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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공적·사적경호의 특성과 현대경호와의 비교연구 (A comparison study of the characteristics of private and public security service of Koryo dynasty and modern security service)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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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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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7-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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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려건국 후 왕의 측근 친위군에 대한 제도적 정비는 성종시대에 이루어졌다. 건국 후 국가제도를 정비하는 법제의 확립과 더불어 2군 6위에 소속된 금군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금군의 핵심부대는 견룡이며, 그들은 필요에 따라 국왕의 가까운 위치에서 호위하거나 궁성을 수비하고 방어하는 부대로 성장하면서 제도적 위상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사적경호제도인 도방(都房)의 창설은 경대승이 신변 안전을 위하여 자신을 따르는 무술이 뛰어난 군졸들과 침식을 같이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경대승이 병사하고, 그의 도방도 곧 해체되었다. 최충헌은 집권 후 경대승의 도방을 부활시켜 이를 보완하고 발전시켰다. 최충헌은 그의 문하에 문무를 두루 겸비한 문객들이 많은 가운데 유능한 인물을 영입하여 군사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문신들의 조언도 받아들이며 도방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자신의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금군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최우의 집권 이후 6번 도방을 내외도방으로 확장, 개편하여 실질적인 도방으로 발전시켰다. 또 야별초를 창설하여 도방의 위기를 방지하는 효력도 발휘하였다. 고려시대의 공경호인 금군은 왕권이 무력화된 무신집권시대에도 그 제도는 존속되었으나, 군권을 위시한 실권은 사적경호 조직인 도방이 행사하였고 왕은 다만 상징적인 존재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고려시대의 경호와 현대 경호를 비교해 볼 때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으나, 경호의 본질에 있어서는 경호대상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으로는 고려시대의 충성심과 현대의 이익추구가 각각 그 특징으로 대비되며, 고려시대 경호가 무력에 의한 강압으로 다스려진 것이라면, 오늘날의 경호는 자유의지에 의한 의무와 책임감의 수행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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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경복궁 궐내각사의 건축공간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Architectural Space of Gwolnaegaksa at Gyeongbokgu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 이정국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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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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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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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architectural space of Gwolnaegaksa (闕內各司), the Government office in the palac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Royal palace can be divided into three parts, political space for king, living space for king and his family and government office. So first, we should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each space in the Royal Palace. Up to now we have looked at the architectural space of Gwolnaegaksa in Gyeongbokgung (景福宮), one of the Royal Palace, the result of this study is as followings. There were not many Gwolnaegaksas in the early days in Gyeongbokgung. After King Sejong, some office buildings were established in that palace. King's closest guards, like as Seonjeonkwan (宣傳官), Gyumsabok (兼司僕), Naegeumwi (內禁衛) had been on duty in Sajeongjeon Haengrang (思政殿 行廊), a kind of servants' quarters. Bincheong (賓廳), a conference room of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s was situated in Geungjeon Haengrang (勤政殿 行廊). There were also barracks of other palace guards in Geungjeon Haengrang. Gyeongyeoncheong (經筵廳), a place to prepare and wait, was built separately from Geungjeon Haengrang Layout drawings of Gyeongbokgung painted since the 18th century were different from document in some parts. The arrangement of the Gwolnaegaksa was assumed like as the Fig. 9.

영국 왕실근위대 분석을 통한 국내 시사점 연구 (Implications from Analysis on the U. K. Household Division)

