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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부여고적의 재해석과 고적관광의 성격 (A Study on Characteristics of Reinterpretation and Tourism on Historic Sites of Buyeo Region during Japanese Colonial Era)

  • 김종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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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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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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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일제는 일선동조론에 바탕을 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우리의 역사를 식민사관에 맞춰 재구성하는 한편 고고학적 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이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경주, 부여 등 고도(古都)에 대한 고적조사 및 고적의 재해석 그리고 고적관광은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특히, 부여지역의 경우 고적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백제 사비기와 일본 고대 아스카(飛鳥)시기와의 밀접한 관련과 친연성을 강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고적을 식민지 조선인에게 보여주는 고적관광을 실시하였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부여지역에 대한 고적조사와 고적의 재해석 및 고적관광이 어떤 맥락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첫째, 부여지역의 고적조사는 1909년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처음 시도되어 일제강점기 동안 고분과 사지(寺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세키노는 부여의 고적조사 결과를 토대로 고대 중국(梁) 한국(百濟) 일본(倭)간의 문화적 관계와 영향을 설정하였고 사비시기의 백제문화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다시 일본에 전달하여 아스카 문화를 형성하게 했다는 문화 전달 자설을 역설하였다. 이는 우리문화의 고유성을 부인하고 백제문화를 중국문화의 아류 또는 단순 전파자 역할로 왜곡 해석한 것으로 이러한 세키노의 관점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둘째, 1915년에 발족한 부여고적보존회는 부여고적에 대한 탈맥락적 해석을 통하여 고대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를 동화론적 관점에서 재정립하였다. 특히 낙화암, 고란사, 청마산성 등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일본과의 친연성을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동화정책을 역사적 사실관계로 확정지으려고 하였다. 셋째, 부여지역의 고적관광은 부여고적보존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주된 관광대상과 코스는 고적의 재해석을 통해 재구성된 고적들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부여를 일본 고대문화의 원형 또는 본향으로 이념화된 공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부여의 고적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고적관광은 서로 밀접한 관련하에서 추진되었고 그 추진 주체가 조선총독부와 친일 관변단체였다는 점에서 타자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여진' 것이었으며 그것은 식민지 표상공간으로서 부여의 재발견이었다.

조선 전기 도가사상 연구 - 「심기리편(心氣理篇)」과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도가'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aoism Theory in the Former Half of Joseon Dynasty)

  • 김윤경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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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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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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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조선 도가사상 연구는 지금까지 조선후기를 중심으로 다루어져 왔다. 조선시대 5권의 "노자" 주석서와 2권의 "장자" 주석서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조선전기의 도가사상 전개를 고찰하기 위한 1차 작업으로 개국초기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정도전의 "심기리편"과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실록"에서 임란 이전까지 200여년 간의 사료 안에서 도가 사상에 대한 언급을 발췌하고 이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도출하였다. 정도전과 권근은 도가를 '도덕이 없는 양생술의 추구'로 비판하였다. 도교와 불교의 비판 위에서 성리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 도가는 세 가지 단계로 변용(變容)된다. 첫째는 '노자'를 장생의 사술, 신선의 방술, 도교의 최고 신으로 환치시켜 이단시하고 배척하는 단계이다. 둘째는 1차적인 배척의 논의에서 벗어나 도가사상의 핵심으로서의 "노자"와 '신선술' 및 기복신앙의 대상이 되는 '도교 신'인 '노자'와 분리해서 보려는 단계이다. 셋째 3차 논의는 "노자"의 정치술과 처세술에 대한 존숭으로 드러난다. 즉 조선 전기 도가 사상은 건국초기에서 15~16세기에 이르기까지 초기의 강력한 벽도불에서 벗어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전개된다. 이러한 점은 조선 전기의 도가를 단순히 성리학의 도통관에 따른 이단논리로 해석할 수 없는 지점이다. 건국 초기의 벽이단론에서 도가에 대한 온정적 태도를 취하게 되고, 유학과 사상적으로 융합되는 처세술과 정치술을 수용하는 변화를 보인다. 즉 '노자(老子)'는 비도덕적인 장생불사(長生不死)의 탐욕을 가진 이단(異端)에서 유교국가의 처세술과 정치술로 수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용은 조선 후기로 가면 도가서(道家書)에 대한 적극적 해석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유영국(劉永國)의 초기 구성주의: <랩소디>(1937)에 나타난 유토피아니즘 (Yoo Young-kuk's Early Constructivism: Utopianism in (1937))

