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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許浚)의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f Heo Jun's 『Eonhaegukupbang』)

  • 정순덕;차웅석;김남일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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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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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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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1. "Eonhaegukupbang(諺解救急方)" is a medical book that was published and edited by Naeuiwon(內醫院) under the king's command in the Joseon Dynasty in 1607. 2. It includes the contents but doesn't a preface and an epilogue. And several medical treatments and herb medicines of diseases from emergency are noted in the original text of "Eonhaegukupbang(諺解救急方)". The book is composed of two volume and 181 pages. 3. A number of cultural properties and medical books were lost and all people of the nation were suffered from poverty and diseases during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n some books of Korean translation of Chinese classics were edited under the king's command with the intention of recompiling the lost books and easy application of medical knowledge for the people. 4. "Eonhaegukupbang(諺解救急方)" admit several books and notes the reference books at the beginning or the end. This book has 37 kinds of reference books, and those are "Boncho(本草)", "Uihakgangmok(醫學綱目)", "Uihakimmun(醫學入門)", "Deukhyobang(得效方)", "Uihakjeongjeon(醫學正傳)", "Dan-gyebang(丹溪方)" and so on in the main. 5. "Gugupbang(救急方)"(in the Sejo Dynasty) is similar to "Eonhaegukupbang(諺解救急方)" in aspect of helping the people with convenient contents. But it is a point of difference that the composition and contents of "Eonhaegukupbang(諺解救急方)" are more centering about the medical prescriptions than those of "Gukupbang(救急方)". 6. "Eonhaegukupbang(諺解救急方)" is very similar to the "Gukupmun救急門" in the "Donguibogam(東醫寶鑑)" in the contents and construction of the list. "Eonhaegukupbang(諺解救急方)" was published during the writing of "Donguibogam(東醫寶鑑)", so it has a deep meaning that "Eonhaegukupbang(諺解救急方)" is a condensed version of easy application for the civilian by regulating already established section. 7. It seems that "Eonhaegukupbang(諺解救急方)" has continuous influences in the part of emergency in the "Donguibogam(東醫寶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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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회격현궁(灰隔玄宮) 축조방법 연구 (A Study of the Construction Method of the Pit of Royal Lime Tombs in the Choseon Dynasty)

  • 김상협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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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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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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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is study examines the construction method of lime tomb of royal tombs in the Choseon Dynasty based on reference. This was primarily published as "The Five Manners and Courtesy of the Annals of Sejong" as examples, which were followed by the influence of Koryo's culture in the beginning foundation of Choseon, were organized in the time of Sejong; and later, in the time of Sungjong, "The National Five Manners and Courtes y" was published. Such old reference explains the stone materials and construction method of the royal tomb's pit yet there were not many studies regarding the pit of royal tomb in the Choseon Dynasty. And there exists no historical research or reference study in regard to the pit of royal tomb which is formed as a lime tomb. This is believed to be impossible to excavate the royal tomb since ancestral ritual formalities are still given by the descendants and because of our country's culture of giving ancestral ritual formalities which value formalities and filial duty. However, the current excavation of Guhui Tomb, which was the early burial site, was important since it gives an opportunity to look at the shape and structure of lime tombs in the Choseon Dynasty. Thus, this study, based on the excavation of Guhui Tomb, will look into the construction method of the pit of lime tomb and will examine the structure, shape, construction method, etc. of the lime tomb which was formed after the time of Sejo in a way with reference history. This is an important data to learn the construction method of limb tomb of royal tombs in the Choseon Dynasty and is believed to have a very important value as historical materials as to understanding the structure of the pit of royal tombs in the Choseon Dynasty which yet has not been excavated.

조선 가각고의 인력구성과 존재시기에 관한 재고찰 (Reconsideration of Gagakgo's Staff and Period of Existence in Joseon)

  • 이형중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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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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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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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가각고는 국왕의 명령인 수교(受敎)를 비롯한 국가 중요문서와 노비문서·행사기록 등 다양한 국가기록을 보존하는 일종의 기록보존을 위한 공간이었다. 때문에 가각고에 대한 연구는 조선의 전반적인 기록보존 공간 운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가각고의 인력구성과 혁파시점을 중심으로 가각고의 실상을 보다 상세히 규명해 보고자 하였다. 먼저 가각고는 운영을 위해 별도의 실무인력을 두었으나, 조선 초기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가각고의 소속과 인력 구성 또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가각고의 위상 및 그 운영의 양상 또한 변동되었다. 이후 세조대 들어 가각고는 혁파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조선 후기 효종~영조 연간 가각고라는 이름의 기관이 운영되었음이 확인된다. 이 가각고 또한 조선초기 가각고와 마찬가지로 실무 인력을 배치하고 기록을 보존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는 가각고의 존재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가각고 운영과 조선 기록보존의 실상에 보다 근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철릭 고찰 (A study on Cheollik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 김명자;이소영
    • 한국의상디자인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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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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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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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This paper presents an investigation into Cheollik based on 288 records about it at the homepage of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on the Internet. Cheollik was called in diverse names and worn by various social classes from kings to common people, but it was solidified as clothes for military officers toward the latter half of Joseon. Not only did it serve the purpose of clothes, but it also was used for a royal grant, diplomacy, shrouding a corpse, and royal coffin. It served the diplomatic purposes a lot especially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and King Seongjong. Cheollik was usually made of cotton, hemp, silk, and mixed fabric with silk used most. Its major colors include white, green, red, blue, black, purple, grey, and yellow with white used most. The fabrics and colors of Cheollik became simplified toward the latter half of Joseon. Silk was most used in Cheollik for a royal grant, shrouding a corpse, and royal coffin. White was most used in Cheollik for kings' visit to royal tombs or their participation in ancestral rites. There were limitations with the selection of materials according to the social status and situations. It was stipulated that only Sa and Ju were used to make Cheollik for Dangsangguan and Danghaguan. Cheollik made of silk was banned for country residents and merchants. The color of Cheollik for Danghaguan was changed to blue and then red. Of military officers, only those who had a Gonsu title or higher were allowed to wear Cheollik made of silk in various colors. In the end, Cheollik was abolished for its low convenience and efficiency during the rule of King Gojong.

음악교육의 관점에서 바라본 정간보 창안의 주체 (The Subject of Jeongganbo Invention from the Viewpoint of Music Education)

