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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세기의 동남아 힌두 미술 - 인도 힌두미술의 전파와 초기의 변용 - (Southeast Asian Hindu Art from the 6th to the 7th Centuries)

  • 강희정
    • 동남아시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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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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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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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e relics of the Southeast Asian civilizations in the first phase are found with the relics from India, China, and even further West of Persia and Rome. These relics are the historic marks of the ancient interactions of various continents, mainly through the maritime trade. The traces of the indic culture, which appears in the historic age, are represented in the textual records and arts, regarded as the essence of the India itself. The ancient Hindu arts found in various locations of Southeast Asia were thought to be transplanted directly from India. However, Neither did the Gupta Hindu Art of India form the mainstream of the Gupta Art, nor did it play an influential role in the adjacent areas. The Indian culture was transmitted to Southeast Asia rather intermittently than consistently. If we thoroughly compare the early Hindu art of India and that of Southeast Asia, we can find that the latter was influenced by the former, but still sustained Southeast Asian originality. The reason that the earliest Southeast Asian Hindu art is discovered mostly in continental Southeast Asia is resulted from the fact that the earliest networks between India and the region were constructed in this region. Among the images of Hindu gods produced before the 7th century are Shiva, Vishnu, Harihara, and Skanda(the son of Shiva), and Ganesha(the god of wealth). The earliest example of Vishnu was sculpted according to the Kushan style. After that, most of the sculptures came to have robust figures and graceful proportions. There are a small number of images of Ganesha and Skanda. These images strictly follow the iconography of the Indian sculpture. This shows that Southeast Asians chose their own Hindu gods from the Hindu pantheon selectively and devoted their faiths to them. Their basic iconography obediently followed the Indian model, but they tried to transform parts of the images within the Southeast Asian contexts. However,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the process of the development of the Hindu faith and its contents in the ancient Southeast Asia. It is because there are very few undamaged Hindu temples left in Southeast Asia. It is also difficult to make sure that the Hindu religion of India, which was based on the complex rituals and the caste system, was transplanted to Southeast Asia, because there were no such strong basis of social structure and religion in the region. "Indianization" is an organized expansion of the Indian culture based on the sense of belonging to an Indian context. This can be defined through the process of transmission and progress of the Hindu or Buddhist religions, legends about purana, and the influx of various epic expression and its development. Such conditions are represented through the Sanskrit language and the art. It is the element of the Indian culture to fabricate an image of god as a devotional object. However, if we look into details of the iconography, style, and religious culture, these can be understood as a "selective reception of foreign religious culture." There were no sophisticated social structure yet to support the Indian culture to continue in Southeast Asia around the 7th century. Whether this phenomena was an "Indianization" or the "influx of elements of Indian culture," it was closely related to the matter of 'localization.' The regional character of each local region in Southeast Asia is partially shown after the 8th century. However it is not clear whether this culture was settled in each region as its dominant culture. The localization of the Indian culture in Southeast Asia which acted as a network connecting ports or cities was a part of the process of localization of Indian culture in pan-Southeast Asian region, and the process of the building of the basis for establishing an identity for each Southeast Asian region.

석탄(石灘) 이신의(李?儀)의 『대학차록(大學箚錄)』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f ShiTan Li Shen-Yi(石灘 李?儀)'s Daxuezhalu (『大學箚錄』))

  • 서근식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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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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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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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석탄(石灘) 이신의(李?儀)의 "대학차록(大學箚錄)"에 대해 살펴보았다. "대학차록(大學箚錄)"의 3가지 판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 "석탄집(石灘集)"에 실린 "대학차록(大學箚錄)"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체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제유장본(國際儒藏本)"이 왕심죽(王心竹)의 점교(點校)을 거쳐 구두(句讀)도 되어 있고"석탄집(石灘集)"의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석탄집(石灘集)"에 실린 "대학차록(大學箚錄)"을 저본(底本)으로 삼고 "국제유장본(國際儒藏本)"을 보충자료로 삼겠다. "대학차록(大學箚錄)"에서는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 대한 註釋을 하고 있는데 필자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보인다.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의 핵심을 경(敬)으로 본다든지 '章句'에 대한 독특한 해석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오류(誤謬)는 "대학차록(大學箚錄)"이 37세 때에 지어지고 그 이후에 수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가 끝나는 부분의 안(按)에서는 심(心), 성(性), 정(情), 지(志), 의(意) 등을 주석(註釋)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독특하게 여겨진다. 경문(經文)에서 의심 가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석탄(石灘)은 삼강령(三綱領)을 표시한 표와 같이 지선(至善)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독특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지지(知止)'절(節)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지지(知止)'절(節)을 그냥 두느냐 옮기느냐의 문제에서 석탄(石灘)은 그냥 두는 쪽으로 해석하여 주자(朱子)의 의견을 그대로 답습한다. 전문(傳文)의 체제(體制)는 주자(朱子)의 "대학장구(大學章句)"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지(知)와 행(行)으로 나누어 보려는 경향을 보이지만 언급들이 모두 구절(句節)로 되어 있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주자(朱子)와는 다르게 '근(謹)'자(字)와 '신(?)'자(字)를 들어 언급했지만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忘章)"과 같은 부분은 아무런 말이 없다가 '신(?)'자(字)가 맞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 과민반응을 보인 것이다.

