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Historical Buildings

검색결과 302건 처리시간 0.026초

역사기록물(Archives)의 항구적인 보존화 이용 : 보존전략과 디지털정보화 (Permanent Preservation and Use of Historical Archives : Preservation Issues Digitization of Historical Collection)

  • 이상민
    • 기록학연구
    • /
    • 제1호
    • /
    • pp.23-76
    • /
    • 2000
  • In this paper, I examined what have been researched and determined about preservation strategy and selection of preservation media in the western archival community. Archivists have primarily been concerned with 'preservation' and 'use' of archival materials worth of being preserved permanently. In the new information era, preservation and use of archival materials were faced with new challenge. Life expectancy of paper records was shortened due to acidification and brittleness of the modem papers. Also emergence of information technology affects the traditional way of preservation and use of archival materials. User expectations are becoming so high technology-oriented and so complicated as to make archivists act like information managers using computer technology rather than traditional archival handicraft. Preservation strategy plays an important role in archival management as well as information management. For a cost-effective management of archives and archival institutions, preservation strategy is a must. The preservation strategy encompasses all aspects of archival preservation process and practices, from selection of archives, appraisal, inventorying, arrangement, description, conservation, microfilming or digitization, archival buildings, and access service. Those archival functions should be considered in their relations to each other to ensure proper preservation of archival materials. In the integrated preservation strategy, 'preservation' and 'use' should be combined and fulfilled without sacrificing the other. Preservation strategy planning is essential to determine the policies of archives to preserve their holdings safe and provide people with a maximum access in most effective ways. Preservation microfilming is to ensure permanent preservation of information held in important archival materials. To do this, a detailed standardization has been developed to guarantee the permanence of microfilm as well as its product quality. Silver gelatin film can last up to 500 years in the optimum storage environment and the most viable option for permanent preservation media. ISO and ANIS developed such standards for the quality of microfilms and microfilming technology. Preservation microfilming guidelines was also developed to ensure effective archival management and picture quality of microfilms. It is essential to assess the need of preservation microfilming. Limit in resources always put a restraint on preservation management. Appraisal (and selection) of what to be preserved was the most important part of preservation microfilming. In addition, microfilms with standard quality can be scanned to produce quality digital images for instant use through internet. As information technology develops, archivists began to utilize information technology to make preservation easier and more economical, and to promote use of archival materials through computer communication network. Digitization was introduced to provide easy and universal access to unique archives, and its large capacity of preserving archival data seems very promising. However, digitization, i.e., transferring images of records to electronic codes, still, needs to be standardized. Digitized data are electronic records, and st present electronic records are very unstable and not to be preserved permanently. Digital media including optical disks materials have not been proved as reliable media for permanent preservation. Due to their chemical coating and physical character using light, they are not stable and can be preserved at best 100 years in the optimum storage environment. Most CD-R can last only 20 years. Furthermore, obsolescence of hardware and software makes hard to reproduce digital images made from earlier versions. Even if when reformatting is possible, the cost of refreshing or upgrading of digital images is very expensive and the very process has to be done at least every five to ten years. No standard for this obsolescence of hardware and software has come into being yet. In short, digital permanence is not a fact, but remains to be uncertain possibility. Archivists must consider in their preservation planning both risk of introducing new technology and promising possibility of new technology at the same time. In planning digitization of historical materials, archivists should incorporate planning for maintaining digitized images and reformatting them in the coming generations of new applications. Without the comprehensive planning, future use of the expensive digital images will become unavailable. And that is a loss of information, and a final failure of both 'preservation' and 'use' of archival materials. As peter Adelstein said, it is wise to be conservative when considerations of conservations are involved.

