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st of these cultural spaces are Western architecture which is completely unrelated to our traditional style. In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these Western formation flowed in and passed on by them. Therefore before the understanding of modem cultural space built in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it's essential to study about the background of the western period in that time, architecture and trend of interior. Due to Great Depression and other reasons the economical modernism of architecture raised in this period. In this thesis, based on such background of period, cultural space has been divided into assembly, theatre and exhibition spaces. Those spaces were studied according to its expressional characteristics and brought to following conclusion from the analysis. The cultural spaces were created around 1930 due to an increase of demand when the modernism started to establish. Like other buildings cultural space expressed modernized elevation and space formation with ferroconcrete building. However until Japan's colonial period the cultural areas were not used for public but for Japanese authority class's social gatherings only. Consequently, unlike other buildings the classical elements that could express these characters were more used in cultural spaces especially in theater and exhibition areas. This distinctiveness didn't appear separately but according to type of rooms in one space. Once more, place like assembly space was expressed with modernism, special or recreation rooms where people pursue a comfort were expressed with decorative style. Also a special theater which was used for only one person was generally expressed with western style to represent the stem character such as power.
장충단공원은 현재 남산자락 내 공원으로 인식되지만, 조선 시대 남소영(南小營) 터에 대한제국의 군인 추모를 위해 조성된 장소였다. 일제강점기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공원으로 변모했고, 식민지의 타당성을 표현하는 공간구성요소가 도입되었다. 이에 일제강점기 장충단공원의 시계열적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제국을 위해 싸운 군인들을 위한 추모공간이었다. 1900년 남산 자락의 제한된 진입공간을 지닌 터에 중심건물인 단사(壇舍)와 부속건물을 지형에 위요되도록 배치했다. 1909년까지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추모 제례를 진행했다. 둘째, 경성부민을 위한 도시공원이었다. 1919년 경성부는 장충단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제례를 금지시켰고, 단사를 제외한 기존 건물은 공원관리 시설로 활용했다. 다양한 계층이 이용할 수 있도록 휴게시설과 편의시설이 보완되었고, 대규모 벚나무 식재로 관앵(觀櫻)과 탐화(探花)의 명소가 되었다. 셋째, 식민지에 영향을 준 인물을 배향하는 추모공간을 조성했다. 1932년 이토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博文寺)가 장충단 권역을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잡았다. 이때, 조선의 전통건축을 이축(移築)하여 박문사의 부속건물로 활용했다. 관광지화 전략으로 경성유람코스에 박문사를 포함하여 다수가 경성 시내와 장충단 권역을 시야에서 내려 보는 경관을 체험하도록 유도했다. 장충단공원은 일제강점기 이질적 구성요소가 도입되어 공간이 지닌 성격조차도 변화되거나 재생산되었다. 향후 공원에 대한 재정비 사업의 진행 시 과거 기억을 존중하는 공간계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This study was described with a focus on the maintenance and management of Local Confucian School(Hyanggyo) architecture, centering around cases investigated through official documents written in the 1910s. In 1910, by the Japanese imperial rule, the regulations on Local Confucian School(Hyanggyo) property were enacted, and the income was paid solely to elementary school education expenses and ancestral rites. Through this process, many Local Confucian School(Hyanggyo) buildings were destroyed while only the space for ritual sacrifices remained by the Japanese colonial rule. In particular, as the land, which was the basis of Local Confucian School's property, was sold for various reasons, the finances gradually deteriorated. In addition, as the architectural acts that Local Confucian School preserves itself are restricted, it loses its original character. This study was of great significance that identified the intention to dispose of Local Confucian School(Hyanggyo) property by Japanese imperialism in the 1910s and clarified the purpose of its disposal.
