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oseo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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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과 대한제국 시기 사진기록물의 성격과 생산, 유통 과정 (The Facets of Photographic Records on Korea in Modern Era)

  • 박주석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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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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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5-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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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의 개항 이후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대를 찍은 사진기록물은 당시의 기술적 수준이나 대외 개방의 정도를 감안하면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한국 관련 사진기록은 서구 사회에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 인쇄한 서적의 삽화, 화보 신문이나 잡지의 도판, 빈티지 프린트, 사진엽서, 스테레오 사진, 카드형 사진, 랜턴슬라이드(Lantern Slide) 등 다양한 형태로 보급되었고, 현재도 상당량이 남아 있다. 관련 연구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조선 사람이 처음 사진에 찍힌 1863년부터 1910년 이전에 촬영된 한국 관련 사진은 최소 3,000점에서 4,000점 이상이고, 같은 사진이 중복되기는 하지만 발행된 사진엽서의 수는 25,000점 이상이며, 그중 대부분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본 논문은 근대 초기인 구한말 한국 관련 사진기록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경로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이를 전형적인 사진가 또는 기관의 활동 사례를 들어 분석했다. 사진에 찍힌 대상은 분명 한국 또는 한국인의 모습이지만, 사진의 생산 주체는 거의 대부분 제국주의의 부역자들인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이었다. 사진의 경우 생산 주체의 필요나 관점에 따라 사실 관계의 왜곡 가능성이 무척 크다. 그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사진의 내용뿐만 아니라 생산자의 의도와 생산 및 소통 경위가 파악되어야 한다. 세월이 많이 흘러 실제 경험자가 없는 시대의 사진기록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판독하는 문제는 근대 한국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폭넓게 연구하기 위한 초석이기 때문이다.

『강희자전(康熙字典)』과 한국 한자(漢字) 자형(字形)의 영향 관계 연구 (A Study on the influence relationship between 『Kangxizidian(康熙字典)』 and Chinese character's shapes used in Korea)

  • 김영옥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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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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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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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청대(淸代) 강희제(康熙帝)의 칙명(勅命)으로 제작된 자전(字典)인 "강희자전(康熙字典)"의 한자(漢字) 자형(字形)이 조선 후기 및 그 이후 현대까지 한국의 한자(漢字) 자형(字形)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며, 그것이 한국한자학사(韓國漢字學史)와 자형학(字形學) 연구에서 가지는 의의를 찾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강희자전"은 영조(英祖) 5년(1729년)에 조선에 유입되어 조선의 한자 자형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교육부에서 2000년에 수정하여 제시한 '한문 교육용 기초 한자'의 자형 표기 기준으로 '강희자전의 자형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대까지도 그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하지만 "강희자전"과 역대의 한국 한자(漢字) 자형(字形)과의 영향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과 그것의 의의를 탐구하는 연구는 단편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자료를 보강하면서, "강희자전"이 한국의 한자 자형에 미친 영향과 의의에 대하여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하고자 하였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강희자전"의 정자(正字) 제시 원칙과 방법의 구체적인 사례를 확인하였으며, 또한 "강희자전"이 조선에 유입된 이래로 조선 후기 및 현대까지 한국의 한자 자형에 미친 영향의 구체적인 내용 파악 및 그것이 가지는 의의에 대해서도 고찰하였다. 이 연구가 앞으로의 한국 한자 표준 자형 선정에 대하여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철비(鐵碑)의 조영(造營) 연구(硏究) (A Study on The Iron Monument in The era of Joseon Dynasty)

