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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 틱 장애 뚜렛씨 장애의 임상 특성 (CLINICAL CHARACTERISTICS OF CHRONIC MOTOR TIC DISORDER AND TOURETTE'S DISORDER)

  • 신성웅;임명호;현태영;성양숙;조수철
    • Journal of the Korean Academy of Child and Adolescent Psychia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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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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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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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뚜렛씨 장애는 근육틱과 음성틱이 만성적으로 지속되는 질환이다. 만성 틱장애는 근육틱 혹은 음성틱중 하나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이다. 본 연구에서는 1998년 4월 1일부터 1999년 4월 1일까지 서울대학교병원 소아정신과 병동에 입원한 만성 틱 장애 아동과 뚜렛씨 장애 아동의 임상적 특징을 조사하고 두 질환 사이의 관계를 비교하고자 시행되었다. 이들의 특성을 확인하기 위해 대조군으로 학습장애 환자를 선정하였다.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만성 틱장애(n=13)와 뚜렛씨 장애 환자(n=29)의 평균 발병연령은 각각 $7.3{\pm}2.5$, $7.2{\pm}2.2$세, 입원시 연령은 평균 $11.7{\pm}2.7$, $11.5{\pm}2.6$세, 입원기간은 $5.7{\pm}5.4$, $11.0{\pm}8.7$주였고 두 군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는 없었다. 학습장애의 경우 발병연령($4.2{\pm}1.9$세)이 두 장애보다 빠르고 의료기관을 찾는 시기($9.8{\pm}3.2$세)도 빨랐다. 출생 계절은 틱장애 환자들에서 6월에서 9월 사이가 가장 적었지만 의미 있는 차이는 없었다. 남녀의 성비율은 각각 10:3, 26:3, 11:5였고 의미 있는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환자가 출생할 때의 아버지와 어머니 연령은 세 군 모두 차이가 없었다. 둘째, 정신과적 가족력이 있는 경우도 세 군 사이에 차이가 없었고 각각 24.1%, 46.2%, 56.3%였다. 발병전 유발 요인이 확인된 경우는 만성틱장애와 뚜렛씨 장애에서 11.1%와 35.7%로서 의미 있는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학습장애(56.3%)에 비해서는 적었다. 셋째, 만성 틱장애와 뚜렛씨 장애, 그리고 학습장애 환자의 지능지수는 각각 언어성 지능 $92.3{\pm}10.7$, $94.7{\pm}14.9$, $94.3{\pm}13.8$이었고, 동작성 지능은 $93.0{\pm}20.5$, $97.5{\pm}13.0$, $95.0{\pm}16.9$이었으며, 전체 지능은 $91.9{\pm}20.1$, $95.8{\pm}14.5$, $93.9{\pm}15.1$로서 세 군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는 없었다. 기질적 뇌장애 소견은 CT/MRI 등에서 0%, 27.3%, 6.3%, 뇌파 이상은 8.3%, 17.2%, 12.5%에서 나타났고 차이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넷째, 항도파민 약물에 대한 반응은 만성 틱장애와 뚜렛씨 장애 환자에서 각각 84.6%, 77.0%가 부분관해를 보였고 완전 관해된 경우는 한 명도 없었으며 두 군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 다섯째, 공동 유병현황을 조사한 결과 주의력결핍·과잉운동장애가 학습장애에서 의미 있게 많은 것을 제외하고는 세 군 사이에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조사 결과 입원한 환자의 경우 만성 틱장애와 뚜렛씨 장애를 가진 환자들은 임상적으로 학습장애를 가진 환자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였으나 만성 틱장애와 뚜렛씨 장애를 구분해야 하는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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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CT 영상에서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은 CT와 조영제를 사용한 CT를 이용한 감쇠보정에 따른 표준화섭취계수의 비교 (A Comparative Study of the Standard Uptake Values of the PET Reconstruction Methods; Using Contrast Enhanced CT and Non Contrast Enhanced CT)

  • 이승재;박훈희;안샤론;오신현;남궁혁;임한상;김재삼;이창호
    • 핵의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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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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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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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PET/CT 검사의 사용 초기에 CT는 주로 감쇠보정(Attenuation Correction: AC)의 목적으로 사용되어졌지만, CT의 성능이 향상됨으로써 조영제를 이용한 CT검사를 진단에 반영하여 보다 진보된 진단적 가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조영제의 사용이 없이도 CT를 판독할 수 있지만 병변의 정확한 범위를 확인하고 정상 구조물을 구별하는데 있어서 조영제의 사용은 판독자로 하여금 판독을 매우 용이하게 하는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PET/CT검사 시 조영제가 감쇠보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논쟁으로 이견이 많았다. 40-140 keV 정도의 낮은 엑스선을 이용하는 CT영상에 비하여, 조영제를 사용한 CT영상에서는 조영제로 인해 감쇠가 많이 되지만 511 keV의 에너지를 가진 감마선은 조영제로 인해 거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고 이로 인해 감쇠보정 시 과보정을 하게 되어 PET영상에서 오류를 나타낼 수 있다는 의견이 보고되기도 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조영제가 감쇠보정에 과대평가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견과 과보정으로 인한 표준화섭취계수에 변화의 가능성은 있으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조영제의 영향이 SUV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만 비교 평가하였다. 