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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강도궁궐의 위치와 범위 검토 (The Location and Range of Goryeo Palace in Gangwha)

  • 이상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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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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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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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강화는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궁궐을 비롯한 여러 시설물이 즐비한 고려의 도성이었다. 하지만 도성의 핵심시설인 궁궐의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중세도성으로서의 역사적 위상을 발현하지 못하고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강도궁궐은 개경궁성을 모방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전제한다면, 강도궁궐의 실체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개경궁성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개경궁성의 특징은 도성의 남북중심 축선에서 서편으로 치우친 곳에 입지하고, 궁성의 동편에는 '동지(東池)'가 위치한다. 그리고 궁성의 중앙부에는 탁월한 고도의 구릉이 남쪽으로 돌출되어 있고, 이 구릉을 감싸고 두 줄기의 가지하천이 흘러 주류하천에 합수된다. 강화에서 이상 개경궁성의 특징들을 적용해 볼 수 있는 곳은 관청리 '궁골'일대이다. 이곳에서는 예로부터 많은 청자들이 수습되었다고 하며, 중앙부에는 탁월한 고도의 구릉이 남아있다. 이 구릉을 감싼 두 줄기의 하천은 남쪽으로 흘러 주류하천인 동락천에 합수된다. 한편 관청리 405번지 유적의 발굴조사 결과는 이곳이 연못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그렇다면 이 유적은 궁궐의 동편에 입지하는 개경의 '동지'와 같은 성격의 유적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지적도에서 확인한 대형도로는 개경도성의 남북방향 주간선도로에 비견된다. 그러므로 강도궁궐은 개경궁성과 같이 이 두 유구의 서편에 입지하여야만 한다. 그곳이 바로 '궁골'인 것이다. 지적도에는 '궁골' 일대에 호상(弧狀)의 도로에 의해 구획된 복주머니 형태의 평면이 확인되는데, 개경의 궁성모습과 흡사하다. 이 호상도로 내부에 궁궐 전각의 일부로 생각되는 관청리 659-2번지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개경궁성의 특징, 고지도 및 지적도, 고고자료의 검토를 통해 얻은 결론은 강도궁궐이 강화읍 관청리 '궁골'일대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며, 그 범위는 상기한 호상도로의 내부라는 것이다.

고려 강도궁궐 위치 연구 (A Study on the Location of Goryeo GangdoPalace)

  • 빈경민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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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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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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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iew the research on Gangbang Palace and to presume the location of the palace through the study of feng shui. when the Mongols invaded, Ganghwado was the capital, moved from Gaegyeong and it was maintained for 39 years. At that time, the palace construction followed the palace of Gaegyeong, and the names such as Gujeong毬庭, Palace, and Sasa寺社 were the same as those of Gaegyeong. However, despite several archaeological excavations at Goryeo Palace Site, Historic Site No. 133, no actual remains of the Goryeo period were found. After the negative opinions on the current Goryeo Palace site became public, there have been several previous studies on the estimation of the location of the Goryeo Palace Site, and although there have been achievements, the location of the Goryeo Palace is still not confirmed. The key to presuming the location of the GangdoPalace江都宮闕 is first, whether the palace was located in the south of Songaksan, and second, at what point it was located in the south of Songaksan. As to whether the palace was located in the south of Songaksan, it was presumed that the Chiso治所 of Ganghwabu was located in Gukhwari, referring to the record in 『Shinjeungdongguknyeojiseungnam新增東國輿地勝覽』 that Goryeosan, a guardian mountain鎭山, was 'five ri west of Bu府西五里'. Accordingly, the location of the palace of 'Budongsimni 府東十里' in the old literature was estimated to be south of Songaksan Mountain. Also, the location of the palace on the south side of Songaksan was approached from a feng shui theory. Three places for the palace to be located are presumed to be 'Ganghwa Girls' High School', 'Seonggwang Church', or 'Above the Ganghwa-gun library', and the central axis of the palace is estimated to be 'Above the Ganghwa-gun library' where the corridor-type building relics were found among them, and the other two areas were presumed to be other buildings within the palace.

고려 강도(江都)의 성곽과 궁궐 재고찰 (A reevaluation of the castles and palaces of Goryeo Gangdo (江都) using GIS)

  • 강동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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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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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4-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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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강도는 39년간 고려의 수도였으며, 이는 개경의 재현이었다. 하지만 몽골군의 침입이라는 급박한 전시 상황과 강화도의 지형적인 특징 등으로 인해 개경과는 다소 다른 성곽 체제와 궁궐의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강도의 성곽은 외성-중성-내성으로 구성된 3중성(重城) 체제로 이해할 수 있다. 외성은 가장 먼저 완성한 성곽이었으며 몽골군의 침입을 최전선에서 최우선으로 방비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었다. 그 구간은 조선시대 외성의 휴암돈~화도돈이었다고 추정된다. 중성은 강화산성 외곽의 토축성인 현 '중성'으로 볼 수 있다. 이 성곽은 고고학적 조사에서 확인된 축조 수법의 정교함과 견고성을 통해 볼 때 치밀한 계획 하에 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중성은 강도의 도성으로서 궁궐, 관청, 민가 등을 보호하기 위해 18년이라는 장기간의 축성 과정을 거쳐 『고려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이다. 내성은 궁성적 성격을 지닌 성곽이었다. 조선시대 강화부의 '구성(舊成)'이 이에 해당하며 개경 구성의 규모와 거의 일치하였다. 내성은 궁궐을 포함한 주요 관부와 부속 시설이 위치한 궁성과 황성의 통합, 즉 복합적 기능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궁궐은 개경에 준하였다는 문헌 기록에 근거하여 개경 궁궐도와 중첩한 결과, 승평문-선경전에 이르는 건축물의 중심축이 김상용 순절비각-고려궁지와 일치하였다. 따라서 강도의 궁궐은 기본적으로 개경과 동일한 건축물 배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내전과 부속 건물 등은 강화의 지형 조건을 감안하여 배치되었을 것이며, 이는 관청리 '궁골' 일대로 추정된다.

태안 마도1·2호선 해양 유물로 본 고려시대의 음식 문화 (Food Culture of Koryo Dynasty from the Viewpoint of Marine relics of Taean Mado shipwrecks No. 1 and No. 2)

  • 고경희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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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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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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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This study examined the food culture of the Koryo Dynasty during the early 13th century based on the records of wooden tablets and marine relics from the 1st and 2nd ships of Mado wrecked at sea off Taean while sailing for Gaegyeong containing various types of grain paid as taxes and tributes. The recipients of the cargo on the 1st ship of Mado were bureaucrats living in Gaegyeong during the period of the military regime of the Koryo Dynasty, and the place of embarkation was the inlet around Haenam (Juksan Prefecture) and Naju (Hoijin Prefecture) in Jolla-do. On wooden tablets were recorded 37 items of rice, cereal, and fermented foods. The measures used in the records were seok [石-20 du (斗)] for cereal, seok [15 du, 20 du] for fermented soybean paste, and pot (缸) and volume (斗) for salted fish. The places of embarkation on the 2nd ship of Mado were Jeongeup (Gobu Prefecture), Gochang (Jangsa Prefecture, Musong Prefecture), etc. On wooden tablets were recorded 29 items of rice, cereal, fermented foods, seasame oil, and honey. The volume measure for yeast guk (麴), the fermentative organism for rice wine, was nang [囊-geun (斤)], and the measure for sesame oil and honey, which were materials of oil-and-honey pastries and confections, was joon (樽-seong, 盛). