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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지역의 농업환경 모니터링 (The Monitoring of Agricultural Environment in Daegwallyeong Area)

  • 박경훈;윤혜정;류경열;윤종철;이정주;황현아;김기덕;진용익
    • 한국토양비료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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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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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7-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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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대관령 농업지역의 연 평균기온은 $6.4^{\circ}C$, 1월 평균 기온은 $-7.6^{\circ}C$, 7월 평균 온도는 $19.1^{\circ}C$이었으며 강수량은 1717.2 mm, 안개 현상일수는 133일, 서리 현상일수는 59일 이었고, 특히 6월 8월 사이에 100 mm 이상의 집중 강우가 많았으며, 잦은 안개와 일조시간의 부족으로 병해충의 발생 및 작물생육이 불량한 것으로 관찰되었다. 수질모니터링 결과 작물재배시기에 T-N, T-P 등 영양물질의 수질오염도가 높았으며, 7월~8월의 강우에 의한 토양유실로 영양물질의 오염도가 높게 관찰되었다. 배추재배지에서 T-N 농도는 평균 $9.4mg\;L^{-1}$ (7.4~11.3)로 감자재배지의 평균 $4.4mg\;L^{-1}$ (3.1~7.2)의 2배 정도 높았고, T-P의 경우도 배추재배지에서 평균 $0.084mg\;L^{-1}$ ($0.061{\sim}0.10^1$)로 감자재배지 평균 0.036 (0.019~0.056) mg $L^{-1}$의 농도보다 약 2배 정도 더 높았다. 부유물질 경우는 배추재배지가 평균 $18.3mg\;L^{-1}$ (3.0~53.0)로 감자재배지 평균 $1.9mg\;L^{-1}$ (0.5~3.0)로 무려 9배나 높았다. 이처럼, 배추재배지가 감자 재배지보다 수질 오염도가 높은것은 대관령 지역에서 배추는 감자보다 생육기간이 짧고 또한 피복율도 작기 때문에 토양유실이나 양분유실이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경작중에 고랭지 작물재배지 토양을 분석한 결과, 작물별로 토양화학성의 차이는 작았으며, pH는 5.6~6.8사이, EC는 $0.67{\sim}1.13dS\;m^{-1}$, 유기물은 $18.0{\sim}42.4g\;kg^{-1}$, 유효인산은 $316{\sim}658mg\;kg^{-1}$, 치환성 칼륨은 $0.41{\sim}0.88cmol_c\;kg^{-1}$, 치환성 칼슘은 $3.7{\sim}7.1cmol_c\;kg^{-1}$, 치환성 마그네슘은 $1.2{\sim}1.9cmol_c\;kg^{-1}$ 범위였다.

고려 강도(江都)의 성곽과 궁궐 재고찰 (A reevaluation of the castles and palaces of Goryeo Gangdo (江都) using GIS)

  • 강동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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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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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4-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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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강도는 39년간 고려의 수도였으며, 이는 개경의 재현이었다. 하지만 몽골군의 침입이라는 급박한 전시 상황과 강화도의 지형적인 특징 등으로 인해 개경과는 다소 다른 성곽 체제와 궁궐의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강도의 성곽은 외성-중성-내성으로 구성된 3중성(重城) 체제로 이해할 수 있다. 외성은 가장 먼저 완성한 성곽이었으며 몽골군의 침입을 최전선에서 최우선으로 방비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었다. 그 구간은 조선시대 외성의 휴암돈~화도돈이었다고 추정된다. 중성은 강화산성 외곽의 토축성인 현 '중성'으로 볼 수 있다. 이 성곽은 고고학적 조사에서 확인된 축조 수법의 정교함과 견고성을 통해 볼 때 치밀한 계획 하에 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중성은 강도의 도성으로서 궁궐, 관청, 민가 등을 보호하기 위해 18년이라는 장기간의 축성 과정을 거쳐 『고려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이다. 내성은 궁성적 성격을 지닌 성곽이었다. 조선시대 강화부의 '구성(舊成)'이 이에 해당하며 개경 구성의 규모와 거의 일치하였다. 내성은 궁궐을 포함한 주요 관부와 부속 시설이 위치한 궁성과 황성의 통합, 즉 복합적 기능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궁궐은 개경에 준하였다는 문헌 기록에 근거하여 개경 궁궐도와 중첩한 결과, 승평문-선경전에 이르는 건축물의 중심축이 김상용 순절비각-고려궁지와 일치하였다. 따라서 강도의 궁궐은 기본적으로 개경과 동일한 건축물 배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내전과 부속 건물 등은 강화의 지형 조건을 감안하여 배치되었을 것이며, 이는 관청리 '궁골' 일대로 추정된다.

