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thesis is concerned with the study of the court attire the typical attire of the ju-dicial world in a point of time that more than 10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introduction of the modern judical system. In recognition of the fact that compiled data of the official uni-form or attire in Korea are insufficient this study placed its signification on the provision of information with focus on attire. As a result of studying court attire in Korea the conclusion was made as follows: Firstly Official attires in Yi Dynasty were divided by wearing embroidered insignia on the breast and the back of an official robe ac-cordint to court rank as well as by wearing Sa-mo in wadded clothes of Dan-ryeong and attaching all sorts of appurtenances including bands and shoes The Minister of Justice was equipped with Ho-pyo Dae-sa-heon equipped with Hae-chi the mayor of Seoul equipped with Un-an In the era of the Kng Young-jo the minister of Justice had no change in its of-ficial robe but the mayer(Pan-yun) of Seoul (Han-sung-bu) had Un-an(wild geese in clouds) changed into Un-hak In the King Ko-jog era the minister of Justice had Ho-pyo changed into Ssang-ho and the mayor of Seoul had Un-hak changed into Ssng-hak on embroideved insignia on the breast and back of an official robe. Laws and regulations concerning court attire began with the In-judgement Full-dress Uni-form Requlation for official-level Clerical Staff below the ordinary staff the Issue No. 14 of the Royal Ordinance in 1906 provided as $\ulcorner$the matter cincerning the Dress Regulation of the Tribunal staff of the Cho-sun Government-General$\lrcorner$the Issue No. 222 of the Royal Ordi-nance in 1911 and changed into$\ulcorner$the Regu-lation on the Dress of Judge Prosecutor At-torney and Law Count Clerk$\lrcorner$the Issue No. 12 of the Supreme Court Rule in 1953 affter the establishment of Korean Government since emancipation from the Japanese rule and into $\ulcorner$the Regulation concerning the Court Attire of Judge and law Court Clerical Staff$\lrcorner$the Issue No. 516 of the Supreme Court Rule in 1966. The judicial system in Korea is the system introduced from the foreign country rather than autogenously developed. And it came to pass through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t the beginning that it took root in Korea n was not stabilized in harmony with our native tradition. Accordingly the attare regulation in the judicial system took root in our society by accepting the Japanese attire regulation as it was and judical officials have come to wear the count attire similar to that of the Japanese imperialist era due to its influence though Korean independent goverment was established together with liberation form the Japanese rule. The more regrettable thing is that the current court attire has maintained the form greatly influenced by the U. S. court attire. Fortunately as the judicial circles have recently raised their voices for change in the court attire it has been told that the forma-tion of a meeting for a new court attire has been under way. The birth of the court attire into Which our tradition is sublimated is expected. This study end up with thinking that the must Korean thing is the most global thing in this era that people in the world are clamoring for globalization.
본고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 지배와 '전후보상'처리와 관련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 식민지, GHQ와 점령지 일본에서 이루어진 결재 과정과 이 과정에서 생산된 기록 원본의 출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10년부터 1952년까지를 대상으로 역사학과 기록학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식민지 지배와 그 처리문제를 시공간적으로 연속선상에서 파악함으로써 제국과 식민지 점령지 기록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강점지배에 대한 기록과 1945년부터 1952년까지 GHQ 점령기의 '전후보상'처리에 대한 결재원본은 한국, 일본, 미국 등에 분산 보존되어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일본제국정부와 조선총독부, GHQ와 일본종속정부의 결재구조에 있다. 즉, 중요정책, 인사, 예산에 대한 결재는 제국 본국에서 처리되고, 그 시행에 관한 결재는 식민지 및 종속국에서 처리되는, 상명하달식 이중결재구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결재 원본도 일국에 완결적으로 보존되는 게 아니라 제국과 식민지 종속국가에 각각 분산 보존되어 상호 보완적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최근 한일간 외교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 미불금 문제는 GHQ의 정책결정과 일본정부의 정령 시행으로 공탁처리되어, '채무'에서 '경제협력'으로 둔갑해 버렸다. GHQ-일본의 상명하달식 결재시스템에 의해, '전후보상'을 위한 기본적인 원본기록 역시 미국과 일본에 각각 분산 보존 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1910년부터 1952년까지, 일제에 의한 식민지지배와 '전후보상'을 둘러싼 문제는 의사결정 프로세스와 기록의 출처 분석 등을 통해 시간적 공간적 측면에서 구조적 종합적으로 재인식될 필요성이 있다.