조선조에서의 선진(先秦) 제자학(諸子學) 수용 양상 - 순자(荀子)에 대한 비판과 이해를 중심으로 - (The Aspect to Receive Pre-Chin Study of One Hundred Schools in Cho Sun Dynasty-Centered on the criticism and understanding of Hsün Tzu)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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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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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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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에서는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선진 제자학을 위상을 검토하고 아울러 순자사상의 한국적 수용과 전개 양상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여말선초부터 18-19세기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문집을 통하여 순자에 대한 이해양상과 시대별 흐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부터 고려 중엽까지는 지식인들이 선진 제자학 가운데 다른 학파나 사상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여말선초 이래 "맹자"가 유가의 정통 경전으로 확립되면서부터 순자를 비롯한 선진 제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고려부터 선초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으며, 다만 순자에 대한 이해의 심도가 점차 깊어짐을 알 수 있다. 성리학 전성기에 이르면 선초에 비해 순자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 강도가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토대로 한 성리학적 세계관이 이미 확립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성악설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대체로 순자의 다른 사상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원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17세기에 이르면 순자를 법가로 귀결시키는 논의도 일부 보이지만, 주자학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실학적 토대 위에서 제자학을 적극 수용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18세기에 이르면 순자에 대한 이해 범위가 보다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글자 고증에 있어서 순자의 원문 및 주석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요컨대 조선조 지식인들의 순자 비판은 시종일관 그의 성악설에 근거하며 나아가 분서갱유를 주도한 이사(李斯) 등의 법가와 연계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이를 제외한 순자의 기타 사상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수용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순자를 비판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제자서를 쉽게 접하거나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태도를 지녔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예술 개념으로서의 서예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aligraphy as a modern concept of art)

  • 김희정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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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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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5-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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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논문을 '근대적 예술 개념으로서의 서예'를 정의해 보고자하는 글이다. 근대성의 지표로서의 '자율성'에 근거하여 '순수예술로서의 서예성'과 배치되는 요소들을 제거해 봄으로써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시대의 서예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반추해보자는 의미이다. 근대예술 개념으로서의 서예를 '글자를 쓰는 예술'로 정의하고, 이를 성격과 형식, 내용적 측면으로 분류하여 논의하였다. 먼저 성격적 측면에서 서예는 마땅히 공간예술이어야 하지만, 시간의 추이와 함께 창작되고 감상되는 시간예술적 속성도 또한 지닌다. 따라서 공간예술 가운데 2차원적 공간예술인 회화와 가장 유사하며, 시간예술 가운데 리듬성(운동성)과 추이성을 내재한 음악과 유사하여 시공간예술로서의 무용과 유사함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서예는 '회화와 같이 눈에 보이는 글자를 음악과 같이 시간의 추이에 따라 (평면)공간에 써가는 사이에 살아있는 작가의 생명감이 표현되는' 무용과 같은 '시공간 예술'이라 하였다. 형식적 측면에서는 서예를 전각 서각 문자디자인과의 비교를 통해 동이점을 도출함으로써 '순수예술'로서의 서예 개념을 도출하였다. 서예의 내용적 측면은 문학과의 비교를 통해서 동이점을 논설하였다. 근대예술 개념으로서의 서예, 즉 서예의 자율성 문제는 순수예술이냐 응용예술(실용예술)이냐의 문제와 어울려 서예의 소재인 문자의 가독성(可讀性)과 문의(文意) 문제를 들었다. 문자의 가독성과 문의는 서예를 존재케 하는 요소임과 동시에 서예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일종의 파라독스다. 즉 문자의 가독성과 문의의 수용 여부는 서예를 응용예술 혹은 문학예술의 부용으로서의 서예인가, 순수조형예술인가의 가름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하여 서예의 창작과 감상 부분에서는 2차원적 공간예술인 회화와 시간적 예술인 음악과 대비시킴으로서 문의로부터 자유로운 '순수조형예술로서의 서예'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태원지>의 MMORPG 콘텐츠화 가능성 탐구 - 세계관과 공간의 제시를 중심으로 - (Analysis of the possibility of a MMORPG based on Taewonji - focused on the showing of outlook and new stage)