  • 방환복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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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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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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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연구는 1660년부터 지금까지 350여년이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영국 왕실근위대의 변천사와 조직구조, 임무에 관한 조사와 함께 왕실근위대 교대식과 한국 수문장 교대식의 비교 분석을 통해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했다. 연구 결과를 요약하자면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영국왕실은 영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써 350년 동안 왕을 호위하는 왕실근위대가 존재해왔다. 왕실근위대는 영국 육군 소속의 정규군으로 현재 2개 기병연대와 5개 보병연대를 비롯하여 왕립기마포병대 등이 하나가 되어 왕실근위사단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임무는 크게 구분하면 왕을 호위하고 궁 경비, 국가 의식행사에 동원되는 임무 외에 최정예 부대로 전투에도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영국의 왕실근위대와 한국 수문장 교대식 비교에 있어서는 왕 호위, 궁 경비 등과 전통계승 차원이라는 점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었고, 반면 기본적인 취지와 목적, 광관상품화 과정, 전담조직 등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왕실근위대는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이미지로 잡아온 반면, 한국 수문장 교대식은 사적자료의 고증을 통한 문화재연 행사로 전통계승, 관광산업적 측면을 강조해왔지만, 세계의 유일의 독특한 왕실 호위 및 경비 문화를 전반적으로 담을 수 있는 콘텐츠로는 미흡한 점이 있어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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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현동(松峴洞) 일원 역사문화경관의 통시적 연구 (A Diachronic Study on Historical and Cultural Landscape of Songhyeon-dong, Seoul)

  • 강재웅;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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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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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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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경복궁 옆 송현동 일원에 문화공원을 조성하기로 계획된 사실을 배경으로 '송현(松峴)'이라는 장소가 인식되었던 조선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관련 문헌과 도면자료를 분석하여 주요 시기의 역사문화경관을 파악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송현동 일원의 경관을 통시적으로 고찰하기 위하여 주요 필지의 소유주를 파악하고 토지이용과 경관구성요소를 추출하였다. 1392년 조선의 건국 이래 송현은 풍수지리사상에 의하여 '경복궁의 내청룡(內靑龍)'으로 이해됨에 따라 국가에 의해 '소나무숲'이 관리되었다. 1410년 태종이 실시한 전제 개혁과 도시계획의 영향으로 국가 창고 '분감(分監)'이 세워지고 영세한 과일가게 '우전(隅廛)'이 조성되었다. 19세기 이후에는 상류층 가옥으로서 '가성각(嘉聲閣)', '창녕위궁(昌寧尉宮)', '벽수거사정(碧樹居士亭)'이 존재하였다. 1919년 조선식산은행이 부지를 매입하면서 대규모 관사단지인 '식은사택(殖銀舍宅)'이 조성되었으며, 이는 1948년 미국으로 이양되어 '미국대사관 직원숙소'로 사용되었다. 둘째, 도출한 시기별 경관구성요소의 존속기간과 함께 위치를 비정하여 물리적 실체를 파악함으로써 시대별 사회상과 결부된 입지관(立地觀)의 변천을 확인하였다. 풍수지리적 세계관 속에서 궁궐의 왼편을 비보(裨補)하는 '내청룡'으로 인식된 소나무숲은 부지 서쪽 고지대에 있었다. 동시기 동쪽의 평탄한 구역은 각종 정부시설과 시장에 인접한 길목에 다양한 계층이 모여드는 '여항(閭巷)'으로 여겨졌다. 19세기 이후 소나무숲에는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원림이 들어서 '성시산림(城市山林)'으로 이해되었다. 오랫동안 도심 속 대형 필지로 존재하였던 송현동 일원은 20세기 일제에 의해 '이상적 건강지(理想的 健康地)'라는 관념 아래 개발되었다. 이로써 조선시대 전통적 복거관(卜居觀)을 고수해 온 송현동 일원의 장소성이 단절된 것이다.

한국의 가두행렬(街頭行列)과 전통연희 (Korea's Street Processions and Traditional Performing Arts)