During the ancient times, there was no separative judicial system and administrative , legislative and judiciary functions were ultimately concentrated in the all-powerful monarch. And the three states developed state organization , adopting hieratical structures and placing at the pinnacle . State Codes were promulgated to initiate a legal system to rule the people, these codes instituted under influence of China codes. The people tradition sees crime control as the preservation of the authority of hereditary rulers. In the period of the Koryeo dynasty, government accepted a serious of detailed penal code from Tang dynasty . Legal response to crime stressed preservation of the dynasty rather than making citizen behave according to certain rules. In the period of Early Joseon , the compilation of Grand Code for state administration was initiated, the Kyeongkuk Taejeon ,became comer stone of the dynastic administration and provided the monarchial system with a sort of constitutional law in written form. This national code was in portant means of criminal policy at that time, Late Joseon , the impact of Western culture entering through China gave further impetus to pragmatic studies which called for socio-economic reforms and readjustment. Approach to criminal justice policy emphasized more equitable operation of the criminal justice system ,rehabilitation and crime control. Korea-Japanese Treaty concluded on 22 August ,1910 and proclaim a week later ,Japan gave the coup de grace to the Korea Empire and changed the office of the Resident - General into the Government - General . Thus korean criminal policy were lost during a dark ages ,which lasted for 36 years after fall of Joseon Dynasty (the colnial period,1910${\sim}$1945). After 1945 Korea's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 rule, the occupation of devided Korea by the United States and Soviet Union frustrated the efforts of Koreans to establish an independent government, and the transplantation of two conflicting political ideologies to south and the north of the 38th parallel further intensified the national split. U.S. military government office occupied the south of the 38 the parallel and placed emphasis on democracy of criminal policy. ln 1948, the U.S. military government handed over to the ROK government its administrative authority.
본 논문에서는 임적조사사업(林籍調査事業)(1910)의 수립 배경, 실시 과정, 결과 및 평가와 이 사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국임야정리(韓國林野整理)에 관한 의견서(意見書)"가 일제의 초기 식민지 임정에 끼친 영향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임적조사사업(林籍調査事業)은 일본인 관료 목내중사랑(木內重四郞)과 재등음작(齋藤音作)의 주도하에 조선의 소유별, 임상별 산림분포를 파악하고자 실행되었다. 그러나 경비부족과 짧은 조사기간으로 인해 조사의 정확도는 매우 낮았다. 특히 북부지방의 많은 촌락공유림(村落共有林)과 특수지역림(特殊地役林)이 임적조사사업(林籍調査事業)의 간략성(簡略性)과 자의성(恣意性)으로 인해 "관리기관이 없는 국유림"으로 편입되었다. 그럼에도 당시 일제는 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조선의 임야정리에 관한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 정책은 "한국임야정리(韓國林野整理)에 관한 의견서(意見書)"로 종합되었는데, 그 중 임야정리에 관한 제안은 이후 삼림령(森林令)(1911) 및 일련의 임야정리과정을 거치면서 구체적이고 구속력을 더한 식민지 임정으로 현실화되었다. 결론적으로 임적조사사업(林籍調査事業)은 조사의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일제 강점기 초기 식민지 조선의 임정을 수립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자료로서 이용되었고 "한국임야정리(韓國林野整理)에 관한 의견서(意見書)"는 임야정리(林野整理)에 관한 구체적인 방향(方向)과 식민지 임정의 각론(各論)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책제안서(政策提案書)라고 볼 수 있다.