  • 김인회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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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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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9-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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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20세기 후반이후로 디지털 게임은 현대의 문화와 산업에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때문에 고소설을 디지털 게임의 소스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이 시도는 산업분야 뿐만 아니라 인문학 분야에서도 이루어 졌다. 본고는 고소설을 디지털 게임으로 변환하는데 필요한 사항을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특히 고소설 연구자들이 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 볼 것이다. 기존의 연구들은 고소설의 스토리, 환상성, 아이템이 게임의 창작에 직접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게임은 규칙(rule), 결과(outcome), 경쟁(conflict), 자발성(voluntary)의 네 요소를 이용해 재미를 준다. 스토리와 환상성, 아이템이 게임에 쓰이지만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다. 고소설은 게임의 네 가지 요소 중 규칙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태원지>가 제시하는 규칙다음과 같다. (1)난세를 바로잡아야 한다. (2)천명(Heaven's will)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천명을 얻은 자만이 나라를 세울 수 있다. (3)중심(화(華))과 주변(이(夷))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다. (1)과 (2)는 <삼국지연의>등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매우 익숙하다. 특히 중요한 규칙은 (3)인데 이는 <태원지>만의 독특한 생각이다. 자신의 고향에서 주인공 임성은 중심(화(華))이었지만 새로운 대륙에서는 주변(이(夷))이 되는 경험을 한다. 디지털 게임에서는 작품의 줄거리, 아이템 등을 활용하여 플레이어가 이 세 가지 규칙을 직접 체험하게 되는 만드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고소설 연구자들은 우선 고소설 속에서 게임에 적용할 만한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고소설을 게임에 활용하기 위한 특별한 분야가 필요하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동진남북조시기(東晉南北朝時期) 형신문제(形神問題)의 초보적(初步的) 탐구(探究) (Research on the Soul & Body Thought of 'Dong-Jin Northern & Southern Dynasty')

  • 조원일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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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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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5-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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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형신사상(形神思想)의 핵심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형(形)과 신(神)은 인간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두개의 요소로 만일 그 가운데 하나라도 없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으로 볼 수가 없다. 동진남북조(東晉南北朝) 시기의 사상가들은 '우리들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와 영혼이 과연 어떻게 나온 것일까?'라는 의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잡하고 미묘한 정신작용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육체와 영혼은 도대체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까?' 또한 '인간이 죽은 뒤에도 그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소멸되는 것인가?' 등의 문제들에 대하여 활발하게 토론과 연구를 진행했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먼저, 동진(東晉) 시기의 형신사상(形神思想)에 대하여 종병(宗炳)의 영혼은 음양(陰陽)과 같은 것으로도 헤아려지지 않는 만물 속에 있는 현묘(玄妙)한 것으로서 무시(無始) 이래 정추(精?)의 식(識)으로 나뉘어 계속 존속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 그리고 하승천(何承天)의 무엇이든 태어나면 죽는 것이며 육체가 없어지면 영혼이 흩어지는 것은 사계절이 계속 바뀌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영혼의 존속을 부정하는 주장들을 '명불론(明佛論)'과 '달성론(達性論)'을 중심으로 당시의 담론으로 형성되었던 '신멸(神滅)'과 '신불멸(神不滅)'의 문제를 집중 분석했다. 다음으로는 남북조(南北朝) 시기의 형신사상(形神思想)에 대하여 소침(蕭琛)의 육체와 영혼은 합하기는 하지만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태어나면 육체와 영혼이 합하여 기능이 생겨나지만 죽으면 육체는 남고 영혼은 떠나버리나 영혼은 항존(恒存)하는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범진(范縝)의 육체가 영혼의 질(質)이라면 영혼은 육체의 용(用)이라고 하면서 육체가 없다면 영혼 또한 없는 것이니 육체 즉 영혼이라는 주장들을 '난신멸론(難神滅論)'과 '신멸론(神滅論)'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 학술계의 화두였던 '신멸(神滅)'과 '신불멸(神不滅)'의 논쟁을 집중 분석했다. 끝으로는 동진남북조(東晉南北朝) 시기에 유행하였던 형신사상(形神思想)의 의의와 그것이 중국철학사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영향에 대하여 분석하고 조명했다.

