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he enlightenment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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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작가'의 시기별 개념 변화와 그 의미 : 출판시장의 확대와 철학자, 문인 그리고 작가들 (The Concept of Philosopher/Writer and Its Change in the Age of Enlightenment : Expansion of the Publishing Market and Philosophers, Man of Letters and Writers)

  • 정해수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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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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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1-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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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글은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작가'의 시기별 개념 변화와 그 의미 - 1. 용어의 사전적 의미와 18세기 문학장의 기원"의 후속 논문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출판시장이 확대된 이후 17세기 말엽의 문학장의 변화를 고찰했다. 특히 현대철학자들과 교수직을 가진 전통 철학자들 간에 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두고 벌어진 다툼의 양상이 이 글의 핵심내용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독자층의 형성으로 인해 전통 철학자들도 독자들의 기대지평에 민감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몇몇 전기 작품도 이 글의 관심사항이었다. 17세기 말 갑자기 예전과 달리 철학자나 작가가 전기 작품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새로운 영웅, 즉 위대한 철학자 또는 위대한 작가의 도래를 희구했고, 이러한 희망이 전기 작품의 출판으로 이어졌음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저자, 작가, 철학자 등에 대한 개념변화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다음 글에서 우리는 철학자/작가에 대한 보다 진전된 논의를 이어갈 것이다.

근대적 도시 공원으로서 창경원 (Changgyeongwon as a Modern Urban Park)

  • 우연주;배정한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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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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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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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논문은 창경원을 근대적 도시 공원으로 보고, 창경원의 공간적 성격과 그곳에서 창출된 공원 문화의 특징을 파악하고자 했다. 먼저 창경원 성립의 배경을 파악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근대 도시 공원으로서 창경원의 성격을 제시했다. 첫째, 대외적 선전과 과시의 장으로서 창경원의 성격, 특히 개원 초기 해외 사절과 고위 인사들의 방문에 주목했다. 특히 애초에 이곳을 근대적 공원으로 만들고자 계획했던 내용에 바탕을 두고, 근대 도시 공원으로서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둘째, 계몽과 교화의 장으로서 1920년대 창경원 이용이 보다 대중화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는 점을 파악하고, 여성과 아동을 위한 행사와 새로운 시설의 등장에 주목했다. 셋째, 창경원을 공원으로 인식하고 이용했던 당대의 기록을 조사하여 그 문화적 특징을 파악했다.

송대(宋代) 천동사(天童寺)의 전각과 이용 - "선원청규(禪院淸規)"와 "오산십찰도"의 문헌을 중심으로 - (The Usage of Buildings in Tiantong Temple in the Song Era - Through Rules of Purity for the Chan Monastery and Five Mountains Ten Checks Figures -)

  • 서아리;홍대형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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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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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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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Ceremony is important to Buddhism as a part of the religious practice. Buddhist ceremony is a kind of discipline and it rules the Chan monastery life. This discipline, called $\ulcorner$Qinggui(淸規)$\lrcorner$ also forms a part of the practice for enlightenment in the Chan monastery(禪宗). Qinggui is derived from $\ulcorner$Baizhang's monastic code(百丈淸規)$\lrcorner$ which no longer exists. $\ulcorner$Chanyuan qinggui(禪院淸規)$\lrcorner$ is considered the oldest surviving Chinese monastic discipline. Its success is partly due to the emphasis in the Chan monastery on the succession of monks to abbot hood. Qinggui has been called the only discipline in Buddhist monastic life in religion. Whether it is also the discipline of the architectural space of the Chan temples is the focus of this thesis. The examination of this assumption may expand the meaning of Qinggui as embodying not only the religious form of discipline but also a fundamental part of the architectural archive. The majority of the buildings in the Chan monastery in Qinggui are related to $\ulcorner$Five Mountains Ten Checks figures$\lrcorner$. Most of all, it can be clarified that the elements of Qinggui are expressed through the analysis of the activities in each building. This proves that Qinggui has become a stipulation not only for the regulation of the monastery life but also the architectural code of the Chan temples. In conclusion, this study shows how the meaning of ceremony and monastery life in $\ulcorner$Chanyuan qinggui$\lrcorner$ can be expanded to include the design program of temples. The research proves that there is a basic code in the Chan temples for designing the structure of the monastery space. Similarly, $\ulcorner$Five Mountains Ten Checks Figures$\lrcorner$ was a diagram for examination and analysis as well as a tool for creating drawings of the temples in the Song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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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드라마, 도덕규범과 감정을 조율하는 근대적 상상력의 역설 -발생론적 접근을 중심으로 (Melodrama, the Paradox of Modern Imagination Coordinating Moral Norms and Emotions -Based on the Developmental Approach)

