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Goryeo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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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수선본사(修禪本寺) 흥천사(興天寺) 사리각 영건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Construction of Stupa in Heungcheon-Temple which represents Buddhism in Early Joseon Era)

  • 김버들;조정식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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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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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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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This is a study on the construction of the Heungcheon-Temple. The results are follows. 1) The Heungcheon-Temple was anticipated to be the Jeongneung. However, when completed, the Heungcheon-Temple was symbolized Buddhism; moreover, there was a stupa enshrined sarira. The stupa was a land mark in Hanyang. While king Sejong repaired the stupa, it disappeared during the regin of King Jungjong. Before it disappeared the stupa signified a Buddhist event and a rite of good fortune. 2) The stupa was constructed using a double-frame, and there was a stone-stupa in an octagonal multi-layer temple. This single location consisted of a sarira space and a worship space. 3) Buddhist Relic(Sarira) worship was to witness holiness and therefore reics could be moved according to need. It appeared as though Buddhist Relic worship occurred in Southeast Asia. 4) The Heungcheon-Temple stupa was considered a new and superior architectural-symbol to comfort people and recognize the new order of Ming and neo-Confucianism. Therefore, the stupa was a good alternative to politics, religion, and external relations during the early Joseon era.

조선왕릉의 조영의도, 이념, 사상, 미의식에 관한 연구 (A Study on Constructional Intention, Idea, Thought and Aesthetic Consciousness of Joseon Royal Tombs)

  • 최종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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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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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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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세계유산으로서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진정성, 완전성을 지닌 조선 왕릉의 입지, 배치 및 공간구성, 구성요소(건축, 조경, 석물, 조각) 등에 내재되어 있는 조영의도, 이념, 사상, 미의식 등을 구명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40기를 연구대상으로 문헌조사와 현장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조영의도, 이념, 사상의 기원을 살피기 위해 조선왕릉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왕릉과 통일신라시대의 왕릉도 살펴보았다. 조선왕릉은 고려왕릉, 특히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능제를 많은 부분 계승하였으나, 불교국가였던 고려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예법에 따라 조영되었으므로, 공간구성이나 구성요소에서 특색이 나타난다. 조선왕릉의 선지와 입지에서는 풍수사상의 길지 즉, 배산임수의 지형을 잘 갖춘 곳을 택하였으며, 배치 및 공간구성은 유교사상에 따라 이루어졌는데 이는 유교의 위계질서가 반영되도록 능역을 조성한 것이다. 공간구성요소에서는 건축, 조경, 석물, 역사경관림에서 유교사상, 불교사상, 도교사상이 각각 혹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제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유교적 예법에 따라 행해지는 제례의식을 통해 조선왕릉의 조영의도, 이념, 사상에 연결된다.

조선시대 왕실의 소선(素膳) 이용에 관한 연구: 『조선왕조실록』, 『춘관통고』를 이용하여 (A Study on the Use of Soseon in Joseon Dynasty Based on Literature Review: Based on 『The Annals of Joseon Dynasty』, 『Chungwantonggo』)

  • 오은미;이심열
    • 한국가정과교육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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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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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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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조선왕실의 기록 문헌을 이용하여 소선 사례의 빈도, 식재료, 상차림 및 조리법 등에 관하여 알아보고자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조사한 소선 사례는 186개가 나타났다. 의례별 사례 빈도는 흉례가 전체 의례의 61.82%로 가장 많았고, 길례(21.51%), 빈례(11.29%), 가례(5.38%)순으로 나타났다. 소선 사례 횟수는 조선 전기(68.82%)가 조선 후기(31.18%)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소선 식재료 목록을 살펴본 결과, 곡류는 밀가루, 메밀가루, 점이 있고, 두류는 황대두, 포태, 전시가 있으며, 해조류는 다시마, 김, 미역 등이 있었다. 버섯류는 표고, 석이가 있고 양념류로는 겨자, 참기름, 실임자 등이 있었다. 길례와 흉례의 소선 상차림의 주요 음식은 주식이 밥, 면, 부식류는 탕과 채, 적, 개장, 후식류는 유밀과와 산자, 다식, 정과, 떡, 과일로 나타났다. 주요 음식의 경우 밀가루, 두부, 해조류, 버섯, 잣, 참기름, 꿀 등의 식재료를 이용하여 조리되었다. 특히 두부, 밀가루, 해조류 등은 불교적 내용과 관련하여 문헌에서 언급되었다. 본 연구 결과는 소선이 조선시대로 전승되면서 불교의 영향을 받은 채식 문화의 형태란 것을 보여주며, 조선시대 왕실의례의 불교음식문화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고려시대 풍탁(風鐸)의 전개와 독창성 (The Development and Originality of Wind Chimes of the Goryeo Dynasty)