제주마 주파기록에 대한 연도별 추세 및 환경효과 분석 (Estimation of Annual Trends and Environmental Effects on the Racing Records of Jeju Horses)

  • 이종안;이수현;이재구;김남영;최재영;신상민;최정우;조인철;양병철
    • 생명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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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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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4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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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제주마의 연도별 주파기록 특성을 파악하고 경주기록에 대한 환경효과 분석을 위해 수행되었다. 한국마사회가 2002년부터 2019년까지 수집한 제주마 2,167두의 48,645개 관측치 정보가 분석에 사용되었다. 환경효과 분석을 위하여 관측치 빈도가 가장 높은 800 m 기준으로 주파기록은 보정되었다. 거리별 경주기록은 동일거리 기준으로 변환되었으며 연도별 비교가 가능했다. 그 결과 표현형에서 매년 주파기록이 0.242초(R2=0.66) 단축됨을 알 수 있었다. 보정된 주파기록에 대한 환경효과의 유의성 검증 위해 일원분산분석을 수행하였고 모형에서 설정한 모든 변수에서 고도의 유의성을 나타내었다(p<0.001). 이들 변수에 대해 단계적 변수 선발법을 적용, AIC 값 산출을 통해 모형 적합도를 평가하였으며 연도, 부담구분, 기수 순위, 조교사 순위, 주로상태, 날씨, 마령, 성별 순으로 변수 선택 시 가장 낮은 AIC 값을 갖는 모형이 수립되었다. 최종적으로 주파기록에 영향하는 환경효과 분석을 위하여 기수, 조교사 순위 및 마령 3가지 변수를 임의효과로 가정하였다. 그 결과 기수와 마령을 임의효과로 설정하였을 때 주파기록에 영향하는 환경효과 분석에 가장 적합한 모형인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에서 도출된 결과는 제주마 유전능력 평가를 위한 모형설정 시 기초자료로 활용 가능할 것으로 사료된다.

전통적 언어유희의 역사적 변천과 현재적 의의 - 한국 재담(才談)과 중국 상성(相聲)을 중심으로 - (The Historical Transition and Current Meaning of Traditional Language Plays - Focusing on Korean Jaedam and Chinese Xiangsheng -)

  • 강소천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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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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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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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한국과 중국 전통 언어유희 가운데 하나인 재담(才談)과 상성(相聲)의 역사적 변천과 현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한국의 재담과 중국 상성은 모두 웃음을 주기 위한 대표적인 언어유희이며 전통적인 공연예술이다. 재담과 상성의 기원은 우희(優戱)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희는 가장 전통적인 언어유희이며 우희를 전승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공연물이 파생되었다. 그 중에서 한국 재담과 중국의 상성은 비교적 우희의 전통을 잘 이어간 공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국 재담은 독립적인 공연물로써 자리를 잡았고 그 뒤로 박춘재 등 전문적인 재담 연희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공연하였다. 20세기 초 유성기 음반을 취입하면서 재담은 주로 극장 무대와 라디오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때 재담에서 새로운 공연물인 만담이 파생되었는데 만담은 재담보다 시사를 풍자하고 세태를 비판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만담은 한참 동안 인기를 끌었다가 21세기에 들어와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현재까지 한국에 전승하고 있는 재담은 가면극 같은 전통연희에만 남아 있다. 한편 한국 재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19세기 중후반에 구축된 중국 상성은 처음에는 천민의 비속한 기예로 여겨졌으나 20세기 초에 인기가 많아지면서 드디어 공연예술로써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20세기 중반 상성은 개혁을 통해서 사회를 칭송하고 교과하는 내용이 주로 다루는 신상성이 형성되었으나, 신상성에는 세태를 풍자하고 해학적인 내용이 축소되어 재미가 없어졌으므로 얼마 후 인기를 잃었다. 21세기 초 상성은 만담과 똑같이 소멸될 지경에 처했지만 전통을 부흥시키려는 젊은 상성 배우들의 노력을 통해 '전통'과 '소극장'으로 회귀하자는 또 한 번의 상성 개혁이 일어났다. 전통으로 돌아온 현재의 '전통 상성'은 다시 중국 관중들의 애호와 성원을 받고 있다. 한국 재담과 중국 상성은 역사와 연행양상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지만 현재 서로 다른 운명에 처해 있다. 두 공연물의 내용이나 형식 측면에서 공통점도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중국 상성의 경우 전통 곡예 장르 가운데 하나로 현재까지도 중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중요한 전통 공연물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독립적인 공연예술로써의 재담이 소멸되어 가고 이제는 가면극 같은 전통연희에만 재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국 재담과 중국 상성은 전승과정에서 유사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 재담이 사라진 반면 중국 상성은 잘 보존되고 전승되어 있는 이유를 본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백서주역(帛書周易)』 「요(要)」의 '부자노이호역(夫子老而好易)'장의 진위(眞僞) 문제 -공자와 『역』의 관계를 중심으로- (A problem of authenticity in the chapter 'Confucius became aged, and liked "The Book of Changes"' of yao 要, "essentials," seen throughout 『帛書周易』 the Mawangdui Boshu Zhouyi Manuscript. -in relation to Confucius and 『易』"The Changes"-)

