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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확의 '조선' 인식과 '조선철학' (An Hwak's Recognition of 'Joseon' and 'Joseon Cheolhak')

  • 이행훈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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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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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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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화한 일제의 '조선' 연구가 식민 정책의 일환이었다면 그에 대항하는 조선 연구는 국권 회복과 자주 독립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이는 당대 '조선'이라는 개념이 발화주체에 따라 그 안에 내포된 의미와 지향이 상이했음을 의미한다. 대한제국의 소멸과 함께 근대 국가 건설은 좌절됐지만 민족의 이념 지형 안에서 '조선'은 새롭게 발견되었다. '조선'은 과거의 경험을 응축하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아내는 역사적 기본개념이 되어갔다. '조선학'은 학술의 장에 국한된 지식인들 사이의 담론이었으나, '조선'은 그 내 외부의 보다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발화를 포괄한다. 더욱이 개념과 담론의 상호 연관을 고려한다면 '조선학'은 '조선'의 역사적 의미론 속에서 독해되어야 마땅하다. 1920년대 문화운동의 흥기 속에서 안확은 "조선문명사"를 통해 고대 신화의 시대로부터 당대까지를 '조선'이라는 기표 아래에 묶어낸다. 역사 실증주의의 미명 아래 자행된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서 조선의 역사를 서양 민주주의 정체에 비견해도 뒤지지 않는 문명으로 이상화한다. 안확은 '조선' 연구를 문화 전반으로 확장하는 가운데 조선의 미술과 문학을 넘어 조선철학의 탄생을 예고했다. "조선철학사상개관"은 '조선철학'을 하나의 독립적 학문영역으로 사고한 최초의 기술로써, 조선의 학술과 사상의 특수성을 인류의 보편적 문명사의 관점에서 파악하려했던 작업의 일환이었다. 안확은 철학을 조선의 3대 발달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고, 조선 철학사의 특색을 서양과 비교하여 특정함으로써 조선철학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주장했다. '종(倧)'을 조선철학의 시원이자 근세에까지 이르는 사상적 근저로 파악하면서 불교와 유교의 수용도 조선철학의 발전으로 인식했다. 전통 지식체계의 근대적 전환과정에서 탄생한 '조선철학'은 전통 지를 근대적 학문 분류 체계에 적용하여 재해석하고 재구축하는 지적 실험이었다.

규율된 여행 판타지의 60년대적 구성 -김찬삼의 『세계일주무전여행기(世界一周無錢旅行記)』(1962)를 중심으로 (South Korean Society and Disciplined Travel Fantasy in the 1960s -Focusing on Kim Chan-Sam's 『世界一周無錢旅行記』(1962))

  • 임태훈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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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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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9-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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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김찬삼의 『세계일주무전여행기(世界一周無錢旅行記)』가 발표된 1962년은 민간인의 해외여행이 강력히 규제되던 때였다. 이 시기에 관광 목적의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남한 사회 전체를 통틀어 극소수에 불과했다. 국민 대부분은 저개발과 정치적 격변이 끊이지 않는 '국내'에 갇힌 채 대한민국의 바깥세상을 상상해볼 뿐이었다. 독자 대중은 갇힌 반도에서 탈출하고픈 욕망을 김찬삼이라는 예외적 개인에 투사하며 대리만족해야 했다. 1960년대 남한 사회의 대중 독자에게 '김찬삼'이라는 캐릭터는 탈주의 욕망을 투사할 수 있는 대표적인 표상이었다. 따라서 '김찬삼'은 대중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해야 했다. 이 표상은 남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세속적이고 탈정치화된 상식 이상이 되어선 안 됐다. 무엇보다도 이념적 편향성을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독자가 이 책에서 얻는 상상 지리지는 순도 높은 '비 공산권 국가로서의 세계'로 한정되어 있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콤플렉스가 남한 사회 전체에 만연한 상황에서, 그 이상의 정치색을 드러내는 일은 대중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김찬삼은 남한 독자에게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고, 그럴 수 없는지 정확히 알았다. 해외여행을 떠날 수 없는 독자들의 현실, 한국인을 '국내'에 가둬놓는 사회 현실을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해선 안 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김찬삼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분석하여 1960년대 규율된 여행 판타지의 의미를 고찰하는 한편, 우리 시대의 여행기가 여전히 지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묻고자 한다.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에서 나타난 데페이즈망과 몽상의 알레고리 - <부르주와의 은밀한 매력>과 <자유의 환상>을 중심으로 - (Depaysement and Its Dreams for a Hallucinative Allegory in Luis Bunuel's Films :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and "The Phantom of Liberty")

