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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삼세불상을 통해 본 17세기 조선시대 불상의 제작기법 연구 (On the Research of 17th Century Joseon Dynasty's Bulsang, a Buddist Statue, Manufacturing Technique by Examining the Daeungbojeon Hall Samse-bulsang, The Buddha of the Three Words, at the Haenam Daeheungsa Temple)

  • 이수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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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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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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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한 형식의 석가삼세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동안 이 삼세불상은 목조불로 알려져 왔으나 X-선 촬영 결과, 본존불을 제외한 좌우불에서 나무 위에 입힌 소조층이 함께 관찰되었다. 따라서 대흥사의 삼세불상은 조선시대 목조불상 및 소조기법이 적용된 불상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접목조불상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본존 석가모니불상은 크게 5개의 목재를 접목하여 형상을 완성하고 있으며, 약사와 아미타불은 10개 이상의 목재를 접목하여 외형에 가깝도록 조각한 뒤 그 위로 점토를 발라 소조기법으로 형상을 완성하고 있다. 즉 내부의 목재가 심(芯)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목재의 접목방식이 조선시대의 목조불상보다는 소조불상의 기법에 가깝다. 그러나 목심 위에 새끼줄을 감고 그 위에 점토를 두껍게 바른 것이 아니라 나무 위에 직접 점토를 얇게 발랐으며, 얼굴 부분이 완전히 목조로만 이루어진 것이 특징적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애초 작가의 조성의도가 목불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복장기록에 '소성(塑成)'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불상 조성이 완료된 시점에 이들 불상을 소조상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흥사 좌우불은 조선시대식 소조기법의 한 예로 보아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대흥사 삼세불상의 X-선 촬영을 통해 얻은 화상정보를 바탕으로 이들 불상의 내부구조와 접목방식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조선시대 불상 제작기법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한국 고리수의 역사와 원형기술의 복원 연구 (A Study on History and Archetype Technology of Goli-su in Korea)

  • 김영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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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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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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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리수는 편결(編結)과 금속공예의 기술이 접목된 새로운 형식의 수법(繡法)이다. 실올끼리 고리를 서로 엮어가며 공간상(空間上)에서 들떠 있어 마치 투조(透彫)와 같은 느낌을 준다. 수놓은 천에는 금박(金箔)이나 금실과 같은 황금 재질을 삽입하여 화려한 광택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고리수가 서구의 레이스워크(lacework) 공예와 그 형태 및 기법이 유사하면서도 가장 다른 점이다. 10세기 고려 초기, 강원도 월정사의 동자문수향갑낭(童子紋繡香匣囊)에서 고리수의 결구원(結構元) 무늬를 통해 초창기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왜란 시(1592, 선조 25년), 고리수 유물은 일본으로 약탈되어 '고려번(高麗幡)'이라고 불리며, 지금은 탁의(卓衣)의 형태로 개조되어 전한다. 19세기의 연대와 출처가 확실한 조선시대 궁수(宮繡) 베갯모에는 삼각무늬의 금박지(金箔紙)를 삽입하여 노란색 누에실을 엮어 짠 고리 감기수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고리수의 침법(針法)을 크게 분류하면, '고리수', '고리 감기수', '고리 새김수'의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0세기경 초기 단계에서 13세기까지 고리수는 여러 침법으로 변화하며 점차 2~3가지의 입체적인 색채를 사용하였다. 고리수는 중세 이후 서양에서 비약적 발전을 보이며 고귀한 수공예로 알려진 레이스 짜기와 유사한 결구원을 지녔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0세기경 혹은 그 이전부터 편결과 금속공예가 접목된 복합적 공예 양식으로 탄생하여 천년 동안이나 그 수법(繡法)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본 연구를 통해 한국에서 19세기 자수 베갯모에 고리수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음을 밝혔다. 아울러 이러한 연구의 성과를 토대로 고리수의 원형기술을 복원했다.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기능보유자 한상수 자수장과 조선시대 고리수 유물들을 재현했다. 고리수 자수품은 편결과 금속공예의 황금세공기술이 자수공예와 접목하여 탄생된 전통과학기술의 복합적 산물(産物)이다. 이것을 계승과 창조의 새로운 방향으로 자수, 편결, 직조, 염색 등 기타 공예 관련 산업 분야에 확대 응용한다면, 의료(衣料)와 패션, 장식공예, 미술 디자인 등에 고급 부가가치의 신기술로 개발되어 활용될 수 있다. 또한 다른 공예기술과도 상호 보완된다면, 표현 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다양한 예술적 조형미를 추구할 수 있어 우리의 삶에서 더욱 풍부한 미적 생활을 공유하게 되리라고 본다.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조각상 연구 (A Study on the Sculptures from Donggwanwangmyo [East Shrine of King Guan Yu])

