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apanese u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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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구술자료의 관리와 활용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소장 구술자료를 중심으로- (Management and Use of Oral History Archives on Forced Mobilization -Centering on oral history archives collected by the Truth Commission on Forced Mobilization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Republic of Korea-)

  • 권미현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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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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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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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라 함은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 되어 군인 군속 노무자 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가 입은 생명 신체 재산 등의 피해를 말한다. 강제동원 피해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피해당사자, 유족, 시민단체, 학계 등에서 이루어져왔고, 그 결과 2004년 3일 5일 ${\ll}$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등에 관한 특별법${\gg}$ (2007년 5월 17일 일부 개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를 근거로 2004년 11월 10일 국무총리 소속으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하 강제동원위원회)가 발족하였고, 2005년 2월 1일부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주요 업무는 강제동원 피해신고접수 및 피해신고조사(피해자 및 유족 심사 결정), 진상조사신청접수 및 진상조사, 진상조사 및 피해판정 불능에 관한 사항, 피해판정에 따른 호적정정, 강제동원 관련 국내외 자료수집 분석 및 보고서 작성, 유해발굴 및 수습 봉환, 사료관 및 추도공간 조성사업 등이다. 강제동원위원회는 피해조사 및 진상조사 업무를 위해 다양한 기록을 발굴 수집해 오고 있다. 여타 피해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이미 공개되었거나 새롭게 발굴되는 기록은 강제동원의 다양한 역사상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그 양이나 질에 면에서 부족하다. 피해의 역사에서 피해당사자의 이야기는 기록의 부재를 메우기도 하고, 기록 이상의 근거적 가치를 갖기도 한다. 강제동원위원회는 피해생존자와의 구술면담을 통해 다수의 구술자료를 생산하였고 조사업무에 활용하며 체계적인 관리방법을 토대로 관리하고 대중적인 활용까지 꾀하고 있다. 강제동원위원회의 구술자료는 생산 당시부터 철저한 기획에 의해 이루어졌고, 생산단계부터 관리와 활용의 편의성을 염두에 두고 디지털매체의 생산을 유도했다. 또한 조사업무 과정에서 생산되는 구술자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차례 면담자 교육을 실시하고, 면담자로 하여금 구술당시의 상황을 면담일지로 남기도록 했다. 강제동원위원회는 소장 기록을 관리하는 별도의 기록관리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피해 진상 관리시스템과 전자결재시스템을 통해 생산되어 관리되지 않는 생산 수집 기증 기록을 등록 검색하는 역할을 한다. 구술자료는 디지털 아카이브에 등록이 되어, 실물과 중복 보존되고 있다. 구술자료는 등록과 동시에 분류, 기술행위가 이루어지고 구술자료의 관리 아이디인 등록번호, 분류번호, 비치번호 등을 부여받게 된다. 강제동원위원회는 구술자료의 적극적인 활용을 위하여 구술기록집의 발간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고, 영상물 등의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 강제동원위원회의 구술자료는 정부차원의 조사 업무 과정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한계, 예산부족이나 기록관리시스템 등의 부재 등을 넘어서 한시조직으로서 가능한 적극적인 방법으로 생산 관리 활용되고 있다. 축적된 구술자료는 향후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사료관 등이 건립된다면 대중 이용자들을 위해 더 체계적으로 관리 활용될 것이다.

유튜브 이용이 수용자의 이슈 중요성 인식과 태도에 미치는 영향 (Effect of YouTube Usage on the Audience's Attitude and Perception of Importance of Issue)

  • 박덕춘
    • 디지털융복합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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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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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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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기존의 미디어 효과에 관한 연구들이 신문, TV, 영화 등과 같은 미디어가 수용자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바, 게이트키퍼가 없는 인터넷 기반의 새로운 미디어인 유튜브의 시청도 수용자의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살펴본 실증적 연구이다. 본 연구를 위해서 모두 76명의 대학생들을 2개의 집단으로 나누고, 한 집단에게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다른 한 집단에게는 불매운동과 전혀 관계없는 단편 영화를 4주 동안 매주 시청하게 한 후 설문조사를 통해 이들의 이슈 중요성 인식과 태도를 측정,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유튜브 영상을 시청한 수용자들이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지 않은 수용자들보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불매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의제설정 효과와 점화 효과가 발견되었다. 본 연구의 결과를 통해 유튜브의 의제설정 효과와 점화 효과를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향후 유튜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수용자 효과에 관한 연구가 이어져 유튜브의 미디어 효과에 관한 이론이 정립되기를 기대한다.