  • 홍명희
    •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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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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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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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초현실주의의 정신적 자유를 바탕으로 반혁명적 특성을 지닌 루이스 부뉴엘의 작품에 나타난 몽상과 환각의 알레고리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화두로 삼았다. 그의 작품 <부르주와의 은밀한 매력>과 <자유의 환상>의 장면에 나타난 기표에 나타난 기의를 파악하기 위하여 초현실주의의 기법 데페이즈망의 특징인 부유하는 오브제의 배치인 우연성과 기존의 관습을 전복하는 양극성, 그리고 이미지들의 패러디와 모순성을 통해 초현실주의의 영화적 영향 양상을 고찰하였다. 세 가지 데페이즈망의 영화적 적용으로 살펴본 루이스 부뉴엘의 나타나는 미학적 관점은 이성에 대한 반감과 법과 질서의 비판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국가 장치에 대한 혐오는 근본적인 비이성적인 것을 비판하고 우리로 하여금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함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초현실주의의 기법을 도용하여 초현실주의 영화의 초석을 다졌다. 이에 본 연구는 데페이즈망의 여러 층위를 통해 영화에 나타난 몽상과 환각의 시니피앙을 해석하고 작가의 이념이 영화에 새겨진 풍경에 나타난 초현실주의적 자유의 의미를 고찰하였다. 초현실주의는 미술과 현대영화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부뉴엘의 텍스트이다.

정릉(貞陵) 이장과 광통교(廣通橋) 개수를 통해 본 조선 초기 지배 이데올로기의 대립 (Collision of New and Old Control Ideologies, Witnessed through the Moving of Jeong-regun (Tomb of Queen Sindeok) and Repair of Gwangtong-gyo)

  • 남호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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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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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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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정릉(신덕왕후릉)의 축조와 이장에 얽힌 논란은 조선 초기, 신구(新舊)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의 충돌이 잘 드러난 사례이다. 태조의 경처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은 도성 안에 조성되지만 태조 사후, 태종에 의해 도성 밖으로 이장되고 그곳에 남아 있던 석물들은 청계천의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쓰인다. 야사에서는 태종이 강씨를 저주하기 위해 도성 밖으로 능을 옮기고 남은 석물들로 광통교를 만들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고 전한다. 태조 말년, 강씨와 태종은 대립하던 관계였으나 태조가 왕으로 옹립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정치적 동반자에 가까웠다. 정릉이나 광통교와 관련된 실록의 기록은 더 담백하다. 정릉의 천장은 능묘가 도성 안에 있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정부의 상언을 따른 것이다. 광통교 개수를 위해 정릉을 격하하고 이장시켰다는 주장에는 사실 관계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논자는 광통교 개수에 정릉의 석물이 재사용된 것에 대해 당시 도성 안팎에서 건축자재소요량이 급증하여 효율적인 조달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였다. 정릉이 도성 안에 조성되었다가 다시 도성 바깥으로 이장된 원인은 태조와 태종이 가졌던 사상적 배경의 이질성에서 찾았다. 태조는 유교국가의 통치자였으나 죽은 왕비를 위해 도성 내에 원찰과 무덤을 조성한다. 여기에는 불교의 힘을 빌려 죽은 신덕왕후의 권위를 위의하고 지지세력을 규합하고자 한 노림수가 있었다. 원의 다루가치 집안에서 태어나 지방군벌로 성장한 이성계는 높은 유학적 소양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호불적 성향을 띄는 구체제의 인물이었다. 반면 태종 이방원은 고려 말 과거시험에 급제했던 엘리트 유생이었으며 주자학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유교국가에서 도성이 가지는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더 깊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 율령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시스템이 정립된 이래로 도성 바깥에 무덤을 만드는 경외매장의 원칙은 거의 예외 없이 지켜져 왔다. 정릉은 태조 개인의 강한 의지로 도성 내부에 조성되지만 왕 이전에 유학자였던 태종에게 이러한 모습은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태종은 즉위 후, 주도적으로 도성 재정비를 추진하는데 이는 '예치'를 강조하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한양도성의 경관에 명확하게 구현하고자 한 의지의 발현으로 보여진다. 정릉의 이장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진행되었던 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행정사건에 대한 ADR의 적용에 관한 법이론적 고찰 (An Legal-doctrine Investigation into the Application of ADR to Administrative Cases)