  • 이영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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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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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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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불교에서는 부처의 위엄, 부처의 세계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방편으로 불상과 그 주변을 아름답게 꾸몄다. 여기에 이용된 각종 불구를 장엄구라고 한다. 장엄구는 불상을 꾸미는 장신구, 광배, 보개, 번 등 다양하며, 건물 밖에 걸었던 풍탁 또한 불교 장엄구의 일종이다. 풍탁은 지금까지도 사원에서 널리 쓰이는 불교 장엄구이다. 중국에서는 낙양 영녕사 목탑, 둔황석굴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6세기 무렵에는 이미 풍탁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불교사원은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불교가 전래한 것과 동시에 지어졌으므로 사원 건물에 매다는 풍탁도 사원 조성과 그 시작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풍탁은 백제 미륵사지 <금동풍탁>이다. 우리나라 풍탁은 입면에 따라 종형과 제형으로 구분된다. 이는 옆 변의 형태에 따라 세분화할 수 있다. 종형과 제형 풍탁은 시대가 흐르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이러한 모습이 고려시대 풍탁에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고려시대 풍탁은 이전의 형식, 구조, 의장 등을 계승하면서도 기술적으로 발전을 도모하고, 자유로우면서도 과하지 않은 의장을 표현하였다. 특히 고려 소종의 입상연판문대(立狀蓮瓣文帶),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는 불문(?文), 고려 향로 속 삼환문(三環文)과 범자문(梵字文), 석조물의 창호문(窓戶文) 등 동 시기의 불교 미술품과의 교류를 짐작하게 하는 의장은 고려시대 풍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이처럼 고려 풍탁은 특정한 규격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그 역할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풍탁을 조사한 결과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이 가장 비중이 높다는 점에서 시작되었다. 풍탁 연구는 다른 불교 장엄구에 비해 미진한 실정이기에 가장 많은 고려시대 풍탁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풍탁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고 우리나라 풍탁의 형식을 알아보겠다. 이를 토대로 고려시대 풍탁의 시기별 전개와 특징을 고찰하고자 한다.

고려시대(高麗時代) 간행(刊行)의 불경판화(佛經版畵) 연구(硏究) (A Study on the Buddhist scripture published in the Goryeo Dynasty)

  • 석혜영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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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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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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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고려시대 제작된 불교 경전에 포함된 판화와 관련된 개괄적인 현황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고려시대 간행된 판화본 중 해인사 소장 대장경에 포함된 것은 ${\ll}$화엄경(華嚴經)${\gg}$ 주본(周本) 80점(5점 중복), 진본(晉本) 12점을 비롯하여 ${\ll}$예수경(豫修經)${\gg}$ 3종 44점과 송광사에 ${\ll}$천태은사한산습득시집(天台隱士寒山拾得詩集)${\gg}$의 판화 1점이 현전한다. 또한 초조대장경 중 현재 일본 남선사에는 소장된 ${\ll}$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gg}$ 권1-10까지에는 50개의 판화가 현전하며, 이것은 권11-20까지 중복해서 사용 되었으며, 권21에는 불전도(佛傳圖) 형식의 판화가 3점 포함되어 있다. 이 외에 본고에 다룬 고려시대 간행된 불경 판화는 12종 19점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불경 판화의 모티브를 차용하면서도 고려인들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도상을 만들어 내었다는 점과, 특히 조선 초기 제작된 다양한 불경 판화의 원형을 제공해주고 있어 그 시원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벽랑공주는 왜 탐라에 왔을까? (Why did the Byeokrang Princess come to Tamra?)

  • 이성국;김정수;이문호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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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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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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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물(水)의 신(神)인 발타라(跋陀羅, Bhadra: 인도 북부지방 탐몰라주(耽沒羅洲: '몰'자와 '주'자가 탈락되면서 '탐라(耽羅)')존자가 BC 563-483년경에 900명의 아라한(弟子)과 같이 탐라(BC483-AD1105 고려 숙종 때 탐라 왕국이 고려에 한군현이 됨)에 왔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물(신성성(神聖性), Heiligkeit, 4대 원소인 물, 불, 공기, 흙의 하나)을 통한 불교의 전파와 세계에서 가장 큰 나한(한라는 나한이란 뜻: 니한(拏漢):한나(漢拏) 한라산의 한라의 역, 부록: 전주 황방산 서고사(西固寺) 나한전)의 돌(石) 등신불(等身佛)을 찾기 위해서다. 옛부터 제주 사람들은 남녘에서 불어오는 태풍 등을 한라산이 막아준다고 진산(鎭山Truth Mt.)이라고 부르는데, 성불(成佛)한 거대한 나한이 한라산 화산 폭발시에 불(火)에 의해 백록담 바위의 등신불로 굳어버린 모양새다. 오는 날 제주에서 발타라존자의 가장 큰 숨결은 올레길 1번 성산포 시흥리(始興里)에서 26번 구좌면 종달리(終達里) 길이다. 바로 천부경(天符經)의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은 끝이고(시즉종(始卽終)), 끝이 시작(종즉시(終卽始))"을 타원형 제주 "길(도로(道路)Way)"에서 확실히 보여준다.