2007년 12월에서 2008년 6월 사이에 본원에서 PET/CT 검사를 시행한 환자 중 요오드 조영제에 대한 부작용이 없고 당뇨병이 없는 진행성 암 환자 30명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DSTe (General Electric Healthcare, Milwaukee, MI, USA)를 사용하여, 각각의 환자는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은 CT를 시행한 후 PET영상을 얻었고 그 후, 조영제를 사용한 CT검사를 하였다. 각각의 CT정보로 감쇠보정을 실시, 종류별로 PET영상을 획득하여, 각 영상에 동일한 관심영역(Region of Interests : ROIs)을 설정 후, SUV를 비교 하였다. 얻어진 두 가지 결과 값의 정량 분석의 비교를 위해서 대응표본 T-검정 (Paired t-test)을 사용하였다. 검사를 시행한 30명의 환자에게서 폐, 간, 심장의 $SUV_{max}$ 값과 $SUV_{mean}$값을 측정하여 총 180개 영역을 분석하였다. 조영제를 사용하기 전과 후를 비교하였을 때, 측정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조영 후의 $SUV_{max}$$SUV_{mean}$가 상승하였고 통계적으로도 유의한 것으로 나타났다(p value<0.05). 심장 영역에서 조영 전 보다 조영 후의 $SUV_{mean}$값이 증가된 것으로 나타났지만,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조영제를 사용한 CT영상의 SUV값이 과보정되어,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은 CT의 SUV 보다 높게 나왔으나 기존의 보고된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결과는 실제 임상 판독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원발성병변의 진행을 알아보는 과정에서는 SUV의 작은 변동도 분명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간 영역과 같이 SUV의 변동이 다른 영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영역에서는 수치의 변화에 대한 주의가 요구 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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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무이구곡 바위글씨(石刻)의 분포와 내용 및 유형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Distribution, Contents and Types of Stone Inscription of Wuyi-Gugok in China)

  • 노재현;정조하;김홍균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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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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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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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문헌연구와 현장조사를 통해 중국 무이구곡에서 시지각되는 바위글씨의 분포와 형태 그리고 내용에 따른 바위글씨의 유형화를 시도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무이산 무이구곡에는 1곡부터 9곡까지 모든 곡에 바위글씨가 현존하며 그 수는 총 350방으로 확인되었다. 둘째, 바위글씨의 분포 분석 결과, 제5곡에 74방(21.2%), 제6곡 67방(19.2%), 제1곡 65방(18.6%), 제2곡 60방(17.2%) 그리고 제4곡에 53방(15.2%)이 확인되어 이들 5곡에 전체 319방(91.1%)의 바위글씨가 집중됨으로써 이들 곡의 문화경관성이 풍부한 것으로 밝혀졌다. 셋째, 바위글씨 개체수는 1곡 수광석에 41방(22.6%), 6곡 천유봉 호마간에 29방(8.3%), 4곡 제시암에 23방(6.6%), 2곡 영암에 22방(6.3%), 6곡 향성암에 21방(6%), 5곡 운와에 19방(5.4%)·복호암에 18방(5.1%)·은병봉에 17방(4.9%), 4곡 대장봉에 14방(4%), 1곡 대왕봉, 4곡 금곡암에 각각 12방(3.4%)의 바위글씨가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11개소의 개체 바위에 총 228방(65.1%)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 이들 바위의 지명도와 문화적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넷째, 무이구곡 바위글씨는 무이산의 지모 및 지형지질에 대한 찬미, 무이군과 지명과 관련된 설화, 공맹(孔孟)의 사상을 담는 유가적 교훈, 주자의 무이도가와 관련된 경명과 주자의 행적 등 성리문화의 상찬 그리고 동천복지의 세계관과 도화원기의 선경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삼교와 관련된 유·불·선 명인들의 고사를 포함한 중국 전통문화와 관련한 선인고사(先人古事) 등의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운 역사와 신화, 전설을 담는 역사문화 풍경을 내포하고 있다. 다섯째, 무이구곡 바위글씨의 내용을 바탕으로 분류한 결과, 경명·찬경·기유·기사·철리·서회·종교·길어·표어·서지제각 그리고 관문고시 등 11개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이 중 찬경제각(贊景題刻)이 102방(29.1%), 경명제각(景名題刻)이 93방(26.6%) 그리고 기유제각(紀遊題刻)이 61방(17.4%)의 순으로 나타나 무이구곡의 바위글씨는 경물명의 제시와 경관 찬미 그리고 유람을 기념하는 성격이 특히 강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섯째, 연구대상 6개 구곡도와 무이구곡 바위글씨 간의 상호텍스트성 분석 결과, 매체간의 전파방법은 대부분 '인용'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밖에 확장, 반복, 연장 그리고 압축을 통해 상호매체성을 유지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벼멸구 발생의 장기예찰을 위한 기초적 연구 (Study on the Long-term Forecasting of Brown Planthopper Outbreaks)