  • 이용우
    • 한국중재학회지:중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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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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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9-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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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General interest in the out-of-court dispute resolution system are mounting in Korea, and the spread of 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is the worldwide trend. In addition, it was confirmed that the resolution of disputes by ADR such as the decision based on arbitration made by the Prime Ministerial Administrative Decision Committee is no longer in exclusive possession of the civil case. The activation of ADR could lead to the smooth agreement between parties by getting away from the once-for-all mode of decision such as the dismissal of the application or the cancellation of disposal and the like in relation to administrative cases for the years. In consequence, it is anticipated that the administrative litigation that applicants have filed by not responding to the administrative decision would greatly reduce in the future. But, it would be urgent to provide for the legal ground of the ADR system through the revision of related laws to take root in our society because ADR has no legal binding power relating to the administrative case due to the absence of its legal grounds. The fundamental reason for having hesitated to introduce ADR in relation to the administrative case for the years is the protective interest of the third party as well as the public interest that would follow in case the agreement on the dispute resolution between parties brings the dispute to a termination in the domain of the public law. The disputes related to the contract based on the public law and the like that take on a judicial character as the administrative act have been settled within the province of ADR by applying the current laws such as the Civil Arbitration Law, Mediation Law, but their application to the administrative act of the administrative agency that takes on a character of the public law has been hesitated. But as discussed earlier, there are laws and regulations that has the obscure distinction between public and private laws. But there is no significant advantage in relation to the distinction between public and private laws. To supplement and cure these defects it is necessary to include the institutional arrangement for protection of the rights and benefits of the third party, for example the provision of the imposition of the binding power on the result of ADR between parties, in enacting its related law. It can be said that the right reorganization of the out-of-court dispute resolution system in relation to the administrative case corresponds with the ideology of public administration for cooperaton in the Administrative Law. It is high time to discuss within what realm the out-of-court dispute resolution system, 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system, can be accepted and what binding power is imposed on its result, not whether it is entirely introduced into the administrative case. It is thought that the current Civil Mediation Law or Arbitration Law provides the possibility of applying arbitration or mediation only to the civil case, thereby opening the possibility of arbitration in the field of the intellectual property right law. For instance, the act of the state is not required in establishing the rights related to the secret of business or copyrights. Nevertheless, the disputes arising from or in connection with the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law is seen as the administrative case, and they are excluded from the object of arbitration or mediation, which is thought to be improper. This is not an argument for unconditionally importing ADR into the resolution of administrative cases. Most of the Korean people are aware that the administrative litigation system is of paramount importance as the legal relief for administrative cases. Seeing that there is an independent administrative decision system based on the Administrative Decision Law other than administrative litigation in relation to administrative cases, the first and foremost task is the necessity for the shift in thinking of people, followed by consideration of the plan for relief of the rights through the improvement of the administrative decision system. Then, it is necessary to formulate the plan for the formal introduction and activation of ADR. In this process, energetic efforts should be devoted to introducing diverse forms of ADR procedures such as settlement conference, case evaluation, mini-trial, summary jury trial, early neutral evaluation adopted in the US as the method of dispute resolution other than compromise, conciliation, arbitration and med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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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Chinese Socialism and Nationalism)