조선시대 부권(婦權)의 존재 양상 연구 (The Modes of Existence for the Housewife's Authority in Joseon Dynasty)

  • 이은봉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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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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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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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주부의 명절증후군'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제사 문화와 시집살이 문화는 어쩌면 오랜 전통이 아닌 최근의 문화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본 연구는 조선시대 부권(婦權)의 상실이 조선 후기 성행한 '양반-되기' 문화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조선 중기까지 여성 특히 가정 내 부인은 친정에서 가지고 온 재산과 친정과의 유대를 통해 나름의 권위를 가지고 주체적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부권(婦權)은 임병양란 이후 영세해진 가문을 지키기 위해 딸을 상속에서 배제하면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전 인구의 양반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양란을 기점으로 종법제에 입각한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전 인구로 확산될 수는 없었다.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전 인구의 보편적 윤리가 된 것은 양란 이후 지속적 사회 변화 속에서 양반의 수가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자부터 평민까지 모든 사람이 종법제를 지켜야 한다는 정주학의 예론은 모든 집안에 '사당'을 두어 조상의 제사를 모시라고 하는 "주자가례"를 통해 실현되었다. 경제력을 상실한 양반이 자신을 양반으로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준엄한 의례밖에 없었으며, 양인에서 양반이 된 사람들 또한 양인과의 구별을 위해 '형식적 예'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19세기 조선의 '양반-되기' 문화는 성리학적 가부장제에 의한 예법을 공고히 했다. 이 결과 여성은 오로지 시집을 위해 종사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이렇게 하는 것이 남편과 아들의 가문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해 스스로를 옥죄기도 했다.

『대학(大學)』해석(解釋)을 통해 본 주자(朱子)의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 (The Study of Zhuzi's Gewuzhizhi Theory)

  • 서근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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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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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9-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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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주자(朱子)는 본래 "예기(禮記)"의 43번째 편이었던 "대학(大學)" 독립시켜 "대학장구(大學章句)" 재편집하였고, 이 과정에서 134자(字)를 보충하였다. 보충한 134자(字)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 관한 것으로 주자(朱子)의 이러한 해석(解釋)은 후대 학자들이 "대학(大學)"을 해석(解釋)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주자(朱子)는 격물(格物)을 천지(天地)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事物)들의 이(理)를 궁구(窮究)하는 것으로 해석(解釋)하였다. 격물(格物)이 사물(事物)들의 이(理)를 궁구(窮究)한다는 의미라면 궁리(窮理)라는 표현이 보다 적합하다. 그러나, 궁리(窮理)라고 하지 않고 격물(格物)이라고 한 것은 사물(事物)의 실체(實體)를 얻기 위해서라고 주자(朱子)는 주장한다. 이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허학(虛學)이 아닌 실학(實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치지(致知)는 격물(格物)의 과정을 통해 나의 앎이 지극해지는 단계이다. 즉, 치지(致知)는 격물(格物)을 통해 얻은 지식들을 종합하여 진지(眞知)를 구하는 단계이다. 이 진지(眞知)는 사의(私意)가 개입할 수 없으므로 진지(眞知)는 보편적인 앎과 같은 것이 된다.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해 양적으로 축적된 것은 활연관통(豁然貫通)을 통해 질적인 변화를 하게 된다. 격물치지(格物致知)가 하학공부(下學工夫)라면 활연관통(豁然貫通)은 상달공부(上達工夫)에 해당되는 것이다. 활연관통(豁然貫通)은 나의 이(理)가 보편적인 이(理)와 하나가 되는 단계로서 내 마음 속의 준칙(準則)이 보편성을 갖게 되는 단계이다. 즉, 내 마음 속의 준칙(準則)과 보편적인 준칙(準則)이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하는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최종 목표는 지선(至善)에 도달하는 것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지선(至善)을 지향하고 있다면 활연관통(豁然貫通)을 통해 얻은 내 마음 속의 보편적 준칙(準則) 또한 지선(至善)이 그 기준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주자(朱子)의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인식론(認識論)의 측면과 윤리적(倫理的) 측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면화된 수치심과 자기통제력이 뇌졸중 환자의 대인관계에 미치는 영향 (The Effect of Internalized Shame and Self-Control on Interpersonal Relationships in Stroke Patients)