  • 유영아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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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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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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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is study is about Yoo Young-kuk's early works which show constructivism, especially focus on his debut painting, for the 7th Dokuritsu Bijutsu Kyokai(獨立美術協會, the Independent Fine Arts Association) in Tokyo in 1937. The work was painted 2 years after he had started his study in Japan in 1935. It was the first painting that applied Constructivism. played an important role for Constructivism to be a leading art in his abstraction. After this picture, Yoo was soon devoted to the principles of Constructivism-- Faktura(material), Tektonika (tectonics), Tekhnika(technique), space, construction-- in his painterly reliefs. This article examined why Yoo concentrated on Constructivism for , what the characteristics were, and what influences were on other works from 1935 to 1949. In addition, I investigated in which period was painted and how Constructivism was spread in 1930s and early 1940s in chapter 2. I scrutinized Rhapsody in chapter 3. When Yoo created Japan was under the Fifteen Years War(1931-1945), and a major discourse was the Japanese Spirit at that time. It was connected with construction of an ideal nation which the Japanese ultra-national fascism pursued. This ideological pursuit was intended to unite the Japanese people for total war system and to restore a national dignity which had been fallen down due to Manchurian Incident(1931). Thus, on the hand, Kokusai Bunka Shinkokai(國際文化振興, The Society for International Cultural Relations) and the Nippon Kosaku Bunka Renmei(日本工作文化連盟, Japanese Werkbund) were supported financially by the Japanese government. On the other hand, the government enacted regulations to opposing parties which would distract Japanese people's unification. As for the Japanese art world, the merge of art groups was carried out through remodeling of Teikoku Bijutsuin(帝國美術院, The Imperial Fine Arts Academy) in 1935. This brought out continuous dispute and disorder. Young artists who felt difficulty of entering an entry of Imperial Fine Arts Exhibition repeatedly grouped and disbanded for small art groups to build their standing, which they pursued Surrealism and Abstract art. Among them Constructivism was considered as the latest trend and was popular in craft, design, architecture as well as fine arts. In the year before he painted , Avant-garde theatres including Constructivism theatre were introduced in a feature article of September, 1936 in Atelier, which was dealing with mainly avant-garde arts. Books related with Constructivism were translated into Japanese, and Gestaltung Education had become active since the publication of A Compendium of Gestaltung Education("構成敎育大系"(1934)), Salvador Dali(1904-1989) was also introduced, so Surrealism was drawn more attention by young artists. reflected popular trends. Yoo analyzed the Japanese avant-gardists' archaic taste in the Independent Art Association that he submitted his painting to. And then he entitled 'Rhapsody' which derives from Ancient Greek's epic poetry and deliberately set up images in a scene. In chapter 3, I examined a theme which was planned carefully by sorting favorite images from the Japanese Surrealism. was a result that Yoo Young-kuk observed objectively the phenomenon that young artists dreamt of Utopia or longed for Nostalgia passively and lethargically under wars. And then he otherized himself from that circumstance. First of all, for he used the typical icons of Japanese Surrealism such as the horizon, flowing clouds, and vast plain that were considered stereotypes of Arcadia. He, however distinguished himself form those Japanese Surrealists. He made his own vision about Utopia by referring Lyubov Popova(1889-1924)'s stage design. His objective point of view was expressed by positive and dynamic images of structure and human's actions. Constructivism which was attempted in had an effect on other early constructive works, and the principles of Constructivism were sought hard in reliefs, paintings, and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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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화, 그 기로에 서서 - NEA(국립예술진흥기금)를 둘러싼 논쟁 중심으로 (American Culture at the Crossroad : Debates over NEA(National Endowments for the Arts))

