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eong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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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의 사대부(士大夫) 인식(認識)과 그 특징(特徵) (King Jeongjo's recognition on Neo-Confucian literati and it's historical meaning)

  • 박성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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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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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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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정조는 척족이 특권세력으로 발호하던 영조대 후반의 탕평정치에서 아버지를 여읜 피해자였다. 노론의 거센 방해공작을 뚫고 왕위에 오른 정조의 목표는 왕권 강화였다. 정조는 탕평정책을 영조 50여년 치세의 대업적으로 칭송하고 척신과 탕평당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신하들에게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국변인(國邊人)'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정조가 즉위 직후부터 설치 운영한 규장각(奎章閣)은 겉으로는 어제(御製)의 봉안 등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정조의 우군을 양성하기 위한 기구였다. 그만큼 정조가 외척들을 누르고 어떻게 사대부들을 포섭하는가 하는 문제는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본고에서는 정조가 사대부들을 어떻게 굴복시키고 포섭하려 했는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하였다. 그것을 통해서 정조가 시도한 왕권강화책의 논리와 방법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정조는 경학(經學)의 본질은 성리학이 아니라 실생활과 절실하게 관련된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이념적 근거를 붕괴시키고자 하였다. 정조가 사대부들의 풍기와 세도를 비판하고 그들의 학문인 주자성리학의 의미를 축소했던 것은 사대부들을 왕권에 복속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붕당론이나 성학론을 기본으로 하는 사대부들의 정치 이념과 학문적 근거를 반박함으로써 공론(公論)의 주체로서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려고 하였다. 정조가 영조의 '군사(君師)' 개념을 계승하고 왕호도 '홍재(弘齋)'에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바꾼 것은 그의 사대부 비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조의 격기(膈氣)에 대한 연구 - 『승정원일기』를 중심으로 - (A Study on Gyeok-ki(膈氣) Symptoms of King Jeongjo - Foucsed on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

  • 김동율;정지훈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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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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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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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Objectives : To examine the progression and presentation of King Jeongjo's Gyeok-ki(膈氣) symptoms during his reign. Methods : Based on recordings in the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related to Gyeok-ki(膈氣), characteristics of King Jeongjo's case was analyzed, then compared and examined against the political situation he was in. Results : During the 24 years of reign, King Jeongjo's Gyeok-ki(膈氣) developed in four stages; beginning stage with mild symptoms, intrinsic stage where it became the King's main disease, peak stage where symptoms intensified, and chronic stage where symptoms became rather manageable but the disease occurred regularly. Conclusions : From the year of accession to the year of death, King Jeongjo consistently complained of Gyeok-ki(膈氣), which seems to be strongly related to his family history and political situation.

정조(正祖)의 「책문(策問) : 춘추(春秋)」를 통해 본 조선조 춘추학(春秋學)의 문제의식 (Critical Mind on Chunchu Study in Joseon through Chaekmun: Chunchu of King Jeongjo)

  • 김동민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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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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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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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논문은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된 정조(正祖)의 "책문(策文):춘추(春秋)" 20여 조목의 분석을 통해, 정조의 "춘추"에 대한 시각과 조선조 춘추학의 문제의식을 밝힌 것이다. "책문"에서는 크게 "춘추"의 구성이나 내용과 관련된 문제, "춘추" 및 삼전(三傳)의 평가와 관련된 문제 등 춘추학 전반에 관한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정조는 이 "책문"을 통해 '경세(經世)의 대전(大典)'으로서 "춘추" 경전이 지닌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춘추"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이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자료는 "경사강의(經史講義)"에 수록된 1793년과 1796년의 "춘추(春秋)" 조문(條問)과 함께, 정조의 "춘추"에 대한 관점과 학문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춘추학의 현황과 주요 관심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상사적 가치를 지닌다.