  • 조봉래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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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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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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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사회주의 중국에서의 민족주의의 형성에 대한 연구다. 중국은 발달한 문명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우월감으로 인해 일찍부터 문화적 민족주의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이는 오랜 기간을 통해 '중화주의'로 굳어지게 된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서양의 침략으로 인해 위기감이 생겨났고 중국의 지식인들은 다방면의 변화를 통해 구망(救亡)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서양의 '사회진화론'이 소개되고 받아들여진다. 이 사회 진화론의 수용은 결국 국가 간의 경쟁에서 밀린 중국이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는 것은 당연해지는 논리적 한계에 봉착하여 점차 변형되지만 중국 지식인들에게 문화적 중화주의에서 벗어나 서양의 근대적 국가민족주의 개념을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중국공산당은 초기에 창당과정에서 부터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았는데, 당시 제국주의 자본의 세계지배라는 조건 속에서 식민지국가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강조되었고, 중국에서의 저항적인 민족주의성격을 띤 마르크스주의는 명분을 갖게 된다. 이후 중일전쟁 과정에서 반제반봉건투쟁을 통해 중국인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된 중국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고 본격적인 사회주의 체제로서의 중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냉전이라는 국제적 여건 속에서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중국 사회주의의 발전은 자국 인민의 결집된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중국 공산당의 지속적인 애국주의의 고양으로 이어진다. 특히 개혁개방 이후 새롭게 등장한 모순들로 인해 중국은 분열을 겪게 되었고 이를 통합하는 이데올로그로 자국의 문화적 자긍심을 바탕으로 한 중화주의가 또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최근 경제 강국으로서 국제적인 위상이 높아진 중국에서는 전통문화의 우월성이 강조되면서 매우 강력한 중화주의가 대두되고 있다.

인간과 세계의 미래에 관한 해원상생사상 연구 (Haewon-sangsaeng Thought for the Future of Humanity and World)

  • 배규한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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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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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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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의 목적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한국 신종교의 대표적 평화사상인 해원상생사상의 의미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해원상생과 해원공사를 후천선경 건설의 원리와 실행기제로 보고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해원상생사상에 내포된 사상적 특성으로 인간과 세계의 미래를 논리적으로 추론해 보는 것이다. 해원상생사상은 해원과 상생으로 구성되는 복합적 개념이다. 해원은 인간·신명·세계에 쌓인 원한과 원한의 구조를 풀어가는 것이고 상생은 서로 간에 잘 되게 하는 작용 또는 잘 산다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해원상생은 원한을 풀고 서로 잘 산다는 말이다. 대순진리회에서의 해원상생은 그 개념이 외연적으로 더욱 확대되어 나타난다. 해원상생은 전 세계의 평화이며 전 인류의 화평으로 확장된다. 선행연구의 통합적 분석과 필자의 새로운 해석에 의해 얻어진 해원상생의 가치와 의미는 원리·법리·윤리·이념으로써 공통적으로 인존, 상생, 평화, 조화, 후천, 선경 등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해원상생이 가지는 어원적 의미보다 해원상생사상이 인간과 세계와 그 미래에 관해 투영되는 가치적 의미는 더욱 깊고 넓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존과 상생, 평화와 조화, 후천과 선경이 가지는 공통의 특성은 모두 인류가 오랫동안 꿈꿔온 대망의 실현이라는 점이다. 이점이 해원상생의 가치와 의의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이유이다. 해원공사는 상극이 지배하는 선천시대의 원한을 해소하고 상생으로 유지되는 후천세계를 건설하는 강증산의 종교적 행위이다. 그래서 해원상생의 원리는 해원공사에 의해 인간과 세계와 그 미래를 변화시키는 작용력을 가진다. 이 글에서는 해원상생이 '인간욕망의 충족'과 인간과 세계의 '상생적 조화관계'를 이룸으로써 인간은 인존(人尊)으로, 세계는 선경(仙境)으로, 미래는 평화로 변화시킨다고 추론한다. 그래서 해원상생사상은 사회-세계-우주의 변화원리로서 작용하며, 해원상생의 사회적 실현은 인존·선경·평화의 객관적 실재로서의 그 미래를 창출한다. 해원상생사상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소수의 학자들에게서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해원(解冤)·상생(相生)·인존(人尊)·선경(仙境)·평화(平和)를 실현하는 해원상생에 관한 연구가 앞으로 더욱 더 확대되어 세계종교사상의 주요 주제로 다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창녕 교동 39·63호분 동물순장 연구 (A study on animal SHUNJANG in tombs 39 and 63 in Gyo-dong, Changnyeong)