홍삼이 19세기에 청나라로 대량 수출되면서 개성에 대규모로 홍삼 원료삼 재배 단지가 조성되었다. 개성 상인 간 특유의 민간주도형 대부 제도인 시변제(時邊制) 는 인삼 재배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조달할 수 있게 하였다. 대한제국 황실은 1895년에 포삼규칙(包蔘規則)을 공포하였는데 이것이 홍삼 전매제의 효시이다. 1899년 일본인들에 의한 삼포 침탈이 심해지자 황실은 일본인들에 의한 인삼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군대가 경비를 하고, 원료삼 수납대금의 50~90% 정도를 수확 전에 미리 지급하는 국가 주도형 배상금 선교제도(賠償金 先交制度)를 운영하였다. 1895년 종자 가격이 상승하자 일부 상인들이 중국과 일본의 저질 종자를 수입하고 판매하게 되었다. 이에 1920년 공포한 홍삼전매령에서는 정부 허가 없이 외국 종자 수입을 금지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06년~1910년의 인삼경작은 폐농 수준이 되어 1910년도 홍삼 원료 수삼 수납량은 불과 2,771근에 불과하였으나 1915~1919년과 1920~1934년까지 각 기간 중 연평균 수삼 수납량은 각각 약 11만 근, 15만 근 수준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홍삼 원료 수삼 생산량 증가는 1908년부터 실시된 수삼 배상가격 사전 공시, 신규면적 재배 비용 융자, 우수경작인 장려금 지급 등 다양한 삼업 육성정책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궁극적 목표는 한인 삼포주의 육성이 아니라 홍삼 사업의 이익금으로 식민지 경영유지 비용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9월말, 경주 노서리(盧西里)에서 우연히 발견된 고분인 금관총(金冠塚)이 발굴된 지 100년이 되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아시아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발견으로 알려져 있는 금관총의 발굴보고서는 발굴 3년 후인 1924년과 1928년에 조선총독부가 일본어와 영어로 출판한 경주 금관총과 그 유보(慶州金冠塚と其遺寶: A ROYAL TOMB "KINKANTSUKA" or THE GOLD CROWN TOMB at KEISHU, AND ITS TREASURES)라는 책과 도판(圖版)으로 발행된 것이 있으며 이 책들을 2011년에 경주 문화재연구소에서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한 것이 있다. 발굴보고서는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후일 교토제국대학 총장)와 조선총독부 고적 조사 사무촉탁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작성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 보고서보다 훨씬 빠른 시기인 고분 발굴에서부터 약 반년 후인 1922년 7월에 서문이 작성된 조선의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의 5학년에서 교재로 사용된 '고본 고등 조선어 및 한문 독본 제5권(稿本 高等朝鮮語及漢文讀本 卷五)' 교과서를 발견하여 소개한다. 이 교과서에서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는 '경주의 새로운 발굴품(慶州의 新發掘品)'이라는 제목과 우리말로는 조금 어색한 표현이지만 '매우 큰 발견'이라는 뜻으로 '절대의 발견(絶大의 發見)'이라는 부제목을 달아 하나의 단원으로 일본어가 아닌 우리말로 금관총 발굴의 성과와 학술적, 고고학적 발견,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발굴 직후에 작성된 원고이기 때문에 발굴 당시의 고고학 연구자로서 흥분된 느낌과 향후의 연구에 대한 기대를 그대로 읽을 수 있다. 본고에서는 금관총 발굴 후 조선총독부 조사책임자의 흥분된 현장의 목소리를 집필한 지 100년이 되는 2022년에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고분 발견부터 보고서의 작성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의 연표로 정리하여 일련의 흐름을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The goal of this research is to analyze interrelationship for layout of dwelling house and variation of its side plane by introducing concept of space in order to address as to how Korean traditional houses had been formed and varied in the middle of advancing modern city. In addition, this paper also has its meaning in a way that it identified how Korean traditional houses have been changed, and thus make residents more comfortable to live there by reviving their past characteristics, and make users have traditional food culture. Targeted area for this paper is limited to south-eastern area of Daegu such as Namsanjung, Myeongchijung, Sijangjung, Shinjung and Dalsungjng which was group dwelling houses of people of Chosun Dynasty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era ($1910{\sim}1945$). Among those places, the paper has chosen a place where Korea traditional houses were well preserved, variation of road and fields was less 1930s, and residential type is easy to effectively compared. As the result of this research, time when traditional cities were changed into new type of city residential area is believed to be around 1930s, and traditional residential area, through its transitional process, is believed to be changed to modern residential area. It also indicates that change of organizational road and fields directly had influence on change of houses.