경운궁 흥덕전의 조영 및 사용 연혁과 설행된 의례의 특징 (Characteristics of the construction process, the history of use and performed rituals of Gyeongungung Heungdeokjeon)

  • 임초롱;주상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5권1호
    • /
    • pp.281-304
    • /
    • 2022
  • 흥덕전은 경운궁의 확장 과정에서 궁역으로 편입된 수어청 부지에 최초로 지어진 전각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어진 모사처, 임시 봉안처, 빈전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흥덕전의 구체적인 조영 과정을 밝히는 한편, 흥덕전의 사용 연혁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설행된 의례를 분석하여 도출한 특징을 토대로 흥덕전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흥덕전은 1899년 하반기에 건립되기 시작되어, 1900년 2월 중순에서 3월 중순 사이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흥덕전은 부속 전각으로 어재실과 내재실을 갖춘 의례시설이었다. 흥덕전의 이건은 1901년 4월에 계획되어 6월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건 공사는 선원전 부속 전각의 공사 및 선원전 중건의 추가 공사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또, 흥덕전의 영건 역비와 이건비의 기록, 선원전 중건 관련 비용 내역을 비교 검토한 결과, 흥덕전의 부속 전각인 어재실과 내재실이 선원전의 어재실과 이안청으로 이건되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흥덕전은 1900년 초 영건되자마자 두 차례에 걸쳐 어진 모사처로 사용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확인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짧은 시간 동안 두 차례의 어진 모사처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및 대한제국 시기의 어진 모사와 관련하여 선례가 없는 최초의 작업들이 진행된 장소였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황실 의례를 위하여 별도로 건립된 전각을 어진 모사처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흥덕전은 빈전으로 사용되었는데, 이전 시기의 빈전과는 다른 특징이 확인된다. 흥덕전은 빈전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된 의례용 전용 전각이었으며, 어진 모사처로도 사용된 다목적의 의례용 전각이었다. 즉, 흥덕전은 경복궁 태원전과 함께 조선 후기 빈전 운영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전각인 것이다. 흥덕전에서 설행된 어진 관련 의례에서도 주목되는 특징이 확인된다. 첫 번째는 짧은 기간 동안 다수의 작헌례가 설행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주로 지방의 진전에서 거행되는 속절제와 삭망일의 분향이 확인되었다는 점으로, 이는 궁궐 내 진전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마지막은 전배 및 전알, 봉심이 다수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즉, 흥덕전은 황실 의례를 매우 중시하였던 고종의 의도와 경운궁 중건 과정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전각이라 할 수 있다.

사적 제135호 부여 궁남지의 정비과정으로 살펴본 전통의 남용과 발명 (The Abuse and Invention of Tradition from Maintenance Process of Historic Site No.135 Buyeo Gungnamji Pond)

  • 정우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5권2호
    • /
    • pp.26-44
    • /
    • 2017
  • 한국 전통 연지의 시원으로 평가되는 궁남지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무왕의 연지 축조 기록, 사비왕궁으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 및 화지산 이궁지 남쪽에 위치한 지리적 정황에 의해 궁남지로 비정되는 한편 사적으로 지정 복원되었다. 본 연구는 궁남지의 복원정비 과정에 나타난 진정성 왜곡과 전통의 발명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되었으며, 연구의 요약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마래방죽[마천지]으로 불려왔던 궁남지는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3만여 평의 광대한 자연 저습지의 상태로 존재했다. 궁남지 복원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홍사준은 1940년대만 해도 마래방죽에 백제시대 궁남지 유적으로 추정되는 섬과 석축시설이 남아있었고 그 위에 전각 및 정원을 조성한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전했다. 또한 화지산 이궁터의 조사 후 서동설화와 연관시켜 마래방죽을 궁남지와 동일시하는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궁남지 복원정비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특히 홍사준이 제시한 스케치 도면 및 부여도엽에서 마래방죽의 형태와 규모를 엿볼 수 있었는데, 이러한 방죽의 형태는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사진 속 상황과 근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2. 궁남지의 축소정비는 1960년대 추진된 경지정리사업에 의해 농경지로 불하되고 남은 잔여의 면적이 수습된 결과였다. 1965~67년에 있었던 최초 복원공사 이래 수차례 시행된 궁남지 정비를 통해 드러난 문제는 고고학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후대의 시각으로 추정복원 되면서 경복궁 향원지의 구성을 그대로 복제한 데 기인한다. 구체적으로, 연못 안에 섬과 정자를 놓고 교량으로 섬과 육지를 연결시키는 구성은 궁남지가 경복궁 향원정을 모델로 만들어졌음을 방증해 준다. 하지만 교량설계에 참조된 취향교 조차도 조선시대의 형식으로 보기 어려운바 당시의 잘못된 복원설계의 동기와 발상이 궁남지의 가치를 크게 저하시켰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전통조경의 소재로서 이미 널리 알려진 디자인 전범을 그대로 모방한 것은 경복궁이 갖는 미적 표상과 기호를 지향한 것으로서, 궁남지가 그와 유사한 장소 권위를 획득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3. 궁남지는 애초부터 진정성이 결여된 채 정비된 사적이었기 때문에 정비 과정에서 경관의 왜곡과 전통성의 남용을 통해 유적의 역사적 맥락이 과감히 표방되어 갔다. 이러한 역사 재료의 무비판적인 활용과 왜곡을 불사한 정비방식은 1960~70년대 박정희 체제에 의해 주도된 민족주의 문화정책과 맞닿아 있다. '만들어진 전통담론'의 맥락에서, 박정희 시기의 문화정책은 국민의 기억에서 이상화된 과거를 취사선택하여 그것을 가시적으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이전의 유적을 보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 부각된 사적지가 전국 곳곳에 생겨나게 되었는데, 궁남지가 초기에 순수한 보존의식으로 축소되어 정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본래 공간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건조물들이 들어서고 기형적으로 확장 정비되어 갔던 사실은 그러한 국가주도 문화정책의 영향이 컸다고 판단된다.

