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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의 뮤지컬 수용 역사와 문화제국주의 (Acceptance History of Korean Musical Theatre in 1960s and Cultural Imperialism)

  • 이계창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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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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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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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뮤지컬은 유럽의 오페라로 대표되는 서구 음악극 전통에서 시작된 대중예술 장르로서 20세기 미국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꽃을 피웠으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공연예술 분야에서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상업예술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장르의 특성 상 드라마의 전개나 캐릭터의 표현 등은 말이나 몸짓이 아닌 음악을 주요 매개체로 사용하며, 그 음악의 스타일은 특정 계층이 아닌 대중의 기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근대화는 곧 서양화이고 일본이 조선의 개화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일제의 식민주의 음악교육은 조선 민중에게 일본 이데올로기 및 문화를 강제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일본에의 협력과 순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가 편찬한 "보통교육 창가집"을 교재로 한 식민주의 음악교육은 한민족의 음악적 정체성이 일본음악 및 서양음악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해방 이후 냉전체재 하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에 따른 친미적 남한 정부 수립을 위한 자본주의 경제 메커니즘과 더불어 '미8군 쇼 무대'와 '영화'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문화, 이 두 가지 요소들의 유입으로 인한 비가시적인 '문화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우리의 전통음악은 '국악'이라는 단어에 갇혀 '과거의 음악'이라는 의미로 한정되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으로 뮤지컬을 접하게 되었고, 우리 전통예술의 현대화를 통한 '건전한 문화'의 보급을 지향한 당시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 기조에 따라 '한국적 뮤지컬'을 지향하는 '예그린악단'이 창단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예술을 기반으로 현대화 된 공연예술을 만들고자 했던 계획은 1966년 <살짜기옵서예>의 성공으로 가능성을 보였으나, 이후 정권 실세의 후원 중단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주체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상실한 관변단체로 전락하는 운명에 처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일제의 식민주의 음악교육과 해방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이라는 문화제국주의 책략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한국 뮤지컬의 태동기에 우리의 전통연희 양식이 서양 음악과의 교류, 확장을 통한 자주적인 민족예술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1960년대의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이 21세기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을 서구 라이센스 뮤지컬이 주도하게 된 배경이며, 아울러 서양음악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 창작 현실의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한중에서의 일본 고전극 노(能) 연구의 성과와 경향 (Results and Trends of Research on Japanese Traditional Theatre 'Noh' in Korea and China)

  • 강춘애
    • 한국연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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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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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9-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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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was to summarize Korea and China's researches on Noh and to examine main domain in this field, by investigating the academic books and articles published in two countries. In 1960s, since Nohgaku has been introduced to China, academic articles on Zeami's theories and aesthetics have emphasized on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Chinese plays and Japanese Nohgaku through the similarities of oriental plays. The number of researches on Kabuki is almost twice as that of researches on Noh in China. While most researches on Kabuki were compared with the styles and music of Pecking Opera and the theatrical theories of liyu[李漁], those on Noh has been highlighted the comparative studies on $Y{\bar{o}}kyoku$[謠曲], Chinese Noh plays. The main difference among the researches on $Y{\bar{o}}kyoku$ in Korea and China was the material regarding characters of Noh. Because song yuanzaju[宋 元雜劇]and Nohgaku in Chinese-Japanese plays were the mature form of the classic plays and those were representative of traditional nation plays, this researches tried to ascertain the cultural origins of two countries regarding the aesthetic characteristics by referencing lyrical and narrative features[曲詞] of yuanzaju[元雜劇]and the classic waka of Nohgaku. While the comparative studies on Noh and song yuanzaju and kunqu[昆劇] in China were prevalent, national researches have emphasized on the inner world of the main character and dramaturgy through the verbal description of Noh. Especially, this research tried to investigate the inner world of the main character and the intention of the writers through the verbal description of Noh authorized in the history of the works. Also, the researches on Buddhism in the Middle Ages and religious background were examined significantly. In addition, the $Y{\bar{o}}kyoku$ has influenced on European modern playwrights and the comparative studies between the materials of $Y{\bar{o}}kyoku$ and Western modern plays were concerned. In Korea, the comparative studies on Noh between Korea abd Japan has been most focused on the origin theory of Noh. The fact that appearance theory of Noh had originated from Sangaku was common opinion among Korean, Chinese, and Japanese scholars. However, they are agree with the opinion that according to the formation of the different genres, Noh's mainstream was different among three countries despite of the same origin. Yuan drama and Noh play have the same origin, but different branch. In relation to the Noh's origin theory, there are literature comparative studies in religious background, the studies presumed the origin of instrumental music related to those in mask plays, and the comparative studies between Korean mask plays and $ky{\bar{o}}gen$ of Nohgaku. Kyogen is the Comedy inserted among the stories in Nohgaku performed in just one day. Therefore, $ky{\bar{o}}gen$ must be discussed separately from the relations of 'shite[任手]'s inner action veiled with masks. This research figured out that the lacking points of the two countries' researches were the acting methods of Noh. Academic articles written by foreign scholars studying Korean and Chinese theatres should be included when this issue will be dealt with. In Korea and China, translation studies and writings regarding Nohgaku have studied by those who are major in Japanese literature or oriental literature. This case is the same in Korea in that scholars whose speciality is not theatre, but Japanese literature has studied. Therefore, this present study can give a good grasp of whole tendency on Nohgaku's research in theatre fields.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조각상 연구 (A Study on the Sculptures from Donggwanwangmyo [East Shrine of King Guan Yu])