  • 홍대한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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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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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5-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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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우리사회에서 철을 자유로이 사용하게 된 것은 채 100년이 안 된다. 중세 이전 우리나라의 철 생산은 원시적인 행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태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407년 전국적으로 대규모 철장[철광산] 증설을 시행하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 때 개발된 철장의 수를 전국적으로 78개 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5세기에 편찬된 "농사직설"에 따르면 철재 농기구는 지주 등 일부만이 소유할 수 있는 중요한 재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이었던 농기구마저 지주 등 일부에게 한정되어 사용되던 시절이었기에 다른 용도로 철을 사용한다는 것은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러한 상황은 16세기 말~17세기 전반기에 거듭된 전쟁으로 관영수공업이 파괴되었으며, 국가로부터 제철업경영권을 위임 받은 '별장'이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철소(鐵所)를 사적으로 경영하게 되면서 획기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철비는 크게 현감, 관찰사 등 지방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와 1684년 제작으로 서당을 운영하기 위하여 창립한 전남 진도 학계(學契)비 등의 사적(史蹟)비, 보부상 들이 세운 송덕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철은 과거 부의 상징이자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중요한 공덕비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철비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철은 동양사상에서 악한 것을 물리치고, 지기(地氣)가 강한 곳을 누른다는 비보풍수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철비가 세워진 가문은 최고의 영광이었다고 한다. 철비는 17~18세기 들어 제작이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것은 선정을 베푼 수령의 증가가 아닌, 역설적으로 원성을 듣던 수령이 직접 세우는 사례가 증가하며,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바꾼 후 조상의 정통성을 가공하기 위해 철비를 세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떠한 이유로 철비를 제작하게 되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으나, 오행(五行)사상과 관련 깊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은 곧 금(金)이다. 오행에 있어 '금'의 기운을 보면 '금'은 대지를 뜻하며, 그 색은 황금이며 황금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찬란한 휘광이다. 또한 금은 모든 쇠, 또는 철이기도 하기 때문에 음의 기운에 속한다. 금은 단단하고 변함없으며, 절대 부서지지 않는 강인한 기운을 지니고 있다. 이승이 양이라면 저승은 음이다. 이러한 오행사상과 철이 지니는 가치 때문에 철로 비를 제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급격한 생산력의 증대가 이루어진다. 세종대 이후 농업기술의 발달에 기인한 바 크며, 17세기 이후 상업자본의 성숙과 함께 사대부와 견줄만한 재력을 모은 중인계층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사회여건 속에서 자신들의 권위와 부를 상징하기 위해 당시까지만 하여도 귀했던 철을 소재로 비를 건립한 것으로 판단된다.

보물 제 308호 전주 풍남문 주요 부재의 수종 연구 (Study on Species Identification for Pungnammun Gate (Treasure 308) in Jeonju, Korea)

  • 박정혜;오정은;황인선;장한울;최재완;김수철
    • Journal of the Korean Wood Science and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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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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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8-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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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에서는 전라북도 전주시에 소재한 보물 제 308호 풍남문 건축부재의 수종을 분석하였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풍남문은 전주를 둘러싸고 있는 옛 전주읍성의 남문이다. 1388년 전주부성을 세우면서 동서남북 4개의 문도같이 설치되었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34년 재건하였고, 1768년 3층루였던 것을 2층루로 수축하면서 이때 읍성의 남문을 '풍남문'이라 지은 것이 오늘날에 이른다.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의 양식과 다른 문루 건축에서 볼 수 없었던 건축양식들이 잘 남아 있어 1963년 보물 제 308호로 지정되었다. 수종분석은 건축 부재 중 기둥, 보, 창방, 도리, 장여, 주두, 동자주, 추녀, 귀틀, 종대(종보)를 대상으로 실시하였으며 분석 결과 모두 소나무(Pinus spp.)로 식별되었다. 이는 조선후기 건축물에 나타나는 주요 수종으로 소나무를 사용한 것과 일치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문루 건축문화재의 수종 자료 구축 및 훗날 문화재 수리 과정에서 참고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 어보 보수(寶綬)의 재료학적 분석 (Material Analysis of Bosu of the Royal Se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Korean Empire)