중국 당대~금대 목조 건축의 귀포 변천에 관한 연구 - 좌우대의 결구 유형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hanges in Gwi-po from Tang to Jin Dynasty in China - Focusing on the connection type of Jwau-dae(左右隊) -)

  • 이병춘;이호열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8권3호
    • /
    • pp.96-119
    • /
    • 2015
  • 이 연구는 중국의 중세 목조건축을 대상으로 귀포(轉角鋪作)의 변천을 고찰한 것이다. 연구의 목적은 당대(唐代)부터 금대(金代)에 건축된 목조건축 중 중국정부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國保)로 지정 보호하고 있는 71동의 건물을 대상으로 귀포의 시기별 변천 양상을 살펴보고 변화요인을 파악하는데 있다. 이 연구에서는 귀포를 구성하는 좌우대(左右隊)의 다양한 결구유형에 주목하여 귀포의 변천과 전개과정을 고찰했다.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귀포의 형식 변화는 건축을 주도했던 장인들의 좌우대에 대한 인식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초기의 귀포에서는 소첨과 대첨으로 구성되는 중공조(重?造) 구성과 일두삼승(一斗三升)의 첨차 구성 원칙이 잘 유지되었으나 건축기술의 발달로 귀포의 출목부(出目部)에 귀잡이한대(말각공)와 좌우대가 결구되면서 다양한 형식이 나타났다. 초기의 귀포에서 진일보한 과도기형 귀포는 홀수 단에 놓인 좌우대의 모양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즉 귀한대에 면해 좌우대의 뺄목이 형성되지 않은 '무(無)뺄목형'(요, 북송)을 비롯한 좌우대의 뺄목이 사두(?頭)와 같은 모양인 '사두뺄목형'(북송, 금)과 좌우대의 뺄목이 소공두(小?頭)와 같은 '소공두형'(남송, 금)이 그것이다. 귀포의 후기형인 정형은 각 출목에 사두가 결구되는 유형으로 비록 요대에 형성되었지만 폭넓게 적용된 시기는 원대이후로 추정된다. 요대(遼代)에 이르러 건물의 지붕이 대형화되고 처마가 길게 돌출되는 변화가 나타나면서 하중이 집중되는 귀포를 구조적으로 보강할 필요가 생겼다. 이 시기에 처음 사용된 귀잡이한대는 귀포의 구조 보강을 위해 사용되었지만 이후 귀포의 형식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요대(遼代)에 발달한 공포재인 익형공(翼型?)은 귀포를 비롯한 건물의 공포형식이 투심조(偸心造)에서 계심조(計心造)로 변화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와 같은 변화는 무앙계 건축을 중심으로 귀포의 정형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동시기 하앙계 건축에서는 무앙계에 비해 귀포가 '사두(?頭)뺄목형'에서 '소공두형'으로 바뀌는 변화가 서서히 일어났다. 무엇보다 귀포의 변화에 요대의 건축특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주목된다.