일본 원격진료의 지역화 형성 및 특성에 관한 연구 : 카가와현(香川県)을 통한 지방의 원격진료 사례를 중심으로 (A Study on Regionalization of Telemedicine in Japan : A Case of the Kagawa Prefecture)

  • 박수경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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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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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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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에서는 원격진료 기술로 병원간 통합을 꾀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를 중심으로, 원격진료의 지역화 형성 및 특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연구를 통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에서는 원격진료의 효과적인 운용을 위해, 현청, 지역 내 대학, 의사회, 지역 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 등을 주축으로 하는 "원격진료 의원회"를 구성하여, 이를 활발한 의사 교환의 장(場)으로 이용하고 있다. 따라서 지역의 다양한 의료 종사자와 환자의 직접적인 수요를 최대한 반영하고, 조속히 맞춤형 원격진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을 형성하였다. 둘째, 이미 형성된 긴밀한 인간관계가 원격의료의 지역화에 크게 관여하고 있다. 지역의료의 발전을 위한 정책 결정자-의사 집단 간의 관계, 의사회의 정기적인 모임과 연장자 의사 집단의 지역의료에 대한 깊은 이해 및 지원 등을 기반으로 하는 의사-의사 간의 관계, 긴 시간 신뢰를 쌓은 의사-환자 간의 관계 등은 원격진료의 발안 단계에서부터 실제적인 이용과 응용의 단계까지 두루 걸쳐 일본에서만 보여지는 지역화의 특성을 결정짓는다. 결론적으로 오프라인에서 형성된 개인적 차원의 관계(게마인샤프트)가 온라인상의 공적 차원(게젤샤프트)의 서비스로 전환되는 현상이 일본 원격진료의 지역화에서 보여지는 고유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경제, 문화적인 특성들이 원격진료에서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나타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시대 판장(板墻)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Pan-Jang in the Joseon Dynasty)

  • 오준영;김영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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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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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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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가변적, 재료적 특성으로 인해 원형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판장(板墻)을 대상으로, 판장의 사용양상과 용례, 구성요소와 구조에 대한 실증 및 고찰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에 따른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나무널로 만든 담장을 가리키는 판장은 기능, 구조, 단청색 등에 따라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다. 유사한 용례인 판장문과 목판장은 전통적인 판장과 밀접한 관계가 없다. 또한 판장과 재료적으로 유사한 중국의 목영벽과 일본의 판병도 판장과는 분명한 구조적 차이가 있다. 둘째, 판장의 변용유형은 크게 이목기판장, 살판장, 흙판장 그리고 한자어가 다른 판장(板障)으로 구분된다. 이목기판장은 두 단의 방연이 사용된 판장을 가리키며, 살판장은 살대와 널로 만든 투시형 판장을 의미한다. 흙판장은 흙담과 판장의 절충적 형태이며, 판장(板障)은 벽체의 성격을 지닌 고정형 시설로 추정된다. 셋째, 판장의 목부재로는 신방, 기둥, 도리, 중방, 인방, 널, 띠목, 초엽, 방연, 개판, 평고대, 연함 등이 조영의도와 구조형식에 따라 선별적으로 사용되었다. 목부재 외에 못, 잠금장치, 구체적인 용처를 알 수 없는 부속요소도 함께 사용되었다. 넷째, 판장의 기단부는 목부재의 종류와 결구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며, 축부는 상인방의 사용유무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지붕부 재료로는 개판과 기와가 사용되는데, 각각의 재료에 따라 명확한 구조적 차이가 나타난다.

조선시대 목판재료 자작목(自作木)의 실체와 명칭 변화 (The True Identity and Name Change of Jajak-mok, the Wood Species for Woodblock Printing in the Joseon Dynasty)