  • 전경욱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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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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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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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행렬도는 묘 주인의 등급에 따라 인원수와 각종 대열 및 인원 배치가 규정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가두행렬에 동반되는 연희들은 대부분 산악 백희의 종목들이었다. 특히 안악 3호분의 악대는 고취와 횡취를 갖추고 있어서, 이 행렬의 국제적 교류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호위병, 의장대, 악대, 연희자를 갖춘 고구려의 행렬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어가행렬과 일치하므로 그 영향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가두행렬은 왕의 어가행렬이다. 연등회에서 왕이 봉은사나 흥왕사를 다녀올 때, 왕이 지나는 차도의 좌우에는 등산과 화수를 설치했으며, 그 가두행렬의 규모가 매우 컸고 다채로운 음악과 공연을 연행했다. 나례는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으로 고려시대의 궁중의례에 수용되었다. 고려의 나례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가두행렬과 연희를 행했다. 그리고 정초에 풍물패가 행하는 지신밟기도 나례의 유풍이다. 조선전기의 궁중나례에는 방상시 12지신 이외에 판관 조왕신 소매 등 새로운 배역이 등장한다. 그래서 나례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모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환궁행사에서 왕이 탄 가마는 전후의 고취악대가 행진음악을 연주하고, 산붕이 인도하는 가운데 대궐을 향해 가두행렬을 진행했는데, 이때 각종 연희도 공연되었다. 이 환궁행사는 고려 의종 때의 환궁행사와 매우 유사하다. 조선시대의 삼일유가와 문희연은 양반층의 축제였다. 급제자는 악사와 연희자들을 대동하고 서울 시가를 3일간이나 돌아다니며 가두행렬을 벌이면서, 자기 가문의 경사를 축하하고 가문의 위세를 과시했다. 조선시대의 동제와 읍치제의에서는 사당의 신상이나 신대를 앞세우고 가두행렬을 진행했다. 중국의 마을제사인 영신새회가 후대에는 나례의 연문축역과 융합되었듯이, 한국의 마을제사도 지신밟기와 결합되어 마을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신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가두행렬이 형성되었다. 수영야류의 가두행렬은 가면극 공연의 홍보 효과가 있었고, 참가자들의 일체감을 조성하면서 축제적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북청군 토성리 관원놀이의 중심은 관원의 행차를 모방한 가두행렬이었다. 토성 관원놀이는 인명의 안과와 마을의 오곡 풍성을 기원하는 민속신앙의 기능, 가두행렬과 여러 연희들을 통해 흥과 신명으로 즐기는 오락적 기능, 주민들의 단결과 화합을 조성하는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가두행렬은 자생적 가두행렬과 외래 기원의 가두행렬이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렬도의 고취와 횡취, 고려시대에 상원이라는 연등회의 시기와 왕이 참석한 가운데 행해지는 교방가무희 및 백희 공연, 동제의 지신밟기 등을 통해서 국제적 교류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상원연등회는 중국에서 유입되었지만, 왕이 선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모신 봉은사에 다녀올 때의 가두행렬과 그 노변에 설치되는 등산과 화수 및 수많은 등은 고려 연등회의 특징이다. 이상의 모든 행사에서 가두행렬은 축제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고, 행렬의 중간이나 행렬이 끝난 후 펼쳐지는 전통연희의 공연에서 참가자들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가두행렬의 참가자들은 각 행사를 통해 문화적인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자기들의 역량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고려시대 왕실호위제도의 사적 고찰 (Historical Review on the Security Service for the Royal Household in the "Goryeo" Era)

  • 이성진;김의영;이종환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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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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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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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고려시대의 왕실 호위라 함은 오늘날로 보면 국가원수에 대한 경호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의 독특한 정치제도가 완성되기까지는 신라시대나 태봉국의 제도를 답습하여 왕의 신변을 중심으로 경호가 실행되었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과 6위라는 8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2군은 6위보다 위였으며 이는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으로서 이를 근장(近仗)이라고 불렀다. 이를 오늘날의 공경호와 관련을 지어보면 근접경호에 해당된다. 고려 귀족 사회의 안정기에 귀족문화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그 뒤로 귀족분열과 상극대립으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무신란이 일어나고 무신들이 집권함으로서 왕의 신변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최씨 무인집권시대에 이르러 무인집권의 안전을 위하여 도방을 설치했고 최우 시대에는 그의 문객들을 모아 사병들뿐만 아니라 정방, 서방, 등의 문신을 거느려 인사행정을 담당케 했다. 몽고에 항쟁하던 시대에는 무신통치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를 중심으로 항쟁했다. 최씨 정권시대의 그들 나름의 국가관과 국가 호위의 정신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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