정조(正祖)의 궁원(宮苑) 유락(遊樂) (Jeongjo's Enjoyment of the Palace Garden)

  • 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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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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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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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연구의 목적은 정조가 궁원에서 즐긴 유락의 실태를 규명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화조어연'은 규장각을 위한 연회로 규례를 정하고 정례화 했다는 차별성이 있다. 정조는 다섯 차례의 행사를 열었다. 둘째, '세심대 놀이'는 정조의 비극적인 개인사를 바탕으로 하는데, 네 차례의 행사가 있었다. 셋째, 정조는 비가 내린 직후에 맑은 물이 흘러넘치는 옥류천의 '폭포 구경'을 즐겼다. 이는 일상적 경관이 아니라 많은 비가 내린 후의 임시적인 경관을 즐겼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넷째, '설중용호회'는 무신들을 위무하는 자리로 일곱 차례의 행사가 있었다. 한 겨울에 열린 이 행사에서는 참석자들이 각자 쇠 꼬치에 꿩을 꿰어 구워 먹게 했다. 또 술과 음악을 베풀어 군신(君臣)이 고락을 함께하는 것을 강조했다. 다섯째, 정조는 겨울철에 난로회를 열거나 난로회의 고사에 따라 술과 음식을 내려 문신들의 노고를 위로하기도 했다. 여섯째, 정조는 활쏘기에 능했으며 이를 즐겼다. 정조 궁중의례인 연사례를 복원하고자 하였으며 두 차례의 연사례를 열었다. 일곱째, 정조는 바쁜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후원에서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정조는 후원의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만물이 생성, 변화하는 주역의 의미를 일깨우기도 했다. 여덟째, 정조는 궁원에서 '군신동락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마련했다. 정조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측근 신료들의 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의 한계는 정조 관련 여러 고문헌 중 번역물에 국한하여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번역 성과물이 축적됨으로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정조연간 팔달문 현판의 단청 복원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Restoration of Paintworks on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during the Jeongjo er)

  • 김석현;구본능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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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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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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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Paldalmun gate was built in 1794 as the southern gate of Suwon Hwaseong. The signboard's paintworks of Paldalmun gate was applied to the signboard of the state-run building in the 18th century.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was repainted along with the building when repaired in 1969. In that time, the signboard's paintworks during the reign of Jeongjo era was transformed.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store the image of Jeongjo era paintworks on the Paldalmun's signboard, which has been modified since the 1960s due to modification. For the purpose of the examination, we examined the traces of paintworks remaining on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and examined several state-run signboards decorated with 'Yukhwamoon' paintings similar as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which made around the 18th century. Through the above-mentioned researches, typical color features were identified in the decorated with 'Yukhwamoon' paintings on signboard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In addition, the type of pigment used in the signboard's paintwork of Paldalmun gate was verified through the 『Hwaseong Seongyeok Uigwe(華城城役儀軌)』 and the 『Han-gul Jeongri Uigwe(한글整理儀軌)』, while analyzing the characteristics of age-related deterioration according to the type of paintworks in various traces of pigment coatings remaining on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현륭원(顯隆園)의 입지선정과 원침계획에서 정조(正祖)의 역할 (King Jeongjo's Role in Selecting the Site and Planning the Tomb of Hyeonryungwon)

  • 김동욱;우희중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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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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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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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Hyeunryungwon is a tomb for Crown Prince Sado, who was the father of King Jeongjo, the twenty second king of Joseon dynasty. The tomb had been originally in the Eastern part of Seoul, but was relocated in 1789 to the downtown Suwon, which was renowned as a good tomb site among the Royal family at that time. King Jeongjo looked through the records from the previous generations for the ideal location and direction for the tomb. He personally studied Feng Shui theory and designated its location and direction. He ordered for lavish decorations for the stone adornments of the surroundings of the grave mound, which was against the regulations of the royal family. He found his reasons in the precedent that allowed sumptuous decoration. However, for the arrangements of Jeongjagahk(T shaped building) and other attached facilities, he made unusual choice that other precedent royal tombs did not have. Instead of following the conventions that Jeongjagak should be facing south of a grave mound, he put it on the right side of grave mound. Also conventionally, Subokbang(a place where guards can stay) and Suragan(a kitchen that prepares food for sacrificial rites) should be facing symmetrically, but they too, were on the same side with Jeongjagak. It was a measurement that the grave mound of Hyeunryungwon can have a full view without being obstructed by other facilities and it was also personally ordered by King Jeongjo. The distinguishing features of Hyeunryuwon was motivated by King Jeongjo's filial affection, and his academic pursuit of precedent royal tombs initiated the unconventional and innovative challen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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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친찬(親撰) 『삼례수권(三禮手圈)』의 편찬 의도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n Complication Intention of the Samryesugwon)

