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and China can find the common feature derived from the mutual cultural exchanges, belonging to the same cultural sphere of the East Asia. It also applies to the stone figures of the palace gardens of both countries. In case of Korea in the stone figures of the palace gardens, there are few of them existing in Kyungbok Palace, Changduk Palace, and Changkyung Palace of the Chosun Dynasty, and most of them were washed away, there are hardly any records remaining and transmitted, and there are hardly any materials of drawings and pictures of them. On the contrary, in case of China, although there are those washed away, there are vast numbers of real objects, and records and materials of them. Therefore, for the study on the stone figures of Korea, the method to analogize the research lacking regarding the stone figures of the palace gardens of Korea from those of China after conducting the comparative study between those existing and those of China, may be available. I consider that although the restoration of the palaces of Chosun Dynasty of Korea had been the restoration project oriented toward the buildings until now, it will be the phase where one should have more interest toward the restoration of the palace gardens in the future, and that the restoration of the palace gardens should be made centered on the landscape architectural structures, deviated from the restoration project attaching weight to the restoration of the trees. Above all, I consider that the interest should be turned to the restoration of the stone figures where the view toward the nature of the Orientals are expressed well. For the restoration of the stone figures in the Changduk and Changkyung Palaces, it is considered that the restoration of the rough locations and shapes is possible based on the Dongkwol Drawings being transmitted, and that the research on the shapes, characters, pedestals, characteristics, etc. of the specific stone figures is possible as far as it is based on the study of the stone figures of the palace gardens of China.
우리가 '장승'이라고 부르는 조형물들은 그 기원이나 역사, 또는 기능이 서로 달라 엄밀한 구별이 필요하다. 이 글은 장승의 기원과 함께 역사적인 변화과정을 더듬어 이 구조물이 갖는 두 가지 다른 측면을 구분하고 이에 기초하여 소위 '석장승'의 다양한 기원과 기능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고려시기에 사찰에서는 장생, 또는 관련 석물을 세웠는데, 이 중 '통도사국장생석표'는 석표(石標)라기보다는 석비(石碑)의 기능을 갖는다. 석비에 음각된 명문을 보면 이전의 판아(判兒)처럼 다시 세우라고 하였는데, 판아란 역귀(疫鬼)를 쫓는다는 종규(鍾郡)를 말한다. 명문 내용은 통도사의 영역을 장생으로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허목의 "월악기(月嶽記)"에 실려 있는 한준겸(韓浚謙)의 기사를 보면 도갑사 국장생의 규모가 매우 커서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며 '국장생'이나 '황장생'이라고 새긴 입석은 장생이 아니라 표석, 즉 장생표(長生標)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정(里程) 기능을 하는 후를 장생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사찰 장생과는 달리 나무로 만들어 사찰 장생의 생(生) 자에 나무 목(木) 변을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요즈음과는 달리 조선시기에는 비보 성격을 갖는 사찰 석상이나 읍성풍수물을 장승이라고 부른 경우는 찾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제주도 '돌하르방'을 두고 장승이라고도 불렀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의하면 제주목사 김몽규(金夢奎)가 성문 밖에 옹중석(翁仲石)을 세웠다고 했는데, 옹중석은 대개 고대 제왕(帝王)이나 대신(大臣)의 능묘 앞에 세운 석인상(石人像)을 지칭하는 말이다. 옹중석은 엽승[壓勝]을 위한 풍수물로도 나온다. "광주읍지(光州邑誌)"(1899년간)에는 수구(水口)를 만들고 석옹중 2기를 마주 세워 그 기를 진압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전라북도 부안읍치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2기씩 세워진 석물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읍성풍수물인 이것 역시 석장생이나 장승, 또는 당산으로 불릴 이유는 없다. 도교적인 개념인 상원(上元)과 하원(下元)이 붙은 주장군이나 당장군은 이후 사찰 석상의 명문으로 자주 등장하고, 이후에는 이표 장승에도 붙는다. 사모를 쓴 북한산성 옹중석을 지금은 볼 수 없는 것처럼 많던 옹중석들은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제주의 옹중석과 부안 읍성의 석상은 위치 이동이 적어 옹중석의 기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석상들은 고려시기에 조성된 장생(長生)과 기능상 가장 관련이 깊은 듯하다. 즉, 과거의 장생처럼 18세기 초중반의 석상들은 읍성, 또는 사찰의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 석상의 설립시기는 양전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때이기도 하지만 속세에서는 산송(山訟)이 활발해지는 때라 사찰에서는 비보와 함께 영역 표시를 위해 석상들을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승으로 통칭되는 목인과 석상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유로 세워진 것들이다. 그 출발은 고려시기 사찰의 장생(長生)으로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석물, 또는 석상이었다.