  • 이혜연;김주영;조문경;김민지;박대우;이정민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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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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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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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조선의 어보는 국가 왕실을 상징하는 인장이다. 보수(寶綬)는 어보에 달린 붉은 끈으로, 어보의 품격을 높여주는 장식의 목적과 취급의 편리를 위해 제작되었다. 보수는 끈목과 방울술로 이루어졌다. 본 연구는 1441년부터 1928년까지 제작된 조선 왕실 및 대한제국 황실 어보의 보수 총 318점을 대상으로 형태 조사, 색상, 재질, 성분 분석 등을 실시하였다. 연구 결과 끈목은 시기가 후반으로 갈수록 길어지고 얇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방울술은 1800년대 중후반부터 방울목이 대부분 사라지고 술 끝에 고리가 나타난다. 보수의 색상은 대부분 다홍색이지만 주황색과 자주색도 확인된다. 보수의 재질은 대부분 실크로 확인되지만 1900년대 제작된 어보의 보수 5점과 1740년대에 제작된 어보의 보수 1점은 레이온으로 추정된다. 1740년대에 제작된 어보의 보수는 1900년대에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방울술을 장식하는 금지의 주요 성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1800년대 중반까지는 술과 방울에 금(Au)이 주요 성분인 금지를 사용하지만 18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술에는 금(Au), 방울에는 황동(Cu-Zn)이 주요 성분인 금지를 사용하다가, 후반 이후 술과 방울에 황동이 주요 성분인 금지를 사용하였다. 보수는 어보의 한 부속품이지만 본 연구를 통하여 시대에 따른 제작 기법과 재질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간행된 한국학 분야 영문학술지의 연구 동향 분석 (Research Trends in English-Language Journals of Korean Studies Published in Korea)

  • 김민정;이혜은
    • 한국비블리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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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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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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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는 국내에서 간행된 한국학 분야 영문학술지의 연구 동향을 분석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연구의 대상은 A&HCI 및 SCOPUS에 등재된 한국학 분야 영문학술지 4종으로, Korea Journal 768편,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466편,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285편, Acta Koreana 321편 등 총 1,840편을 선정하였다. 이를 대상으로 내용 분석, 저자 분석, 저자 키워드 빈도분석, 토픽모델링을 수행하였다. 연구의 결과 한국학 연구는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체육학 순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세 영역 모두 2000년 이후 출판 논문의 수와 범위가 크게 성장하였다. 연구의 대상 시기는 현대, 조선 후기, 근대 일제강점기 순이었다. 논문 저자의 소속 기관은 국내 소속 기관의 저자가 73.34%였으나, 국외 소속 기관 저자의 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저자 키워드는 'Korea'(41번), 'Buddhism'(20번), 'Koreanwar'(18번) 'Joseon'(18번) 등이 상위 키워드로 도출되었다. 토픽모델링에서는 '한국 문화, 문화 전파 현상', '한국 현대 정치사', '한국 사회 민주화 과정', '일제강점기 시대상', '한국 고유 종교철학', '한국 고대사' 등 총 6가지의 토픽이 확인되었다. 이 연구를 통하여 최근의 국제적인 한국학 학술 커뮤니티의 관심사와 연구영역을 파악할 수 있었다.

A Study for the Restoration of Hong Dae-Yong Honsangui - Focusing on the structure and operating mechanism -

  • Lee, Yong Sam;Kim, Sang Hyuk;Park, Je Hoon
    • Journal of Astronomy and Space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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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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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7-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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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Honsangui (celestial globe) which is a water-hammering method astronomical clock is recorded in "Juhaesuyong" which is Volume VI of supplement from "Damheonseo", written by Hong Dae-Yong (1731~1783). We made out the conceptual design of Hong Dae-Yong's Honsangui through the study on its structure and working mechanism. Honsangui consist of three rings and two layers, the structure of rings which correspond to outer layer is similar to his own Tongcheonui (armillary sphere) which is a kind of armillary sphere. Honsang sphere which correspond to inner layer depicts constellations and milky way and two beads hang on it as Sun and Moon respectively for realize the celestial motion. Tongcheonui is operated by the pendulum power but Honsangui is operated by water-hammering method mechanism. This Honsangui's working mechanism is the traditional way of Joseon and it was simplified the working mechanism of Shui y$\ddot{u}$n i hsiang t'ai which is a representative astronomical clock of China. This record of Honsangui is the only historical record about the water-hammering method working mechanism of Joseon Era and it provide the study of water-hammering method mechanism with a vital clue.