  • 백운하;백현준
    • 한국응용곤충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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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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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1-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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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
  • 1975년의 벼멸구 대발생에 의한 극심한 피해에 감하여 그 발생을 예찰할 수 있다면 정부의 이에 대한 방제대책 및 살충제의 약종$\cdot$제제형태를 결정해야 할 농약수급계획 수립에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예찰방법은 전국 47개소의 예찰소에서 채집된 벼멸구를 유일한 자료로 삼고 있다. 벼멸구 발생의 신빙할만한 기록은 수원에 권업모범장이 설립된 1905년부터 볼 수 있고 그 이전의 해충기록은 삼국사기, 고려사, 문헌비고 등에 "황", "황충", "비황", "충" 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들 해충에 대해 일본인 학자를 사이에 상반되는 견해가 발표되었는데 Muramatsu, S.(촌송 무)는 고문헌에 나타난 "황"은 풀무치(비황, Locusta migratoria)라고 주장하였고 Okamoto, H.(강본반차랑)는 멸구류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주로 문헌비고에 근거를 둔 것 같다. 설사 삼국사기, 고려사 등을 참고했다 하더라도 이들 문헌은 문헌비고나 다름없이 해충에 대한 기술이 극히 간략하다. 예를 들면 "7월 황", "추구월황해곡", "오월유항충"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만으로 해당해충의 정확한 이름을 알아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1967년에 벼멸구의 대발생이 태양흑점 활동최소기와 상관이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양자간의 상관관계를 논하기에는 자료의 량이 충분치 못한 감도 있어 이를 보충하기 위해 벼멸구의 발생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기로 하고 아울러 삼국사기, 고려사, 문헌비고 등에 나타난 해충기록들을 분석해 보았다. 고기록의 해충명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선결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분석의 결과 밝혀진 해충은 1. 솔나방(Dendrolimus spectabils) 2. 멸강나방(Mythimna separata) 3. 벼멸구(Nilapavata lugens) 4. 흰등멸구(Sogatella furcifera) 5. 풀무치(Locusta migratoria) 6. 이화명나방(Chilo suppressalis) 7. 땅강아지(Cryllotalpa africana) 8. 벼뿌리바구미(Echinocnemus squameus) 9. 거세미나방(뗘탬 segetum) 10. 뽕나무명나방(Margaronia pyloalis)의 10종이었고, 종명 미군종이 19건이었다. 그런데 문제의 벼멸구가 조선와조실록중에 기록된건수는 놀랍게도 겨우 5건에 불과하며 그 발생년도 또한 서기 1458년, 1468년, 1489년, 1536년, 1587년로서 태양흑점의 관측이 근대적 방법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1719년대 이전의 사실이었다. 따라서 양자간의 상관관계를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본 연구기간 중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 해 주는 중요한 새로운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즉 1946년에 흰둥멸구의 대발생으로 충남, 전남지방에 피해가 심했으며 그중 피해액이 밝혀진 곳은 라주군에서 16만석, 서산군에서 19만석이었다. (당시 농사시험장 곤충담당관 이봉우씨 담, 현재선 교수 전) 1910년 이후의 우리나라에서의 벼멸구 생기록을 보면 항상 흰등멸구와 함께 발생하고 있으며 최근의 예찰등성적을 보아도 함께 나타나 있고, 해에 따라 1975년도와 같이 벼멸구가 대발생하는 수도 있고 1977년도와 같이 흰등멸구가 대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벼멸구와 흰등멸구는 모두 우리나라 재래의 해충이 아니며 해마다 중국본사에서 비래하는 곤충이다. 한편 태양흑점이 실측되기 시작한 1710년대부터 현재까지는 그 활동이 11.2년의 주기성을 보여주지만 그 이전에 있어서는 그 활동이 극히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불규칙하다는 것이 Schneider와 Mass(1975)에 의해 밝혀졌다. 결국 1710년대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있어서 벼멸구와 흰등멸구의 대발생 연도는 1910년, 1921-23년, 1946, 1967-8년, 1975-7년의 5회가 되며 이들 대발생 연도는 모두 태양흑점 활동최소기와 일치되어 필자의 주장의 신빙성이 더해졌다. 따라서 앞으로 태양흑점의 활동이 현재와 같은 주기로 계속되는 동안은 그 활동최소기에 임해서는 벼멸구와 흰등멸구에 대해 특별한 경계가 필요하며 만전의 방제체제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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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 지역 오르도비스기 정선석회암의 속성 역사 (Diagenetic History of the Ordovician Chongson Limestone in the Chongson Area, Kangwon Province, Korea)