  • 권주영;김보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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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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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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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창녕 교동 39호분과 63호분은 북쪽에 입구부를 둔 횡구식 묘제로 별도의 추가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창녕지역의 독특한 묘제이다. 본고는 해당 고분의 매장 프로세스와 함께 고분의 입구부에 별도로 조성된 석곽 2기의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 2기의 석곽은 39호분의 석곽 3호(39-3호)와 63호분의 석곽 3호(63-3호)로 대형분 내에 독립되어 조성된 소형 무덤이다. 2기 모두 매장주체부의 북벽 중위에 위치하며 한쪽 벽면을 매장주체부 벽석과 공유하고 있는데 축조상태로 보아 주피장자를 석곽 내부에 안치한 뒤 북벽을 폐쇄하는 과정에서 조성되었다. 석곽 내부에는 동물유체가 모두 확인되었는데 특히 63-3호 동물유체 동정결과 최소 3개체의 개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무엇보다 이들 동물유체는 주피장자를 등진 상태로 머리를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한정된 공간 내에 중첩되지 않고 나란히 안치되어 있어 주목된다. 창녕 교동 39-3호와 63-3호는 매장주체부를 축조하는 과정에서 조성된 것으로 동시성을 가지며 각각의 독립된 유구이지만한 고분 내에서 주피장자를 따라 축조되었다는 종속적 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동물을 살해한 뒤 해체되지 않은 상태로 일정한 방향에 따라 정연하게 안치하였다는 점에서 강제성을 띠고 있다. 이에 유구의 성격은 개(견(犬))를 순장한 순장곽(殉葬槨)으로 이해된다. 삼국시대 고분 출토 동물유체에 대한 연구는 그 위치에 따라 동물부장, 제수매납, 동물희생 등으로 해석되며 이는 일련의 동물희생의례, 즉 동물 부장과 희생(제생(祭牲) 혹은 공희(供犧))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동물을 음식이나 제의 희생물과 같이 물적 대상화하는데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창녕 교동 39-3호와 63-3호는 장송의례 과정에서 동물을 영적존재로 인식하고 주피장자의 계세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유구의 위치와 방향성에 대한 다각도로의 분석도 요구되는데, 이 2기의 순장곽이 고분의 입구부에 해당하며, 위치가 입구부의 가장 개방된 공간이라는 점, 바깥을 향해 바라보는 개의 모습 등은 고분 수호와 벽사의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모습은 고대 계세사상을 반영하는 고구려 벽화고분에 묘사된 개의 그림과 백제 무령왕릉 출토 석수와도 비교가 가능하며 고대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의 의미와도 상통한다. 이는 차후 동물유체 매장유구에 대해 다각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하는 바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 메모리얼에 나타난 기념성 - 미국, 소련, 독일의 전쟁메모리얼을 대상으로 -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Commemoration in World War II Memorials - Focus on the War Memorials of the United States, the Soviet Union, and Germany -)

  • 이상석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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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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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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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의 목적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던 미국, 소련, 그리고 독일이 만든 전쟁메모리얼에 나타난 국가적 기념성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소련,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메모리얼은 전사자 및 희생자 추모를 기본적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국가별로 미국은 자유를 위한 대의명분을 나타내며 단결과 승리를 고양하였고,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파시스트 나치 독일을 물리친 대조국전쟁을 강조하였다. 반면 국가적 기념이 어려웠던 독일은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를 지향하였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 메모리얼은 국가의 대표적 장소나 전적지 등 장소적 의미가 있는 곳에 입지하였고 독일에서는 교회묘지나 공공묘지에 조성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메모리얼의 공간 중심축을 대칭을 이루고 정형적인 형태로서 간결하고 절제된 미적 특성을 보여주었다. 셋째, 미국과 소련은 공통적으로 기념벽에 전쟁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면서, 미국은 자유를 위한 희생과 헌신, 소련 및 동독은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는 메시지를 각각 다르게 기념적 텍스트로 나타냈다. 국가별로 미국은 국가를 상징하는 독수리, 각 주 및 영토를 나타내는 열주 등을 통하여 국가적 일체감을 강조하였고, 소련은 공산주의 양식의 군인 조각을 세웠다. 미국 및 소련에서는 공통적으로 승리를 상징하는 기념조각과 월계수를 사용하였지만, 독일에서는 전사한 군인조각을 세워서 전몰자를 추모하였다. 정치적으로 미국은 단결과 승리의 고양, 소련은 대조국전쟁의 승리와 공산주의의 선전, 그리고 독일은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였으며, 종교적 측면에서는 미국, 소련, 독일 모두 기독교가 보편적 종교이기 때문에 십자가, 교회, 에비타 조각상 등 기독교적 상징을 다수 도입하는 기념문화적 특성을 보여주었다. 향후, 우리나라의 전쟁메모리얼에서 국가적 기념성과 기념문화를 정립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대순진리회의 효 윤리에 나타난 종교성 연구 (A Study on the Religiosity of Filial Piety Ethics in Daesoonjinrihoe)