  • 김진아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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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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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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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문화 전쟁(Culture Wars)'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미국에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사이에 벌어진 문화적 논쟁을 일컫는다. 이 용어는 제임스 헌터(James Hunter)의 책 "문화 전쟁: 미국을 정의하려는 노력(Culture Wars: The Struggle to Define America)"의 출간으로 대중화되었고,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패트릭 부캐넌(Patrick Buchanan)에 의해 급부상하게 된다. 그는 "이 나라에는 지금 종교 전쟁, 즉 냉전만큼 중요한 '문화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이것은 미국의 영혼을 위한 전쟁이다." 라고 부르짖으며 급변하는 문화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 미국적인 전통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 문화 전쟁은 여러 다양한 논쟁을 함의하고 있었는데, 교목제도의 폐지, 교육기관에서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커리큘럼 도입, 동성애자의 군복무, 낙태, 총기 소지 등의 허용 문제로 당시 미국의 교육계, 문화계뿐만 아니라 정치계, 입법부에서도 첨예한 대립 구도를 형성하였다. 미술계에서 가장 치열했던 문화 전쟁은 안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의 작품전과 ${\ll}$로버트 메플소프: 완벽한 순간(Robert Mapplethorpe: The Perfect Moment)전${\gg}$이 공공기금인 국립예술진흥기금(National Endowments for the Arts, NEA)의 지원을 받아 개최되는 것이 타당한 것이냐에 대한 논쟁에서 표출되었다. 이 두 전시를 기점으로 그 뒤로도 여러 미술 전시회와 음악회, 연극 등을 둘러싼 NEA 기금 지원과 관련한 분쟁은 한동안 계속된다. 이 글은 이러한 미술계 문화 전쟁의 발전 과정과 몇몇 논점에 초점을 맞추되, 세라노나 메플소프의 작품 자체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글이 아님을 밝혀 둔다. 본 연구는 분쟁의 전개에 대한 상세한 기술적, 연대기적 조사보다는 그 발단과 전개 과정에서 몇 가지 핵심적인 사항들을 기술하고, 이 사항들이 암시하는 정치적, 미학적, 미술사적 시각의 충돌에 대해 지적하는 글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시 이러한 논쟁이 미국 미술계에 의미하던 것, 미국 문화 전체에 의미하던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비평적 질문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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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부터 1950년대까지 한국에서 활동한 외국인이 본 한국미술 (Korean Art from the view of foreigners in Korea from the period of independence to 1950s)

  • 조은정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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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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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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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Foreigners who arrived in Korea after the age of enlightenment were Japanese, Chinese and 'Westerners' who were Europeans and Americans. The westerners were diplomats who visited Korea for colonization or for increasing their economical profits by trading after the spread of imperialism, and tourists curious of back countries, artists, explores and missionaries to perform their roles for their religious beliefs. They contacted with Korean cultural and educational people as missionaries and instructors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In 1945, the allied forces occupied Korea under the name of takeover of Japanese colony after Japan's surrender and the relation between foreigners and Korean cultured men enter upon a new phase. For 3 years, American soldiers enforced lots of systems in Korea and many pro-American people were educated. This relationship lasted even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of Korean Republic and especially, diplomats called as pro-Korean group came again after Korean War. Among them, there were lots of foreigners interested in cultures and arts. In particular, government officials under American Forces who were influential on political circles or diplomats widened their insights toward Korean cultural assets and collected them a lot. Those who were in Korea from the period of independence to 1950s wrote their impressions about Korean cultural assets on newspapers or journals after visiting contemporary Korean exhibitions. Among them, A. J. McTaggart, Richard Hertz and the Hendersons were dominant. They thought the artists had great interests in compromising and uniting the Orient and the West based on their knowledge of Korean cultural assets and they advised. However, it was different from Korean artist's point of view that the foreigners thought Korean art adhered oriental features and contained western contents. From foreigners' point of view, it is hard to understand the attitude Korean artists chose to keep their self-respect through experiencing the Korean war. It is difficult to distinguish their thought about Korean art based on their exotic taste from the Korean artists' local and peninsular features under Japanese imperialism. We can see their thought about Korean art and their viewpoint toward the third world, after staying in Korea for a short period and being a member of the first world. The basic thing was that they could see the potentialities through the worldwide, beautiful Korean cultural assets and they thought it was important to start with traditions. It is an evidence showing Korean artists' pride in regard to the art culture through experiencing the infringement of their country. By writing about illuminating Korean art from the third party's view, foreigners represented their thoughts through it that their economical, military superiority goes with their cultural superiority. The Korean artist's thought of emphasizing Korean history and traditions, reexamining and using it as an original creation may have been inspired by westerners' writings. 