  • 봉련식;정공수
    • 한국지구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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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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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9-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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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탄산염 완사면과 테두리진 탄산염 대륙붕에서 퇴적된 오르도비스기 정선석회암은 다양한 속성양상을 보인다. 어란석 입자나 펠로이드 주위에 분포하는 등후의 침상의 교결물로 나타나는 해수속성작용은 최초의 속성작용이었으며 재결정화된 마이크로스파 내지 스파 방해석, 방해석으로 채워진 증발암 캐스트 그리고 어란석 입자 주위에 분포하는 등후의 스파 방해석으로 나타나는 담수속성작용으로 이어졌다. 얕은 매몰 속성 작용의 양상은 마이크로스타일로라이트와 용해 씸을 포함하며, 깊은 매몰 속성작용의 양상은 스타일로라이트, 매몰 교결물, 거정질 방해석 그리고 포이킬로토픽 방해석을 포함한다. 매몰교결작용은 압력용해양상과 쌍정 엽리를 갖는 거정질 방해석 또는 포이킬로토픽 조직을 갖는 방해석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돌로마이트는 조간대 기원의 극세립 및 세립질 모자이크 돌로마이트, 다양한 기원의 산재된 돌로마이트, 생물 교란 반점이 돌로마이트화 된 패치돌로마이트, 깊은 매몰 기원의 안장형 돌로마이트가 있다. 규화작용은 방해석을 치환한 석영과 열극에 침전된 석영이 있다. 포이킬로토픽 조직을 보이는 극조립질의 매몰교결물은 -10.4%$_o$ PDB의 ${\delta}^{18}$O 값과 -1.0 %$_o$ PDB의 ${\delta}^{13}$C 값, 504ppm Sr, 3643ppm Fe 그리고 152ppm Mn 값을 보인다. 세립 및 조립질 방해석으로 구성된 석회암은 매몰교결물과 비슷한 ${\delta}^{18}$O 값과${\delta}^{13}$C값을 보이나, 매몰교결물에 비해 Sr 함량은 낮고, Fe 및 Mn 함량은 높다 이런 지화학적 경향은 세립 및 조립질 방해석의 재결정화 작용이 담수 환경에서 일어난 후 매몰환경에서 다시 재결정되어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며, 매몰교결물은 비교적 높은 온도와 낮은 물/암석 비를 갖는 환경에서 형성된 것으로 해석된다. ${\delta}^{18}$O 값이 -8.2%$_o$ PDB, ${\delta}^{13}$C 값이 -1.9%$_o$ PDB, 213ppm Sr, 3654ppm Fe, and 114ppm Mn을 보이는 극세립 및 세립의 돌로마이트는 조상대 환경에서 퇴적물과 동시기적으로 형성된 후 비교적 낮은 암석/물의 비율을 갖는 매몰 환경에서 재결정 된 것으로 해석된다. 지화학적 자료는 정선석회암의 속성환경은 물/암석의 비가 낮은 매몰환경이 주된 속성환경이었음을 시사한다. 정선석회암은 퇴적될 당시 해수 속성 작용과 담수 속성 작용을 받았다. 행매층과 회동리층의 퇴적으로 정선석회암의 일부는 얕은 매몰 환경 하에 놓이게 되었고, 데본기의 지구조적 변형기에 대기하에 노출되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석탄기와 페름기의 평안계 지층이 약 3km의 두께로 퇴적되어 정선석회암은 이시기에 깊은 매몰환경에 놓이게 된 것으로 해석되며 스타일로라이트, 매몰 교결물, 거정질 방해석 그리고 안장형 돌로마이트가 형성된 것으로 해석된다. 정선석회암은 중생대와 신생대에 있었던 송림, 대보, 불국사 변동으로 대기에 노출된 것으로 보이며 담수 속성환경에 다시 놓이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백악기와 제3기의 불국사 변동 후 정선 석회암은 대기 하에 노출되어 담수 속성작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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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식 비단털쥐(Tscherskia triton)의 번식과 발달 (Breeding and Development of the Tscherskia triton in Jeju Island)

  • 박준호;오홍식
    • 한국환경생태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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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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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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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중국 북부와 한국, 러시아 지역에 서식하는 비단털쥐(Tscherskia triton)의 분포를 제외한 생활사, 행동, 생태와 관련된 생물학적 특징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된 바 없다. 이에 본 연구는 제주도에서 포획된 개체(n=9)를 대상으로 종 단위 연구의 기본이 되는 번식과 성장 및 발달에 대한 생물학적 정보를 밝히기 위하여 2015년 3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사육실에서 진행되었다. 연구결과, 임신률은 31.7%였고 좁은 케이지에서 보다 넓은 케이지에서 더 높게 나타났다(56.7 vs. 6.7%). 임신기간은 $22{\pm}1.6$일(범위 21-27일), 한배의 산자수(litter size)는 $4.26{\pm}1.37$마리(범위 2-7 마리)였다. 최소이유시기는 $19.2{\pm}1.4$일(범위 18-21일)이었다. 