명주지역 나말여초 불교조각과 굴산선문 (Buddhist Sculpture of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 at Myeongju and the Gulsan School of Seon Buddhism)

  • 최성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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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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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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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굴산사(?山寺)는 신라하대에 통효대사 범일(梵日, 810~889)에 의해 개창된 이래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파(??山派)의 본산으로서 크게 융성하였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위치한 굴산사지에는 거대한 당간지주를 비롯해서 고려시대 석조부도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2구 전해오고 있으나, 범일과 그의 제자인 개청(開淸, 854~930), 행적(行寂, 832~916)이 활동했던 나말여초기 굴산사를 알려주는 불교조각은 전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나말여초기 굴산선문의 불교미술을 살펴보기 위한 시도로서 굴산선문의 영역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강릉, 오대산, 동해시 등지로 범위를 넓혀 나말여초기 명주지역 불교미술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범일과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 굴산선문의 불교미술을 유추해 보았다. 강릉지역의 석조물 가운데 강릉시 오죽헌박물관에 옮겨진 무진사지(無盡寺址) 석탑의 부조 사방불상과 사천왕상은 신라 중앙이나 양양 진전사지, 선림원지 석조미술과 양식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말여초기 명주지역 불교미술이 당시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범일의 제자인 개청이 주석했던 보현산 지장선원[普賢寺]에 전해오는 석조대좌의 부재(部材)는 팔각연화대좌의 하대 복련좌(覆蓮座)를 받치고 있던 팔각의 받침석으로 안상(眼象)에 사자(獅子)가 새겨져 있어 나말여초기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지권인 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국립춘천박물관과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 한송사지(寒松寺址) 석조보살좌상 2구는 대리석이라는 재료를 비롯해서 머리 위에 쓴 원통형의 고관(高冠), 양손의 검지를 곧게 뻗은 수인(手印), 다리를 편히 놓은 서상(舒相)의 좌세 등, 독특한 밀교계 요소를 보여준다. 이러한 밀교계(密敎系) 도상(圖像)은 굴산선문 승려들의 당 유학(遊學)을 통해 명주지역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활발했던 굴산선문 승려들의 국제적 활동은 지역 미술에 큰 영향을 주면서, 선진성을 고양하였을 것이다. 동해시 삼화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시무외 여원인의 수인을 결(結)한 화엄계 노사나불상 표현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인 도상으로서 명주지역 미술이 전통성을 고수했던 면도 있었음에 주목하게 한다. 굴산선문 불교미술은 중앙지역과 같이 하는 양식 수준, 활발한 대당(對唐) 교류의 결과로 나타나는 선진문화의 수용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선진성과 국제성은 나말여초기 굴산선문 불교미술의 기본 성격으로 생각된다.

부석사 조사당 신장 벽화를 통해 본 조사당 건립의 배경과 의미 (The History of the Josadang and Its Meaning as Seen Through the Murals of Josadang Hall in Buseoksa, Yeoungju)

