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서예의 유파가 많은데 '추서(醜書)'가 하나의 유파로 봐야 할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추서'를 인정받지 않은 사람은 '추서'에서 전통적인 결자 규범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 문제의 식별성도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추서'가 존재하고 발전을 이루는 것은 현대 서예가의 끊임없은 탐색과 개혁과 관련된다. 뿐만 아니라 서예들의 미적 인식 능력이 늘어나고 미적 표준도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 이에 따라 '추서'를 인정하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시대에 앞장선 서예가들이 전통적인 서예 사상을 줄곧 견지하면서 전인을 배우고 경험을 쌓는다. 그 중에서 전통적인 중용(中庸)사상을 저버리고 '추(醜)'를 세인에게 보이는 서예가들이 있다. 옥흥화(沃興華)와 증상(曾翔) 등 서예가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옥흥화와 증상은 모두 고대 비첩을 골자로, 민간 서예를 혈액으로 하여 나름의 풍격을 창출했다. 본고는 옥흥화와 증상의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추서'의 정의와 형성 과정을 탐색, 연구하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추서'의 특징 및 '추서'의 미감을 정리하도록 한다.
After the Qing Dynasty overthrow of the Ming dynasty, this is far-reaching influenced on the Ming Dynasty's Sovereign state of the Joseon dynasty. Not only did regulations prohibit the entry into various books published by the Qing Dynasty, In addition, the "Northern Expedition" of Song Siyeo put forward the mainstream political proposal of the Northern Expedition and Qing Dynasty.Even in this context, Representatives of scholars such as Hong Daeyong, Bak Jega, Kim Jeonghui on the Joseon dynasty peninsula at the time, put forward the idea of "Learning from Central Plains" through several visits to Shuntian Prefecture (now Beijing), And gradually formed the well-known Silhak (Practical Learning) ideological of "Bukhak, (Northern Learning)" in the Joseon dynasty history. the Joseon dynasty Silhak ideological scholar of Kim Jeonghui also was under the influence of the Weng Fanggang and Ruan yuan other famous Qing Dynasty Textual scholar, Fruitful achievements in Chinese Classical Studies Epigraphy, Calligraphy.He founded the "Chusa-che" style of calligraphy Chusa, the "Chusa-che" styled is although born out of the clerical script, but more composition and See also asymmetrical in harmony, Strong and vigorous brush strokes, Every word vibrant, Make it a master of gold stone calligraphy in the Joseon Dynasty.This study based on some records of Kim Jeonghui's visited to Shuntian Prefecture(now Beijing), this article examines the academic activities of seeking truth to facts in Korea and the Qing Dynasty at the time, and the impact on these activities on calligraphy and painting in the Joseon Dynasty.
고창 서화는 20세기 초에 들어서 사호 송수면(宋修勉, 1847-1916)의 제자이자 한때는 양자였던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 1872~1941)가 고창으로 이주하며 초석을 다졌고 본격적인 흐름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염재는 전남 화순 출신으로 조선 말기와 근대기의 학자이자 서화가로서 고향인 화순과 고창을 중심으로 한문과 서화 교육자로 근무하면서 창작활동을 하며 고창 서화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서예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6세에는 진사시에 합격(동몽진사)하여 최연소로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의 그는 구한말 부정부패의 만연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인해 크게 낙담하여 세상을 등지고 낙향하여 서화로 시름을 달래었다. 고창과 전주를 기반으로 전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며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민족정신과 역사를 배양시키기 위해 고창고등보통학교(현, 고창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염재는 사호 송수면(宋修勉, 1847~1916) 화풍의 절대적 영향을 받아 강건한 필치의 산수화를 그렸고, 화조화와 사군자 등 남종문인화의 다양한 화목을 다루었다. 특히 한국적 풍토미를 바탕으로 한 근대지향적 실경산수의 구현과 더불어 신문물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초창기 근·현대를 아우르는 대표적 서화가로서, 근·현대 고창 서화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1904~1989)는 10대 후반에 염재로부터 묵화의 기본을 사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다양한 예술적·사회적 활동에 비해 지역작가로서의 한계와 평가에 그치고 있는 점은 아쉽다.