출생 직후 새끼의 체중과 외부형태의 크기는 성별로 차이가 없었으나, 이유시기부터 암수의 머리와 몸통길이(HBL)와 꼬리길이(TL)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HBL-weaning, $106.50{\pm}6.02$ vs. $113.34{\pm}4.72mm$, p<0.05; HBL-4 months, $163.93{\pm}5.42$ vs. $182.83{\pm}4.32mm$, p<0.05; TL-4 months, $107.23{\pm}3.25$ vs. $93.95{\pm}2.15mm$, p<0.05). Gompertz 모형과 logistic 모형을 적용하였을 때, 머리-몸통길이에서는 수컷이 암컷보다 최대 성숙 길이가 길었고($164.840{\pm}7.453$ vs. $182.830{\pm}4.319mm$, p<0.0001; $163.936{\pm}5.415$ vs. $182.840{\pm}4.333mm$, p<0.0001), 성장률도 빨랐으나($1.351{\pm}0.065$ vs. $1.435{\pm}0.085$, p<0.05; $2.870{\pm}0.253$ vs. $3.211{\pm}0.635$, p<0.05), 성장곡선의 기울기가 최대가 되는 일령은 암컷보다 조금 늦었다($5.121{\pm}0.318$ vs. $5.520{\pm}0.333$, p<0.05; $6.884{\pm}0.336$ vs. $7.503{\pm}0.453$, p<0.05). 한편 꼬리의 최대길이($105.695{\pm}5.938$ vs. $94.150{\pm}2.507mm$, p<0.001; $111.609{\pm}14.881$ vs. $93.960{\pm}2.150mm$, p<0.05)와 변곡점에서의 길이($60.306{\pm}1.992$ vs. $67.859{\pm}1.330mm$, p<0.0001; $55.714{\pm}7.458$ vs. $46.975{\pm}1.074mm$, p<0.05)는 암컷이 수컷보다 긴 것으로 나타났다. 두 성장모형에서 암수의 체중과 외부형태형질에 대한 성장률은 비교 결과 유사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비단털쥐의 종적 특징을 밝히는데 필요한 자료로 이용될 것이다.

1920년대 전통음악공연의 형태와 특징 - 서양식 장르와의 혼성공연형태를 중심으로 -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Traditional Music Performance of the 1920s - Focused on the mixed performances type in the western-style genre -)

  • 금용웅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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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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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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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일제강점기 전통음악공연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이면서 점차 축소, 약체화 되어 갔고, 개화기 이후부터 사회전반에 꾸준히 확산되기 시작한 서양문물의 영향으로 서양식 장르의 공연이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통음악공연은 단독공연형태보다는 서양식 장르와 함께 연행되는 혼성공연(混成公演)형태를 보이는데, 특히 서양음악과의 혼성공연형태가 주를 이루었고 이 밖에 연극, 강연, 영화, 댄스, 마술과 같은 장르와도 함께 공연되었다. 이와 같은 서양식 장르와의 혼성공연형태는 1920년대에 들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전통음악공연의 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서양식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 대한 연구는 한국근대음악사에서 아직 조명되지 않은 전통음악의 공연형태를 밝혀, 일제강점기 전반적인 전통음악공연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으나, 지금껏 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진 바가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1920년대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 대해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중심으로,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 활성화 배경과 형태별 특징에 대해 고찰하였다.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 활성화 배경에서는 1920년대에 들어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가 이전에 비해 활성화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원인은 1920년대에 들어 공연의 주최나 후원 단체들이 늘어남에 따라, 전반적인 공연의 개최 수가 이전보다 급격히 증가하였고, 증가한 공연의 양상이 서양문물의 확산으로 더욱 다양해진 대중들의 기호 충족을 위해 대부분 혼성공연형태로 이루어진 데에 기인하고 있었다.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별 특징에서는 전통음악과 함께 공연된 서양식 장르들을 분류하여, 전통음악이 개개의 서양식 장르와 함께 공연되었을 때 어떠한 특징이 나타나는지 살펴보았다. 첫째,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반적으로 서양음악의 프로그램 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당시에 흔치 않았던 서양악기와 전통악기의 합주가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부제나 날짜별로 두 장르를 구분하여 공연되기도 하는 특징을 보였다. 둘째, 연극과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통음악이 창극과 유사한 형식으로 연극에 직접 참여하거나, 연극의 무대전환을 위한 막간공연의 역할로 연극과 독립되어 공연되기도 했고, 관객모집이나 여흥을 위해서도 공연되는 특징이 있었다. 셋째, 강연과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통음악이 강연의 전이나 후에 연주 되어서 강연의 분위기 조성과 여흥의 역할을 하는가 하면, 관객모집을 위해서도 공연되는 특징을 보였다. 넷째, 영화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통음악이 영화에 직접 참여하거나, 독립적인 공연의 성격을 띠기도 했고, 영화 상영 후 여흥을 위해서도 공연되는 특징이 있었다.

