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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향토민요 관련 무형문화재의 전승현황과 과제 (Current status and tasks of the transmission of Gyeonggi Province intangible cultural assets (folk songs))

  • 장희선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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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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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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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논의는 경기도 지역 향토민요 무형문화재의 지정 및 지정 후 재현, 전승 현황을 고찰하고, 전승의 과제와 개선방안을 제시한 글이다. 1998년 지정 후 2016년까지, 경기도 향토민요 관련 무형문화재로 최대 13종 지정이후 9종으로 감소하여, 문화재 관리, 운영의 문제가 예상된다. 우선 북서부 지역 위주의 분포와 농요, 의례요 등 유사한 민요의 지정현황은 발굴 복원과정에서 일정부분 상호 전이되거나 정형화 경향과, 일부의 원형 훼손 가능성, 지정 전승 과정상의 한계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화재 종목의 '(세시)놀이'와 '민속음악'의 유형분류와 민요구성의 관계가 모호하여, 재검토가 요구된다. 민요와 놀이 의례의 연계성 등은 원형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다. 지정문화재의 명칭과 종목 번호도 올바른 문화재 지정 여부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보존회의 전수교육은 정기적인 회원 강습과 일반인 대상교육으로 구분가능하고, 원형전승과 현대적 계승의 이원화된 공연양상을 띤다. 의례(일) 과정과 연계된 다양한 유형의 소리 발굴 및 지나친 양식화에 따른 원형훼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전승의 과제와 개선방안으로, 첫째, 문화유산의 가치와 보존에 대한 인식 재고, 둘째, 문화재 지정과 해제 과정의 지표화, 셋째, 문화재의 기록화와 기록물 보존의 체계화, 넷째, 지역사회와의 연계, 다섯째, 전문인력 구성과 지원관리의 체계적 정립 등을 주요 논점으로써, 제안하였다.

이왕직아악부의 정재 음악 연구 - 이병성·성경린 무보를 중심으로 - (A Study of Jeongjae Performed by the Iwangjikaakbu(Royal Music Institute): Based on the mubo(choreography notes) of Lee Byungseong and Sung Gyeonglin)

  • 이종숙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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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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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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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에서는 이병성(李丙星, 1909-1960)의 '창사급정재철'(呈才及唱詞綴)에 수록된 11종의 정재를 기준으로 성경린(成慶麟, 1911-2008) 무보(舞譜)의 음악 관련 기록들을 비교 검토하였다. 이 기록들은 비록 이병성과 성경린 개인의 것이지만,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 아악생 무동의 학습 자료로서 혹은 교재로서 무동 양성에 크게 일조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두 무보에 수록된 <처용무(處容舞)>, <향령무(響鈴舞)>, <무고(舞鼓)>, <보상무(寶相舞)>, <춘앵전(春鶯?)>,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수연장(壽延長)>, <만수무(萬壽舞)>, <봉래의(鳳來儀)>,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무산향(舞山香)> 등 11종의 정재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로 구분된다. 당악정재인 <수연장>, <봉래의>, <장생보연지무>의 죽간자 등장에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이라는 아명(雅名)의 '보허자령(步虛子令)'이 사용되었다. 중무(中舞)와 무용수를 인도하는 음악은 '풍경지곡(豊慶之曲)'이 사용되었다. 향악정재에는 춤이 전개될 때의 음악으로 '함녕지곡(咸寧之曲)', 끝날 때는 '풍운경회지곡(風雲慶會之曲)'이 사용되었다. 이왕직아악부 정재 반주음악은 '삼현영산회상(靈山會上)'의 속곡(屬曲)인 상령산 중령산 세령산 가락덜이 삼현환입 염불환입 타령 등에 다양한 아명을 붙여 사용한 특징이 발견되었다. 특히 "정재무도홀기"에 제시된 '향당교주(鄕唐交奏)'는 '삼현영상회상'의 여러 속곡임을 알 수 있었다. 정재 반주음악의 빈곤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상의 두 노트는 <학연화대합설무>의 보유자인 이흥구(李興九, 1940년생)의 개인소장 자료이다. 이병성과 성경린의 노트를 비교 분석하여 그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는데 의의를 두었다. 일제강점기 정재음악에 대한 이해에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결혼이주여성의 자기문화 스토리텔링 활용 표현교육 사례 연구 (A Study on the Expression Class through Story-telling about Interracial Married Women's Homeland Cultures)