  • 김상섭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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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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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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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백서주역" "요"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통행본 "계사" 하편 10장과 5장의 다섯 단락, 둘째 부분은 공자와 제자 자공(子贛)(자공(子貢))과의 "주역"에 대한 중대한 대화, 셋째 부분은 공자의 '손익지도(損益之道)'에 대한 설명이다. 둘째 부분에서, 공자가 늘그막에 점책인 "역"을 좋아하자 제자 자공은 공자의 평소의 가르침을 미루어 볼 때 공자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질문을 한다. 이에 공자는 "주역"을 복서(卜筮)로 사용하는데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점글을 즐긴다고 대답한다. 자공이 그렇게 한다면 사람에게 그릇된 것이라고 말하자 공자는 또 한 편으로 "주역"이 미래를 아는 것을 즐긴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백 번 주역점을 쳐 70번을 적중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에서 공자는 "역"의 점치는 면은 뒤로 하고 덕과 의를 살필 뿐임을 강조한다. 이 대화에서 의리와 상수를 함께 언급하는 공자의 역관이 펼쳐진다. 본 논문은 "요"의 둘째 부분 '부자노이호역(夫子老而好易)'장의 내용을 순서대로 인용하면서 공자와 자공의 대화 내용을 분석하여 의리와 상수 두 방면에서 공자의 주역관을 살펴보고 이것이 과연 공자의 본뜻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부자노이호역(夫子老而好易)'장의 내용이 과연 공자의 역관을 기록한 것인가 하는 진위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아울러 공자와 "역"의 관계도 명백하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광주권번을 통해 본 광주지역 판소리의 전승양상 (Transmission of Pansori In Gwangju Region : A Case Study Of Gwangju Gwonbeon)

  • 이명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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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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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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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광주권번은 호남의 대표적인 권번으로, 일제강점기부터 1951년 광주국악원이 창립되기 이전까지 광주지역의 국악교육을 수행한 곳이기도 하다. 광주국악원 역시 광주권번의 후신으로 광주의 국악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운 기관이다. 따라서 근현대 광주 국악사를 거론할 때 광주권번은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그럼에도 광주권번 자체는 물론, 관련 연구 등은 아직 미비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파악된 광주권번에 대한 연구는 권번운영과 무용 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광주는 지역적 특성상 판소리가 활성화되었던 곳이다. 1918년 당시 기생에 대한 기록인 "조선미인보감"에 의하면, 다른 지역에 비해 광주권번의 기생들은 판소리에 특화되어 있기도 했다. 또한 광주권번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또 학생으로 교육을 받았던 인물들 중 오늘날 대중적으로 알려진 수많은 명창들이 있다. 이들이 증언하는 광주권번과의 인연은 광주지역의 판소리 전승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하지만 광주권번과 판소리의 상관성은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된 바 없는 실정이다. 특히 광주권번에 관한 판소리 명창들의 증언은 현재 파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어 그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광주권번과 광주국악원의 창립은 광주지역 국악인 양성교육을 위한 초기 사설학원으로서 판소리 교육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광주지역의 국악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에 필자는 곳곳에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명창들의 증언을 한 곳에 모으는 작업에 중요성을 두고 본 논문을 작성하였다. 이를 통해 광주권번과 광주국악원에서 활동했던 명창들의 활약을 재구성할 수 있었고, 일제강점기부터 1973년경까지 광주지역의 판소리 전승양상과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논문을 기점으로 광주지역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관련 연구가 보다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고성오광대 문둥북춤 춤사위 연구 - 시대적 변화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dance movements of Go-sung Five-Clown Leper Drum Dance - Focusing on the variation over time -)