근대 전환기 심재 조긍섭의 두(杜)·소시(蘇詩) 화운시 (Hwaunsi(和韻詩) on the Poems of Tu Fu(杜甫) and Su Shi(蘇軾) Written by Simjae(深齋) Cho Geung-seop(曺兢燮) in the Turning Point of Modern Era)

  • 김보경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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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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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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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고는 근대 전환기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1873-1933)의 시세계를 화운시(和韻詩)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시에는 화운시 특히 두보(杜甫)와 소식(蘇軾) 시에 대한 화운시가 많다. 이것은 그가 격변의 시기에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한시창작에 임했던 중세적 시인이었음을 가늠케 한다. 화운시를 놓고 보았을 때 그의 창작 생애는 대략 40세가 전환의 기점이 된다. 40세 이전에는 두 소뿐만 아니라 그 밖에 당(唐) 송(宋) 및 명(明) 청(淸) 대(代) 시인들, 우리나라의 이황(李滉) 등 화운의 대상이 폭넓게 나타난다. 40세 이후에는 두 소에 대한 화운은 줄어드는 대신 지역과 관련된 우리나라 인물의 시에 화운하는 예가 종종 발견된다. 연령으로는 30대에 지은 것이 가장 많다. 심재는 시재(詩才)의 온전함과 의경(意境)의 통달함을 꼽으며 두보를 '시인의 집대성(集大成)'이라 일컬었다. 그런 인식을 반영하듯이 두시 화운시도 주제와 의경이 다양하게 드러난다. 소시(蘇詩)에 대해서는 그가 따로 생각을 밝힌 바 없으나 일정한 애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시에 대한 밀착도는 두시가 소시보다 비교적 더 높게 나타난다. 거칠게 말하면 두보에 대해서는 닮고자 하면서 자기 개성을 찾아나가는 방향이라면, 소식에 대해서는 닮으려 하기보다 계기로 활용해서 자기 의사를 드러내려는 측면이 좀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신중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가 화운시를 짓되 일방적인 모방에 그치지 않고 대조와 차이의 미학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주제와 의경을 그대로 가져오기보다는 창작의 계기는 공유하되 시 안에 자기 뜻을 기탁해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소시 화운시는 전반적으로 원시와의 밀착력이 더 희박한 편이다. 이것은 화운이라는 제약이 많은 창작 방법을 활용하면서도 그에 전적으로 지배되지 않고 자신의 주제와 개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소시 화운시가 40세 이후로는 별로 지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것은 어쩌면 화운시 '안'에서의 노력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문학적 현실을 자각한 때문은 아닐까. 예컨대 그는 1919년 소식의 옥중시(獄中詩)를 차운해 4수를 짓고 다시 <구중잡제(拘中雜題)[팔수(八首)]>를 지었다. 이것저것 읊은 이 잡제에는 누구의 운에도 제약되지 않은 그의 복잡다단한 심사와 정회가 다종하게 분출되어 있다. 심재의 화운시는 근대 전환기에 한시의 아비투스가 생존했던 현실과 그 인상적인 생존 방식을 증언해 준다. 화운시 창작은 분명 그의 호고(好古)적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나, 이면에는 근대적 문자 변동에 저항하는 심리가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유의할 것은 그것이 두 소시에 대한 일방적인 모습(模襲)과 같은 반동적 방향으로 내닿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한계 속에서도 자기 개성과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의미 있게 새길 필요가 있다. 요컨대, 심재의 화운시는, 새로움과 기이함, '근대'라는 이름의 시도에 이목을 붙들렸던 근대 한시사에서 '접혀 있던' 한쪽 얼굴, 그 평면이 아닌 입체로서의 얼굴을 펼쳐 보게 하는 의의가 있다.