  • 김영순;허숙;응웬뚜언아잉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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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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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9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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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결혼이주여성들이 출신국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문화를 공부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국 지역문화 스토리텔링(자기문화 스토리텔링) 활용 표현교육 모형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결혼이주여성들이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문화를 공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본 연구는 결혼이주여성들의 자기문화 스토리텔링 활용 표현교육 5단계 모형을 활용하여 한국어 고급 학습자 49명에게 한국어 쓰기와 말하기 활동을 주목하였다. 그 중 일본 출신 A씨의 한국어 쓰기 및 말하기 표현교육 사례를 중심으로 각 단계별 활동 결과물을 제시했다. 활동 결과 제시의 방법은 내러티브 기술법을 사용하였다. 본 연구에서 자기문화 스토리텔링은 스토리텔링의 '대중성', '상호작용성', '참여성'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자기문화 스토리텔링은 결혼이주여성에게 출신국의 문화에 대한 쓰기와 말하기의 재구성을 포함한다. 이를 통해 결혼이주여성들은 자기문화에 대한 자부심 함양과 정체성의 확립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 및 한국문화 이해도가 높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FTA 비준동의안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투표행태 분석: 제18대, 제19대 국회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Voting Behavior of National Assembly Members: Focused on the FTA Ratification of the 18th and 19th National Assembly)

  • 강신재;가상준
    • 의정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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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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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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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제18대 국회와 제19대 국회에서 제출된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표결에서 의원들에게 영향을 미친 요인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무엇보다 의원들은 표결 결정에 있어 지역구, 소속 정당의 당론, 정치적 이념 중 무엇이 중요하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았다. 과거 의원들의 행태에 대해 분석한 연구들은 소속 정당과 의원들의 이념이 의원 표결 결정에 주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임을 밝히고 있다. FTA 비준동의안 표결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지 분석해 보았다. 분석결과 가장 놀라운 발견은 의원들의 지역구 변수가 다른 무엇보다 항상 중요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한국 정당의 강한 규율 때문에 정당 영향력이 가장 클 것이라 생각해보았지만 지역구 변수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통해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표결에서는 지역구의 이익이 가장 중요한 변수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의원들의 선호도를 볼 수 있는 이념 변수의 경우 사안별로, 모형별로 다르지만 투표행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원들의 투표행태 분석에서 이념 변수의 측정과 표결에 미치는 영향력을 심층적이고 다각도로 분석해야만 하는 이유라고 하겠다. 여야 변수의 경우 몇몇 모형에서 통계적 영향력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모든 사례에서 여-야 균열의 영향력은 꾸준하게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의 연구는 다른 연구와 달리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에 대한 표결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위의 결과가 의원들의 다른 표결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5개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의원들의 일반적 특징을 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본 연구는 제16대 국회부터 꾸준히 국회에 제출된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에 있어 의원들 표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하였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원들의 이념측정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의원들의 이념을 다각적 차원에서 조명하여 분석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19세기(世紀) 함경도(咸鏡道) 안변(安邊)의 향청(鄕廳)·작청(作廳) 직임(職任)과 인사관행(人事慣行) - '향청·작청 직임 명단' 문서를 중심으로 - (A Study on Hyangcheong and Jakcheong's Official Duties and Personnel Practices of Anbyeon of Hamgyeong Province in the 19th century - Focusing on an article of 'a list of Hyangcheong and Jakcheong's officials' -)