  • 이운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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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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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6-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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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조선시대 왕실 출판 과정에서 책판의 주요 수종으로 사용된 나무는 '자작목(自作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칭을 보면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가 연상되지만, 문헌에 기록된 산지(産地)와 쓰임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의 '자작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작나무와는 다른 나무로 추정된다. 본고는 조선시대 왕실 출판에 사용된 '자작목'이 실은 거제수나무이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는 우리말 봇나무 즉 '화목(樺木)'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더불어 조선시대 거제수나무를 지칭하던 '자작목'이 어떠한 연유로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를 지칭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당시 일본에서는 '화(樺)'라는 글자를 산벚나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18세기 중반에 일본의 백과전서류가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지금의 자작나무를 의미하는 '화목'과 혼용되게 되었다. 더욱이 '화목'의 우리말인 '봇나무'와 산벚나무의 우리말인 '벗나무'는 발음마저 비슷하여, 이후 두 나무는 '벗나무'로 표기가 통일되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 세 나무의 공식적인 명칭이 정리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농상공부고시와 1912년 조선총독부고시에 의하여 '화목'은 '자작나무'가 되었고, 이후 산벚나무를 뜻하는 '벗나무'는 '벚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본래의 '자작목'에는 '거제수'라는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오늘날 한자 사전에서는 '화(樺)'의 뜻을 '1. 벚나무 2. 자작나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세 나무의 명칭이 혼용되었던 역사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성경신(誠敬信)의 의미 고찰 - 종도 차경석(車京石)의 행적(行蹟)과 성경신 변화 과정을 통한 고찰 - (Consider the Meaning of Sincerity(誠), Reverence(敬) and Faith(信))

  • 유병무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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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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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5-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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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The object of this thesis is to consider the meaning of sincerity(誠), reverence(敬) and faith(信) through Cha gyungseok's historical record. Cha gyungseok(車京石, 1880-1936) is a key disciple of Kang Jeungsan Sangjenim(姜甑山, 1871~1909) to whom Cha kyungseok has begun to follow since 1907, completing his wandering around Yeonghak-gye(英學契), Iljin-hoe(一進會) and Cheondo-gyo(天道敎) after the loss of his father[Cha Jikoo(車致九), 1851-1894] in Tonghak peasants revolution. To examine the meaning of sincerity, reverence and faith as cardinal points in Daesoonjinrihoe(大巡眞理會) creed, this research has taken note of Cha kyungseok's sincerity, reverence and faith who is said to be thought of himself as a head of Reconstruction Work for the Tonghak spitit's resolution of grievances, despite the Sangjenim's intention of using him for different usage due to his sincerity, reverence and faith. Especially, emphasis was given to the illumination of Cha gyungseok's change of sincerity, reverence and faith through closely reviewing his life prior to the encounter with Sangjenim, the process of following Sangjenim and his whereabouts after the ascension of Sangjenim. In addition, through Jeonkyeong(典經), this research also examines Cha kyeong seok's sincerity, reverence and faith along with his ambition contained in that sincerity, reverence and faith. Up to his ascension, Sangjenim has never saved his advice on Cha gyungseok's ambition. Leaving Sangjenim's advice behind, Cha gyungseok moves on to become a head of the Reconstruction Work for the Tonghak spitit's resolution of grievances without deserting the dream of being the Son of Heaven. Although, he showed his prowess as a religious sect leader called Bocheon-gyo boasting its 6 million believers and as a provisional emperor of the country named Sikuk, he ends his life as a head for the Resolution of grievances of kings, princes, generals and premiers due to the change of faith on Sangjenim and interruption of Japanese Imperial Government, without accomplishing his dream. The feature of past disciples suggests the direction of cultivation for our cultivators. Through Cha gyungseok's sincerity, reverence and faith, we could look back upon the meaning of sincerity, reverence and faith and conclude that a real sincerity, reverence and faith is the heart-mind trying to participate in Reconstruction Work of Heaven and Earth with a pure mind, contrary to the one coming out of greed.

수산자원 소유.이용제도의 변천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Evolution of the Holding and Utilizing System of Fisheries Resources in Korea)