  • 임현택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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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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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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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2015년 9월 23일 교육부는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을 지향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을 고시하였다. 이에 따라 음악과 교육과정 또한 일부 개정되었는데, 그 큰 틀은 2009 개정 음악과 교육과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과의 영역 안에서 정간보는 초등학교 3~4학년의 교육과정에서 이미 노출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간보의 명칭 유래 및 창안 배경을 비롯한 악보 읽는 방법, 음높이 및 음길이 나타내는 방법 등에 관한 학습 내용은 5~6학년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정간보는 15세기 중엽 조선조 세종에 의해 창안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유량악보로 알려져 있으며, 현전하는 악보 중 가장 오래된 악보인 "세종실록악보"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악 관련 전문서적은 물론이거니와 음악교과서에서는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세종이 정간보를 창안한 주체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근거에 입각하여 세종이 정간보를 창안하였다고 주장하는지 가려낼 필요가 있겠다. 본고에서는 먼저 초등학교 5~6학년 음악교과서에서 소개되는 '세종이 정간보를 창안하였다'는 명제에 대한 근거를 세종의 신악 창제, 세조의 정간보 창작, 세종의 한글 창제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2009 개정 음악과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발행된 초등학교 5~6학년 6종 검정교과서를 대상으로 정간보 창안의 주체가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그에 따른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바람직한 음악교육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세종의 신악 창제, 세조에 의한 1행 16정간의 정간보 제작, 세종의 한글 창제 등 역사적 기록 및 정황들을 종합해 보면, 세종이 정간보의 창안 주체임이 현재로서는 가장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만으로 명확하지 않은 일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며 교육하는 음악학계의 태도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정간보 창안의 주체자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드러나기 전까지 "세종이 정간보를 만들었다" 또는 "창안하였다"는 내용으로 기술하기보다는 "정간보는 세종조에 창안되었다" 또는 "정간보는 세종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추정된다"로 바꾸어 기술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통해 본 왕의 위락활동 유형과 변천 (A Study on the Types and Changes of the King's Amusement Activities through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 강현민;신상섭;김현욱;마일초;한서정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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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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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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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분석한 조선시대 제왕들의 위락활동과 변천에 관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궁중 안팎 외부공간에서 행해진 왕의 위락활동은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연회형은 회례연, 진연(進宴), 풍정(豊呈), 진찬(進饌), 양로연, 사신연, 수연(壽宴), 곡연(曲宴) 등이었고, 강무형은 활쏘기, 격구, 사냥 등이며, 유희형은 나례(가면놀이), 처용무, 풍두희(?頭戱), 그리고 화산붕(불꽃놀이), 꽃놀이(賞花), 투호, 수박희(手搏戱), 낚시, 뱃놀이, 각투(角鬪), 상희(象戱), 잡희 등이었다. 위락 활동은 고려시대 답습기[1기, 태조~세조(예종)], 확립기[2기, 군사문화가 성리학 문화로 전환되었고 연회의 규례가 제도화, 성종~중종]. 단절기[3기, 임진왜란 등 불안한 정세 속에서 침체, 단절 초래, 성종~현종]. 중흥기[4기, 위락 문화 재정비, 수준 높은 왕실 문화의 자긍심 표출, 숙종~정조]. 그리고 쇠퇴기[5기, 세도정치로 왕권이 추락하면서 위락 활동이 급격히 퇴조, 순조~순종] 등 5단계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왕들의 사냥 관련 기사는 600건 이상 추적 되는데, 태종, 세종, 세조 등은 각 100여회 이상이었다. 사냥 대상은 호랑이, 곰, 사슴과 노루, 표범, 멧돼지, 매 등 이었고, 한양의 동북쪽 산림지역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산수풍광이 수려하고 지리에 익숙한 풍양, 철원지역 등 북방의 정세와 안전을 살피기 위한 방안, 그리고 풍양이궁(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장소성 등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단오절 세시풍속으로 대중에 확산된 격구놀이는 조선 초 왕과 신하들의 최상류층 마상격구로부터, 중기이후 무과시험의 마상격구와 상류층의 보상격구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쳐,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확산되어 겨울철 남성들의 집단유락문화로 전승되는 과정이 추적된다. 특히, 강무형 위락문화는 봄(활쏘기), 여름(투호), 가을(활쏘기), 겨울(격구) 등 심신수양을 겸한 4계절 행위요소로 작용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왕과 왕비들의 연향과 같은 위락 활동은 공식적 의례의 경우 내정(內庭)에서, 비공식적 관유(觀遊)의 경우 궁궐 후원이나 별궁에서, 특수 연회의 경우 모화관과 태평관, 기로소 등 별원(別園)에서, 활쏘기의 경우 성균관 사단에서, 사냥의 경우 금표가 설치된 강무장(금원과 원유)에서, 매사냥의 경우 한강변 광나루에서, 격구의 경우 보격구 중심으로 내정이나 별궁에서 다양하게 행해졌다. 즉, 외조, 치조, 연조, 후원의 범위를 넘어서 별원과 금원, 원유 등 한양에서 최대 100리 범위 까지를 활동영역으로 설정하는 위락문화 확장성(정(庭)${\rightarrow}$원(園)${\rightarrow}$원(苑)${\rightarrow}$원유(苑?))을 추적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를 통해 수준 높은 기록문화의 추적을 통해, 역대 왕들의 위락문화를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유형화 할 수 있었고, 위락 활동(진찬, 회례연, 양로연, 대사례, 사신연 등은 물론 사냥, 활쏘기, 격구, 투호, 처용무, 낚시, 뱃놀이, 불꽃놀이 등) 전모와 장소성, 그리고 상징적 의미, 역사적인 전승과정과 위락문화 등을 복합적으로 탐색할 수 있었다.

홍문관고(弘文館考) (A Study on the Hongmunkwan(弘文館))