고려왕릉은 대부분 개성에 위치하여 실견할 수 없다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연구가 미흡하였다. 또한 왕릉의 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석물에 대한 연구도 통일신라 및 조선시대에 국한되어 왔다. 이에 본고에서는 강화도 소재 고려왕릉 5기를 대상으로 축조배경과 현황, 석실구조를 살펴본 다음, 강도시기 왕릉관련 석물의 구조적 도상적 특징을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 강도시기 석물의 특징으로는 구조의 간소화와 규모의 축소를 들 수 있다. 난간석 및 병풍석 등의 시설은 구조적으로 간소화되고 석인상의 크기는 이후 시기에 비해 두드러지게 작다. 또한 도상에 있어서도 석양의 채용 등 일정한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한 강도시기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Ordinary people generally bury or burn placenta when the baby was born. But, Joseon royal family put placenta in pot and then buried it in propitious site praying for good health and long life. After that baby had become the king of Joseon, people built stone figures formed fixed type at that place. It is called gabong-taesil(加封胎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gure out the type and characteristics of the King Taejo's taesil in Joseon Dynasty. The King Taejo's taesil had built first as soon as Joseon was established circa 1393, and repaired largely in 1689. Since then, this was damaged by the Japanese Empire and assembled in recent days at near place from the original place. Center piece of taesil remains the original form, and the rest of stone figures is assumed to be rebuilt in 1689. But, some materials like sangseok(裳石) and jeonseok(磚石) are assumed that are original stone figures or were made, assembled by the style of then. Considering most of remained taesil is a relic of the latter part of Joseon Dynasty, the King Taejo' taesil has high cultural value as the first gabong-taesil of Joseon Dynasty inheriting Goryeo Dynasty type.
This research is the second attempt to illustrate the phases of ancient Korean architecture through a comparative study of historical materials such as historical ruins, relics, stone remains and art products. Among these the stone stupa (budo), contains many architectural aspects of old times, which give clues to trace the characteristics of the antient Korean structures. The study brings about following results: 1. The pillar employs an entasis technique, and the bracket system (gongpo) consists of cross beams (changbang) and small supporting blocks (soro) thereupon. A type of the bracket arm (chomcha) is also found on top of the pillar. 2. Windows and doors are assumed from the carved features on the stone stupa to be pair-doors which could be folded twice sideways and upwards. 3. There are two types of eaves; the single eaves and the double eaves consisting of a rafter and a flying rafter. 4. The roof has furrows formed by the concave tiles and the convex ones and also the tiles at the edge of eaves. And there are evidences that a variety of small images of animal and human figures were decorated along on top of the eaves.
Retaining wall is a structure to stabilize the land slope as vertical retaining wall have constructed to make efficiency use of downtown area. Recently to commune with nature and refine a apartment and structure, natural friendly relations for retaining walls are tried to construct. The surface of the concrete walls are weave in various figures and colours, and in some places plant a shrub. Laying a landscape stone which have disclose a plane nature one means keeping up the natural slope, constructively safely set a anchor in front side and rear side wall between the natural stone, plant shrub or ground coverings to give shape into a rock. Natural stone is exposed of surface and planting the gardening, to be a type of natural friendly relations however that will be recycled. The size of blasted nature stone which is irregular become more natural type of one.
본 연구는 조선시대 왕릉 석인상의 크기에 관한 연구로서 분석 결과를 요약하면, 석인상의 문인석, 무인석은 1600년대에는 크기가 증가하였다가 1700년대에는 크기가 다소 감소하였으나 1800년대에는 석인상의 크기가 증가하는 것으로 평균 분석 결과 확인되었다. 조선 왕릉의 석인상은 당시 인물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그 시대 인물상의 전형을 살펴볼 수 있다. 왕릉은 일관성과 고유성을 지니고 있으며, 석인상의 크기에 관한 규범은 시대별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지배계급의 권위적 상징의 건축물로서 의식과 법제에 따라 왕릉이 축조된 국가적 공사였다. 조선시대 묘의 석인상 크기는 능의 석인상에 비하여 약 90cm의 차이로 작았으며 조선전기에 제작된 석물은 지위에 따라 석물의 크기에 차등을 두었다고 한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 왕릉 석인상의 연대별 석물 크기를 확인하는데 본 연구의 의의가 있다.
