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apanese Colon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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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지구의 일제시대 토지소유 변화 (A STUDY ON THE TRANSFORMATION OF LAND OWNERSHIP IN THE KYUNGJU-EUPSUNG IN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NCY)

  • 한삼건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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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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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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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 This paper discusses the change of land ownership in the urban historical core of Kyungju city in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ncy(1910-45) based on the analysis of land register records. Kyungju city was not designated for the cities controlled by urban planning law which was set up in 1912 and 1934. The major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the urbanization process of a Korean local city where the formal urban planning projects were not carried out. The focus of the study is the increase of the Japanese landowners and Japanization of the landscape. In the very beginning of occupation, Japanese already owned about 8% of the total land of the city centre where the old Kyungju castle had been located. The ratio of the land owned by Japanese went up to more or less 70% at the end of World war II. The process which the urban core had been replaced for the Japanese is very clearly traced from the analysis of a land register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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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도시 공원으로서 창경원 (Changgyeongwon as a Modern Urban Park)

  • 우연주;배정한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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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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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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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논문은 창경원을 근대적 도시 공원으로 보고, 창경원의 공간적 성격과 그곳에서 창출된 공원 문화의 특징을 파악하고자 했다. 먼저 창경원 성립의 배경을 파악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근대 도시 공원으로서 창경원의 성격을 제시했다. 첫째, 대외적 선전과 과시의 장으로서 창경원의 성격, 특히 개원 초기 해외 사절과 고위 인사들의 방문에 주목했다. 특히 애초에 이곳을 근대적 공원으로 만들고자 계획했던 내용에 바탕을 두고, 근대 도시 공원으로서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둘째, 계몽과 교화의 장으로서 1920년대 창경원 이용이 보다 대중화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는 점을 파악하고, 여성과 아동을 위한 행사와 새로운 시설의 등장에 주목했다. 셋째, 창경원을 공원으로 인식하고 이용했던 당대의 기록을 조사하여 그 문화적 특징을 파악했다.

1930~40년대 경지정리사업의 특징과 사회⋅경제적 배경 (Features and Socio-Economic Background of Farmland Consolidation Project during the 1930s and 1940s in Korea)

  • 김진수
    • 한국농공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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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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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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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The study is aimed to investigate the features and socio-economic background of farmland consolidation project with medium-sized paddy plot at irrigation association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Korea. Most of farmland consolidation works in the 1940s was composed of independent irrigation and drainage ditches along the short side of field plot. However, the number of farm roads at farmland consolidation zone was much smaller than number of irrigation ditches to decrease reduction in farmland area. The standard field plot was medium-sized (about 20-40 ares) in Korea but small-sized (about 10 ares) in Japan in this period. As the result of farmland consolidation works, the unit water requirement was increased to 0.0035 m3/s/ha, and the unit area drainage discharge was over 2.0 m3/s/km2 in many cases. The farmland consolidation with medium-sized plot have been spread under the colonial landlord system, where major landlords occupied a large share of farmland and managed corporate farming to gain more benefit. The reasons for spread of farmland consolidation with medium-sized plot may be as follows: high net profit ratio, an increase in land price, and labor savings in rice farming. The farmland consolidation with medium-sized plot in the colonial period showed intermediate features between the farm consolidation with small-sized plot for an increase in land productivity in Japan and the farm consolidation with medium-sized plot for an increase in labor productivity after the 1960s.

운동공원으로서 철도공원의 변화와 의의 (Transition of Cheoldo Park and Its Significance as Sports Park)

  • 김영민;조세호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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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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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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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철도공원의 연혁, 이용행태, 공간적 변화를 파악하고, 공원계획 의미를 운동공원의 개념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연구는 철도공원이 일제강점기에 최초로 신규 계획 조성된 공원이면서 공식적인 계획도서에서 계획 공원으로 편입되어 여러 차례 명칭과 영역이 변경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는 철도공원의 변화가 중요한 계획적 개념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도공원에 대한 분석은 공간적, 이용적 특징과 계획적 의미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공원 이용의 행태는 주로 당시의 공원과 관련된 신문기사와 사진의 분석을 통해 물리적 특징과 공간적 변화는 도시계획서 내용과 부도 및 지도 자료, 항공사진을 시기별로 분석하여 파악하였다. 계획적 의미는 도시계획서와 부도에 나타난 철도공원의 변화를 운동공원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1915년 개설된 철도공원은 철도국 용산관사단지의 부대시설로 조성되었으나, 1925년 경성부 공원으로 편입되면서 일제강점기에 종합운동경기장의 역할을 하였다. 1930년 공원계획에서 운동공원의 유형이 등장하지만, 프로그램적 성격이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으며, 운동공원으로서 철도공원의 중요성은 주목받지 못했다. 1930년대에 운동공원이 계획적으로 일반공원과는 다른 프로그램적 성격의 공원으로 인식되면서 철도공원을 확대하여 운동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가 나타난다. 1940년의 계획안에서 철도공원은 이촌공원으로 재편되어 경성의 중요한 대형 공원이자 운동공원으로 계획된다. 철도공원은 근대 공원계획이 양적인 계획에서 프로그램을 고려한 질적 공원계획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여러 제약 속에서 근대 공원계획을 구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모델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한국근대건축에서 식민지관광주의와 모더니즘에 관한 연구 - 일제강점기 철도역사 건축을 중심으로 - (Colonial Tourism and Modernism in Korean Modern Architecture - Focused on Railroad Station during Japanese Ruling Era -)