  • 장경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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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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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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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중국 촉(蜀)나라의 장수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이다. 이러한 사당이 우리나라에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598년 정유재란 때부터이다. 당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은 관우의 힘으로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길 염원하면서 그들의 주둔지마다 관왕묘를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중국 명나라 황제와 조선의 국왕은 외세를 물리치려는 의지로 관왕묘를 세우고자 하였다. 1599년 8월 조선 정부는 '동관왕묘조성청' 이라는 관청을 임시로 설치하고 인력과 물력을 총동원하였다. 명나라 기술자의 감독 아래 연 2,400명의 조선 장인과 역군(役軍)들이 중국 제저우(解州) 관제묘(關帝廟)를 본으로 삼아 영건하여 3년 뒤인 1602년 봄에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 한 중 기술자가 협력하여 세웠기 때문에 관왕묘의 정전 건축과 내부 구조 및 조각상에는 양국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관왕묘 내부에는 7기의 조각상이 서 있다. 관우상 1기는 금동상이며, 나머지 6기는 소조상 위에 채색한 것이다. 이들 조각상들은 1602년에 만들어졌고, 관우와 그를 배위하는 관평(關平) 주창(周倉) 조루(趙累) 왕보(王甫)는 삼국시대에 실존했던 인물들의 초상조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복식은 관우를 추숭하던 당송대에 확립된 도상을 따르고 있었으며, 세부적으로는 명대적 요소와 조선적 배치가 절충되어 있었다. 이로 미루어 송대 이후 확산된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판화의 도상이나 명나라 만력황제가 1593년 조영한 제저우 관제묘의 명대 관우 도상이 동관왕묘를 제작할 때 직접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재 동관왕묘와 비교되는 중국 제저우 관제묘의 경우 건축과 조각상이 모두 청대 18~19세기에 중건된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동관왕묘의 조각상은 17세기 초 한 중 관왕묘 중에서 제작시기가 가장 이른 예로서 당시의 원형을 지니고 있다는 점, 한 중 기술자의 합작으로 규모가 매우 크다는 점, 금동으로 만든 관우상은 유일하다는 점, 문무 배위상을 각 1쌍씩 마주 배열하여 조선왕릉의 석인 배치와 친연성이 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명주지역 나말여초 불교조각과 굴산선문 (Buddhist Sculpture of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 at Myeongju and the Gulsan School of Seon Buddhism)

  • 최성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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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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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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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굴산사(?山寺)는 신라하대에 통효대사 범일(梵日, 810~889)에 의해 개창된 이래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파(??山派)의 본산으로서 크게 융성하였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위치한 굴산사지에는 거대한 당간지주를 비롯해서 고려시대 석조부도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2구 전해오고 있으나, 범일과 그의 제자인 개청(開淸, 854~930), 행적(行寂, 832~916)이 활동했던 나말여초기 굴산사를 알려주는 불교조각은 전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나말여초기 굴산선문의 불교미술을 살펴보기 위한 시도로서 굴산선문의 영역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강릉, 오대산, 동해시 등지로 범위를 넓혀 나말여초기 명주지역 불교미술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범일과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 굴산선문의 불교미술을 유추해 보았다. 강릉지역의 석조물 가운데 강릉시 오죽헌박물관에 옮겨진 무진사지(無盡寺址) 석탑의 부조 사방불상과 사천왕상은 신라 중앙이나 양양 진전사지, 선림원지 석조미술과 양식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말여초기 명주지역 불교미술이 당시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범일의 제자인 개청이 주석했던 보현산 지장선원[普賢寺]에 전해오는 석조대좌의 부재(部材)는 팔각연화대좌의 하대 복련좌(覆蓮座)를 받치고 있던 팔각의 받침석으로 안상(眼象)에 사자(獅子)가 새겨져 있어 나말여초기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지권인 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국립춘천박물관과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 한송사지(寒松寺址) 석조보살좌상 2구는 대리석이라는 재료를 비롯해서 머리 위에 쓴 원통형의 고관(高冠), 양손의 검지를 곧게 뻗은 수인(手印), 다리를 편히 놓은 서상(舒相)의 좌세 등, 독특한 밀교계 요소를 보여준다. 이러한 밀교계(密敎系) 도상(圖像)은 굴산선문 승려들의 당 유학(遊學)을 통해 명주지역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활발했던 굴산선문 승려들의 국제적 활동은 지역 미술에 큰 영향을 주면서, 선진성을 고양하였을 것이다. 동해시 삼화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시무외 여원인의 수인을 결(結)한 화엄계 노사나불상 표현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인 도상으로서 명주지역 미술이 전통성을 고수했던 면도 있었음에 주목하게 한다. 굴산선문 불교미술은 중앙지역과 같이 하는 양식 수준, 활발한 대당(對唐) 교류의 결과로 나타나는 선진문화의 수용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선진성과 국제성은 나말여초기 굴산선문 불교미술의 기본 성격으로 생각된다.