This study explores the space and society of Seorin-bang(瑞麟坊), using the Hanseong-bu family registry from the Gwangmu period to demonstrate the urban organizational units used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known as Seo(署)-Bang(坊)-Gye(契)-Dong(洞)-Tong(統)-Ho(戶). It seeks to examine how Seorin-bang's space and society changed with time. First, the study offers approximate demarcation for Gye and Dong through spatial verification of Bang-Gye-Dong-Tong-Ho of Seorin-bang in late Joseon Dynasty, whose precise locations were formerly undetermined. Second, it explores the relationships between Bang-Gye-Dong-Tong-Ho which has been widely understood to be hierarchical by previous studies, and classifies the relationship dynamics between Gye and Dong into four types. Third, the study finds that Seorin-bang retained much of its urban structure including roads, plots, and streams and maintained stable population distribution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and continuously served as place of residency for many throughout the Gwangmu period. This study has major implications in that it illustrates space and society of Seorin-bang by converting the family registry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into spatial data, and observes its changes subsequent to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is study investigates the course of transformation of the capital city of the Korean Empire into a colonial city during the Japanese rule by focusing on state-owned lands at and near #193, 2nd jeongmok(丁目), Hwanggeum-jeong(黃金町) in Keijo(京城). The study reveals that although the colonial rulers had made it apparent that they acted in the benefit of the Korean Empire, in reality, they had taken dexterous and gradual steps to change the purpose of the lands in order to utilize them as desired. Briefly, the usage of the lands was changed several times from Daedong-gurakbu(大同俱樂部) to Gyeongseong Exposition(京城博覽會) and to Nongsanggongbu Office(農 商工部) up until the Japan-Korea Annexation Treaty. Following this, the lands were bestowed upon the pro-Japanese, including Guijokhoigwan(貴族會館), as a means of Japan's assimilation policy. The changes in the usage of the buildings on the lands and the land use show how the rulers' intentions were reflected in the space of the ruled.
현재까지 국가기록원을 비롯하여 각급 공공기관에 보존되어 있는 식민지 시기의 영구기록들은 조선총독부 기록관리활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공공기관의 영구기록들이 조선총독부 본부 및 소속기관에서 생산하였거나 수집한 것으로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인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기관에 남아 있는 식민지 시기 영구기록은 기록의 완전성을 유지하지 못한채 극히 일부만이 파편적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현재의 기록만으로는 당시의 업무 과정을 복원하기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것은 조선총독부의 평가선별 기준에 의해서 제도적으로 폐기된 측면도 있으나 해방과 동시에 조직적으로 문서과 기록을 파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한편, 조선총독부의 수집정책에 의해서 보존되고 있던 기록은 조직적 폐기를 모면하였으나, 수집정책에 따라서 역사기록의 범위와 대상이 달라졌다. 조선총독부의 각급 조사기관에서 관리한 역사기록들은 식민통치의 정보로 활용하거나 조선사 편찬을 위해 수집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수집한 기록들은 한국사회를 기록화한다는 관점이 아니라 식민통치의 목적이 우선되었기 때문에 파편성을 면할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기록관리제도는 일본본국정부의 제도를 도입한 것이었으나 조선의 역사기록 수집과 그 활용 과정에서 식민지적 특성이 잘 나타났다.
이 연구는 1930년 국세조사 인구자료를 기초로 14개 부, 41개 지정면을 도시지역으로 설정하여, 도시로의 인구이동과 그 출발지 유형, 입지를 분석하여 당시 도시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서 당시 도시지역에 유입된 인구의 출생지를 출발지로 간주하고 그 유형과 입지를 우선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1930년의 부와 지정면은 유입인구의 출발지에 따라 전국적 범위의 출생자들이 장거리 이동한 곳, 인접지역 출생자들이 단거리 이동한 곳 및 두 가지의 중간적 성격을 가지는 곳 등으로 구분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제의 효율적 식민 지배를 위해 새롭게 개발된 도시일수록 전국적 장거리 이동자의 유입지라는 성격이 두드러졌지만, 전통적인 도시기능을 수행했던 곳들도 주변 인구가 유입되면서 지역의 중심도시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이에 대해서 이 연구는 식민 도시화라는 정주체계와 전통적 정주체계의 이중적 구조가 이중적 도시화와 인구이동을 발생시켰을 가능성이 있음을 제안한다.