한국 금융회사 마케팅 현황에 대한 탐색 연구 (An Exploratory Study on Marketing of Financial Services Companies in Korea)

  • 천성용
    • Asia Marketing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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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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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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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투자상품의 확산, 고령화 등으로 인한 금융니즈 다양화와 자본시장법 시행으로 인한 금융회사간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금융산업 내에서 마케팅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다른 산업에 비해 금융산업의 마케팅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하였다. 본 연구는 향후 구체적인 금융마케팅 연구들이 진행되기에 앞서 국내 금융마케팅 연구들을 정리하고, 국내 금융회사 마케팅 담당자를 In-depth 인터뷰하여 실제 국내 금융 마케팅 현황을 조사하였다. 이를 통해 향후 금융마케팅 연구에 필요한 시사점을 얻고자 하였다. 분석 결과, 다른 산업의 마케팅과 다른 금융 마케팅만의 고유 특징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가 부족하였고, 금융산업 내에서 은행, 증권, 보험, 카드 산업 간의 마케팅 특징 차이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소비자행동 관점에서 금융고객의 의사결정 과정에 관한 연구도 부족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금융회사의 마케팅 현황은 외형적으로 어느 정도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 업무는 여전히 과거의 영업지원, 혹은 프로모션 및 CRM 데이터 분석 등 단기적인 부분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은행, 증권, 보험, 카드 회사 등 각 세부 금융산업별 마케팅 담당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금융마케팅의 키워드와 문제 인식 정도도 서로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금융마케팅 연구를 위한 시사점과 함께 6가지의 연구명제를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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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朝鮮王朝) 왕릉(王陵) 문인석상(文人石像)의 복식형태(服飾形態)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ostume Style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Erected at Tombs of the Kings for Yi-dynasty)

  • 권용옥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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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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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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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
  • A costume reveals the social characteristics of the era in which it is worn, thus we can say that the history of change of the costume is the history of change of the living culture of the era. Since the Three States era, the costume structure of this country had been affected by the costume system of the China's historical dynasties in the form of the grant therefrom because of geographical conditions, which affection was conspicuous for the bureaucrat class, particularly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the Kings' familities. Such a grant of the costume for the bureaucrat class (i.e., official uniform) was first given by the Dang-dynasty at the age of Queen Jinduck, the 28th of the Shilla-dynasty. Since then, the costume for the bureaucrats had consecutively been affected as the ages had gone from the unified Shilla, to the Koryo and to the Yi-dynasty. As the full costumes officially used by government officials (generally called "Baek Gwan") in the Yidynasty, there existed Jo-bok, Gong-bok and Sang-bok. Of such official costumes, Gong-bok was worn at the time of conducting official affairs of the dynasty, making a respectful visit for the expression of thanks or meeting diplomatic missions of foreign countries. It appears no study was made yet with regard to the Gong-bok while the studies on the Jo-bok and the Sangbok were made. Therefore, this article is, by rendering a study and research on the styles of costumes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erected at the Kings' tombs of the Yi-dynasty, to help the persons concerned understand the Gong-bok, one of the official costume for Baek Kwan of that age and further purports to specifically identify the styles and changes of the Gong-bok, worn by Baek Gwan during the Yi-dynasty, consisting of the Bok-doo (a hat, four angled and two storied with flat top), Po (gown), Dae (belt), and Hol (small and thin plate which was officially held by the government officials in hand, showing the courtesy to and writing brief memorandums before the King) and Hwa (shoes). For that purpose, I investigated by actually visiting the tombs of the Kings of the Yi-dynasty including the Geonwon-neung, the tomb of the first King Tae-jo and the You-neung, the tomb of the 27th King Soon-jong as well as the tombs of the lawful wives and concubines of various Kings, totalling 29 tombs and made reference to relevant books and records. Pursuant. to this study, of the 29 Kings' tombs the costume styles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erected at the 26 Kings' tombs are those of Gong-bok for Baek-gwan of the Yi-dynasty wearing Bok-doo as a hat and Ban-ryeong or Dan-ryenog Po as a gown with Dae, holding Hol in hand and wearing shoes. Other than those of the 26 tombs, the costume styles of the Ryu-neung, the tomb of the Moon-jo who was the first son of 23rd King Soon-jo and given the King's title after he died and of the You-neung, the tomb of the 27th King Soon-jong are those of Jobok with Yang-gwan (a sort of hat having stripes erected, which is different from the Bok-doo), and that of the Hong-neung, the tomb of the 26th King Go-jong shows an exceptional one wearing Yang-gwan and Ban-ryeong Po ; these costume styles other than Gongbok remain as the subject for further study. Gong-bok which is the costume style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most of the Kings' tombs had not been changed in its basic structure for about 500 years of the Yi-dynasty and Koryo categorized by the class of officials pursuant to the color of Po and materials of Dae and Hol. Summary of this costume style follows: (1) Gwan-mo (hat). The Gwan-mo style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26 Kings' tombs, other than Ryu-neung, Hong-neung and You-neung which have Yang-gwan, out of the 29 Kings' tombs of the Yi-dynasty reveals the Bok-doo with four angled top, having fore-part and back-part divided. Back part of the Bok-doo is double the fore-part in height. The expression of the Gak (wings of the Bokdoo) varies: the Gyo-gak Bok-doo in that the Gaks, roundly arisen to the direction of the top, are