  • 장경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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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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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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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중국 촉(蜀)나라의 장수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이다. 이러한 사당이 우리나라에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598년 정유재란 때부터이다. 당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은 관우의 힘으로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길 염원하면서 그들의 주둔지마다 관왕묘를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중국 명나라 황제와 조선의 국왕은 외세를 물리치려는 의지로 관왕묘를 세우고자 하였다. 1599년 8월 조선 정부는 '동관왕묘조성청' 이라는 관청을 임시로 설치하고 인력과 물력을 총동원하였다. 명나라 기술자의 감독 아래 연 2,400명의 조선 장인과 역군(役軍)들이 중국 제저우(解州) 관제묘(關帝廟)를 본으로 삼아 영건하여 3년 뒤인 1602년 봄에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 한 중 기술자가 협력하여 세웠기 때문에 관왕묘의 정전 건축과 내부 구조 및 조각상에는 양국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관왕묘 내부에는 7기의 조각상이 서 있다. 관우상 1기는 금동상이며, 나머지 6기는 소조상 위에 채색한 것이다. 이들 조각상들은 1602년에 만들어졌고, 관우와 그를 배위하는 관평(關平) 주창(周倉) 조루(趙累) 왕보(王甫)는 삼국시대에 실존했던 인물들의 초상조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복식은 관우를 추숭하던 당송대에 확립된 도상을 따르고 있었으며, 세부적으로는 명대적 요소와 조선적 배치가 절충되어 있었다. 이로 미루어 송대 이후 확산된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판화의 도상이나 명나라 만력황제가 1593년 조영한 제저우 관제묘의 명대 관우 도상이 동관왕묘를 제작할 때 직접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재 동관왕묘와 비교되는 중국 제저우 관제묘의 경우 건축과 조각상이 모두 청대 18~19세기에 중건된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동관왕묘의 조각상은 17세기 초 한 중 관왕묘 중에서 제작시기가 가장 이른 예로서 당시의 원형을 지니고 있다는 점, 한 중 기술자의 합작으로 규모가 매우 크다는 점, 금동으로 만든 관우상은 유일하다는 점, 문무 배위상을 각 1쌍씩 마주 배열하여 조선왕릉의 석인 배치와 친연성이 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서울지역 공동체신앙 전승과정 고찰 조선시대 각사(各司) 신당(神堂)의 존재양상과 변화를 중심으로 (A Study of the Transmission of Community Religion in Seoul Focussing on the Shrine of the Authorities and the Change)