조선-일제강점기 동래읍성 경관변화 연구 (A Study on the Historical Landscape of Dongrae Ciy-wall in Busan)

  • 김기혁;김성희
    • 대한지리학회지
    • /
    • 제37권4호
    • /
    • pp.317-336
    • /
    • 2002
  • 본 연구는 동래 읍성의 입지, 성곽 형태 및 도로망. 관아 및 가옥분포 토지이용 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경관 복원을 시도한 후.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변화를 파악하여 이를 사회ㆍ문화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가야시대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던 현재의 장소에 고려말 읍성이 이전 입지한 것은 해안방어 요충지와의 접근성을 최대로 하기 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읍성이 위치한 장소는 동래부의 중심 공간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입지 특성은 4대문 위치 및 성안의 도로망 분포 등에 영향을 주었다. 관아시설의 배치는 중앙 권력의 상징. 읍성 군사 방어 기능과 관련되어 배치되었다. 객사 입지는 중심공간에 지형을 이용하여 권력 질서의 위계를 반영하였으며. 좌측에 동헌. 우측에 향청 및 군사 기능이 배치되었다. 읍성내 취락은 남문을 중심으로 분포하였고. 산록부는 농경지로 이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 1920년대 시행된 시구개정사업으로 성벽이 철거되었고, 성안에 격자상의 도로망이 신설되었다. 평지에 있던 성벽 자리는 도로용지나 주택지로 이용되었다. 객사와 동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성안의 공간구조가 변화되었고. 관아건물은 공공기관으로 사용되거나, 민간인에게 불하되어 다른 용도로 이용되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읍성이 위치하였던 장소의 상징적 의미는 쇠퇴되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읍성은 부산시민에게 역사적인 중심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일부 경관을 중심으로 복원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연구 결과는 읍성이 단순히 건축물이 아닌 당시대의 사회문화가 투영된 경관이며, 각지방에 소재한 읍성은 새로운 시각으로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임을 보여준다.

중세유럽의 생활미술과 복식문화에 관한 연구 (The Study on living Art and Costumes Culture of the Middle-Age Europe)

  • 이순홍
    • 복식
    • /
    • 제35권
    • /
    • pp.17-44
    • /
    • 1997
  • Medieval European practical art and style of costume is studied through referring to the literatures. The type of clothing that was seen on tapestries arts and crafts paintings and wall paintings and appeared in the architecture such as church. There were symbolic aspects of color motifs at this period and some restraints for clothing according to the social class, It was a period that draped garments due to the War of Crusades is appeared. Be-cause the medieval taste and decorative character is not only 'formative art' but also the taste beyoud 'mode' and atomsphere of that times it could be seen the strong reflec-tion of customs in the clothing of that times which is shown in works of art. 1) The purpose of Christian art which was found in mosaics stained glasses wall pain-tings and statues of architecture was not just the revival of natural phenomena but visuali-zation of sacred and invisible things. It was valuable to understandin of the spiritual through the sense organ It was a monumental art that was combined with decorative func-tion and role of the Bible. It revealed what was about the religious spiritual miracle, 2) In the medieval European painting characteristic and beautiful creativity was the basis of an argument. Both "Worship of East-ern" that is painted ion a parchment and "Cor-onation of Charles VI" were described decor-ation motifs on the edge of buildings geo-metric patterns and others with outstanding skill. there were precise technologic skill of architect and glassmen and lots of patience of craftsmen. " The Labour of the Months" and the scene of"A Trial at the Court" is also de-scribed elaborately. 3) Tapestry was developed in France Ger-many Swiss at the 14th century. Religionary and historical themes unicorn lady bird flowering plants and others were major motifs. It was very important as decorative wall coverings and as practical door arch and bed hangings. It was made through patient hard work with simple technique and it was con-sidered as an art for practical use. Tapestry was what everyone wish to have. It is reckoned for the item of the best gift. The royalty and nobility ordered and used custom-made tapestries. Sometimes the subject of motifs consisted of series which were deeply related to living 4) Decorative arts and crafts was the art that used materials such as precious metals jewels and others and that accorded with the luxurious and gorgeous taste of the royalty and nobility. Christian considered splendid and beautiful color of light as a symbol of glory. They used also for church appliances, There were metal crafts wood crafts textile crafts and others, As was stated above the costume appeared on the arts and crafts for living revealed the process of changes saw how the politic econ-omic and social organizations were developed.and social organizations were developed.