  • 안창모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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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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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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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Architectural style is said to be product reflecting political, social and cultural condition. Especially, in colony, architectural style is strongly related to political condition or policy. After colonization in 1910, public buildings with western historical architectural style in Japanese version were widely built by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in Korea. And in the late 1920s, modernism style in architecture became dominant in Korea as like other countries. In this situation, curious buildings in strange architectural styles came out. One example is railroad station buildings with traditional Korean architectural style and timber house station having a steep roof which is widely used in North Europe such as Alps area with good sights and mountains. Generally, the colonizer says that colonization is the only way to save the colony at crisis defined by colonizer and they insist that they can help the colony modernize. To justify colonization, the colonizer attributes the colonization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nation and stagnation of the traditional culture etc.. Accordingly, the colonizer tries to depreciate colony's traditional value and culture. In case of colony which has similar cultural background historically (in this case, economical exploitation is less important than other Asian colony by European power), this depreciation of traditional value and culture in Korea was done more strongly than others. At this time, we should understand special rel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historically. Even though, colony's locality is adopted by the colonizer in public fields, which is based on political purpose or exotic taste etc.. In early days of Japanese ruling period, Japan never use the Korean traditional facts in public. Therefore there is no use of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al style in public field. In late 1920s, some railroad station buildings were constructed in new styles without precedence in modern Korea. One is railroad station buildings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al style, the other is railroad station buildings in timber house stations having a steep roof which is different form western historical architectural style. It was mystery that Japan had constructed railroad stations in Korean traditional style which Japan had tried to destroy together with Western style railroad station buildings. This paper is made to solve the mystery why the colonizer(Japan) constructed entirely different types of railroad stations at the same time in the late 1920s and 1930s. The key point to solve this mystery is tourism. In this paper, to solve this mystery, I try to use terminology' 'Colonial Tourism' in architecture why colonial power had constructed railroad stations with colony's traditional architectural style and Western style having a steep roof which can be seen north European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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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한국철도와 만주철도의 비교연구 (A Comparative Study of the Korean and Manchurian Railway Systems during the Japan Colonial Period)

  • 이용상;정병현
    • 한국철도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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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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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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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 철도와 만주철도를 비교하였다. 양국철도는 공히 제국주의 철도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만주철도는 정부주도하의 민간철도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철도는 철도수입위주였지만 만주철도는 철도이외에도 지역개발, 광산, 항만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두 번째 만주철도는 우리나라 철도에 비해 수익성이 좋았고, 화물위주의 수송이었다. 세 번째로 철도관료의 경우도 우리나라는 주로 정부 관료들이 임명되었지만 만주철도의 경우는 정당정치에 의한 정치가, 외교관 등 다양한 계층에서 임명되었다. 관동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군의 영향력이 컸다. 공통점으로는 제국주의 철도였기 때문에 정부정책 특히 시기적으로 철도는 군사적 목적에 활용되었다. 특히 만주철도의 경우 대륙에서의 전쟁수행이라는 면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향후 같은 시기의 일본 본토 그리고 대만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동아시아 철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의 부각을 통해 우리나라 철도의 성격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부여(扶餘)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 성격(性格)에 대한 재고(再考) (Revisiting of ancient tombs in Neungsan-ri, Buyeo)