조선 정릉(貞陵) 사각 장명등(四角長明燈) 양식의 원류와 전개 -사찰 석등과의 비교를 통해 - (The Origin of the Square-Shaped Jangmyeongdeung of Jeongneung Royal Tomb and Its Stylistic Development -In Comparison with the Buddhist Temple Stone Lanterns-)

  • 김지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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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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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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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장명등은 능묘의 능침 앞 중앙에 놓여 사자(死者)를 지키고 밝혀주는 상징적인 기능과 함께 뛰어난 조형성으로 능역을 장식하는 역할도 담당했던 중요한 석물로서, 석등의 한 범주에 속한다. 정릉 장명등은 조선왕릉 장명등 중 최초로 조성된 장명등이며, 조선 전 중기 왕릉 장명등 가운데 유일한 사각 장명등(四角長明燈)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석, 화사석, 옥개석 형식이 기본적으로 사각을 이루고 있어 팔각 장명등(八角長明燈)형식과는 완연하게 구분된다.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을 1매의 통석으로 마련하고, 화사석은 1매의 통석으로 전후로 화창을 표현하였다. 정릉 장명등은 고려 현 정릉 장명등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으나, 이보다 뛰어난 조형성을 보이고 있어 조선 개국 이후 최초로 조성되었던 왕릉 장명등으로서의 격조를 무리없이 보여준다. 본고에서는 정릉 사각 장명등 양식의 원류를 파악하는 데 연구 목적을 두고 고려 왕릉 장명등과 더불어 사각 장명등의 연원이 되는 사찰 사각 석등과의 비교 고찰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고려 말 회암사지 지공선사 석등 및 나옹화상 석등, 조선 초 회암사지 무학선사 석등 및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석등과 다음의 공통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대석, 화사석, 옥개석 등이 기본적으로 사각을 이루고 있는 점, 둘째, 간주석이 낮아지면서 대석부분이 안정적인 형태를 이루는 점, 셋째, 화사석의 경우 대석 위에 양측으로 석재를 세워 자연스럽게 전후로 화창을 구성하는 방법, 넷째, 옥개석이 사모지붕 형태를 하고 있는 점 등이다. 한편 정릉 장명등에는 불교적 요소가 다분히 내제되어 있는데, 간주석의 삼주문(三珠文)표현이 그것이다. 삼주문은 밀교와 관련된 상징물의 하나로서,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불화 및 조선 초기 보살상의 보관에 표현된 예가 확인된다. 정릉 장명등은 이후 묘 사각 장명등 조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15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점차로 정릉 장명등의 영향에서 벗어나 팔각 장명등 형식이 보다 많이 가미된 경향으로 변모해 나간다. 정릉 사각 장명등은 고려왕릉에서 조선왕릉으로의 능제 계승, 사찰 사각 석등 양식의 수용, 그 시대 불교사상의 반영 등 당대의 시대상과 문화의 흐름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담겨진 산 증거물로서 의의가 있다 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 묘지에 나타난 기념성 - 서유럽에 있는 미국군, 영연방군, 독일군 묘지를 대상으로 -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Commemoration in the World War II Cemeteries - Focus on the Military Cemeteries of United States, the Commonwealth, and Germany in Western Europe -)