  • 박영준
    • 한국비블리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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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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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6-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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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
  • The study is to trace the origin of the Hongmunkwan ana discuss its development and roles assigned in each succeeding stages of the history. The Hongmunkwan lived a long life through Koryo and Yi dynasties. It was a multi-functioned institution designed as a royal library, an educational institution, and a political reference center. Prior to the Hongmunkwan, there were some established institution with similar functions to its ones during the Three-Kingdom Era. One of such kind was the Sungmunkwan(崇文館), which was eventually renamed the Hongmunkwan by King Songjong(成宗) of Koryo in 995, and a distinguished scholar-minister was appointed at the position of directorship for management of the now status-raised institution where state documents and books were housed. The Hongmunkwan experienced some reforms during its long life. In 1420, King Sejong(世宗) of Yi Dynasty founded the Jipyonjon(集賢殿) within the royal palace in place of the Hongmunkwan. The Jipyonjon was an innovated Hongmunkwan where many scriptures were stored and distinguished scholars and officials studied on them, sometimes delivering lectures to the king. King Sejo(世祖) abolished the Jipyonjon in his second year(1456) and reestablished the Hongmunkwan designed as a royal library in place of the former in his ninth year. King Songjong(成宗) in his 10th year (1479) of the reign, reformed the Yemunkwan(藝文館), which existed from the beginning of the Yi dynasty, by extending its functions and afterwards absorbed it into the Hongmunkwan together with the functions of the former Jibhyonjon which were included in the Yemunkwan. He founded another Yemunkwan which had the roles of drafings and descriptions of royal decrees. In the 10th year (1504) of Yonsankun(燕山君), the Hongmunkwan was abolished and instead of it the Jindokchong(進讀廳) was founded with less authority and functions. But shortly after that, King Jungjong(中宗) refounded the Hongmunkwan with the same scale, same authority and same functions as the former, one. As the Hongmunkwan also had a function of the royal library it collected and kept numerous books and writings in it. Some books and writings of the Hongmunkwan were composed of those which had been transmitted from the Koryo Dynasty and the others were composed of those which had been collected in the country or purchased by the trade with China in the Yi dynasty. Also newly-compiled important books in the country were reprinted and one of them were send to the Hongmunkwan. In the 8th year (1784) of King Jongjo(正祖), the history of the Hongmunkwan, entitled the Hongmunkwanji(弘文館志), was written and editioned by the royal decree and it was reeditioned the 7th year (1870) of King Kojong(高宗). The Hongmunkwan was absorbed into the Kyujanggak(奎章閣) in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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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본부와 가맹점 간 목표불일치가 가맹점의 조절초점, 성과, 그리고 기회주의에 미치는 영향 (The Effects of Goal Incongruity between Franchisor and Franchisee on Regulatory Focus, Performance, and Opportunism of Franchisee)

  • 이병관;오세조;김상덕
    • 유통과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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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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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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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Purpose - The ultimate goal of a franchise system comes from its win-win strategy. Agency theory uses goal incongruity to examine complex contracting problems between buyers and suppliers. Goal incongruity within a contractual relationship can be defined as the agent's desire not to cooperate. It is the degree to which the contractual terms do not satisfy the agent's goals. The greater the goal incongruity between the agent and the contract, the more likely it is that the agent will meet the terms of the contract. Thus, goal incongruity between buyers and suppliers has close relationships with both behavioral and financial performance. This study tries to examine these relationships in the franchise context using a model including related variables, such as regulatory foci, financial performance, and opportunism, to explain the reasons that not all franchisees perform their best. In particular, the study examines the effects of goal incongruity on regulatory focus, and the effects of regulatory focus on performance and opportunism. In short, the objective is to determine goal incongruity's effect on regulatory foci, and the effect of regulatory focus on performance and opportunism. Research design, data, and methodology - This study used data collected from the franchisee managers of 104 franchisors in South Korea. The franchisors include more than 10 franchisees, the majority of whom have been in business for more than five years. The study also surveyed 104 franchisees, matched with their franchisors for the sake of a dyadic approach. The study used regression analysis to test the hypotheses. Results - H1 and H2 predicted that goal incongruity would decrease promotion focus and increase prevention focus. Supporting H1, the result indicates goal incongruity had a positive effect on promotion focus. However, H2 was not supported. Goal incongruity had no significant effect on prevention focus (β = -.375, t = -4.331 and β = -.145, t = -1.950, respectively). H3 and H4 predicted that promotion focus would increase financial performance and decrease opportunism. Supporting these hypotheses, the results indicate that promotion focus had a positive effect on financial performance and a negative effect on opportunism (β = .771, t = 7.899 and β = -.765, t = -6.778, respectively). H5 and H6 predicted that prevention focus would decrease financial performance and increase opportunism. However, the results do not support these hypotheses. The results indicate that prevention focus had no effects on opportunism or financial performance (β = -.130, t = -1.070 and β = .090, t = .641, respectively). Overall, the evidence generally supported the hypotheses. Conclusion - Goal incongruity between a franchisor and a franchisee increases the franchisee's financial performance and opportunism, and the relationship is mediated by promotion focus. Interestingly, however, prevention focus has no mediating effect between goal incongruity and performance. Even though no significant relation exists between goal incongruity and prevention focus, the results have two implications. First, decreasing goal incongruity can improve financial performance and suppress franchisee opportunism. Second, the relationship between goal incongruity and performance affects promotion-focused franchisees.