  • 박경하
    • 역사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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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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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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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연구에서 19세기 함경도 안변도호부의 부사 휘하 행정조직으로서 사족들이 참여하는 향청과 향리들의 작청조직의 직임과 인사관행을 분석하였다. 안변도호부의 신출(新出) '향청(鄕廳) 작청(作廳) 직임(職任) 명안(名案)' 문서를 통해 향청과 작청의 직임과 구성원의 역할, 인사관행 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특히 실질적으로 이 연구에서 향청과 작청의 40개의 직임과 1848년부터 1853년 6년 동안 330여 명에 달하는 직임의 명단을 가지고 족보와 대조를 통해 개개인의 신분 및 가문을 추적하였다. 이들 성씨의 대동보(大同譜) 파보(派譜) 등을 무작위로 일일이 그 본관과 성명을 대조하여 그 중 19명의 가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안변도호부의 향청 작청의 직임과 직역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지방행정 조직으로는 사족의 향청과 일반 행정 집행기관으로서의 작청(作廳)과 군사(軍事) 토포(討捕) 등의 업무로서의 장청(將廳)이 존재하는데, 안변에서는 장청의 기능을 향청의 감관과 작청의 호장이 분담하여 지휘하였다. 호장이 장청의 기능을 지휘함으로써 그 역할이 타 지역에 비해 높았다. 안변은 호장 이방 천총 중심의 운영으로 보여진다. 조세(租稅)수입을 보관하는 각창(各倉)은 일반적으로 향청 임원인 좌수(座首) 향소(鄕所)가 겸임하여 관리하는데 비해, 안변에서는 좌수 향소 이외에도 호장 이방 부이방 등이 겸직을 하기도 하고 역임 전후 겸임없이 각창(各倉) 감색(監色)을 단독으로 맡고 있다. 향청 작청 인사는 1주년(周年) 교체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연임(連任)이 많으며, 격년(隔年)으로 맡거나, 다음 해에는 타 직임으로 전보(轉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6년 동안 330여 명의 직임을 171명이 맡은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족보에서 찾은 19명을 중심으로 보면, 각 직임에 취임하는 나이는 좌수는 5-60대, 향소는 3-40대, 호장 육방들은 비교적 4-50대에, 각창의 색리들은 4-50대이고, 수통인은 20대에 직임을 맡는 것으로 파악된다. 군사(軍事) 토포(討捕) 등의 경찰 업무는 비교적 전문직으로서 자체 순환하여 맡고 있었다. 통상 상천(常賤)이 맡는 각 창의 색리는 감(監)과 색(色)으로 복수로 구성하여, 향청의 향소나 작청의 호장 육방이(六房吏)가 겸임하기도 하고 단독으로 맡기도 하여 신분에 구애 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인사운영의 전반적 특징은 향청 임원은 창감(倉監)을 겸임하기도 하지만 향청내에서만 순환하였다. 반면 작청의 상급 향리인 호장과 이방 직임은 서로 순환하여 맡을 수 있지만 특정 가문이라기보다는 신(申) 이(李) 박(朴) 3개 성씨만이 맡고 있다. 다른 향리들은 상하 구분없이 각색(各色)과 각창(各倉)의 감(監)과 색(色)을 겸임 또는 순환하여 맡고 있다. 경상 호남지역과 달리 향청이나 향리 직임을 몇몇 가문이 세전(世傳)하지 않고, 여러 성씨들이 직임을 돌려 가면서 직역을 분담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모헌(慕軒) 강필신(姜必愼)의 생애와 문학연구 (A study on Mohun(慕軒) Gang, pil-shin(姜必愼)'s life and Literature)

  • 맹영일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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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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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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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18C 전반기는 다양한 시인들이 출현했던 시기이다. 소론과 남인 계열, 중인계층의 문인들 역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 시기 남인문학을 주도했던 문인들은 소위 문외파로 불리던 사대부들이다. 이들 강박, 이인복, 이중환, 오광운, 강필신은 모두 근기 남인 계열의 사대부들이며, 백련시단의 구성원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강박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강필신은 당대의 평가에 비해 그 실체를 밝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필신은 조선 후기 남인 계열의 대표적 문인이다. 강필신의 생애와 교유관계를 분석하면 그의 문학세계의 면모를 일정부분 확인할 수 있다. 강필신과 교유관계를 맺었던 인물들은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 먼저 백련시단으로 대표되는 청남 계열 문인들로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집단, 두 번째로 진주 강씨 가문, 세 번째로 강필신의 말년 세거지였던 경상도 지역의 문인들로 분류할 수 있다. 강필신의 교유관계는 시회(詩會)를 통해 이루어졌다. 시회는 기본적으로 강박을 비롯한 인척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시회의 구성원들이 달라졌다. 강필신은 서울과 경상도를 오가며 시회를 가졌다. 이는 강필신이 근기 남인으로서의 특징을 지니면서 동시에 영남 남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강필신의 문학이 근기 남인과 영남 남인 사이에서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지 좀 더 면밀하게 고찰하면 조선 후기 서울과 지방의 문학 교류 양상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강필신의 문학에 대한 보다 면밀한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묵가의 의리관(義利觀)과 겸애(兼愛) (Mohist's Idea of YiLi and Jianai)