'The establishment of national art' that Korean artists gave emphasis then, didn't only affect one of the reactions toward external impact, 'the adhesion of tradition'. In the process of introducing Korean contemporary art and national treasure in America, different view caused by role differences-foreigner as selector and Korean as assistant-showed the fact evidently that the standard of beauty differed between them. By emphasizing that the basis to classify Korean cultural assets is different from the neighborhood China and Japan, they tried to reflect their understanding that the feature of Korean art is on speciality other than universality. And this make us understand that even when Korean artists profess modernism, they stress that the roots are on Korean and oriental tradition. It was obviously a different thought from foreigners' view on Korean art that Korean artists' conception of modernism and traditional roots are inherent in Korean history. In 1950s, after the independence, Korea had different ideas from foreigners that abstract was to be learned from the west. Korea was enduring tough times with their artists' self-respect which made them think that they can learn the method, but the spirit of abstract is in the ori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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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원도심 소리풍경에 관한 의미론적 연구 - 대흥동 성당과 은행동 성심당 종소리를 중심으로 - (A Semantic Study on the Soundscape of the Historic Downtown of Daejeon - Focusing on the Bells of Daeheung-dong Cathedral and Enhang-dong Sungsimdang -)

  • 김명신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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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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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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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의 목적은 대전 원도심의 랜드마크이자 명소인 중구 대흥동 성당과 은행동 성심당 두 장소의 종소리가 지닌 사운드스케이프의 성격과 의미를 조명하는 것이다. 연구는 현장 답사 및 녹취, 관련 자료와 사운드스케이프 이론 등의 문헌연구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전시는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철도 대전역과 함께 생성된 도시로,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대전역 인근에 위치한 중구 대흥동과 은행동 일대는 크게 발달하며 원도심을 형성하였다. 90년대에 서구로 주요 행정기관이 대거 이전하면서 대전 원도심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세종시 개발로 쇠락은 가속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대흥동 성당과 한국전쟁 당시 한 피난민에 의해 설립된 성심당은 원주민들이 떠나간 대전 원도심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대흥동 성당은 일제 강점기에 설립되어 2019년 들어 100년의 역사를 지니게 된 지역 랜드마크로, 일제 강점기에 탄생한 대전시와 역사를 같이 하는 역사문화자산이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탄생한 성심당 또한 설립 60년의 역사를 지닌 역사문화자산이자 대전 명소 1위로 선정된 지역 랜드마크이다. 인근 주택가에까지 들려오는 대흥동 성당의 종소리에서 출발한 이 탐구는, 대로 건너에 위치한 은행동 성심당의 종소리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본 고는 대흥동 성당과 은행동 성심당의 종소리가 시그널 사운드(signal sound)를 넘어 사운드마크(soundmark)의 성격을 지님을 머레이의 사운드스케이프 소리 범주를 통해 파악하였다. 나아가 비교적 최근의 EU 사운드스케이프 정의에 따라 두 종소리의 의미 분석을 시도했다. 두 종소리는 표층적 차원에서는 시그널사운드이지만 심층적 차원에서는 대전 원도심의 사운드마크이다. 외형적으로는 규모나 스케일, 빈도, 유명도에서 차이가 있으나, 두 종소리는 특별한 인연의 역사성과 장소성, 로컬리티와 선한 영향력 등에서 의미를 공유한다. 본 연구의 시사점은 대전 중구 원도심 도시 재생 혹은 도시 개발에서 두 장소가 시각적 랜드마크 뿐만 아니라 사운드마크로서도 지역 역사문화자산임을 밝힌 데 있다.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병서(兵書) 편찬(編纂)과 병학(兵學) 사상(思想) (Compilation of Books on Military Arts and Science and Ideology of Military Scien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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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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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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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이 글은 조선 후기에 편찬된 대표적 병서와 지식인들의 논의를 중심으로 병학사상을 살펴본 것이다. 조선은 개국 이래 200여년의 태평성대를 구가하다가 양대 전란(戰亂)을 거치면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선 병학의 한계를 각성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에 반영된 왜적(倭賊)에 대한 대비책과 전란의 경험은 후기 병학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초의 병서에는 이에 대한 대비책이 별도로 제시된 일이 없었다. 한편 선초의 진법(陣法) 논쟁과 마찬가지로 후기 병학의 정립과정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임란 직후 명(明)나라 군대를 통해서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연병실기(練兵實紀)"가 유입되었는데, 처음에는 원본 내지는 초록본의 형태로 군사훈련에 활용되다가 후에 "병학지남(兵學指南")"과 "연병지남(練兵指南)"으로서 출간되었다. 