조선왕릉 봉분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일고 - 문헌에 기록된 석실과 회격의 구조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tructural Features of the Joseon Royal Tomb Tumulus)

  • 전나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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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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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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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사료를 통하여 조선왕릉의 내부와 외부 구조를 분석한 후 시각적으로 구성하고, 조선왕릉의 특징을 고려 왕릉, 조선 사대부 무덤과 비교하여 본 논문이다. 조선왕릉은 구조적으로 견고한 건축의 성격을 지닐 뿐만 아니라 내부와 외부에 수호를 상징하는 미술 장식을 넣어 오래도록 왕과 왕후를 수호하도록 기원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는"세종실록 오례의"와 "국조오례의"가 남아 있어 이 사료를 통하여 조선왕릉의 내부는 석실이고, 외부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조가 자신의 능에 석실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 이후로 조선왕릉의 내부는 모두 회격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조선왕릉의 조성 과정을 작성한 사료는 영조 때 편찬한 "국조상례보편"이 있다. 이 책에는 조선왕릉을 회격으로 조성하는 구체적인 과정이 나타나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한 왕릉의 병풍석은 십이지상을 새겼던 기존과 달리 모란을 새겨 넣는다. 모란은 궁궐의 장식화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조선왕릉에 모란이 나타난 점은 조선왕릉이 왕의 일상 공간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점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반포(斑布)의 의미와 형식 연구 (A Study on the Meaning and Types of Banpo [斑布] during the Joseon Dynasty)

  • 이지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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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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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4-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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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조선시대 직물 문화에 있어, 반포의 역사는 단편적이며 공백이 많다. 문헌 기록이 적은 것이 주요한 이유지만, 현재 그 실체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점도 크다. 반포는 무명의 한 종류이지만, 현재 전승되고 있는 전통 직물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반포는 얼룩이나 반점을 의미하는 반(斑)자와 직물을 의미하는 포(布)자가 결합한 단어이다. 백색 담론의 경계에서 반포는 연구 주제로서 주목받지 못하였다. 본 연구는 반포를 통해 조선시대 직물 문화의 일부를 복원하는 시도이다. 반포는 단순히 조선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동아시아의 직물 문화와 교류 발전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소재이다. 본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첫째, 조선시대 반포의 기록과 의미를 파악하였다. 반포의 기록은 조선 초기 세조, 성종 때 보이며, 반포의 제작과 실제 사용이 확인된다. 반포는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으나 현재는 단절되었다. 반포는 오색으로 면실을 물들여 짜는 사염 직조물로 고대 동남아시아에서 출현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반포와 유사한 형식으로 호, 섬, 침 등의 직물이 있다. 특히 반포와 호의 상관관계는 조선시대 반포를 이해하는 중요한 고리이다. 둘째, 중국·일본의 문헌 기록과 사례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반포의 의미 변화와 전개를 조명하였다. 반포의 등장과 발전은 동아시아에 면화가 도입되는 시기와 맞물려 움직인다. 동아시아에서 면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생산되는 시기인 송말원초 시기에 반포의 의미는 다변화한다. 중국에서는 명대를 기점으로 반포의 명칭이 화포, 기자포, 기자화포 등으로 바뀐다. 일본은 면의 도입이 늦은 만큼 변화된 의미가 수용되었고 발전하였다. 일본에서는 반포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지만, 같은 형식의 류조 직물이 확인된다. 이 류조는 호, 화포와 같은 개념으로 후대에는 호로 통합된다. 호, 화포, 반포 등과 같은 명칭은 나라마다 쓰임이 다를 뿐 동아시아에서 사염 직조물이라는 형식은 공유되었다. 셋째, 동아시아에서 공유한 반포의 의미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반포의 형식을 분류하였다. 조선시대 반포의 형식은 격자와 줄무늬로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 반포의 형식은 최근까지 전승되었지만 단절되었다. 앞으로 본 연구가 반포의 복원과 전승에 보탬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