  • 이태승;윤무학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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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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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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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글은 묵가의 의리관과 그것을 기초로 한 "겸애"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묵가의 이념적 특성을 고찰한 것이다. 공자와 묵자를 비롯한 제자 백가에서 의리관이 주요 의제가 되기 이전에도 이미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그것은 대체로 "의"와 "리"를 본말(本末) 혹은 체용(體用) 관계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계승하고 개인의 도덕적 표준으로 설정한 것이 공자를 비롯한 유가의 입장이었다. 물론 유가의 눈높이는 당시의 위정자 혹은 지도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에 비해 묵가에서는 자기 집단의 구성원의 입장을 대변하여 개인보다는 집단과 사회의 공동의 이익 추구를 도모하였다. 따라서 유가에서 "의"를 "리"보다 중시한 데 비해, 묵가는 양자를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묵가가 전국시대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하늘의 뜻"에 그것의 형이상학적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에 수반하여 내부적으로 묵가의 의리관은 "겸애"를 비롯한 묵가의 핵심적인 주장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겸상애, 교상리", 말하자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서로 이롭게 해주는 일이다." 한편 묵가의 의리관, 나아가 겸애를 비롯한 십대 주장의 이념적 기반이 "하늘의 뜻"이었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시 묵가 구성을 비롯한 노동자, 농민, 수공업자들의 눈높이에는 쉽게 수용될 수 있었지만, 진한(秦漢) 봉건제국이 성립되면서부터는 오히려 쇠망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봉건제국에서는 개별집단으로의 묵가의 이념과 활동은 용납되기 어려웠다. 예컨대 "최고 통치자" 위에 "하늘"(상제)을 설정하는 방식은 정권의 정당성과 합리성에 결정적 제약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묵가의 "절용", "절장", "비악" 등의 주장은 기득권으로서는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후 청대 서세동점(西勢東漸)에 이르기까지 묵가는 유가와 달리 학파로서의 활동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요컨대 역사적으로 묵가의 겸애를 비롯한 이념은 유토피아적 구상에 그치고 말았지만, 유가와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상호간의 사랑과 배려, 아울러 상호 이익을 공유한다는 이념은 오늘날에도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노동개혁국면에 있어 노조운동의 대응전략에 관한 평가: 박근혜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혁에 대한 양노총의 대응을 중심으로 (Evaluating the Strategic Reaction of Labor Union Movement toward Labor Reforms: The Two National Centers' Reaction toward Park, Guen-Hye Government's Labor Market Restructuring)

  • 이병훈
    • 한국사회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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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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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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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글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둘러싼 노동정치의 국면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보여온 정책대안과 활동전략을 중심으로 우리 노조운동의 전략적 역량을 검토하며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부 주도의 노동시장유연화 정책이 계획대로 성사된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가 그들이 바라는 고용안정성을 강화하는 진보적인 노동개혁을 관철시키는'파워의 역설'을 이뤄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해 전략적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특히, 양노총은 조합원대중의 결집된 동원(조직연대자원)과 시민사회 친노동정치 세력과의 광범한 연대(연결망자원), 우호적 지지여론의 확보-강화(담론자원), 그리고 활동체계 조직자원 등의 효능적 집행(인프라자원)을 이뤄낼 수 있는 전략적 역량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온 것으로 평가된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둘러싼 노동정치에 있어 행사되는 노조운동의 전략적 역량에는 대중적 담론의 형성과 확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제한된 운동자원과 불리한 권력지형의 제약에 놓여 있는 노조운동으로서는 조직 안의 대중적 결집과 강력한 동원을 이뤄냄과 동시에 조직 밖의 시민사회로부터 대중적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의 여부가 그들의 정치적 협상력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더욱 중요하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노동개혁을 둘러싼 노동정치의 국면에서 노조운동으로서는 조직안팎에 대한 프레밍 조정 총화 학습의 전략적 능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최근의 노동개혁국면에서 우리 노조운동은 보유한 자원을 제대로 가동-활용치 못하고 타성적 방식으로 저항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스스로 조직 안팎의 대중으로부터 운동적 효능감을 잃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또한, 노동시장의 진보적 개혁을 도모함에 있어 정 경 언의 보수 권력연합 앞에서 분열된 조직노동과 야당 및 시민사회의 각개적 대응이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만큼, 친노동 세력과 집단들간에 유기적 연대-공조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윤씨부인의 여사적(女師的) 삶과 그 의미 (A study of Mrs Yun's Teaching Life and It's Meaning)