  • 허창열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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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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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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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고성오광대 제1과장 문둥북춤은 양반의 자손으로서 조상들의 죄업으로 문둥병에 걸려 고통으로 괴로워하다 신명을 통해 극복한다는 내용을 대사 없이 춤으로만 표현한다. 고성오광대 문둥북춤의 문화재 지정 이후 현재까지 변화양상을 살펴본 결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둥북춤의 춤사위가 더 많아지고 동작이 구체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5년 문둥북춤 춤사위부터 2000년 문둥북춤까지 춤사위가 5개에서 20개로 확장되고 이전보다 구체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문둥북춤에서 사용하는 소도구 북의 표현하는 방식이 65년의 경우 북을 치고 어르는 춤사위만 있었다면, 1988년의 경우 현재와 같이 북과 북채를 무대에 두고 등장하고 춤사위도 14개로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00년 문둥북춤의 경우 문둥이가 북을 잡고 난 이후부터 신명나게 춤을 추며 자진모리장단으로 발전되는 형태는 이전보다 춤사위가 더 다양해지고 이야기 구조를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는데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성오광대의 대표적인 춤사위 배김새가 1965년엔 보이지 않고 1969년엔 한 방향으로만 배김사위를 하는데 1988년과 2000년 문둥북춤에서 보여지는 배김사위는 좌우로 대칭하여 한 번씩 연행해 현재의 배김사위와 같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사를 위하여: 아키비스트와 역사가의 역할 -공공기록보존소를 중심으로- (For History : Roles of Historians and Archivists - Public Archives, Archivists, and Historians -)

  • 이상민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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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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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5-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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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Chief Consultant Archives Government Archives & Records Service -table of contents- 1. Introduction 2. Relationship of Historical Studies and Archive 3. Relationship of Archives and Archives 4. Conclusion; Historians, Archives, and Archivists, and Their Roles This essay is mainly written for historians who may have "little or limited experience" in dealing with archives and archivists in their course of historical research. It may sound very ridiculous to say that "historians have little or limited experience" in using archives but it is also true that many Korean historians have depended on various compiled editions of historical materials or personally donated and/or collected materials when they do research, rather than they would visit archives and search for the materials by themselves. This is the main reason for that the public archives in Korea have not served historians well and effectively, and vice versa, that historians have not visited archives sometime with no knowledge of archives, and have not requested opening of archives for their research. It is a simple fact that historian's study depends on the records he/she uses. Without records, there should be no history. Use of archives for historical research is a common thing and a must in modern archives. Records are selected to be preserved in archives for their preservation as well as their future use. Who select the records as archives? Archivists do mostly. Then, what are the criteria for the archivists to chose records as permanent preservable archives? Answers to this fundamental question have been provided by many historians and archivists. The closest answer may be that selecting archivists would be better trained and equipped with historical research and knowledgeable of the major trends in historical research. With his/her own experience of historical research and tracing the trends of historical studies and materials used in the historiography, they could chose better and appropriate records for future use using their prudence and discretion. It also means that historians have had influence on archivists in their selecting archives by providing the theme and context of historical studies of the time. Though not necessarily becoming a historian themselves, selecting or appraising archivists should understand the process of creating the records and should know how they become archives. This is a precondition to become a good archivist. But that's not all. They must know how the archives are used and what archives are used for what purposes. Among many other roles of modern archivists, selecting and describing the archives are the foremost tasks of an archivist. Archivists therefore developed modern methods to select future archives based on functional analysis and records series concept rather than a record file or item as a unit of selection. Historians are users or consumers of the archives held in the archives building or repository. The quality of their study depends on the "quality" of the materials they use. With the help of archivists not to mention of reference service, historians owe much to archivists in having an access to the materials they need, intellectually and physically. Too many closed archives and too long closed archives in the archives repository would benefit neither historians nor archivists. However, archivists can mostly react only to archive requests and demands made by historians for more wide accessibility. Using the FOIA, as in the U.S., or the Information Opening Act, as in case of Korea, historians can promote the use of historical materials as well as promoting accountability and transparence for the benefit to society as whole. In this context, it is vary desirable to establish a close professional relationship between historians and archivists even in the age of information society. At present, historians need more understanding of operation and importance of archives while archives administration need to realize the potential archival demands from research community and civil movement for clean government.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공문서의 성격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Seoul Olympic Organizing Committee's Official Documents)