  • 오문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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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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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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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서울 공동체 신앙은 조선시대 각 관서에 속한 신당의 제사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각 관서(官署)의 부속공간으로 존재하던 신당의 제사 주체는 하급관리들이었다. 이러한 신당은 대개 부군당(府君堂)으로 불리웠다. 기록에 등장하는 부군당은 대개 1~3칸 정도의 규모이며, 내부에는 신앙의 대상인 부군을 그림으로 그려 봉안하였다. 역사기록에는 부군당의 제사대상이 최영장군이나 송씨부인으로 등장하는데, 실제 부군당의 제사대상은 각각 달랐다. 부군당의 제사 대상 가운데는 왕건, 단군, 남이장군, 제갈공명, 김유신, 임경업, 공민왕, 태조 이성계, 조선의 개국공신인 조반, 남한산성 일대의 지역에 전승되는 설화의 주인공인 홍씨대감과 처첩, 임진왜란 이후 신으로 모셔지기 시작했던 관우와 제갈공명 등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조선시대 각 관서 신당의 의례를 오늘날 서울지역 마을굿의 양상과 정확하게 비교해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록을 통해 볼 때 굿과 고사의 형태가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관서 신당 의례는 점차 민(民)의 공동체신앙으로 자리잡아, 서울의 문화적 변동 맥락 속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다. 본고는 조선시대 관서에 속한 신당의 존재양상을 살펴 보고, 관서 신당의 의례가 민간화되는 전승의 맥락을 장충동 관성묘, 방산동 성제묘, 서빙고 부군당의 사례를 통해 살펴 보았다. 방산동 성제묘가 민간화 되어가는 과정은, 군인들의 신으로 인식되던 신령 관우가 역사적 변화과정 속에 놓이게 되면서 군인들의 신에서 상인들의 신이 되었고, 이후 특정지역 상인들의 공동체적 신앙 대상이 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충동 관성묘는 남영 군인들의 부군당으로서, 관성묘 주변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영신사(永信社)라 불리는 제사집단에 의해 제사가 전승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구성원이 된 이 일대 마을의 공동체신앙으로의 전승이 자연스럽게 계승되었다. 서빙고 부군당의 민간화 과정은 조선 후기 장빙역(藏氷役)의 변화와 맞물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태봉 철원도성의 고지형과 구조 분석 연구 (A Study on the Paleotopographic and Structural Analyses of Cherwon Castle in Taebong)

  • 허의행;양정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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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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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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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태봉 철원도성은 현실적 접근의 어려움으로 인해 조사와 연구에 제약이 있다. 따라서 현재 고고학계에서 이용되고 있는 고지형분석 방법론의 적용과 해석을 통해 도성의 구조와 내부 공간 구획의 여러 모습을 파악하였다. 태봉 철원도성은 외성의 북쪽 구릉지성 지형에서 시작하여 남서방향으로 흘러 내려온 다섯 줄기의 평탄한 구릉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내·외성벽은 각 구릉의 능선 줄기를 중심으로, 궁성벽은 그러한 능선 줄기의 중심 구릉지에 축조하였다. 각 성벽에는 여러 방향의 성문과 문지 등이 확인되는데, 도성 내부 건물의 방향과 지형 형태에 맞추어 설치한 것으로 파악된다. 도성 내 궁성은 평면 사다리꼴의 형태이며, 그 내부에는 궁전지와 관련 건물지 그리고 배수관련 지형 등이 확인된다. 궁전의 동서방향으로는 추정 도로와 함께 성문의 위치도 확인되었다. 궁성과 내성의 공간은 각각의 구릉 지형에 맞추어 평탄대지를 조성하고 건물지를 배치하였다. 내성의 남쪽에는 연못지로 추정되는 저수지가 궁성에서 내성의 중심을 잇는 수직 선상에 자리하는 모습이다.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건물지 흔적은 잘 관찰되지 않지만 평탄한 대지 지형의 존재로 그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다. 태봉 철원도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북동 방향으로 약 9도 치우쳐 평면 장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구릉성 지형의 형태를 따라 설계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남서벽의 꺽임 현상 또한 습지성 지형을 회피를 의도한 것으로 파악된다. 아직 도성 내부의 건물지 기능과 성격이 불명확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 공간 활용의 모습도 분명치 않다. 하지만 내성은 궁전과 함께 관아 건물지로서의 이용 공간으로서, 외성과 내성 사이 공간은 일반민의 생활 공간으로서 구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리제로서의 구획 흔적도 구릉성 지형의 존재로 인해 그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일부 지형은 평탄한 지대가 넓게 확인되고 있어 정연한 공간 구획의 모습을 배제할 수는 없다. 각 성벽의 축조 선후 시기나 방식 등도 아직 명확치 않지만, 적어도 지형을 이용한 도성의 축조와 내부 공간 구조의 활용을 이해할 수 있다.