  • 이상석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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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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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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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유럽에 있는 미국, 영연방,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묘지에 나타난 공간적 배치 및 구성, 기념적 요소, 묘역 및 묘비에 나타난 기념적 특성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양식적, 정치적, 종교적 측면에서 기념문화를 고찰하였다. 연구 대상으로 각 나라별로 규모가 크고 고유한 양식적 특성을 보여주며, 장소적 의미가 있는 미국군 묘지 7개소, 영연방 묘지 3개소, 독일군 묘지 4개소 등 대표적인 전쟁 묘지 14개소를 선정하여, 현장조사, 문헌연구, 인터넷 조사를 통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 및 고찰을 하였으며, 연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영연방, 독일군 묘지 모두 공간적 중심축을 강조하였고, 대칭적이며 방형, 원형, 나선형 등 정형적 형태를 취하고 있어 신고전주의적 양식을 보여주었다. 한편, 일부 미국군 묘지에서는 곡선 레이아웃 및 유기적 공간 구성을 한 근대주의적 형태가 나타났다. 둘째, 미국군 묘지에는 예배당, 실종자의 벽, 전투지도벽, 기념조각 등을 공통적 기념요소로 적용하였고, 영연방 묘지에서는 쉘터와 '희생의 십자가' 및 '기억의 돌' 등 고전주의 양식의 표준적인 기념 조형물이 도입되었다. 한편, 독일군 묘지는 분구묘와 공동묘지에 상징적 십자가 조형물을 설치하였고, 다른 기념 요소의 사용은 제한되었다. 셋째, 각 나라마다 기독교를 주제로 하는 십자가를 묘비의 주요한 형태적 모티브로 적용하였다. 미국은 라틴 십자가 묘비를 통하여 전사자를 추모하고, 동시에 순교자로서 미국의 희생과 기독교를 강조하였으며, 영연방과 독일은 기독교에 바탕을 두고 전사자의 영혼을 추모하였다. 마지막으로, 정치 및 종교적 측면에서 미국은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기독교 및 자유민주주의와 국가적 애국심을 강하게 표현하였고, 영연방은 제국주의 공통된 양식으로 묘지를 조성하였으며, 독일은 집단적 죽음을 동료애로 표현하는 전통주의와 화해 및 평화를 지향하였다. 본 연구 결과는 서유럽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전쟁묘지는 공간적 중심축과 정형적 공간 형태를 통하여 표준화되고 정형화된 묘지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국가별로 공간 설계, 상징적 기념요소의 도입, 종교 및 이념적 가치에서 고유한 기념문화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향후, 우리나라의 현충원 및 호국원 등 묘지에서 담아야 하는 숭고한 기념성과 국립묘지를 발전시키고, 기념문화를 정립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거창 송계사(松溪寺) 목조여래좌상과 18세기 후반 조각승 상정(尙淨) 불상의 작풍(作風) 연구 (A Study on the Wooden Seated Buddha at Songgyesa Temple in Geochang and the Sculpting Style of Sangjeong, a Monk Sculptor in the Late 18th Century)

  • 유재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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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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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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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상정(尙淨)은 18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조각승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수조각승 상정의 조상 활동 6건과 그가 조성한 기년 불상 중 마지막 작품으로 발견된 1767년 거창 송계사 <목조여래좌상>을 토대로 상정 불상의 전체적인 작풍을 설정하였다. 상정이 조성한 불상의 공통점은 귀의 생김새, 상·하반신 옷주름, 오른손이 놓인 위치, 하반신 표현 등에 나타나 있었다. 그 중 하반신 표현은 불상 하단에 표현된 연잎 사이로 하반신 옷주름이 흘러내리는 A유형, 연잎과 대좌 표현 없이 하반신에 'S'자형 옷주름만 형성된 B유형, 불신과 대좌를 일체형으로 조성하여 대좌에 표현된 연잎 사이로 하반신 옷주름이 흘러내리는 C유형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정은 그가 유일하게 조각 수업을 받았던 스승 태원(泰元)의 작풍을 충실히 계승하였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는 서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나한상> 조성 불사에서 수조각승 태원 아래에서 상정이 3위 조각승(3/12위)으로 참여한 기록과 봉은사 석가상에서 표현된 'S'자형 하반신 옷주름이 상정이 조성한 모든 불·보살상에 반영된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현좌 표현, 보발의 형상 또한 18세기 전반 조각승 진열(進悅)에서 태원을 거쳐 상정에게로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상정과 태원 두 조각승의 작풍은 불상에서 나타나는 양감과 측면의 두께, 하반신 옷주름의 요철 강도, 오른쪽 가슴의 옷자락 형태, 귀의 세부적인 표현 등에서 차이점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조각가 개인의 양식을 추출하였고, 상정의 작풍을 갖고 있는 불·보살상 10건 14점에 대해 상정 또는 태원(계) 등 원 조각가를 분류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공주 마곡사 명부전 불상 연구 (Buddhist Images in Myeongbujeon at Magoksa Temple in Gongju)