  • 이정옥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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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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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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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멜로드라마는 근대 초기 계몽주의 시대에 탄생한 이래 현재까지 다양한 문화와 매체를 넘나들며 유동하고 있다. 따라서 멜로드라마의 분화 원리와 변화의 방향성을 온전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멜로드라마의 형성과정에 대한 발생론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본 논문은 프랑스혁명을 전후한 시점을 중심으로 근대 멜로드라마의 형성과정과 그 미학적 특질을 고찰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형성된 근대 멜로드라마는 자율적인 시민성을 요구하면서도 시민으로서의 여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근대적 상상력의 역설과 프랑스혁명의 정치적 모순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됐다. 근대 멜로드라마에 재현된 여성의 희생과 눈물의 미학은 분열과 위기에 처한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여성을 도덕적 도상으로 미화함으로써 타락한 사회를 회복하려는 정치적 열망이며, 여성 배제의 정치에 내포된 성차별적 폭력성을 은폐하기 위한 감정의 조율이었다. 근대 멜로드라마에 재현된 여성의 희생과 눈물의 미학은 오랫동안 도덕적 위선의 연극, 저급한 통속극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돼왔다. 그러나 1970년대 '서크멜로'에서 여성과 인종, 계급을 포괄한 '약자의 희생과 눈물의 미학'으로 전환함에 따라 멜로드라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증폭됐다. 각종 사회문제와 국가적 재난, 전지구적 재앙이 일상화되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든 현대사회에 이르러 '여성의 희생과 눈물의 미학'은 성차를 넘어서 다종·다양한 희생자 서사로 전환되는 추세이다. 최근 멜로드라마의 이론적 추이에 대한 고찰과 더불어 구체적인 작품 분석에 대한 연구는 후속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근대시기 동양평화에 대한 두 시각 - 안중근과 박영철을 중심으로 - (Two Views on the Oriental Peace of Modern Era - Focusing An, Joonggeun and Park, Youngcheol)

  • 오재환;구사회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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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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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9-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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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이 논문에서는 민족 존망의 위태로운 시기에 활동했던 안중근과 박영철이라는 두 사람을 통해 근대 지식인의 자세와 현실에 대한 대응 방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민족정신의 표상인 안중근과 친일파였던 박영철을 비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그것을 시도한 것은 사회진화론이라는 똑같은 이데올로기라도 그것을 어떻게 적용시키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였기 때문이다. 안중근과 박영철은 같은 시기에 태어나서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변혁기를 살았다. 이들에게 민족 주권과 동양평화라는 공통적인 화두가 있었지만 삶의 방향이나 행적은 서로 달랐다. 전자는 일제의 심장을 겨누었고, 후자는 그것의 심장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양평화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19세기 이래로 대두된 적자생존과 우승열패로 귀결시키는 사회진화론을 전제로 개진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논리는 사회진화론에 결합된 인종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중근은 동양 각국이 서로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고 공존해야 동양평화가 이룩된다고 보았고, 박영철은 동양이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야 동양평화가 이룩된다고 보았다. 이들 두 사람은 같은 시기를 살았지만 시대 의식도 대조적이었다. 안중근은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빼앗아 동양평화가 깨질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박영철은 일본과 한국이 일체가 되어 대동아공영을 이룩한 바, 평화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후자는 한국의 주권보다는 일본의 근대 문명에 관심을 보이며 한국이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혜심(慧諶)의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 찬술 배경과 내용 분석 - 간화십종병(看話十種病)을 중심으로 - (An Analysis on Writing Background and Contents of Hyesim's 「Gujamubulseonghwa Ganbyeongron(狗子無佛性話揀病論)」 - focusing on Ganhwa Sibjongbyeong(看話十種病) -)