  • PDF

산성취락연구(山城聚落硏究) : 남한산성(南漢山城) 광주읍치(廣州邑治)의 형성(形成)과 쇠퇴(衰退) (The Establishment and Transformation of the Mountain Fortress Town of Kwangju County in Kyonggi Province)

  • 홍금수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 /
    • 제10권2호
    • /
    • pp.313-340
    • /
    • 2004
  •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병자호란을 상징하는 경관요소로서 치욕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채 한강남쪽 평지 한 가운데 솟아있다. 남한산 아래의 고위평탄면상에는 산성의 수축을 계기로 고골(古邑)에서 이전해온 광주부(廣州府)의 치소(治所)가 자리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성내동(城內洞)으로 불리다가 1910년에 읍내동(邑內洞), 1914년에는 다시 산성리(山城里)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생활환경이 열악한 일개 산촌에 불과했던 산성마을은 행정중심지로 계획되었으며 정책적으로 모임(募入)한 300여 호에서 출발하며 전성기에는 600호 가까운 규모로 성장하였다. 성내에는 종묘봉안처(宗廟奉安處)(좌전(左殿)), 사직봉안처(社稷奉安處)(우실(右室)), 행궁(行宮)을 겸한 광주부(廣州府)의 관아(官衙), 수어영(守禦營)과 광주부(廣州府) 소속의 공해, 시장(市場) 등 유교적인 도회도식(都會圖式)에 규정된 기본요소로 구성된 상징경관이 형성되었다. 성내동민(城內洞民)은 복호(復戶)의 혜택이 주어진 산성 안팎의 토지를 경작하고, 상품을 교역하는 한편, 모군(募軍)으로 자신의 노동을 상품화하면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사회경제적인 상황의 변화와 함께 1917년 산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한 주막리(酒幕里)가 광주군 신 청사의 입지로 결정되면서 산성취락은 해체단계를 맞아 한적한 벽촌으로 남게된다.

  • PDF

일본전통정원의 해외 보급 및 확산에 관한 역사적 고찰 - 1867년부터 1939년까지 만국박람회를 중심으로 - (A Historical Study on the Propagation and Diffusion of the Traditional Japanese Garden in Foreign Countries - Focused on World's Fairs between 1867 and 1939 -)

  • 윤상준;권진욱;홍광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2권2호
    • /
    • pp.167-179
    • /
    • 2014
  • 본 연구는 전통정원의 해외 보급 및 확산을 위한 기준점 마련과 기반 구축을 위한 기본연구로서 일본의 전통정원 보급 및 확산에 있어 초기 단계인 유럽과 미국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 통한 조성내용과 파급효과를 규명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일본이 박람회를 처음 참가한 1867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까지 일본 정원이 조성된 박람회를 대상으로 조성된 정원을 파악하고 박람회 기간 중 그리고 폐막 이후 일본정원의 파급효과를 조사 분석하였다. 연구의 결과를 종합하면 문화적 측면에서 명치정부의 첫 박람회 참여에 있어 독일인 바그너의 충고에 따라 문화와 공예를 박람회 주제로 선정하고 정원을 전통 건축물과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면서 국가적 정책으로 대외 홍보 수단으로 삼았다. 그 결과 만국박람회 일본관에 대표적으로 조성된 강호시대 회유식 정원 양식과 다정은 유럽과 미국 내에서 일본정원의 대표적 양식으로 인식되었다. 정치적 측면으로는 미국인에게 일본 정원은 도입된 '이국적 미'이자 '문화유산'으로 인식되면서 일본에 대한 친근감을 높이고 반일감정을 없애려는 일본 제국정부의 목적을 달성하였고 전통정원을 통해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일본사회를 이상적으로 표현하여 서구 열강과의 차별성을 도모, '전통'과 '자연'을 키워드로 '영원한 평온'이라는 국가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사회경제적으로는 박람회 이후 존치된 일본정원은 지속적인 일본정원의 모델 역할을 하였으며 박람회의 일본관을 조성하기 위하여 정원과 관련된 많은 전문가가 일본에서 미국과 유럽으로 간 후 현지 정착하며 일본 정원이 현지에 녹아드는 계기가 되었다.