실전 판소리의 재탄생 연구 -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중심으로 - (The study on the rebirth from a lost pansori : An aspect of a changgeuk )

  • 이소정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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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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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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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논문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마담 옹(Madame Ong)>이라는 제목으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국립창극단의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통해 실전판소리가 어떻게 새롭게 재탄생되었는지, 그 과정에 주목하여 이 작품의 텍스트와 음악적 특징을 분석해보았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현재에는 실전된 판소리 <변강쇠가>를 각색하여 창극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변강쇠의 치상부분인 후반부의 내용을 삭제하고, 옹녀가 변강쇠를 되찾아오기 위해 장승들과 전쟁을 벌이는 내용을 새롭게 삽입하여 텍스트의 변화를 주었다. 또한 <변강쇠 점찍고 옹녀>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원작과는 다른 관점으로 변강쇠가 아닌 옹녀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동안 음녀로만 여겨졌던 옹녀를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인으로 변모시켰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모든 소리가 작창으로 만들어졌는데, 극과 가장 부합되는 소리, 즉 이면에 맞는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창자간의 화음을 넣는 등, 여러 가지 시도가 이루어졌다. 또한 소리를 하는 인물 혹은 등장인물의 심경 변화에 따라 그 소리의 조와 성음이 달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특히 반주음악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소리북을 여러 개 사용하거나 대중가요에서 왈츠, 클래식, 각도민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사용하는 등 도전적인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극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고 사실감 있는 극적표현을 도와주었다. 이렇듯,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고전서사를 차용했지만,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기존의 창극에서 벗어난 다양한 변화와 시도들을 통해, 온고지신의 면모를 갖춘 새로운 창극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현대 사회에서 창극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해 준 작품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화의식(文化意識)과 그 실천(實踐) (Cultural awareness and its practice of Jang Hyeongwang)

  • 박학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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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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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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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고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학문 체계 내에서 그가 구체화시켰던 문화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그 기저가 되는 인문 정신, 문화 의식과 연관된 그의 국토 인식 및 우리 문헌 자료에 대한 그의 특징적인 논의와 실천의 모습을 검토한 것이다. 그리고 이 논의의 출발점은 최근 역사학계에서 여헌의 학풍을 둘러싸고 제시된 엇갈리는 평가에 기초한다. 여헌은 문화와 관련된 기본적인 인식 체계로서 인문 정신의 구현에 주목하였다. 그는 '도(道)'의 가시적이며 현상적 대상이 '문(文)'임을 제시하고, '도'와 '문'의 불가분리성을 제시하고, 인문의 실현이 천문(天文)과 지문(地文)을 구현하는 요체임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인문의 실현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였으며, 인간이 실현해야 할 인문의 내용을 '도덕의 실천'으로 규정하였다. 인간이 일상에서의 행위로부터 사회 윤리와 교화의 규범, 그리고 천지만물의 화육(化育)에 이르는 것이 모두 인문의 내용이라 이해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이 육경(六經)에 온전히 담겨 있다고 보았다. 여헌은 인문 정신의 실현이 도덕의 실천임을 강조하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인문 실현의 터전으로서 지문(地文)에 대한 이해를 우리 국토에 대한 인식과 결부시켜 형세(形勢)를 중심으로 국토를 파악하고, 중국과 비견되는 '소중원'이라 규정하였다. 긍정적인 국토 인식 하에서 우리 국토에서 배태된 우리의 풍속과 문화가 중국에 결코 뒤지지 않음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그는 우리 역사 속에서 드러난 문헌에 대한 애착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끌었다. 그는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의지를 그의 문인인 김휴(金烋)를 통해 우리나라 최고의 도서 해제집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으로 구체화하였다. 이 책의 편찬 작업이 전란을 거치면서 피폐해진 현실 상황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정리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의식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국학정신이 앙양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여헌은 인간 도덕에 대한 자각과 실천을 바탕으로 인문세계의 실현을 누구보다도 강조하였고, 이러한 생각과 의지는 우리 국토와 문화, 그리고 문헌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유학 전통의 도덕 실천을 강조하는 그의 인문 정신은 인간 도덕의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자 실천 의지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가 보여주었던 우리 국토와 문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실천적 지향은 비록 중국과 비교되는 차원에서 제시되었지만, 중국에 대한 추종이라기보다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소림일다(小林一茶)의 ≪시경≫ 배구화(俳句化) 양상 고찰 (Kobayashi Issa's ≪Shi jing≫ Hiku-ka and that meaning)