  • 류정곤
    • 수산경영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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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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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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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 This study deals with the evolutional history of the holding and utilization of fisheries resources in Korea. Fisheries resources have the basic characteristics of the density dependent self-regulating renewable and common property resources, Irrational utilization of fisheries resources is mainly due to the unlimited access to the resources. The holding and utilization of fisheries resources in Koryo era was opened to everyone. But it was nationalized in the early Yi Dynasty. The purpose of its nationalization was to provent the paticular powered-man with their monoplized holding and to levy fisheries tax. Eoeop-peop, the first modern fisheries law in Korea, was enacted as a part of the invasion policy of Japan in 1908. With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n 1910, the Japanese Government established a new institutional system of fisheries as a part of an overall reformation of the institutional for an implementation of the colonial policy. It was very the new enacted Fisheries Law (Gyogyorei). Also the Government enacted compulsorily another new Fisheries Law (Chosen Gyogyorei) with its adjunct laws and regulations revise the institutional system of fisheries on May 1, 1930. After Eoeop-peop enactment, the fisheries resources in Korea could be used only under the license, permission, and statement. After Korea was from Japan in 1945, Korea Government at last enacted the new fisheries law (Susaneop-peop) in 1953. The goal of Susaneop-peop was to achive the general usage and protection of the fisheries resources, and to attain the development and democratization of the fishery in Korea. This law was amended 13 times until 1990. The license fishery have a legal right on the fishery, called a fishery rigt. This right means a right of exclusive occupation and utilization of a unit of the inshore fishing grounds. The main evolutional issues of license fishery are as the following : 1) the foundation of the exclusive usable fishery right(1911, Gyogyorei), 2) the deletion of the settled U9space lift net and settled space sein net fishery, and the expansion of the cooperative fishery-No.1, 2, and 3 type cooperative fishery-(3rd amendment, 1963), 3) the deletion of the No.2 and 3 type cooperative fishery, and the separation of the culturing fishery in No.1 and 2 type culturing fishery (13th amendment, 1990). The effective period of the license fishery was amended as the following : 1) 1908(Eoeop-peop) : within 10 years, renovation system, 2) 1929(Chosen Gyogyorei) : within 10 years, unlimited extension system, 3) 1971. 7th amendment : 10 years, renovation system, 4) 1972. 8th amendment : 10 years, only 1 extension system, 5) 1975. 9th amendment : 5-10 years, only 1 extension system, 6) 1990.13th amendment : 10 years, within 10 years of total extensional years. The priority order of the fishery license was established in 1953 (Susaneop-peop). The amendment of it is as follows : 1) 1953. enactment \circled1 the fishing grounds that the fishery right is extablished 1st order : the existing fishery right man, unlimited renovation 2nd order : the corporat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3rd ord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circled2 new fishing grounds 1st order : the corporat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2nd ord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2) 1971. 9th amendment \circled1 the fishing grounds that the fishery right is established 1st order : the existing fishery right man, unlimited renovation 2nd order : the Eochongy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3rd order : the regional fishery cooperativ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4th ord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circled2 new fishing grounds 1st order : the Eochongy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2nd order : the regional fishery cooperativ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3rd ord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3) 1981. 10th amendment \circled1 the inside of No.1 type cooperative fishing grounds 1st order : the Eochongy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2nd order : the regional fishery cooperativ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3rd or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4) 1990. 13th amendment \circled1 No.1 type cultural fishery 1st order : the Eochongy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2nd order : the regional fishery cooperativ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3rd ord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circled2 No.2 type cultural and settle fisher : general priority order The effective period of the permission fishery was amended 6 timed. First, it was within 5 years and renovation system (Eoeop-peop). Now it is 5 years and renovation system. The effective period of the statement fishery was amended 4 times. First, it was within 5 years, and then was amended within 3 years(Chonsen Gyogyorei). Now it is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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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도서를 중심으로 본 1910년대 탑골공원의 성립과정 (1910's Tap-gol Park Construction Process through Design Document Interpretation)

  • 김해경;김영수;윤혜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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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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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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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탑골공원의 조성 논의가 시작된 1897년부터 공원 형태가 완성된 1916년까지 약 20년 동안 작성된 설계도면을 1차 사료로 활용하여 공간 구성요소의 변화를 통한 공원 성격의 형성과정을 분석했다. 이에 도출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897년에서 1904년까지는 왕실 소유의 공원으로 탑골공원이 조성되는 시기이다. 고종의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서 1897년 조성 논의의 시작과 1899년 민가를 철거하여 거북이 모양의 공원 평면을 바탕으로 담장 남문 북문 조성하여 1902년 개원하였다. 1903년에는 이왕직 음악대의 연주 장소로 팔각정이 도입되었고, 연주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 1904년 호자식 음악당이 축조되었다. 이 시기는 일요일에만 개방되는 이왕직 소유의 공원이었다. 둘째, 1910년에서 1913년까지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이용이 활발해지는 시기이다. 주변 시설로 인해 경계부가 변형되었으며, 이용자를 배려한 휴양시설과 편익시설이 보완되었다. 1913년 8월에는 야간 개방이 이루어 졌는데, 이는 1910년대 일제에 의해서 도시풍 오락의 장소로 탑골공원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1914년에서 1916년까지 상업시설이 도입된 시기이다. 1914년 상업시설로 끽다점인 청목당이 들어섰으며, 주변에 연못과 등나무 그늘시렁이 조성되었다. 1916년 종로 야시의 시작으로 탑골공원 이용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휴양시설과 편익시설의 확충과 관리를 위한 경계울타리와 관리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기존의 호자식 음악당이 철거되고 용산군주차사령부에서 가제보형 음악당이 이축되었다. 191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1922년 개벽 에 등장하는 탑골공원의 이용 행태와 부합하는 공원형태가 완성되었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공원 설계도면의 발굴이라는 사료적 가치, 기존 연구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근거 제시, 근대 조경공간에 사용된 공간 구성요소와 재료에 대한 탐구로써 의의를 지닌다.