본 연구는 삼림법(森林法)(1908)에 규정된 지적신고제도(地籍申告制度)가 일제(日帝)의 식민지(植民地) 임지정책(林地政策)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가를 밝혀보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였다. 지적신고제도(地籍申告制度)는 국유림처분정책의 하나인 부분림제도(部分林制度)의 부속물로써 시작되었다. 인간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소유권을 정립시키고자 하는 지적신고제도가 한국민의 관습을 무시하고 소유권구분기준도 마련되지 않은 채 우리하게 강행되었다. 한국민은 지적신고에 대해 임야세(林野稅)를 부과하기 위한 전조(前兆)로써 인식하거나 일본인이 한국의 토지를 수탈한다고 보았다. 이 제도에 따라 신고를 했던 계층은 중산층 이상의 지식층에 속하는 자, 나면관경(那面官更)(경원(更員)) 또는 이들의 친척(親戚), 연고자(緣故者)와 측량(測量)을 담당하는 대행업자(代行業者)들로 매우 한정되었다. 특히 임지가치에 비해 측량경비가 훨씬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원소유자조차 신고할 수 없었다. 3년간의 신고기간동안 약 52만건 220만정보가 신고 되었으며 마지막 5개월 동안 신고가 집중되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신고기간을 연장하라는 한국민의 요구를 묵살한 채 소유권 사정이나 경계 확정과 같은 후속 조치도 없이 일방적으로 종료하였다. 결국 삼림법 제19조에 따라 신고되지 않은 약 1,400만정보의 임지는 국유화되었다. 총독부의 식민지 임지정책은 (1) 총독부 초기에 대규모 국유림을 창출하고, (2) 창출된 국유림을 요존국유림과 불요존국유림으로 구분하여, (3) 불요존국유림을 일본인 중심으로 처분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인에게 불요존국유림(不要存國有林)을 안정적으로 처분하기 위해서는 대량 창출된 국유림에 대한 소유권 변화를 막아야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인에게 양여(讓與)하거나 조림대부(造林貸付)해 준 산림에 대해 원소유자가 소유권을 주장할 경우 총독부는 정해진 기한내에 신고하지 않은 원소유자의 태만을 들어 붙요존림 처분을 정당화하였다. 결론적으로 총독부는 "신고주의원칙"을 통치 초기 대규모 국유림의 창출과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불요존림 처분이라는 식민지 임지정책을 강행하기 위한 족쇄로써 이용하였다.
이 글은 일제에 의해 이식된 은사기념과학관의 사회적 역할을 살펴보았다. 식민지 과학관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일제는 과학사상을 보급한다는 미명아래 과학관을 식민지 지배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식민지 과학관은 '위대한 과학제국' 일본을 부각시켜 열등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과학관의 전시와 강인 실험, 과학영화 등은 이러한 식민지 지배이데 올로기를 선전하였다. 식민지 과학관의 이식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남았다. 첫째, 과학관이 정치권력의 선전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식민지 과학관의 건축, 전시, 운영의 모든 면이 공공연하게 권력의 정책방향을 선전, 옹호하고 그것이 '개발, '발전'이라는 장미빛 환상을 심었다. 둘째, 식민지 과학관에서 과학기술은 '결과와 '도구'로 취급되었다. 일제는 과학이 사회적 위기를 해결했던 역사적, 문화적 산물임을 부정하고 '도구적 합리성'만을 주입시켰다. 셋째, 식민지 과학관에서 다루었던 과학기술은 매우 수준 낮은 것이었다. 생활의 과학화를 내세우며 교육했던 것은 근대적 규율을 내면화시켜 권력이 요구하는 노동자형 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일선동조론에 바탕을 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우리의 역사를 식민사관에 맞춰 재구성하는 한편 고고학적 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이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경주, 부여 등 고도(古都)에 대한 고적조사 및 고적의 재해석 그리고 고적관광은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특히, 부여지역의 경우 고적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백제 사비기와 일본 고대 아스카(飛鳥)시기와의 밀접한 관련과 친연성을 강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고적을 식민지 조선인에게 보여주는 고적관광을 실시하였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부여지역에 대한 고적조사와 고적의 재해석 및 고적관광이 어떤 맥락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첫째, 부여지역의 고적조사는 1909년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처음 시도되어 일제강점기 동안 고분과 사지(寺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세키노는 부여의 고적조사 결과를 토대로 고대 중국(梁) 한국(百濟) 일본(倭)간의 문화적 관계와 영향을 설정하였고 사비시기의 백제문화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다시 일본에 전달하여 아스카 문화를 형성하게 했다는 문화 전달 자설을 역설하였다. 이는 우리문화의 고유성을 부인하고 백제문화를 중국문화의 아류 또는 단순 전파자 역할로 왜곡 해석한 것으로 이러한 세키노의 관점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둘째, 1915년에 발족한 부여고적보존회는 부여고적에 대한 탈맥락적 해석을 통하여 고대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를 동화론적 관점에서 재정립하였다. 특히 낙화암, 고란사, 청마산성 등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일본과의 친연성을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동화정책을 역사적 사실관계로 확정지으려고 하였다. 셋째, 부여지역의 고적관광은 부여고적보존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주된 관광대상과 코스는 고적의 재해석을 통해 재구성된 고적들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부여를 일본 고대문화의 원형 또는 본향으로 이념화된 공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부여의 고적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고적관광은 서로 밀접한 관련하에서 추진되었고 그 추진 주체가 조선총독부와 친일 관변단체였다는 점에서 타자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여진' 것이었으며 그것은 식민지 표상공간으로서 부여의 재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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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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