  • 염중섭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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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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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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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혜심(慧諶)은 최이(崔怡)의 무신정권 후원 하에 지눌(知訥)의 결사도장(結社道場)인 수선사(修禪社)를 확고한 위상으로 확립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본고에서는 혜심 선사상이 온축되어 있는 "간병론(揀病論)"의 배경과 핵심 내용인 십종병(十種病)을 검토해본 것이다. 이를 통해서 다음의 5가지를 새롭게 인지해 볼 수 있게 된다. 첫째, 십종병이 혜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 이는 혜심이 지눌에게 인정받는 인가(印可)과정과, 혜심이 지눌의 유고(遺稿)를 간행한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그리고 "간병론"에서 공통적으로 십종병이 등장한다는 점을 통해서 확인된다. 둘째, "간병론"의 찬술은 지눌이 제기한 간화(看話) 경절(徑截)의 체계적인 발전인 동시에, 혜심의 수선사 내에서의 위상정립을 위한 것이라는 점. 셋째, 혜심은 "간병론"을 통해서 지눌이 제기한 간화경절의 체계를 확립하려고 했다는 점. 넷째, "간병론"의 결과는 종고와 지눌이 제기한 깨달음의 보편화를, 실행적인 측면에서 일반화하는 것이라는 점. 다섯째, 깨달음의 보편화는 최이 무신정권이 요구하는 시대적인 요청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 이상의 연구접근으로, "간병론"과 십종병 그리고 수선사 초기의 선불교적인 측면에 대해서 보다 분명한 이해를 수립해 볼 수 있게 된다.

한국주거형태 변천과정에서 본 주거학의 생태학적 개념정립 제1부 부엌변천 (Development of Housing Conceptual Framework through Changes in Korean Family Houses -Kitchen Lifespace(I)-)

  • 윤복자
    • 대한가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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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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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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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1) to investigate changes in house and kitchen forms and behaviors in the kitchen area of Korean family houses from the Yi-dynasty to the present, and (2) to develop a housing conceptual framework on the basis of the ecosystem approach through analysis of changes in Korean family houses. The documentary research method wad used fro this study. The major findings were that the traditional Korean houses were composed of separate buildings and had various floor levels with the maru(a wooden floor) as the center of the open plan. The introduction of foreign style house forms from the era of enlightenment, in the year 1876 to the Korean war in 1950 changed traditional Korean houses into Korean-western style houses. More recent increased population and urbanization accelerated to change from the traditional Korean house form to an apartment style. At the present time, however, many kinds of house forms, from a highly modernized style with convenient facilities to a primitive style, which cannot even meet the basis needs of daily life, coexist together. The Kitchens in traditional Korean houses had no plumbing, drainage, or work centers. They had simple adobe furnaces which were used for cooking and for heating the ondol, a kind of panel heated floor by which the heat and smoke run under the floor to the chimney. This made the kitchen floor level lower than the floors of other spaces. The residents entered the kitchen through the madang(atrium). The influence of the western style kitchen, the development of technology, and improvements of nation-wide economic status have made today's kitchen space covenient and hygienic. The floor level of the kitchen was raised to the same level of other spaces. Formerly the major function of the kitchen was raised to the same level of other spaces. Formerly the major function of the kitchen space was cooking and heating floors. This had changed, and the kitchen is now, the place for family and social interaction. A housing conceptual framework was developed on the basis of these fin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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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Politics of Ukraine in the Field of Freedom of Conscience in a Pandemic

  • Mykola, Palinchak;Dobrodum, Olga;Khrypko, Svitlana;Gold, Olga;Ostashchuk, Ivan;Vlasenko, Inna;Lobanchuk, Olena
    • International Journal of Computer Science & Network Secu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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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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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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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In today's era of digital technologies, the problem of religious communication in the cyberspace is being actualized, since the globality and accessibility of the WWW makes it one of the most effective and promising channels for transmitting various kinds of messages, including those of a religious nature. Today, religious organizations and movements pay the closest attention to the virtual media space, not only using it to attract new followers, but also for religious PR, image-making and branding, informing the world about themselves through news from the life of the organization and its followers. An equally important form of electronic communication in the online sphere is currently the interaction of various religious movements and religious cultures in general, or the dialogue of confessions in particular. Research in the digital space makes it possible to identify important trends in religious spheres based on the analysis of the flow of information on the Internet, to demonstrate the specifics of individual media outlets and the consequences of their activities for interreligious dialogue, to study the role of the Internet in changing religious beliefs, the possibility of changing religious identity, retrospective development of religious enlightenment at the turn of the century, to determine the vectors of possible interreligious interaction and discuss the role of digital technologies in the work of religious structures, to state the need to continue an active dialogue between representatives of religious movements, to hold expert seminars on interreligious dialogue on a regular basis, and to record the risks generated by the digital space. Thus, the coronavirus pandemic served as a background and context, a litmus test and a catalyst for accelerating and intensifying interreligious, interfaith dialogue and dialogue between religious organizations and society.