  • 차선근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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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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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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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글은 전통 효(Filial Piety) 윤리와 대순진리회(Daesoonjinrihoe)의 효 윤리를 비교의 지평에서 분석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전통 효 윤리는 현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변화를 요구받아 왔고, 그 핵심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수직적·일방적인 게 아닌 수평적·상호 호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념과 대안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인 대순진리회가 근대화 이후에 전통과 현대의 충돌을 경험하면서 성장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교리체계에서 효 윤리가 어떻게 구축되어 있는지를 관찰하는 작업은 전통 효가 현대적 감각에 맞게 어떻게 윤색될 수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하나의 좋은 사례를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 본다. 이것을 요약하면, 첫째, 유교와 대순진리회는 봉친(奉親)을 효 윤리로 삼지만, 유교는 가부장적인 봉건성에 입각하여 아랫사람의 일방적·맹목적 희생을 강조하고, 대순진리회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지양하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상생(mutual beneficence)을 도모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유교적 효가 봉건질서를 추구하는 이념 속에서, 대순진리회 효가 새로운 종교적 세계인 후천 신세계의 원리인 보은상생과 인존(Respect For Man)의 이념 속에서 구축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둘째, 불교와 도교의 효는 부모 생전에 수복(壽福)을 누릴 것을 기원하고 사후에는 천도를 위해 발원하는 소극적·수동적인 것이다. 대순진리회의 효 역시 그러한 관념을 일부 포함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부모 스스로가 죄를 벗고 앞길을 닦아나가도록 유도하는 것까지 효의 범주를 더 넓게 잡는다. 부모와 자식의 수행을 동시에 요구하는 이런 효 윤리는, 자식이 수행 끝에 종교적 목표를 이룬 연후 받게 되는 복록을 부모도 동시에 누릴 수 있게 하고자 하는 대순진리회 세계관 때문에 성립된다. 셋째, 유교와 대순진리회는 선령향화를 효 윤리로 삼지만, 무속적 사고를 배제한 본래 유교(성리학)적 세계관 속의 효는 향화의 대상을 비인격적 존재로, 대순진리회는 인격적 존재로 상정한다. 따라서 유교에 비해 대순진리회의 선령향화는 관념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다 현실적이다. 넷째, 유교와 대순진리회는 모두 조상들의 은혜를 갚고자 하나 그 은혜의 내용과 보은에 차이가 있다. 유교에서는 조상들이 생명을 준 존재이기에 그에 대한 감사로써 향화를 올리는 것만으로 효가 성립되지만, 대순진리회에서는 조상신들이 자손의 도성덕립을 목적으로 60년 적공(積功)으로써 생명을 주면서 동시에 수도를 하도록 독려하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향화를 올리는 것과 더불어 수도까지 해야 효가 성립된다. 다섯째, 유교에서는 세속에서의 출세를 의미하는 입신양명이 효이지만, 대순진리회에서는 그 보다는 수도를 성공시켜 종교적 목표를 달성시키는 것이 더 큰 효로 규정된다. 여섯째, 유불도는 모두 도덕에 기반한 가족윤리로 효를 규정한다. 대순진리회 역시 그러하지만, 그 외에도 효에 종교적 구원을 위한 필수 윤리라는 위상을 더 부여한다. 왜냐하면 효의 부재는 세상을 병들게 하고 멸망케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면서, 동시에 60년 동안 적공(積功)을 한 조상신들과 직접적으로 생명을 준 부모들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은이 개벽시대에는 용납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대순진리회는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유불도의 전통 효 윤리들을 일부는 수용하고 일부는 재해석과 재창조 과정을 거쳐 윤색해 두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즉 대순진리회의 효는 인간 존중의 이념, 구체적으로는 보은상생과 인존(Respect For Man)사상 위에서 정립된 윤리 규정이며, 인격 완성과 도통이라는 종교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나 자신의 수행이자 복록을 더불어 누리기 위한 부모의 일정한 수행까지 요구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개벽시대에 구원을 받기 위한 필수 윤리라는 대단히 강화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라고 크게 그려 볼 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