 자각(自覺)과 관조(觀照)의 인식이 발현되는 "초적(草笛)" 제3부 "노을빛 구름"에는 문화적(文化的) 유물(遣物) 혹은 역사적(歷史的) 유물(遺跡)을 소재로 한 시조가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청자부(靑磁賦)>, <백자부(白濾賦)>, <옥적(玉笛)>, <십일면 관음(十日面 觀音)>, <다보탑(多寶塔)>, <촉석루(矗石樓)>, <무열왕릉(武烈王陵)>, <포석정(鮑石亭)>, <재매(財買)>, <여황산성>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초적(草笛)"에서 보여준 고전적(古典的) 문화유산(文化遺産)에 대한 깊은 자각(自覺)과 관조(觀照)는 그 이후의 시조집인 "삼행시육십오편(三行詩六十五篇"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항아리", "이조(李朝)의 흙", "내가 네 방(房)에 있는가", "관계(關係)", "포도인영가(蘭菊印影歌)", "착한 마법(魔法)", "금(金)을 넝마로 하는 술사(術士)" 등의 작품이 도자(陶磁)를 시적(詩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초정(艸丁) 김상옥의 시조에서 나타나는 자연관(自然觀)은 자연(自然)과 순응(順應)하는 고시조(古時調)의 전통(傳統)을 계승(繼承)하고 나아가 관념논적(觀念論的) 자연(自然) 인식(認識)이 자연(自然) 상관물(相關物)을 통하여 구체화된 사물화(事物化)로 나타나 표현(表現)의 간접성(間接性)을 드러낸다. 이러한 표현의 복합적(複合的) 중층구조(中層構造)는 고시조(古時調)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실용논적(實用論的) 자연관(自然觀)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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