  • 유정란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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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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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9-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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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글은 소림일다(小林一茶)(고바야시 잇사, 1763-1827, 이하 '잇사'라고 칭함)의 ${\ll}$시경${\gg}$ 배구(俳句)(이하 '하이쿠'라고 칭함)화(化) 양상을 살피고 그 의미를 도출한 것이다. 잇사는 1803년 ${\ll}$시경${\gg}$을 공부하고, 이를 하이쿠로 재창작하여 ${\ll}$향화구첩(享和句帖)${\gg}$을 작성했다. 현재까지 이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없으며, 일본과 중국에서 잇사의 ${\ll}$시경${\gg}$ 수용 양상을 다룬 바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주로 국풍(國風)에 한정되었으며 연구자들 사이에 용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등 다양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작품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번역이라는 관점을 지양하고 배구화(俳句化)라고 명명하였다. 나아가 두 장르간의 심층적인 교류와 영향 관계를 문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 ${\ll}$시경${\gg}$ 배구화(俳句化) 양상을 주제의식의 재현, 시어와 이미지의 변용, 의경 전화와 제목 차용의 층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주제의식의 재현에서는 주로 고향이나 부모를 그리워하는 작품이 선별되어 배구화(俳句化) 되었다. 이때 단순한 주제 차용의 수준이 아니라 핵심 의미를 도출, 주석을 고려하여 해석하거나 잇사 개인의 원작 이해가 많이 개입되었음을 살폈다. 시어와 이미지의 변용에서는 해당 원천들의 의미를 절취하거나 조합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 작품이 두드러졌다. 의경 전화에서는 일본적 정경으로 그 분위기를 바꾸는 작품이 있었는가하면, 제목 차용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작품도 존재했다. 배구화(俳句化)의 의식 지향은 ${\ll}$시경${\gg}$의 감정이나 격앙된 어조, 비난 등을 의도적으로 탈락시키고 이치를 배척하거나 시교(詩敎)의 관점을 탈피한 것, 도덕적 이상을 담아내지 않는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잇사는 ${\ll}$시경${\gg}$을 하이쿠로 옮겨 올 때 매우 많은 부분에서 하이쿠적인 감상과 습관을 자각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잇사가 ${\ll}$시경${\gg}$을 배구화(俳句化)한 것의 의미는 우리의 ${\ll}$시경${\gg}$ 수용과 대조해볼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에서는 ${\ll}$시경${\gg}$을 언해하였지만 의역이 아닌 직역을 하였기 때문에 ${\ll}$시경${\gg}$ 원문의 글자가 유지되었다. 일본의 경우도 훈독체로 ${\ll}$시경${\gg}$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원 글자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잇사는 ${\ll}$시경${\gg}$의 출발점인 민요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하여 일본의 민족어 시가 형태로 그 내용을 옮겼다.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ll}$시경${\gg}$ 수용 방식을 벗어나 잇사는 민족어 시가로 ${\ll}$시경${\gg}$에 대응한 것이다. 따라서 잇사의 ${\ll}$시경${\gg}$ 배구화(俳句化)의 의미를 본래 ${\ll}$시경${\gg}$의 출발점인 노래 그 자체로 인식하여 받아들인 태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2015 개정 실과(기술·가정) 교육과정의 초·중등 '가정생활' 분야의 연계성 및 중복성 분석 (An Analysis on the Connectivity and Duplication of Curriculum Contents between Elementary and Secondary Levels on 'Family Life' Contents Area of the Practical Arts(Technology & Home Economics) Subject in the 2015 Revised Curriculum)