  • 최선일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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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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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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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논문은 공주 마곡사 명부전에 봉안된 불상에 관한 문헌 검토와 양식적인 접근을 통하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석조시왕상의 제작 시기 및 조각승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 연구이다. 명부전 내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석조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서 있고, 벽면을 따라 시왕상 및 권속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 불상들은 1930년대 후반에 목조지장보살좌상은 청양 정혜사에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및 시왕상 등은 임실 신흥사에서, 시왕도는 논산 정토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이제까지 마곡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좌상은 석조시왕상 조성 시기인 1677년에 함께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목구비에서 풍기는 인상, 신체 비례, 착의법 등을 살펴보면,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수연(守衍)이나 그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 1620~30년대 만든 불상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의 두 번째 주름이 수직으로 늘어지고 끝자락이 하트 모양으로 마무리된 점과 그 옷주름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낮게 펼쳐진 옷주름 처리 방식은 수연이 제작한 서천 봉서사불상(1619년)이나 익산 숭림사 불상(1634년, 옥구 보천사 조성)과 유사하다. 석조시왕상과 권속 등은 1677년에 조각승 성일(性日)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것을 조성발원문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성일이 수화승으로 만든 유일한 불상이고, 같이 제작에 참여한 작가들의 활동을 정확히 알 수 없어 새로운 자료가 공개되어야 구체적인 조각승의 계보가 밝혀질 것이다. 기존 연구에서 성일이 불상 제작과 중수에 참여한 활동을 살펴보면, 혜희(慧熙) 계보 또는 운혜(雲惠)(운혜(雲慧))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하여 두 조각승 집단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곡사 시왕상은 호남이나 영서 지역에서 주로 제작되는 흙이나 나무가 아니라 돌로 제작되었으며, 영남에서 유행한 시왕상의 형태나 착의법 등과 유사하여 호남보다 영남에서 주로 활동한 조각승들의 작품으로 보인다. 앞으로 충남 지역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석조시왕상의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조성 시기와 작가에 관한 심층적인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들에 대한 분석이 진행된다면, 17세기 후반 영남 지역 석조불상과의 비교를 통해 호남에서 제작된 석조불상을 주도적으로 만든 조각승과 활동 내용이 밝혀질 것이다.

6-7세기의 동남아 힌두 미술 - 인도 힌두미술의 전파와 초기의 변용 - (Southeast Asian Hindu Art from the 6th to the 7th Centuries)