  • 윤현정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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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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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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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정조가 초본 『사부수권』을 편찬한 목적이 선본 시리즈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밝히고, 편찬 과정과 구성상의 특징을 검토한 뒤, 실제 절록 양상을 정리하여 『삼례수권』의 편찬 의도를 규명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삼례수권』은 약 20일 간의 짧은 시간 동안에 편찬되었으며, 특히 『예기수권』의 편찬의 경우 절록 과정이 다소 세밀하지 못하다. 둘째, 그 구성은 목차나 초록된 구절의 출처와 같은 정보를 생략하거나 간단하게 표기하여 절록된 구절을 강조하고 있으며, 『의례』, 『주례』, 『예기』세 문헌마다 강목 설정을 다르게 하고 있다. 셋째, 정조는 삼례에 대해 『의례』와 『주례』를 존숭하였으며, 『예기』에 대해서는 앞의 두 문헌보다 부차적인 문헌으로 수용하고 있다. 넷째, 정조 특유의 섬세한 절록 양상이 나타나지 않고, 삼례 각 문헌마다 상이한 절록 규칙을 보인다.

정조(正祖)의 화훼(花卉) 애호 태도와 의미 (Jeongjo's Attitude and Meaning of Flowering Plant Loving)

  • 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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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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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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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의 목적은 정조가 애호한 화훼는 무엇이며 그 태도와 그 이유, 여기에 반영된 의미를 밝히는데 있다. 연구의 범위는 완호(玩好)의 대상물로서의 특정 '화훼'에 한정하였다. 연구의 방법은 사료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고찰하고 해석하는 기술(description)적 연구로 진행하였다. 정조의 일생은 매우 절제된 생활태도로 일관했다. 그의 의식주는 소박했으며 음악, 잡기, 여색 등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조는 기화요초(琪花瑤草)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정조의 태도로 인해 특정 화훼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드러낸 일이 많지 않다. 정조는 여러 종류 꽃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꽃을 소재로 문학 혹은 회화 등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도 막힘이 없었다. 정조 스스로 자신이 애호하는 꽃으로 밝힌 것은 석류가 유일하다. 그러나 정조에게 있어서 석류는 단순한 완상(玩賞)의 대상물로서의 화훼가 아니었다. 석류는 벼농사의 절기를 알려주는 '지표식물(indicator plant)'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를 가까이 두고 수시로 접함으로서 농사의 절기를 일깨우는 매체가 되도록 했는데 그 수량도 단지 몇 그루에 그쳤다. 이 밖에 정조는 즉위 초반에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 등 안위가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석류화분 5, 600개를 팔진도(八陣圖)의 돌무더기 형태로 배열하여 처소에 대한 방호물(barricade)로 활용하기도 했다. 정조의 이와 같은 석류화분 활용은 관상 등 시각적 활용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매우 독특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기록을 볼 때 석류는 재위기간 전반에 걸쳐 정조와 함께한 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조가 이렇듯 장기간에 걸쳐 석류를 가까이 한 이유도 미적 향유(享有) 등 통념적인 화훼에 대한 완상(玩賞) 행태와 차별성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본 연구의 한계는 국역된 자료에 의존하여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료의 번역 성과에 따라 보다 심도 있는 후속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창덕궁 후원 부용정(芙蓉亭)의 조영사적 특성 (Historical Studies on the Characteristics of Buyongjeong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 Palace)