청대의 예서는 중국서예의 역사에 혁신을 불러왔다. 서예에 있어 중요한 금석학과 고증학이 청시대에 들어와 발전하였고, 그리하여 예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청시대예 들어와 적지 않은 서예가들이 출현하였고, 특히 금농(金農:1687-1763)과 이병수(伊秉綬:1754-1815)은 중국의 서예의 역사에 있어 예서체가 자리 잡는데 핵심적인 역학을 한 서예가들이다. 금농과 이병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이 논문에서는 두 예서체의 대가들이 남긴 그들의 작품을 비교분석하여 예서의 미적 가능성을 현재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고, 나아가서는 서예가로서 금농과 이병수의 예서작품을 비교분석하여 예서의 미적 차이점을 구체화 한다. 나아가서 두 서예가의 예서가 한대(한자)의 예서를 전승함에도 불구하고 청시대의 예서사에 자리매김한 원인이 탐구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시대의 예서와 금농과 이병수의 예서체 그리고 서예의 사상과 그들의 서예작품은 예서를 비교 및 연구한다. 청시대의 서예가인 금능과 이병수 작품에 대한 비교분석은 예서의 역사적 그리고 미학적 판단에 중요한 화두를 제공한다. 이는 후세의 서예가들에게 예서체를 배울 수 있는 길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서예의 역사적 그리고 미학적 가치를 연구하는데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This study explored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South Korean crossover picturebooks that are enjoyed across generations. Participants included three publishers, six critics, six illustrators and three picturebook researchers, and focused on 92 South Korean recommended picturebooks published from 1995 to 2014 as the research material for this study. The majority of Korean crossover picturebook type was story, followed by information and art. There were few wordless books. Common themes of the story picturebooks were contemplation, traditional culture, social changes (such as immigration and redevelopment), reminiscence, social relations, loss and death, family problems, and social incidents. Classic essays and novels were revised for picturebooks as were famous poems originally written for grown-ups. Informational books were about traditions in music, architecture, furniture and special occasions like wedding and ceremonies. The style of the drawings were precise and realistic. Some drawings were done by brush and Chinese ink on hanji (traditional Korean paper) or silk. Some books featured Korean calligraphy as well, enabling adult readers to also appreciate the beauty and delicacy of the books. Art books and wordless books were quite rare and exhibited a playful tone. Adults alone were not presumed to be the primary reading audience of the picture books. Implications were made for picturebook marketing in a society such as South Korea, where the elderly population is rapidly increasing. Various forms of art books and parodies were also welcome. One conclusion of the study was that more experimental and innovative works would be encouraging for the development of South Korean crossover picturebooks.
2021년 고 이건희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귀)》(건희10703, 이하 '이건희 기증 모사첩')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 김정희 제지, 오세창 배관기를 엮은 총62면의 호접장 서첩이다. 이번 연구에서 이 서첩은 1934년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청구학총』 15호에 소개한 자료와 동일하며, 1824년 경주 창림사 무구정탑안에서 출토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를 경황지(硬黃紙)에 정교하게 탑모(搨模)한 것임을 밝혔다. 아울러 1998년 전 성암고서박물관장 조병순이 공개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경주 창림사 무구정탑 출토 원본 사경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재확인했고, 박철상 소장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경주 창림사 무구정탑 출토 사경을 탑모한 또 하나의 모본일 가능성이 크다고 고찰했다. '이건희 기증 모사첩'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는 측천문자가 6종 15회 사용되었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불국사 소장)에 4종 10회 사용된 측천문자는 '이건희 기증 모사첩'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고, 기타 이체자도 공통되므로 두 경전은 8세기 신라에서 통용되었던 동일한 판본을 저본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희는 금석학으로 한국과 중국의 서예 교류를 고증했는데, 창림사 무구정탑 출토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는 구양순체 이전의 고아한 서법을 보여주는 실물 자료라고 평가했다. 그러므로 '이건희 기증 모사첩'은 김정희가 보기 드문 통일신라 사경과 탑원기 진본을 고증한 사례로 그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크다.