  • 황정하;임재호
    • 대한지역사회작업치료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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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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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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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목적 : 본 연구의 목적은 뇌졸중 환자를 대상으로 내적 수치심과 자기통제력이 대인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조사하고, 그 관련성을 분석함으로써 임상에 필요한 근거와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연구방법 : 본 연구를 위해 전라남도 및 충청남도 지역 소재에 작업치료사가 근무하고 있는 기관에서 작업치료 서비스를 받고 있는 뇌졸중 환자 150명을 대상으로 2019년 3월 1일부터 2019년 4월 30일까지 일반적 특성, 대인관계(RCS), 자기통제력(SCS), 내면화된 수치심 척도(ISS) 설문지를 사용하여 설문을 실시하였다. 연구 대상자의 일반적인 특성은 빈도분석과 기술통계를 실시하였고, 일반적 특성에 따른 대인관계를 비교하기 위해 독립표본 t검정(t-test)과 일원배치분산분석(ANOVA)을 사용하였다. 내면화된 수치심과 자기통제력 그리고 대인관계의 관련성은 피어슨 상관계수로 분석하였고, 뇌졸중 환자의 대인관계에 미치는 영향요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다중 회귀분석을 실시하였다. 결과 : 일반적 특성에 따른 대인관계를 비교한 결과, 연령과 교육수준 항목에서 유의한 차이가 나타났다. 내면화된 수치심과 대인관계, 자기통제력과 내면화된 수치심은 유의한 역상관 관계를 나타내었고, 자기통제력과 대인관계는 정적인 상관관계가 나타났지만, 대인관계 하위요인인 개방성, 민감성, 친밀감, 의사소통 항목과 자기통제력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 또한, 내면화된 수치심의 하위 영역인 부적절함(β =-0.32)과 모험 추구(β =-0.23) 항목은 역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고, 자기통제력의 하위 영역인 신체활동(β =-0.22)과 자기중심(β =0.24) 항목은 정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론 : 따라서 뇌졸중 환자의 대인관계 형성을 위해서는 다양한 심리적인 요인이 적용된 재활치료 프로그램이 운영될 수 있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우울 증상으로 의뢰된 입원환자의 임상적 특징 및 자문 의뢰 형태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and Consultation Request Type of Inpatients Referred for Depressive Symptoms)

  • 윤나라;유승호;하지현;전홍준;박두흠
    • 정신신체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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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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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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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연구목적 본 연구는 우울 증상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 자문 의뢰된 환자들의 임상적 특징과 자문 의뢰 형태, 재협진 여부에 따른 차이를 알아봄으로써, 종합병원 입원환자의 우울장애의 특징을 조사하고자 하였다. 방 법 2005년 8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정신건강의학과에 자문 의뢰된 입원환자를 대상으로 하였고, 이중 우울증상으로 의뢰된 환자들의 의무기록을 후향적으로 분석하였다. 결 과 우울 증상으로 의뢰된 환자는 총 647명으로 전체 협진 중 13.82%에 해당하였다. 우울 증상으로 의뢰된 환자의 평균 나이는 58.6세로 전체 정신건강의학과에 협진 의뢰된 환자군의 평균 56.4세보다 높았으며, 3형 의뢰 형태(입원 이후 새롭게 발생한 정신건강의학과적 증상을 위한 협진 의뢰)가 가장 많았다. 이중 재협진 의뢰된 환자는 275명으로 전체의 42.5%였으며, 재협진군과 비재협진군을 비교해 보았을 때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자문 의뢰 형태에서 두 군의 산술적 차이가 있었는데, 재협진군은 3형(보수형)-2형(병렬형)-1형(상호보완형)의 빈도순을 보였고 반면, 비 재협진군은 2형(병렬형)-3형(보수형)-1형(상호보완형)의 빈도순을 보였다. 결 론 종합병원에서 우울 증상으로 의뢰된 환자군은 전체 정신건강의학과 협진 의뢰 환자 군에 비해 고령의 비율이 높았고, 그중 재협진군은 비재협진군에 비해 입원 이후 새롭게 증상이 발생하여 협진 의뢰된 비율이 높았다. 따라서 각 과 주치의들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입원환자들의 우울 증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치료계획을 논의함으로써 의료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고 위험 요인을 파악하여 필요하면 조기 개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