선형 점성 감쇠기가 장착된 인접구조물의 진동제어를 위한 유전자 알고리즘 기반 최적설계 (GA-Based Optimal Design for Vibration Control of Adjacent Structures with Linear Viscous Damping System)

  • 옥승용;김동석;고현무;박관순
    • 한국지진공학회논문집
    • /
    • 제11권1호
    • /
    • pp.11-19
    • /
    • 2007
  • 이 연구에서는 인접한 두 빌딩의 진동제어를 위한 방법으로 선형 점성 감쇠기의 위치별 용량의 최적설계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기존 연구들에서는 감쇠기의 균등분포 또는 층별 감쇠비의 민감도에 비례하는 분포의 가정 하에서의 준최적(suboptimal) 설계문제를 다룬 반면, 이 연구에서는 감쇠기의 위치별 용량을 독립적인 설계인자로 고려함으로써 전역 최적해를 결정하는 최적화기법을 다루었다. 이를 위하여 넓은 영역에서 다수의 설계변수를 효율적으로 검색할 수 있는 유전자 알고리즘(genetic algorithm)을 도입하였으며, 제어 성능 및 감쇠용량에 대한 목적함수의 정의를 달리함으로써 얻어지는 여러 최적설계 결과를 상호 비교하여 보다 최적의 해를 구할 수 있는 목적함수를 정립하였다. 기존 연구결과와의 제어성능 및 감쇠용량의 비교를 통하여 제시하는 방법의 효율성을 검증하였다. 아울러 서로 상이한 주파수 성분을 띄는 실제 역사지진에 대한 시간이력해석을 통하여 제시하는 방법이 인접 구조물의 효과적인 제진설계방법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건설용 리프트의 운행정보 및 고장데이터 분석을 통한 주요 부품별 점검주기 산출 연구 (A Study on Optimal Inspection Interval for the Major Components of Construction Lift)

  • 소지윤;배재훈;한충희;이준복
    • 한국건설관리학회논문집
    • /
    • 제16권3호
    • /
    • pp.68-77
    • /
    • 2015
  • 최근 초고층 건축물의 증가로 그에 따른 양중계획 및 양중장비의 효율적 관리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 전동 호이스트, 크레인 등과 관련된 재해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특히 건설용 리프트는 안전 측면에서 정기점검이나 고장에 대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나 사용시간에 따른 일률적인 정기검사를 수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리프트는 개별 부품의 사용시간 및 부하조건 등에 따라 그 수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매우 떨어지는 유지관리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고 사용자 편의성과 안전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방안으로써 센싱 기술을 활용하여 리프트의 실제 사용시간을 측정하고 그에 따른 고장데이터를 분석하여 리프트의 주요 부품들에 대한 개별 점검주기를 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연구의 결과물로 리프트의 주요 부품에 대한 점검주기를 산출하고, 리프트 실 사용시간 40시간, 90시간, 130시간, 400시간으로 나누어 그에 따른 점검 부품들을 구분하여 표로 작성하였다. 이를 통해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작업자의 안전성을 향상시켜 효율적인 유지관리 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리프트 고장으로 인한 공기지연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여 공사의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