  • 윤지현
    • 한국가정과교육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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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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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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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의 목적은 교육과정 분석을 위한 연계성 및 중복성의 준거유형을 개발하여 현행 2015개정교육과정의 초등 및 중등의 '가정생활' 분야의 내용 연계성 및 중복성을 분석함으로써 차기 교육과정 구성을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다. 교육과정 구조화의 원리가 초·중등에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여 연계성과 중복성을 분석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과정 내용 체계화 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연계성과 중복성의 준거 유형들을 개발하였다. 연계성은 '분절된 위계형'과 '나선의 위계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복성은 '반복형'(상), '재현형'과 '심화형'(중간), '치환형'과 '생략형'(하)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중간 정도의 중복성을 보일 경우 연계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초·중·고 내용을 비교한 결과, '인간발달과 가족' 영역에서 심화형 중복성을 나타내어 높은 연계성을 보이며, '가정생활과 안전'에서는 '안전' 개념이, '자원관리와 자립'에서는 '생애설계' 개념에서 낮은 연계성을 보였다. 셋째, 교육과정 성취기준을 분석한 결과, 초등에 비해 중등의 '가정' 내용은 난이도와 교과 내용의 양의 증가폭이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심화형 중복성을 보이며 연계성이 높아 체계적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있으나 '가정생활' 분야의 핵심 개념 가운데 '안전'과 '생애설계'는 학교급 간의 연계성이 낮은 편이었고 '생활문화'와 '관리'는 중간 정도의 연계성을 보이며 '발달'과 '관계'는 높은 연계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선형 교육과정으로 교과의 내용을 구조화 할 때는 초등과 중등의 내용을 유기적으로 연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실과와 기술·가정 각각의 학교급별 교과 지식체계를 구성하는 특성들을 고려한 핵심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해야 하고, 적정한 분량 및 난이도를 고려해야 하며, 적정한 내용 중복의 정도를 고려해야 하고, 동일 학교급 내에서 동일 주제의 반복을 최소화 할 필요가 있다.

한국 특촬물 시리즈에 나타난 과학적 인식 - <지구용사 벡터맨>을 중심으로 (Scientific Awareness appearing in Korean Tokusatsu Series - With a focus on Vectorman: Warriors of the Earth)

  • 박소영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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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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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3-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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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지구용사 벡터맨>은 한국 특촬물 시리즈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특촬물 시리즈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80년대 중반부터 계속된 일본 특촬물의 인기와 로봇 애니메이션의 유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어린이 프로그램의 고질적인 문제인 수입프로그램의 범람과 거듭된 재방송으로 인해 국산 어린이 프로그램에 대한 필요성이 꾸준히 대두되고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한국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줄어들면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부담감 또한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지구용사 벡터맨>은 애니메이션이 아닌 특촬물로 제작되었는데, 이때 특수효과기술을 방송국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던 시기적 특성과 맞물려 컴퓨터 시각효과가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지구용사 벡터맨>이라는 새로운 국산 특촬물 시리즈의 등장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벡터맨 시리즈는 이제 우주의 과학기술이라는 모호한 단어 대신 DNA 합성, 뇌세포 변이, 특수심리조종장치 등 구체적인 과학적 용어들을 활용해 우주적 존재들의 능력을 설명한다. 비록 그 과정과 원인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공상과학이 아닌 구체적 용어들로 정의되는 모습은, 이제 한국사회에 과학적 상상력이 구체적인 형태로 발현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벡터맨과 우주인들의 동등한 관계는 지구의 과학 용어로 설명되는 우주의 과학은 지구로 대변되는 한국 과학 기술 발전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성캐릭터들은 과학의 영역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여전히 비과학적 존재로 묘사되며 과학적 인식에 대한 한계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