이 논문은 최근에 공개된 "원교진적"에 대한 소개와 서예비평적 고찰이다. "원교진적"은 한말의 실학자이자 문인이었던 석정 이정직(1841-1910)이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에 대하여 비평해 놓은 것이다. 먼저 석정 이정직의 서예 활동과 함께 그의 글씨가 동국진체와 맺고 있는 관련성에 대하여 탐색해 보았다. 석정이 동국진체의 흐름에 서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이 분야 전문가들의 몫으로 남아 있지만, 본고에서는 "원교진적(圓嶠眞跡)"과 "송하진적(松下眞跡)", 그리고 "창암서첩(蒼巖書帖)"을 통해서 그가 동국진체를 접하고 있었고, 한편으로 그것의 영향권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번에 공개된 "원교진적"은 원교가 부령으로 유배된 다음 해인 1756년 6월을 전후로 지었던 18수의 한시 작품을 초서로 쓴 필첩이다. 여기에는 원교가 함경도 부령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리움과 절망감으로 점철된 그의 내면이 담겨 있다. "원교진적"은 석정이 원교의 글씨에 대하여 앞뒤로 비평적 제발을 덧붙인 자료라는 데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석정은 "원교진적"의 제발을 통해 서예사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원교의 글씨에 대하여 비평을 하였다. 석정은 원교가 왕희지 이전의 글씨에 모범을 두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석정은 원교가 우리나라의 풍기에 갇혀 조화(造化)하지 못한 한계를 보인다고 보았다. 석정의 이 언급은 원교의 글씨가 외면상으로 굳세지만 최고의 예술적 경지로서 '진숙'을 넘어서는 '조화'의 경지에 들어서지 못했다는 평가로 보인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석정의 서예 비평이 주로 중국 작가들에 대해서 이뤄졌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석정이 직접 비평을 하였던 "송하진적"이나 "창암서첩"과 함께 이번에 "원교진적"이란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면서 그가 우리나라 동국진체의 작가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적 제280호 「서울 한국은행 본관」 정초석의 '정초(定礎)'글자가 조선통감부 초대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쓴 글씨라는 보도가 있었다. 서체 관련 전문가 3인으로 자문단을 구성하여 현지조사를 진행한 결과, 정초석에 새겨진 '정초(定礎)' 두 글자는 일본 하마마츠시(浜松市) 시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상의 이토 히로부미의 필적과 운필법 등의 특징으로 그의 글씨임을 확인하였다고 보도되었다. 느낌에 의한 정성적인 판단 보다 객관적인 판단자료를 제공하려면 이미지분석을 통한 글자의 정량적인 비교를 통한 판단의 근거자료의 제시가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이미지분석 소프트웨어를 활용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붓글씨와 정초석의 글자를 겹쳐 육안에 의한 비교와 글자의 면적을 측정하여 비교하였다. 이미지분석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글자 이미지의 비교분석과 소장자가 기술한 소장경위의 조사를 바탕으로 정초석의 글자가 보도자료의 내용대로 그의 글씨임을 확인하였다. 글자간의 유사성의 비교에 있어서 이미지분석법을 활용한 정량화를 통하여 객관적인 판단근거를 마련할 수 있음을 예시하였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와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1685~1776), 그리고 청고(靑皐) 윤용(尹愹)(1708~1740)으로 전해져 온 해남윤씨 3대의 화맥과 학문사상은 해남에 본거지를 두었지만, 주로 한양을 무대로 예술혼을 펼쳤고 가법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선비출신 서화 가문으로 명망을 쌓았다. 공재(恭齋)의 장남으로 태어나 82세를 살았던 낙서(駱西)는 친부 및 남인(南人)계열 이서(李漵)에게서 다양한 학문과 서화를 익혔다. 