  • 강희정
    • 동남아시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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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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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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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e relics of the Southeast Asian civilizations in the first phase are found with the relics from India, China, and even further West of Persia and Rome. These relics are the historic marks of the ancient interactions of various continents, mainly through the maritime trade. The traces of the indic culture, which appears in the historic age, are represented in the textual records and arts, regarded as the essence of the India itself. The ancient Hindu arts found in various locations of Southeast Asia were thought to be transplanted directly from India. However, Neither did the Gupta Hindu Art of India form the mainstream of the Gupta Art, nor did it play an influential role in the adjacent areas. The Indian culture was transmitted to Southeast Asia rather intermittently than consistently. If we thoroughly compare the early Hindu art of India and that of Southeast Asia, we can find that the latter was influenced by the former, but still sustained Southeast Asian originality. The reason that the earliest Southeast Asian Hindu art is discovered mostly in continental Southeast Asia is resulted from the fact that the earliest networks between India and the region were constructed in this region. Among the images of Hindu gods produced before the 7th century are Shiva, Vishnu, Harihara, and Skanda(the son of Shiva), and Ganesha(the god of wealth). The earliest example of Vishnu was sculpted according to the Kushan style. After that, most of the sculptures came to have robust figures and graceful proportions. There are a small number of images of Ganesha and Skanda. These images strictly follow the iconography of the Indian sculpture. This shows that Southeast Asians chose their own Hindu gods from the Hindu pantheon selectively and devoted their faiths to them. Their basic iconography obediently followed the Indian model, but they tried to transform parts of the images within the Southeast Asian contexts. However,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the process of the development of the Hindu faith and its contents in the ancient Southeast Asia. It is because there are very few undamaged Hindu temples left in Southeast Asia. It is also difficult to make sure that the Hindu religion of India, which was based on the complex rituals and the caste system, was transplanted to Southeast Asia, because there were no such strong basis of social structure and religion in the region. "Indianization" is an organized expansion of the Indian culture based on the sense of belonging to an Indian context. This can be defined through the process of transmission and progress of the Hindu or Buddhist religions, legends about purana, and the influx of various epic expression and its development. Such conditions are represented through the Sanskrit language and the art. It is the element of the Indian culture to fabricate an image of god as a devotional object. However, if we look into details of the iconography, style, and religious culture, these can be understood as a "selective reception of foreign religious culture." There were no sophisticated social structure yet to support the Indian culture to continue in Southeast Asia around the 7th century. Whether this phenomena was an "Indianization" or the "influx of elements of Indian culture," it was closely related to the matter of 'localization.' The regional character of each local region in Southeast Asia is partially shown after the 8th century. However it is not clear whether this culture was settled in each region as its dominant culture. The localization of the Indian culture in Southeast Asia which acted as a network connecting ports or cities was a part of the process of localization of Indian culture in pan-Southeast Asian region, and the process of the building of the basis for establishing an identity for each Southeast Asian region.

지역문화생태계와 청년예술가 - Creative Sector Holistic Model을 적용한 광주 청년예술가들의 창작 활동 저해요인에 관한 연구 - (Local Cultural Ecosystem and Emerging Artists: A Study on Hindering Factors in Creative Activities of Young Artists in Gwangju by Adopting Creative Sector Holistic Model)

  • 김미연;김인설
    • 예술경영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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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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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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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이 연구는 지역문화생태계 내 청년예술가의 위치와 이들이 교류하는 생태계 내 주요 이해관계자들과의 역학관계를 중심으로 청년예술가들의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저해하는 환경적 요인을 파악하기 위해 실행된 질적 연구이다. 이 연구의 중심질문은 '무엇이 청년예술가의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저해하고 지역의 예술현장에서 떠나게 만드는가?'로, 청년예술가들의 경험과 시각에 중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본 연구에서 수집된 인터뷰 자료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국비로 광주에서 지원된 청년예술가 지원사업을 기획·실행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자료이다. 이 연구는 전술한 2년간의 지원사업 진행 과정에서 만난 회화, 문학, 조각, 영상, 국악, 시각디자인, 공예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20-34세 사이의 29명의 청년예술가와의 공식 및 비공식 인터뷰를 통해 수집된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자료의 분석을 위해 생태계 논리를 창조산업에 적용하고 구조화시킨 Creative Sector Holistic Model(Wyszomirski, 2008)을 차용하여, 공공인프라(General Public Infrastructure)에 포함된 옹호단체(Advocacy), 전문예술기관(Professional Associations), 공공기금(Public Funding), 정책(Policy) 내 이해관계자와 지역 청년예술가들 간의 관계와 경험, 그리고 인식을 중심으로 구성된 주요 의미를 도출하였다. 분석 결과, 경제적 어려움만이 청년예술가의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중단시키는 요인은 아니었다. 지역의 건강한 문화예술생태계의 부재 혹은 불균형에서 파생된 다양한 저해 요소들이 파악됐으며, 이는 생태계 내 근원적 문제와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안임을 방증한다. 지역의 청년예술가 지원사업은 따라서 해당 지역의 생태학적 지형을 파악하고, 생태계 내 역학관계와 문제점을 밝혀가는 과정을 통해 해당 사업의 효과와 장기적 영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