  • 천호준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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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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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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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이 연구는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의 공문서에 대한 균형적 시각을 제공하고, 이용과 관리의 체계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공문서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에 대한 사항을 고찰하고 공문서의 생산 구조를 분석하여, 기록이 생산되는 원리를 파악하였다. 이후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공문서 관리의 실제와 잔존 기록과의 관계를 확인하여 이들과 생산 원리와의 종합적인 분석을 통해서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공문서의 특성을 제시하였다.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의 공문서는 조직 구성의 난맥상과 의사 결정의 독점적 양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던 조직에서 생성되었으며, 조직 규모에 적합하지 않은 문서관리 부서와 비현실적인 문서 관리 규정, 그리고 왜곡된 공문서의 생산과 관리환경 속에서 생산, 관리되었다. 또한 현재까지 남겨진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공문서는 미흡한 관리 시스템의 영향 하에 놓여 있는 것이 있는 현실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토대로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공문서는 기록 출처의 다원성과 파편화, 잔존 기록의 불균형성 그리고 이용과 활용이 극히 제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이상의 연구결과를 도출한 본 연구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공문서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방법론을 마련하기 위한 후속연구에 공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구체적인 후속연구로는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공문서를 대상으로 한 정리와 평가에 관한 연구를 제시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연구는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등과 같은 다수의 국제 스포츠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후대에 문화적 자산이 될 이들 행사에 대한 온전한 기록화에 본 연구는 일정한 공헌을 할 것으로 사료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공공기록물관리법령 속에 구현되어 있는 한시적 기관에 대한 기록 관리 규정의 보완과 국제 스포츠 이벤트 행사로서 서울올림픽대회와 같이 중요한 역사상을 온전하게 기록화하고 이를 후대에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기록관리 대안 모델을 기대해 본다.

기록학의 도입과 기록관리혁신(1999년 이후) (The Introduction of archival science and the renovation of records Management(since 1999))

  • 김익한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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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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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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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이 글에서는 1999년 기록관리법이 제정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록관리가 어떻게 발전해왔고 기록학 분야의 성장은 어떠하였는지를 다루고 있다. 특히 기록관리와 관련된 주체를 기록생산기관, 기록관리기관, 기록 전문가 집단, 시민사회로 설정하고 각 주체들의 시기별 변화의 특징을 조망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그 결과 기록관리기관과 전문가 집단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록생산기관과 시민사회 영역이 아직도 불균형 발전하고 있는 현상을 지적하였다. 기록관리법 제정 시기의 한국의 기록관리는 국가기록원과 전문가 집단의 일부 선도적 인물들에 의해 기록관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전형적인 엘리트 모델에 의한 성장 시기로, 결과적으로 기록관리법의 제정이라는 역사적 성과를 이루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각 주체의 기형적 발전 양상이 두드러졌다고 평가된다. 참여정부 시기의 한국의 기록관리는 기록관리 혁신이 강력하게 추진됨으로써 이전 시기와는 구별되는 발전의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를 추동한 힘은 기록관리기관과 기록 전문가 집단의 성장이 보다 보편화 되어 엘리트 모델을 일정 부분 극복할 수 있었던 데서 찾아진다. 특히 대학원 교육을 통해 성장한 전문가 집단이 양질적으로 성장하여 기록관리기관과 전문가 집단이 협력하는 패턴이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국가기록관리 혁신 로드맵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실천됨으로써 한국의 기록관리는 점차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의 단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기록생산기관과 시민사회 영역에서의 기록관리의 발전은 제한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전문 교육의 정상화와 전문적 교육을 통해 배출되고 각 기관에 배치된 기록연구사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각급 기관에 기록관리기관을 서둘러 설치하고 기록연구사를 조기 배치하여 기록생산기관의 미발달 상황을 조속히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