clossed each other (tombs of the Kings Tae-jong), the downward style Jeon-gak Bok-doo in that soft Gaks are hanged on the shoulders (tombs of the Kings Joong-jong and Seong-jong) and another types of Jeon-gak Bok-doo having Gaks which arearisen steeply or roundly to the direction of top and the end of which are treated in a rounded or straight line form. At the lower edge one protrusive line distinctly reveals. Exceptionally, there reveals 11 Yang-gwan (gwan having 11 stripes erected) at the Ryu-neung of the King Moon-jo, 9 Yang-gwan at the Hong-neung of the King Go-jong and 11 Yang-gwan at the You-neung of the King Soon-jong; noting that the Yang-gwan of Baek Kwan, granted by the Myeong-dynasty of the China during the Yi-dynasty, was in the shape of 5 Yang-gwan for the first Poom (class) based on the principle of "Yideung Chaegang" (gradual degrading for secondary level), the above-mentioned Yang-gwans are very contrary to the principle and I do not touch such issue in this study, leaving for further study. (2) Po (gown). (a) Git (collar). Collar style of Po was the Ban-ryeong (round collar) having small neck-line in the early stage and was changed to the Dan-ryeong (round collar having deep neck-line) in the middle of the: dynasty. In the Dan-ryeong style of the middle era (shown at the tomb of the King Young-jo); a, thin line such as bias is shown around the internal side edge and the width of collar became wide a little. It is particularly noted that the Ryu-neung established in the middle stage and the You-neung in the later stage show civil servants in Jo-bok with the the Jikryeong (straight collar) Po and in case of the Hong-neung, the Hong-neung, the tomb of the King Go-jong, civil servants, although they wear Yang-gwan, are in the Ban-ryeong Po with Hoo-soo (back embroidery) and Dae and wear shoes as used in the Jo-bok style. As I could not make clear the theoretical basis of why the civil servants' costume styles revealed, at these tombs of the Kings are different from those of other tombs, I left this issue for further study. It is also noted that all the civil servants' stone images show the shape of triangled collar which is revealed over the Godae-git of Po. This triangled collar, I believe, would be the collar of the Cheomri which was worn in the middle of the Po and the underwear, (b) Sleeve. The sleeve was in the Gwan-soo (wide sleeve) style. having the width of over 100 centimeter from the early stage to the later stage arid in the Doo-ri sleeve style having the edge slightly rounded and we can recognize that it was the long sleeve in view of block fold shaped protrusive line, expressed on the arms. At the age of the King Young-jo, the sleeve-end became slightly narrow and as a result, the lower line of the sleeve were shaped curved. We can see another shape of narrow sleeve inside the wide sleeve-end, which should be the sleeve of the Cheom-ri worn under the Gong-bok. (c) Moo. The Moo revealed on the Po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at the age of the King Sook-jong' coming to the middle era. Initially the top of the Moo was expressed flat but the Moo was gradually changed to the triangled shape with the acute top. In certain cases, top or lower part of the Moo are not reveald because of wear and tear. (d) Yeomim. Yeomim (folding) of the Po was first expressed on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Won-neung, the tomb of the King Young-jo and we can seemore delicate expression of the Yeomim and Goreum (stripe folding and fixing the lapel of the Po) at the tomb of the Jeongseong-wanghoo, the wife of the King Young-jo, At the age of the King Soon-jo, we can see the shape of Goreum similar to a string rather than the Goreum and the upper part of the Goreum which fixes Yeomim was expressed on the right sleeve. (3) Dae. Dae fixed on the Po was placed half of the length of Po from the shoulders in the early stage. Thereafter, at the age of the King Hyeon-jong it was shown on the slightly upper part. placed around one third of the length of Po. With regard to the design of Dae, all the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Kings' tombs other than those of the Geonwon-neung of the King Tae-jo show single or double protrusive line expressed at the edge of Dae and in the middle of such lines, cloud pattern, dangcho (a grass) pattern, chrysanthemum pattern or other various types of flowery patterns were designed. Remaining portion of the waist Dae was hanged up on the back, which was initially expressed as directed from the left to the right but thereafter expressed. without orderly fashion,. to the direction of the left from the right and vice versa, Dae was in the shape of Yaja Dae. In this regard, an issue of when or where such a disorderly fashion of the direction of the remaining portion of waist Dae was originated is also presented to be clarified. In case of the Ryuneung, Hong-neung and You-neung which have civil servants' stone images wearing exceptional costume (Jo-bok), waist Dae of the Ryu-neung and Hong-neung are designed in the mixture of dual cranes pattern, cosecutive beaded pattern and chrvsenthemum pattern and that of You-neung is designed in cloud pattern. (4) Hol. Although materials of the Hol held in hand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are not identifiable, those should be the ivory Hol as all the Baek Gwan's erected as stone images should be high class officials. In the styles, no significant changes were found, however the Hol's expressed on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Yi-dynasty were shaped in round top and angled bottom or round top and bottom. Parcicularly, at the age of the King Young-jo the Hol was expressed in the peculiar type with four angles all cut off. (5) Hwa (shoes). As the shoes expressed on civil servants' stone images are covered with the lower edges of the Po, the styles thereof are not exactly identifiable. However, reading the statement "black leather shoes for the first class (1 Poom) to ninth class (9 Poom)," recorded in the Gyeongkook Daejon, we can believe that the shoes were worn. As the age went on, the front tips of the shoes were soared and particularly, at the Hong-neung of the King Go-jong the shoes were obviously expressed with modern sense as the country were civil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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