  • 송석호;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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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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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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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芙蓉亭)은 독특한 평면형태, 공간구성, 건물의 장식 등이 뛰어난 비례와 대비를 이루고 있는 점을 인정받아 2012년 3월 2일에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지정사유가 형이하학적으로 평가되었고, 그마저도 왜 지금과 같이 독특한 형태로 조영되었는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자연철학 및 사상에 관한 형이상학적 접근을 시도하였고, 조영의도와 공간구조의 특징을 규명하여 부용정의 정체성을 찾는데 주력하였다. 요약된 결과는 아래와 같다. 첫째, 부용정의 조영배경 및 특징: 정조는 즉위와 함께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奎章閣)을 창설하고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양성하였다. 또한 각신(閣臣)들을 가인(家人)처럼 우대해주며 친정체계를 구축하였다. 정조의 적극적인 개혁정치는 신하들에게 후원을 구경시켜주기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조 16년(1792)에 각신을 중심으로 한 내각상조회(內閣賞釣會)를 공식적으로 발족하고 후원유람을 정례화하게 되었다. 후원유람은 꽃을 보고 낚시를 하는 상화조어연(賞花釣魚宴), 난정수계의 활동 등으로 이루어졌고, 이후 국가의 대신들이 참석하게 되면서 큰 행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조는 대신, 중신, 각신들과 이러한 문화 활동을 함께하고 나아가 자신의 왕도정치를 실현할 장소로써 부용정을 조영한 것이었다. 둘째, 부용정의 입지와 공간적 특성: 정조는 즉위(1776)와 함께 택수재를 새롭게 개축하였다. 무엇보다 개유와-택수재-원도-어수문-규장각을 축선에 맞춰 연계한 점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재의 규장각 일원을 계획-설계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정조 17년(1793)에는 기존의 사우정(四隅亭) 형태였던 택수재를 군신(君臣)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위계를 두어 증축하고 부용정이라 칭하였다. 지당 위에 위치한 부용정의 북쪽공간은 임금의 공간으로 다른 곳보다 한 단 높게 조성하였고 창호도아자살로 차별화한 특징을 보인다. 서쪽과 동쪽은 신하들의 공간이다. 중앙공간은 양측의 신하들이 북쪽공간에 입어한 임금을 배알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며, 서쪽과 동쪽의 신하들은 부용정의 귀퉁이 공간을 돌아 남쪽공간에서 중앙공간으로 입실하게 되는 구조로 조영되었다. 결국 부용정은 최소한의 공간으로 편전(便殿)의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정원건축물인 것이다. 셋째, 부용정의 문화적 가치: 부용정 일원은 세조, 인조, 현종, 숙종, 정조 등 왕들의 사유적인 정원문화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며 꾸준히 발전된 특징을 보인다. 특히 정조는 선왕들이 조성해놓은 다양한 물리적, 사회적, 상상적 환경 등을 계승하였고 더불어 자신의 왕도정치를 위해 신하들을 후원에 불러들였으며 그 중추적 장소로 부용정을 완성한 것이다. 곧 부용정은 조선왕조의 영속성이 반영된 정원건축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유교사상이 정자에 반영되어 위계가 구분된 독특한 사례로써 왕의 정원에서만 나타나는 특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조시대와 에도시대(江戶時代)의 화장문화(化粧文化)와 수발문화(鬚髮文化)의 비교 연구 (Comparative Study of Make-up and Hair Styling Cultures of the King Jeongjo and the Edo Period)

  • 김민경
    • 한국생활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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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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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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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In the Edo period speaking of hair culture, common women wore decorative pigtail ribbons on the right, and twisted from side to side their tressed hair in such a manner as ungeunmeori and traemeori. Instead of gachae, common women used gogae made of their own hair, ungeunmeori on forehead, or jjokjinmeori at the back of head. During the Edo period, people women naturally exposed their necklines as a way of exposing their faces in the aesthetically ceremonial act of wearing make-up. As for lipsticks, they rouged extracts from red petals of safflowers mainly on their lips, and sometimes on their cheeks by blending this with white powder. Samurai families disliked women who wore thick lip makeup. In the latter period, women painted their necklines or foreheads black, applied a small amount of rouge on their cheeks thinly or thickly, and colored a reddish color into their fingernails by using petals and leaves of balsam flowers. Despite the chronological and spatial proximity of the King Jeongjo period and the Edo period, it was found that there were no similarities between two countries' cosmetic cultures. Moreover, it was discovered that current TV dramas were being produced, even not based on historical evidence in the Jeongjo peri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