  • 윤경희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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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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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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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고는 조선 중기 사대부 여성 윤씨부인의 일생을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선비정경부인행장(先?貞敬夫人行狀)"을 주 자료로 하여 재구하여, 아들에 의해 형상화된 사대부 여성의 여사(女師)적 이미지를 고찰하였다. 윤씨 부인의 삶은 한 마디로 여사적(女師的) 삶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녀는 당대 최고 명문가인 해평 윤문의 외동 딸로 태어나 할머니인 정혜옹주에게 엄격한 훈육을 받고 강한 의지력과 절제력을 지닌 사려 깊은 여성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조선 최고의 예학 집안인 광산 김문으로 출가하지만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에 남편 김익겸이 순절하여, 윤씨부인은 남편,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여 가문의 여사가 되었다. 집안의 정신적 지도자, 여사로 윤씨부인은 손녀 딸 인경왕후를 덕망을 갖춘 왕가의 여인으로 훈육하였다. 그녀는 손자, 조카들의 교육에도 열과 성을 다하였는데, 그 결과 두 아들과 손자가 대제학에 오르는 가문의 번성을 이루게 된다. 만년에 연이은 정변으로 가문에 위기가 닥쳤을 때도 윤씨부인은 집안의 여사로서 중심을 잡고 법도를 준수하여 가문의 앞날을 기약하였다. 손자와 종손들에게 학업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고, 며느리, 손부들에게는 근검한 집안의 법도를 지킬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보통 사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고난과 좌절을 강인한 의지로 극복해 낸 윤씨부인의 삶은 가부장 제도에 순종한 여성의 수동적 선택으로 평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녀는 아름다운 자질을 지니고 태어난 현명한 여성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능동적으로 걸어간 것이다. 윤씨부인은 고난과 궁핍을 두려워하지 않고 극복하며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는 삶에 진정한 가치를 둔 진정한 스승, 여사(女師)였던 것이다.

옥동(玉洞) 이서(李漵)의 이(理)·기(氣) 대립적(對立的) 사유(思惟) 양식(樣式)과 그 의미(意味) (Okdong Lee Seo's Li(理)-Qi(氣)Dualism and Its Meaning)

  • 윤재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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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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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7-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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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글은 옥동 이서의 문집을 통해 그의 학문세계를 이루는 기본 토대인 옥동의 사유(思惟) 양식(樣式)과 체계(體系)를 살펴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필자가 옥동 이서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이전까지 그의 가문 안에서 전해지던 가학(家學)의 전통(傳統)에 강한 자극과 충격을 주는 가학(家學) 변화의 시작점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옥동 이전까지 그의 가문은 문학으로 성가(聲價)를 얻었던 문한가(文翰家)였다고 생각되는데, 이 가문의 학문 경향이 옥동에 의해 경학(經學) 중심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특히 옥동은 조선 후기 학계를 대표하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셋째 형으로, 성호의 학문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옥동은 성호 학문의 골격을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문학 중심의 가학 전통을 경학 중심으로 전환시켜 성호에게 전했다고 보인다. 따라서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옥동과 옥동 학문 세계의 근저(根底)를 해명해 내기 위한 작업으로 의미를 지니지만, 보다 큰 의미는 옥동 개인을 넘어 조선 후기 학문적 지표의 하나로 존재하는 성호와 그의 학문 세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성호학의 기본 골격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옥동의 문집을 살펴보면 옥동은 유가적(儒家的) 성선설(性善說)에 사유(思惟)의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세계를 이(理)와 기(氣)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사유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이(理)와 기(氣)를 대립 관계로 바라보았던 것은 순선(純善)하지 못한 인간의 심(心)을 이해하고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옥동은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도덕적 완전성을 회복하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 "성(誠)과 경(敬)을 통한 심(心)의 수양"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수양을 통해 유가적(儒家的) 고도(古道)가 구현된 효제(孝悌) 충신(忠信)의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 순선(純善)한 인간을 회복하는 것이 옥동의 목표였다. 여기에 옥동의 사유(思惟) 양식(樣式)이 지니는 기본적인 의미가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