이 책들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왜구와 북방 오랑캐를 대응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선초 이래의 오위진법과 상충되기도 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형이 차이가 있으므로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영조(英朝) 정조(正祖) 때에는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병학통(兵學通)",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 병서를 출간함으로써 군사훈련의 통일성을 기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당시 논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해명하였으며, 이로써 선조 때부터 200여년 지속된 논쟁은 종료되었다. 조선 전기와 후기의 병학적 특징을 개괄하자면, 선초에는 "무경칠서(武經七書)"를 바탕으로 문신(文臣)의 주도하에 병학의 윤리화(倫理化)가 진행되었다면, 후기에는 "기효신서"가 계기가 되고 상대적으로 다수의 武臣이 논쟁에 참여하면서 병학의 실학화(實學化)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조선 병학의 정립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세조(世祖)와 정조(正祖)인데, 양자는 모두 왕위계승 과정이 순조롭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정치 행위의 연속이다"라는 명제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로버트 스미슨의 "개간 프로젝트"에 나타나는 생태학적 세계관 (The Ecological View of Robert Smithson's Reclamation Project)

  • 이재은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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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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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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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This is a study on the ecological view of Robert Smithson's reclamation projects. Smithson was a pioneer of Earth art in the late 1960's. Robert Smithson believed that he could transform industrial wastelands, such as an abandoned oil rig and a no longer used quarry, into "Earth Art." In the early seventies, he conceived of land reclamation as a new art form and called this art "Reclamation Projects." His attention regarding industrial ruin started from the American political and social situations in the 1960's. In the late 1960's, American society was in chaos from the right of movement of African Americans, the women's rights movement and from the strike for renunciation of the Vietnam War. The intellectual class seemed to believe that it was the destiny of a closed system's society to run in the direction of entropy. Smithson, who was skeptical about the system of American society, also thought that entropy was the proper diagnosis to describe America's situation in the 1960's. The 1960's civic movements like the civil rights movement and antiwar movements expanded into the environmental movements based on ecological views of the 1970's. The government had also started to worry about environmental pollution. Thus, the reclamation act was also established in 1972. Smithson believed that the relation between art and social background are closely related and affect each other. He was concerned with how art can join society, and the result was reclamation projects. Such reclamation projects lie on man-made wastelands, like abandoned oil rigs and no longer used quarries, which was an allegory of entropy. He also thought that Frederick Law Olmsted was a pioneer of earth art. The aesthetic category of Olmsted's view of landscape is to be based on the picturesque of Uvedale Price and William Gilpin. So Smithson, who considered Olmsted as his touchstone, also accepted the picturesque. Such reclamation projects aim to change with nature by adapting the creative power of artists to the ruin which has the highest level of entropy in industrial society. Smithson wanted this to become the bridge between man and nature. His reclamation project's aim, which shows the system interacting between man and nature as a network, is not different from the ecological view of the 1970's environmental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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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화의 역사왜곡에 대한 고찰 (Consideration on a Historical Distortion of Japanese Cartoon : Focusing on works of the Rightists cartoonist Kobayashi Yoshinori and Yamano Syarin)

  • 고경일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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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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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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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독일이 의장국으로 있는 유럽연합(EU)에서는 회원국 전체가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것을 범죄행위로 규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유럽의 11개 나라에서 역사왜곡을 범죄로 보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국민통합이라는 이름아래 교과서문제나 헌법개정, 야스쿠니 참배 등을 주장하며 국가주의적인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역사교과서의 개악을 주도하는 우익들의 논리는 과거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의 피해자로서의 일본을 강조하여 오히려 피해자라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다. 