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Sejong-Sil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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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1418~1450) 성주 세종대왕자(世宗大王子) 태실(胎室) 출토 <분청사기 상감연판문 반구형뚜껑>의 제작 특징과 제작지 고찰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and the Kiln Site of Production of the Buncheong Ware Excavated from the Placenta Chamber (Taesil) in Seongju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1418-1450) in the Joseon Dynasty)

  • 안세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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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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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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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세종의 대군·군과 세손을 포함하여 총 19기 태실이 모여 있는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여러 태실이 한 공간에 조성된 유일한 사례이자, 태를 봉안·보호하는 장태용 그릇의 구성과 조형 역시 다른 곳과 구별되어 주목받아왔다. 본 글은 성주 태실에서 출토된 장태용 그릇 중 하나인 <분청사기 상감연판문 반구형뚜껑>에 집중하여 제작의 특징을 구명하고 제작지 고찰에 초점을 맞추었다. 연구 대상은 태주가 확인된 6점에 한정하였다. 성주 태실은 세종 연간 왕실의 장태와 태실 조성에 관한 다양한 논의와 행사가 가장 성행한 1436~1439년에 계획되고 세워졌을 것이다. 태를 담은 항아리를 덮어 보호하는 목적으로 태와 함께 장태 된 이 분청사기 뚜껑은 장태에 필요한 여러 잡물 가운데 중앙 관청에 분정된 잡물의 용도와 일치하며, 장흥고에서 장태 행렬 이전에 마련하여 조달한 품목으로 유추된다. 뚜껑의 크기·형태·장식 등의 조형적 특징은 15~16세기 왕실용 태항아리 뚜껑과 공통되는 부분이 있고, 『세종실록』 「오례」에 수록된 길례용 제기 및 가례용·빈례용 준작 기물과 친연성이 높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뚜껑의 꼭지를 에워싸고 있는 태토빚음의 번조받침 흔적은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 왕실용 태항아리 뚜껑에 남아 있는 흔적과 상통한다. 덧붙여 번조받침 흔적의 형태와 위치를 통해 이 분청사기 뚜껑은 꼭지를 아래로 향하게 한 후 받침 도구와 갑발 등을 이용하여 번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상의 분석과 『세종실록』 「지리지」에 등재된 자기소 내용, 15세기 전반 자기의 진헌·공납 관련 기록, 현재까지 조사된 분청사기 가마터 출토 유물 등의 정보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였을 때 이 분청사기 뚜껑을 제작한 곳은 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분청사기 가마터가 가장 유력할 것으로 사료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五禮)」에 기록된 배표의 절차와 복식 연구 (A Study on the Bapyo Ritual Procedures and Costumes Recorded in the Five rituals of Sejong-Silok)

  • 김진홍;조우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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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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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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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배표의(拜表儀)는 황제에게 보내는 외교문서인 표문(表文)에 치르던 의례로, 세종 대에 행하여진 배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직책과 그에 따른 복식을 살펴보았다. 의례 주체자인 왕은 최고 법복인 면복을 착용하였고, 면복은 구류평천관에 구장복으로 구성된다.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은 조복인 양관과 적라의를 착용하였다. 왕세자의 조복은 세종 10년에 오량관에서 육량관으로 바뀌었고, 문종 즉위년에 왕세자의 면복을 받아서 단종 이후에는 팔류평천관과 칠장곤복을 착용하였다. 사행원인 사자와 종사관은 상복을 착용하였다. 사자가 착용한 상복은 사모에 흑단령, 서대, 협금화이고, 종사관이 착용한 상복은 사모에 흑단령, 흑각대, 흑피화이다. 왕의 측근에서 시종하는 별감은 공복과 상복을 착용하였다. 공복은 자건에 청단령과 흑피화, 상복은 주황초립과 직령에 조아, 흑피화로 구성되었다. 의장군은 황의장과 왕의 의장이 진열되었고, 산과 개, 수정장, 금월부를 들고 있는 자는 자건에 청의를, 전도황기는 피모자에 청의를 착용하였다. 선과 금은횡과·금은입과·금은장도는 피모자에 홍의를 착용하였다. 시위군은 갑옷과 투구에 검 또는 궁시를 갖추어 착용하였다. 공인 중 악사의 복식은 복두에 비공복, 금동혁대, 비백대대, 오피리로 구성되었고, 악생은 개책에 비수란삼, 협고, 말대, 말, 오피리로 구성되었다. 이상의 결과로 세종 대에 의례복식이 의제화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표의에 참여하는 왕 이하 왕세자, 문무백관, 사자, 별감, 시위군, 공인 모두 각 품계에 맞는 최고 등급의 예복을 착용하였다. 세종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거듭된 논의를 거쳐 각 의례와 그에 따른 복식을 정비하였고, 배표의 복식도 직책별로 체계적으로 갖추어졌다. 세종 대에 정리된 의례복식은 예전에 규정화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질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지리산 남악제(南岳祭) 제례복식(祭禮服飾)에 관한 제언 (A Study about Historical Research on Jebok(ritual robes) of Jirisan Namakje)

  • 이영주;이상은
    • 한국의상디자인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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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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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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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This study is intended to historical research the Jebok(ritual robes) of Jirisan Namakje. Joseon Dynasty established Five Manners as a country-ruling policy on the basis of Confucianism, the religious clothes-wearing method has been established through Sejong Silok Five Manners and the ritual robes system of all the government officials has been handed down to the end of Joseon Dynasty. The ritual robes of all the government officials was worn at the timed of the religious ceremony included ritual manners, and ritual robes are composed of Yanggwan, Ui, Sang, Jungdan, Peasul, Hwan, Wu(a cord, a leather belt, a belt, jade, a mace, Bangsimgokryeong, Mal, Ri, etc., and the rank was classified by the number of the veritical line of Ynaggwan, a leather belt, Hwan, Wu and jade and typeof a mace. "Jongmyouigwe"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described exactly the Uicha and textile of the ritual robes at that time, the textile Ui used Heukju as same as "Jegiakgidogamuigwe", and jade was used only in case of the first rank ritual official and other government officials did not wear jase. Also, it was revealed that all officials used a wooden mace, and in case of Husu, the first rank ritual official used Jikseong and other official used a pi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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