타락(駝酪)의 한반도 수용과 의미 변천 (Changed Conception of Korean Tarag)

  • 홍세영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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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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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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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Objective : Tarag refers to fermented milk, which has been recognized as daily food of summer in nomadic culture. Also, tarag is cleary defined as a fermented milk product in most of east Asian medical texts. When it comes to tarag-juk described in Korean medical texts, however, there is no definite distinction between milk porridge and tarag-juk. This paper is aimed at finding out whether tarag was merely meaning milk in Joseon. Method : Historical documents of related historical stage, Tibetan and East Asian medical texts, and some cookbooks are mainly consulted, as well as other sources that contains the perception of tarag in Korean history. Result : Tarag is documented as fermented milk in the medical texts of herbs, while tarag-juk is defined as milk porridge in some medical texts in Korea. In one of the Mongolian-Korean dictionary of 18C, milk tea is explained as tarag tea. Conclusion : Although there is not much evidence to back up this conclusion with satisfaction, it would not be to much to say that conception of tarag met some changes from yogurt to boiled milk during Joseon dynasty.

조선시대 석(舃) 연구 (A Study on the Form of Seok(舃) in the Period of Joseon)

  • 최규순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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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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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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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Seok, shoes worn for rituals that originated in China, is worn as part of a formal dress in Korea. The Seok for men were worn with Myeonbok(冕服: kingly ceremonial costume) and Wonyugwanbok(遠遊冠服) and the Seok for Jeokui(翟衣: queenly ceremonial costume) and Jangsam(長衫). Myeonbok, Wonyugwanbok, Jeokui and Jangsam were ceremonial costumes of ancient times. This paper examines Seok, which has never been the focal point of a study, and focuses on the period of Joseon(1392~1897). It was possible to concretely identify its changes in each of the periods and genders by means of the literature and picture data. It turns out from this paper that a unique Korean style emerged in the days of Kings Yeongjo(英祖: 1694~1776) and Sunjo(純祖: 1790~1834). The Seok that were imported from China after the Goryeo period included a neck part, which was a departure from its original form. However, during this period, fences were added on the top of the shoes, and rings were added to thread laces in Seok from China. Women wore their Seok in this period with different ornaments in accordance with the different situations.

한성부(漢城府)의 '통호번도(統戶番圖)' 제작과정을 통해 본 대한제국기(大韓帝國期) 관광방(觀光坊) 대형필지의 변화양상 (A Study on the Urban Changes of Hanseongbu漢城府 through Analysis on Kwangmu-Census光武戶籍)

  • 정정남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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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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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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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This paper deals with a fundamental study for '$Tonhobeondo$統戶番圖-making' of Hanseongbu(modern Seoul) before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onhobeondo$統戶番圖-making' will be accomplished through analysis on Kwangmu-census光武戶籍 as a map of address-system in the Joseon period. It is possible to consider the urban changes of Hanseongbu(modern Seoul) because of '$Tonhobeondo$統戶番圖' reflects a urban situation from the 1897 to 1906. At present, an address-system of Korea was made by the cadastral survey in the 1914. By the way, new address-system was a completely different from traditional address-system of Joseon period. Consequently, different two address-system caused a lot of difficulties the study on the urban changes. For such a reason '$Tonhobeondo$統戶番圖-making' is very important. If '$Tonhobeondo$統戶番圖-making' would be accomplished, it will be used by a field of urban, architectural and historical science study besid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