한중일 사용자 비교분석을 통한 모바일폰 디자인 방향 (A Design Direction for Mobile phones between Comparison of Users from Korea, China and Japan)

  • 윤주현;정희연;김윤전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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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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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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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이동통신 시장을 둘러싼 기업들 간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 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속적인 이동 통신 산업의 성장을 이끌어내고 아시아 시장에서의 앞선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개발은 물론, 각 나라 시장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국가의 각각 다른 지역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을 통해 효과적으로 현지 시장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국 사용자의 이용 행태 및 성향의 차이를 밝혀 향 후 디자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본 연구의 방법으로 한/중/일 삼국을 중심으로 온라인 서베이가 이루어졌다. 연구 조사 내용은 1) 모바일폰의 이용자 행태 2) 모바일폰 디자인 및 UI 4) 모바일폰 기능과 서비스에 대한 인식 5) 제조사에 관한 인식이다. 본 연구 결과 각국별 공통점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1) 첫째 국의 모바일폰 관련 인식 및 문화는 기술적 성숙도, 통신사/제조사의 정책 및 전략, 국민적 성향이 어우러져 형성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2) 둘째 기술적 성숙도와 관련된 항목에 있어서는 한국과 일본이 유사한 성향을 보이는 반면, 국민적 성향과 관련된 항목에서는 한국과 중국이 유사한 성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3) 셋째 통신사/제조사의 정책 및 전략과 관련된 항목은 한중일 각 사가 서로 다른 특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각국의 공통점 및 차이점에 관한 결과는 각 나라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뿐 아니라 본국에서 타국으로 진출 시 좋은 기초 자료가 되리라 본다. 또한 단순 비교에 그치지 않고 본 연구결과를 근거로 하여 신기술에 관한 디자인개발 전략에 적용한다면 더 큰 의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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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유리거울의 수입과 공예품의 특징 (A Study on Glass Mirror Trade and its Characteristics of Craft after Joseon Dynasty)

  • 박진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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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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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6-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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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유리거울을 서양경(西洋鏡), 양경(洋鏡), 파리경(玻璃鏡), 파려경(玻瓈鏡), 석경(石鏡)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고, 이를 경험하고 느꼈던 당시의 상황과 교역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이를 통해 17세기 이후 청·러시아와의 교역을 중심으로 유리거울이 수입되었고, 조선 후기에 들어와 수입금지 품목에 포함되는 등 18세기에 들어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신문물로 확인되었다. 19세기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상품으로 더 크게 확대되었고, 특히 일본과의 교역이 눈에 띄게 성장하였다. 18~19세기의 유리거울은 개인이 용모를 확인하는 기본적인 용도에서 벗어나 상업적인 용도로까지 폭넓게 활용되었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에 관한 시각적 충격과 경험들을 글로 남겼고, 유리거울에 대한 유용함은 조선의 소비 욕구로 이어져 유리거울의 수입을 자극하였다. 이로 인해 18세기 이후 유리거울은 조선의 청동거울을 빠르게 대체하였고 유리거울을 이용한 새로운 공예품들이 제작 및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실내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으로 일체식 유리경갑(一體式 琉璃鏡匣)을 개발해 전통적으로 사용해왔던 빗접과 함께 이용해 편리하였다. 당시 경갑의 인기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를 비롯해 조선시대 풍속화에서도 잘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의 기형으로 볼 수 있는 경대(鏡臺)도 조선에서 많이 제작했는데 서랍 개수와 크기, 상자 형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한 여러 형태의 경대를 살필 수 있다. 또한 휴대용의 작은 면경도 조선만의 미감으로 표현한 길상 문양, 장식 기법을 통해 품격 있는 공예품들로 제작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에서도 유리거울을 수입했지만 19세기 말 이후에는 일본식의 공예품들이 성행하였다. 일본 명치~대정시대에 유행했던 유리경대가 수입되었고 대형의 유리거울을 이용한 공예품들이 사용되었다. 이른 시기부터 있었던 경병의 경우 응접실처럼 큰 공간에 진설하거나 연회를 위해 중국·일본으로부터 수입했으며, 서양식으로 거울을 벽에 걸거나 부착해 공간의 밝기를 조절하고 외부의 풍경을 들여와 실내를 장식하는 방법이 도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