본 연구는 우리가 '장승'이라고 부르는 조형물들의 그 기원이나 역사, 또는 기능이 서로 달라 엄밀히 구별이 필요하다. 따라서 장승의 기원과 역사를 통해 이론적 고찰을 하였으며, 현제 전국적으로 장승이 많이 분포되어 있으나, 호남지방이 가장 많은 분포를 나타내며 전국 167개소 가운데 73개소가 충남지방에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전남은 54개소로 돌장승이 37개소 전북은 19개소에 돌장승이 남아 있으며, 특히 호남지방의 돌장승은 그 원형적인 형상이 잘 보존되어 있어 농업경제의 중심지로서 이 지방에서 장승문화가 성행하였고, 조선후기의 사회변혁 속에서 많은 돌장승이 대전지역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충남지역은 돌장승에 대한 문화가 그리 많지 않으나 돌장승이 가지는 마을의 의미나 의식은 있었으나, 여러 가지 부분에서 돌장승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그 중 17~19세기에 세워진 돌장승의 형식은 중부지방에 많은 목주형(木柱型)장승과 대조적인 조형물(造形物)로 대전지역 순박한 민중의 심성을 꾸밈없이 보여주며, 더 나아가 그 장승을 통해 민족적(民族的) 미의식(美意識)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잠재적인 창조성(創造性)을 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대전지역의 돌장승에 대한 변화과정을 더듬어 이 구조물이 갖는 기능적인 측면을 조사하고 이에 기초하여 소위 돌장승에 다양한 현황 및 입지적 특성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또한 현재 장승으로 통칭되는 목인과 석상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유로 세워진 것들이다. 대전을 중심으로 석물, 또는 석상으로 나오는 '돌장승'을 대표로 조사하여 도출하고, 입지적 특성과 제언을 통해 형태까지 제언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전통장승은 시대가 변화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만들어 세워지는 현대장승들은 신앙적인 요소는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전통의 상징적 표상물 또는 조형물로 사용된다. 마을신앙의 대상물로서의 전통적인 기능은 상실했지만, 마을입구나 행사장의 입구에서 이정표 또는 표지판의 기능을 하거나 특별한 장소에서는 전시의 기능을 한다. 현대장승은 한국 전통문화의 대표적 상징물로서 서민적이고 소박하며 자연미와 해학미를 표현해주는 예술적인 조형물로 새롭게 재창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하여 장승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그 활용방안을 고려한 더 발전적인 모습으로 구체화 하여, 현재 존재하는 돌장승을 통해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를 막기 위함과 그에 따른 공간적으로 입구에 있는 것이 그 의미를 크게 볼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다양한 신격은 외래 종교의 세련성을 가지지 못한 채 민속신앙의 강한 특성을 살리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In May 1987, 11 clay icons and other stone products were excavated in an abandoned ancient tomb which was located in 541-1 Hwangsung-dong, Kyungju. 6 clay figures of them were depicted realistically man's features and postures, costume at that time that they gave a lot of significance to the fields of Korean Costume's Academic Society. The main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study the background of costume history when it was made and its formal characteristics with the study of those 6 clay figures. Shilla accepted the customs and attires of Sui and T'ang by means of frequent in coming and out going Chinese envoy as well as Shilla's envoy, monks, hostages, and students in China. From that period, the diversity of Shilla's costume began to develop by introducing Tang's style into Shilla's costume. Crested hat of men's clothing of the clay figures in Hwangsung- Dong is Bokdu Men's figure II wore Bokdu which Hugak is attached to Byunhyung. The garment is a Po and it is a tight sleeve and silhouette's Banryungpo. The horizontal line of hemline of men's figure 1 can be presumed by expression of Ran though it is not as accurate as the clay figues in Yongg-ang-Dong. As for torso part 1, it can not be known the style of the crested hat because the head part was damaged, but it were shoes, belt and common sleeve, Banryungpo on tight sleeve shirt and tight trouser. The hair style of the women's clothing in Hwangsung-dong clay figure is Bukkye peculiar to Korea. The costume was slim silhouette that people wore tight sleeve and short blouse and long skirt and belted on their bosom which dresses style was in vogue from late Sui dynasty to the early years of the Tang period. The silh ouette of slim silhouette's high waist which can be seen in the women's dresses is mainly worn by Chinese and affected Shilla's costume. Therefore the dresses style of the clay figures in Hwagsung-Dong, it is considered it is a dresses style of tight sleeves and slim silhouette together with the adaptation and abolition of foreign elements on the basis of Shilla's own elements like Bukkye hair style and tight sleeve and silhouette. The style of Yonggang-Dong's clay figures expresses spherical gei and common sleeve, loose silhouette of flourishing Tang's costumes planly whereas the style of Hwangsung-Dong's clay costumes expresses refined spirit of the Shilla(Shillaism) though it is extremly simple.
감은사는 첨성대가 건축되고 46년 후 서력 682년에 세워진 신라시대 사찰로 현재는 금당터와 석탑 및 각종 석조 유물로 전해지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1959년 1차 발굴 때 감은사지 금당터의 동편에서 발견된 동편 태극 장대석과 2차 발굴 때 감은사지 남편 연못에서 발견되어 1993년 인위적으로 서편에 배치된 서편 태극 장대석에 대한 과학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유물에 각인된 도형의 기하학적 분석을 한다. 그리하여 감은사지 태극 장대석이 의미하는 수학적, 천문학적인 도형의 현대적 해석을 통하여 당시의 과학 수준을 가늠할 중요한 척도를 얻게 되었다. 또한 동편 및 서편 태극 장대석이 나타내는 이등변삼각형들의 배치가 각각 해와 달과 관련된 책력과 연관함을 추론하게 된다. 이러한 엄밀한 수학적 개념 조사를 통하여 역사적 사실이 빈약한 오래된 역사적 구조물을 이해하고 고증하는데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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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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