  • 김규운;양숙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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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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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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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능산리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몇 차례 조사되었으나 아직까지 그 전체적인 양상을 이해하기에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기왕의 조사자료에 대한 분석 자체도 부족하다. 따라서 능산리고분군이 어떻게 조사되었고, 보존되어 왔는지에 대한 검토를 통해 능산리고분군을 새롭게 이해하고 접근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능산리고분군의 일련번호는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확실한 기준이 제시되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부여해 왔다. 이는 당시 조사과정에서 일련번호가 어떻게 변하였는지에 대한 검토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리고 능산리고분군은 현재 정비되어 있는 7기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일제강점기에 서쪽부터 3+4+7+5기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하였고, 현 (現)8호분의 성과를 더하면 적어도 20기로 구성된 고분군임을 제시하였다. 또한 동고분군의 경우, 현실의 규모, 고우야마키로 제작한 목관에 옻칠을 한 공정까지 중앙의 6기와 비교해도 크게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면서 6기만을 왕릉군으로 설정해 온 기왕의 인식에 변화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궁극적으로 현재 정비되어 있는 능산리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정비가 완료되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정보를 하나도 표현하고 있지 못함을 지적하였다. 현실로 진입하는 입구시설, 호석을 덮어버리고 고대하게 과장된 봉분이 그러하고, 심지어 주위에 다른 고분들이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제대로 된 지표조사 한번 없었던 문제점을 부각시키면서 능산리고분군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일제강점기 옻칠 증산(增産) 사업의 전개와 영향 (Development and Effects of the Project to Increase Lacquer Producti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 강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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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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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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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일제강점기 옻칠은 나전칠기와 같은 고급 공예품 외에 산업, 건축, 군수물자의 외부 도료 등 다방면으로 활용되는 중요한 전략물자였다. 특히 전시 체제에 돌입하는 1940년대 이후 군수물자에 사용되는 옻칠 수요가 급증하면서 유통을 제한하는 전표제까지 시행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옻칠 수요의 급증에 따라 고질적인 물량 부족을 겪고 있었고, 대안으로 19세기 후반 이후 중국산 옻칠을 수입하였다. 1910년대 이후에는 중국산 옻칠의 시장 점유율이 90%에 이르러 중국 현지 상황에 따라 일본 내 옻칠 수급이 영향을 받자 일제는 조선에서 옻칠 생산을 늘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에서의 옻칠 증산 사업은 1910~1920년대에 각종 시험을 통해 객관적 지표가 마련되었고, 이를 기준으로 1930년대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하였다. 전국 각지에 옻나무를 식재하고 개량 채취법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경제적 수익을 들어 옻칠 생산업을 장래 유망한 농가의 부업으로 홍보하였다. 각 도에서 수립한 옻칠 증산 사업은 효과를 거두었으며, 현재 국내 주요 옻칠 생산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남부에서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한 곳은 강원도 원주, 충청북도 옥천, 경상남도 함양으로 현재의 생산지와 일치하였다. 일제가 조선인 농가를 대상으로 교육한 개량 채취법은 현재 한국 옻칠 채취의 주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각종 기록을 통해 옻칠 증산 사업의 현황을 파악하여 근대 옻칠 공예사 연구의 공백을 메우고자 시도하였다.

항구도시 칭다오의 식민지 시대 도시변천과 근대건축형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Urban Transformation and Modern Architecture Development of Qingdao in the Colonial Period)

  • 이한석;송석기;김나영;뤼 홍웨이
    • 한국항해항만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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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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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5-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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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항구도시 칭다오가 20세기 전반에 근대도시로 형성되는 과정에 관한 연구이다. 칭다오의 근대도시화 과정은 동아시아 항구도시의 공통점을 보여주며 강대국 등 정치적 지배 세력에 의해 4개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독일 점령기 동안에는 칭다오의 구도심 영역이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두 번째 일본 1차 점령기 동안 칭다오의 도심 영역은 북쪽과 동쪽으로 확장되어 기존 도심의 북쪽으로 금융 및 업무시설이 형성되었고 그 북쪽에서 대항에 이르는 지역에는 공업지역이 넓게 형성되었다. 세 번째 북양군벌 및 국민당 통치기 동안 칭다오는 국제적인 상업과 금융, 휴양도시로서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네 번째 일본 2차 점령기 동안 건축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으며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중국 대륙 침략의 관문으로서 칭다오를 활용하고자 했다.

중일(中日) 모더니즘 소설의 수용과 전개에 대한 시론(試論) - 신감각파(新感覺派)를 중심으로 (Study of Chinese & Japanese Literary Modernism in Early 20th century)

  • 김경석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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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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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7-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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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This paper is the study of literary modernism school(新感覺派 xinganjuepai), appeared in the early 20th century in China and Japan. This literary modernism, developed in Japan in the 1920s, was developed in China after 10 years in the 1930s. Chinese literary modernism was influenced by the Japanese school. However, the following occurs the difference in modernism caused by background of the two countries. Japanese school of literary modernism was formed by a backlash against the proletarian literature. The rivalry between Japanese proletarian literature and literary modernism occurred in 1920's. Literary modernism in China occurred in the course of the development of the proletarian literature, as part. In addition, China's literary writers of modernism have expressed their support proletarian literature for the position. This difference between the two countries can be caused by the difference of historical background (imperial and colonial) in early 20th cent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