조선 초·중기 화풍을 섭렵하고 남종화법을 수용하면서 서양식 음영법을 가미하여 대상의 사실성과 입체감을 추구했는데 미법산수(米法山水), 원말(元末) 사대가(四大家), 명대(明代) 오파(吳派), 동기창(董其昌), 청대(淸代) 안휘파(安徽派) 등 다양한 화법을 융복합하여 변유적 회화심미를 이루었다. 그는 특히 말 그림과 도석인물화에서 탁월한 재능을 드러냈는데, 박학(博學) 실득적(實得的) 가풍에 비덕적(比德的)으로 구현한 독창적 진경미(眞景美)를 발현하였다. 낙서(駱西)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32세로 요절한 청고(靑皐)는 다양한 수지법(樹枝法)을 구사한 남종산수화에 능했는데, 물상의 정확한 사실묘사를 위해 세밀한 관찰과 깊은 탐구심, 그리고 화보 화제시의 새로운 시정(詩情)을 펼치면서 독창적 구성의 시의도(詩意圖)를 그렸다. 또한, 가전된 화풍을 변유적으로 재해석하여 진경(眞景)을 넘어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진정미(眞情美)를 발현하였다. 공재(恭齋)를 계승한 낙서(駱西)와 청고(靑皐) 부자의 서민풍속화는 조선 후기 새로운 장로로 자리잡게 되는 등 이들 부자의 변유적 회화심미와 화법은 녹우당 화풍을 이루어 조선 회화풍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한국회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병오(徐丙五, 1862-1936)는 서구적 '미술' 개념의 도입으로 일본화 내지 서양화로 기울던 일제강점기 시서화일치의 대구 문인화단이 형성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79년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의 만남을 계기로 서화계에 입문하였으나, 문인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세 시기로 구분되며, 학습기인 1879년부터 1897년까지는 관직 진출을 목표로 하였던 때문인지 중국 화보를 임모하거나 이하응의 영향 아래 사군자화를 여가에 그리는 정도였다. 발전기는 1898년부터 1920년까지로 그는 애국계몽운동 등 사회적 지도자로 활동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삶의 방향을 문인화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중국 여행에서 다시 만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운미란과 포화(蒲華, 1830-1911)의 묵죽법을 근간으로 새로운 화풍을 적극 모색함과 동시에 산수, 화훼, 기명절지 등의 화목도 다루었다. 완숙기인 1921년부터 1936년까지는 대구와 한양을 오가며 근대 한국 화단의 서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묵란과 묵죽에서 윤묵의 호방한 필법을 특징으로 하는 개성적 화풍을 완성하였다. 특히 학습기의 경우 관련 기록이나 현전작품이 드물어 서병오의 창작활동이나 화풍 등에 관한 것은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석죽도 11점은 학습기의 화풍 연원이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889년작 난죽석도 가운데 묵란도는, 이하응이 1882년 7월 청군에 의해 체포되기 이전에 그린 초기 군란도와 석란도에서 영향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묵죽도는 한양에 널리 알려진 양주화파 정섭(鄭燮, 1693-1765)과 김정희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2)의 화법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하응의 석란도 형식을 응용하여 변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석도의 경우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청나라의 괴석화가 주당(周棠, 1806-1876)과 여항화가 정학교(丁學敎, 1832-1914) 등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죽석도는 학습기에 그려진 것으로 운현궁을 찾았던 허련과 정학교 같은 동시기 화가들이나, 한양에 작품이 유입되었던 정섭과 주당 등의 중국 작품을 실견하며 이들의 화풍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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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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