  • 심영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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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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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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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이 글은 설산 천희(雪山 千熙, 1307~1382)가 영주 부석사에 조사당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의미를 조사당 벽화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조사당의 남벽(출입구 위치)에는 북벽에 위치한 의상 대사상을 마주 보며 6구의 신장(사천왕과 그 양 옆으로 제석천과 범천)이 그려져 있다. 이 신장 그림은 우리나라 사찰 벽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매우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사찰 전각의 내벽에는 경전에서 묘사하는 장면들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사당에는 이런 종류의 벽화는 없으며 신장들만 그려져 있다. 이는 유일한 예이며, 승려상과 마주보는 위치에 신장들이 그려진 예도 찾아볼 수 없다. 주인공인 승려(의상대사)를 외호하기 위한 신장의 배치와 부조상(浮彫像)을 그림으로 번안한 듯한 표현상의 특징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그 구성과 표현이 팔각의 탑신 표면에 신장상을 새긴 나말여초 선종의 석조승탑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도상 또한 나말여초기 신장과 유사성을 지닌 고식이다. 이중 동방과 서방천왕의 존명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는데 이 글에서는 나말여초 승탑의 사천왕 배치 순서에 근거하여 이들의 명호를 제시하였다. 한편, 해동 화엄의 초조 의상 대사를 기념하여 조사당을 건립하고 이를 외호하는 신장들을 배치했다는 것은 개산조에 대한 숭배 개념을 드러낸다. 따라서 조사당 건립의 목적 또한 선종 승탑 건립 이념의 연장선에서 찾았다. 문제는 설산 천희가 화엄종 승려이고 부석사는 대표적인 화엄 사찰이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조사당 건립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14세기 고려 불교계의 상황과 창건주 설산 천희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14세기에는 간화선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천희는 58세의 노령에도 원나라에 유학하여 간화선사의 인가를 받아온 뒤 국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결국 부석사로 밀려나 부석사 중창에 힘쓰게 된다. 천희는 아마도 사찰 중창을 통해 부석사의 위상을 높이고 선종에 위축되어 가던 화엄종의 발전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선종의 부상 아래 힘을 잃어가던 화엄종이 그 발전을 모색하는 시도 속에서 조사당을 건립하였고 이러한 염원이 벽화의 특징으로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조사당 벽화의 불교사적인 가치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기문(記文)으로 본 세조(世祖)연간 왕실원찰(王室願刹)의 전각평면과 가람배치 (Architectural Plan And layout of Buddhist Temples(Wangsil-Wonchal) on through the Study of Records about Temple's Foundation during King Sejo(世祖) Period)

  • 이경미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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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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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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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The study on Buddhism architecture in early Joseon dynasty was inactive. The period of King Sejo is important for studying the trend of Buddhism architecture in early Joseon, that was transmitted from the end of Goryeo dynasty, but it was difficult to know its exact situation due to lack of related records. The records were all written by Kim Su-ohn, which are Wongaksabi' 'Sangwonsajungchanggi' 'Bongseonsagi 'Geonginsajungchanggi'. The main hall was mainly second floor and there were necessarily annexed buildings at the right and left of the main hall. So the plane figure of $\Box\Box\Box$ was shown. It was a main stream for main hall. This layout may be referred to search for the origin of the layout in courtyard based structure(中庭形) in the late Joseon dynasty. Most of temples had 3 gates. Some part of horizontal corridor was used as 2 gates and the outer gate, far from main hall, was without corridor. The gate leading to front yard of main hall was called front gate, the next middle gate and the outer gate was Oisamun(外沙門) or Samun(沙門). Im most of the temples, people could enter into the front yard through pavilion which had the function of bell tower. The pavilions were located between front gate and first corridor. It is thought that this layout of the place for making bean curd outside the temple area will contribute to different studies on temples making bean cure in the future. The records about temples's foundation studied above are a little different between temples, but have more similarities. There common denominators represent the architecture tendency of Buddhist temples in the related period. It is thought that such a tendency was also shown on architecture of other temple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as well as Buddhist tem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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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광선사탑(乘廣禪師塔)를 통한 팔각정형(八角亭形) 승탑사(僧塔史)의 재고(再考) (Referring to The Stupa of Master ChengGuang, Reconsideration of the History of Buddhist Monks' Octagonal Tempietto Shaped Stupa)

  • 황문호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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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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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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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Stupa of Buddhist Monk, YeomGeo"(844) is known as the earliest Seon-stupa relic remains in Korean peninsula, from which, during late Silla and ealy Goryeo period, there were more than 30 of stupa was built on such canon. and became the well-known material culture in Seon Buddhism in late Silla period. In $9^{th}$ century, with the JeonDeong(delivering the light of Seon)from Tang to Silla, the culture of "GeonTapIpBi(building the pagoda and erecting stele)" was also moved in. And it was right after the style of monk's stupa had been methodically changed in china, from having the room in stupa for the corpse, named as "QuanShenSheLi", to the lessened stupa that contain the cremated. Analyzing the "Master ChengGuang's stupa"(807)and its stele, it can be found the correspondences of octagonal plan and the subjects of ornamentation to that of Stupas built in Silla, reveals they were made by the same canon. By the document in the stele, surmising the historical cause of alteration in Chan stupa, there was the most famous zen master ShenHui at the time, who has the most important role of making the NanZongChan to get the authenticity in Chan Buddhism. His reliqury was the first ${\acute{s}}ar{\bar{i}}ra$ casket discovered among Chan monks' relics, consequentially it was to influence to Chan cuture and size the monks 'stupa for his ${\acute{s}}ar{\bar{i}}ra$. The stupa of master ChengGuang, by its shape and geological location, is the lost piece in the Puzzle of Chan stupa culture between Silla and T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