특히, 일반대중들의 깊은 관심을 끌어내고 있는 만화분야에서는 고바야시 요시노리와 야마노 샤린의 만화작품을 통해 우익들의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만화 일본사회의 역사왜곡의 실태'와 '일본우익의 논리와 만화의 상호작용'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일본 만화의 현황에 대해 역사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특히 일본 우경화의 실태와 배경 그리고 왜 국가주의와 보수주의가 고조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일본 우익들의 정신적 뿌리를 이루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와 우익단체의 주도로 집필된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 객관적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역사왜곡의 대표적 작품인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전쟁론"과 야마노 샤린의 "혐한론"을 집중 검토하여 문제의 실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허위 과장된 문제를 정면으로 제시하여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을 역사의 실증으로 분석함으로써 일부 만화가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 역사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대응 논리로 만화가들의 극복과제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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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北韓地域) 전통주거(傳統住居)에 관한 조사연구(調査硏究)(1) - 북한출신주민들의 지식체계분석을 통하여 - (A Study on the Traditional Houses of North Korea(I) - Based on the Memories of Immigrants from North Korea -)

  • 강영환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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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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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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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Architectural researches on the traditional houses of Korea have been studied mainly based on the data collected in the field survey. From explosively incresed real mesurements and drawings in the field, plenty of data have been collected. Those have been the basic data for verifing and developing the theories on the traditional house. But after Korean war the researchers in South-Korea were not able to approach to the field in North Korea, so the new data of North Korea were not added any more. The poverty of real data have caused regional unbalance in the researches. This paper aims at collecting new data of traditional house in North Korea. But still being prohibited for the researchers of South Korea to approach to the field, I had to depend on the memories and experiences of the immigrants from North Korea who are now living in Kyon-Nam and Pusan Province. Through the questionnaire and drawings, they described vivid memory of their old houses. I was able to collect the data of 71 cases, which are significant and valuable as much as those of the real field are. The data include the address and site condition, family structure, economic condition, construction period of each house, The drawings by themselves show the building forms and plans, the plans of each building, and the included spaces. Although the quantity of those data is not enough for statistical analysis, it shows general tendency for analizing regional charateristics, the differnces among economical classes, and the periodical change. It opens the way for verfying the existing theory. Analizing the data, I have some conclusions as followings: a. Most of researchers have classified the dominant housing type of Hamkyong-Do as 'the double fold' type. In this study, all cases of Hamkyongbuk-do also show 'the double fold plan with Chongju-kan'. But in Hamkyongnam-do some cases show 'the double fold plan without Chongju-kan, or projecting the stable into the yard, which seem to be different type from 'the double fold plan with Chongju-kan' b. Existing theories classified the dominant housing type of Pyongahn-do as 'two buildings with pararell arrangement'. This classification is verified with the plentiful cases in this study. Futhermore, I found new tendency, that is, getting higher econnomic condition, they construct annex buildings between the main buildings. Finally their houses show 'scattered ㅁ shape'. The houses included in this two types has narrow and closed inner yard, which is different from the houses of the same shape in the south region of Korea. c. Existing theories classified the dominant housing type of Hwanghae-do as 'ㅁ sape with Daechong' type. I found many cases of 'ㅁ shape', but only two cases show 'Daechong'. 'The doble fold' type was also founded. Unfortunately very few cases were sent from Hwanghae-do, it is not enough for finding general tend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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