경주 남산의 불적에 대한 본격적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불적조사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경주 남산 불적을 심도 있게 고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선행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경주 남산의 불적조사는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한일병합을 전후한 초기 조사는 예비 조사 정도로 간주되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초 조사로 후속 조사의 발판이 되었고, 1910년대에 남산이 불적의 보고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1915년 경주에서 반출되어 경성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된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은 관람객의 눈길을 가장 끄는 미술관 중앙홀에 전시되어 세간에 불적으로서의 경주 남산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약사여래좌상은 남산 불상 중에서 가장 원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공진회에 출품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그 반출은 한일병합을 전후하여 구상된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었다.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중심이 되어 구상된 식민 이데올로기인 '일선동조론'과 '조선정체성론'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해체하고 그 한복판에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석굴암을 안치시킴으로써 일본 제국에 의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시각적으로 선언하려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그 구상이 무산되자 석굴암 본존불 대신에 경성으로 반출된 것이 다름 아닌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이었다. 약사여래좌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11년 세키노 다다시가 실시했으나 그 위치를 세키노에게 알린 것은 모로가 히데오나 고다이라 료조와 같은 경주 거주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 현지인은 총독부로부터 요청을 받아 공진회에 출품할 만한 불상을 찾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약사여래좌상은 총독부와 세키노 다다시, 그리고 경주 거주 일본인들 사이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경성으로 반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주 남산의 불적이 그 신비의 베일을 벗기는 과정이기도 했다. 요컨대 초기 남산 불적조사는 기초 조사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과 1915년 공진회의 성공적 개최라는 데라우치 총독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깊은 관계 속에서 진행되어 순수한 학문적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기 어렵다. 한편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이 좌절되고 경성으로 반출될 가능성이 컸던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이 현지에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에는 경주 조선인의 저항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자세히 논할 수 없었으나 그들을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로 부각시킬 연구가 요구된다.
Modernization drastically changed the cosmetic culture of Korea and Japan. A classic case that shows this is the appearance of the term 'Hyangjang (香粧)'. This paper investigated the background to the formation of the term Hyangjang (香粧), and reviewed the aspects of cosmetic culture that changed with the emergence of Hyangjangpum (香粧品), or cosmetics containing perfume. The investigation revealed that the term Hyangjang (香粧) appeared for the first time in Hirano (1899), a literature published in the Meiji period in Japan, and that the new term Hyangjang (香粧) had been formed against the background of advanced Western synthetic perfume an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contemporary techniques for the manufacture of cosmetics. The term Hyangjang (香粧) and cosmetics containing perfume, or Hyangjangpum (香粧品) were then introduced from Japan to Korea. In Korea, the term 'Hyangjang (香粧)' appeared for the first time in an advertising copy written by Hyeon Hui-un, a pioneer of the Korean modern theater movement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At that time, cosmetic companies in Korea and Japan were releasing cosmetic products that contained perfume that stimulated a women's desire to purchase them by emphasizing 'fragrance' in their advertising. Existing public tendencies to regard a fragrant smell from a made-up face as vulgar were changing and the public perception of fragrance were also changing. The appearance of Hyangjangpum (香粧品) indicates that the existing cosmetic culture revolving around visual sense changed into a complex cosmetic culture involving olfaction. This change in culture is significant in that it heralded the direction of future development towards cosmetic culture that uses increase combinations of different senses including touch, taste, and hearing.
This study considered the change process for Western style shoes in Korea during the time of modernization in the 1920s to 1930s. Western style shoes were one of the items imported by foreigners since the Joseon Dynasty and had a significant impact on Korean dress code. It influence started to spread in the 1900s; however, few high level people wore Western shoes until the 1920s. The trend started to spread through newspaper advertisements and news articles after the mid 1920s. Western shoes such as modern girl and modern boy in the 1930s then entered into Korean culture. Korea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was reorganized on a war footing in the latter half of the 1930s and the main materials for western shoes (cow leather, horse leather and sheepskin) were mobilized as materials for war production; subsequently, new materials using rubber were introduced. The representative material is 'Marine Leather (水産皮革)' and Sharkskin 'Gyoheok (鮫革)' and Whaleskin 'Gyeongpi (鯨皮).' Form is like the material has changed over time. This study also observed the flow of westernized Korean modern shoes as well as analyzed the details of materials and shape of western shoes by period. This represent basic materials to understand the legacy of western shoes in the age; in addition, systemic summary is organized by each kind, shape and materials for each style of western 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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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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