재미작가 홍언의 몽유가사$\cdot$시조에 나타난 작가의식 (A Study on Korean-American Writer Hong-Eun($1880\~1951$) focusing on Mong-yu siga(Traditional Korean Poetry, gasa and sijo of strolling in the dream))

  • 박미영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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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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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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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문학작품은 선행 작품 혹은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창작되고 있다. 당대의 문단활동을 통해서나 작가 자신의 소양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선험적인 텍스트와의 끊임 없는 대화를 통해 작가의 의식에 적절한 반응양식이 선택하여 외부로 표현되는 것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양식 또한 시대적, 개인적 필요성에 의하여 이런 과정을 속에서 되풀이된다. 본 연구에서 대상으로 삼고 있는 홍언은 미국 초기 이민자이며 재미 한인신문 $\lceil$신한민보$\rfloor$의 발행에 오랜 기간 종사한 언론인이자 문인이다. 지면을 책임지고 있는 발행인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비교적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국내문단과의 직접적인 교류나 활동은 없었고 미국 현지에서 함께 할 독자가 적은 가운데 시가만 400여 편을 발표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본 연구에서 홍언의 다양한 작품활동 가운데 1935년,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되는 몽유양식을 활용한 시가$\cdot$몽유가사$\cdot$몽유시조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고찰한다. 1935년과 1947년으로, 두 차례 $\lceil$신한민보$\rfloor$의 <사조>난에 몽유가사와 몽유시조를 싣는다. 홍언은 미국이라는 만리타국에 와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것을 모두 포기할 만큼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였으며 항시 조국의 현실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창작된다. 첫 몽유시가는 1935년 4월 25일에 <이강산>을 필두로 1935년 5월 9일 부터 1935년 7월 4일까지 동회슈부라는 자신의 필명으로 <꿈에 고국에 가셔>라는 제목 하에 연작시가 8편을 차례로 연재하는 것이다. 이는 개화 가사의 형식을 선택하고 있으며 향수와 1900년 전후의 조선 상황에서 정체된 역사의식을 담고 있어 중세적 이념을 노정하고 있다. 두 번째 몽유시가는 1947년 9월 25일 발표한 <나라와 고향>을 서시로 1947년 10월 2일부터 1947년 11월 6일까지 6 편을 연재하는 <꿈속에 강산>이다. 여기서 선택한 시형은 시조이며 그 시상의 전개가 1차 시도와 비슷하여 1차 시도를 의식하여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용은 분단된 조국현실을 직시하면서 미국과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외적 장애요인이 제거되었는 데도 고국에 가지 못하는 자신의 개인적 처지를 합리화하는 방어기제로서, 조국을 '살지 못할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몽유양식은 꿈을 주요 모티브로 사용하면서 현실의 좌절된 욕망을 달성하고자 의도적으로 취하는 양식이다. 홍언은 이민 후 일제치하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독립 후에는 개인의 경제적인 사정으로 고국방문을 하지 못했다. 고국방문이라는 간절한 소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홍언은 몽유양식을 활용하였다. 이는 중세의 지식인들이 우언의 한 양식으로 즐겨 사용했던 전통 양식이자 개화기 지식인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며 다양한 글쓰기 방식의 일환으로 선택되어 문학사적 사명을 다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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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시기 한국의 여의사 양성과정 성립 연구 (A Study on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Women Doctor's Training Course in the Modern Period)

  • 신은정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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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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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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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The Gyeongseong Women's Medical Training Center was created as the result of the efforts of our internal visionaries with meaningful foreign missionaries to cultivate female doctors, yet the systematic structure of the institution developed primarily out of Korean efforts. Koreans have tried hard to cultivate their descendants and the skills of the Korean people within this framework, challenging the oppression of the ruling class in a given environment, and the results have continued to this day. First, during the Early period (1890-1909), Korea began to establish women's education and the first female doctors were trained with the help of foreign missionaries. Second, during the Growth period (1910-1919), while it was difficult for women's education to be easily expressed during Japanese colonial era, the need for women's education was growing as part of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and female students who wanted to become doctors began to go abroad. In addition, during this period, the means to train female doctors in Korea was available, but this system was not recognized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hird, during the Preparatory period (1920-1928), the Gyeongseong Women's Medical Class, which gave practical training to female doctors, was established and centered on Rosetta Hall and female doctors who studied abroad. Fourth, a women's medical school was established during the Establishment period (1929-1938), which created a foundation for stable supply of professional women's medical personnel. In this article, we studied the process of women who were marginalized in education until they were trained as professional intellectuals, and we hope that it will help them understand the current women's education in Korea and draw directions in the fu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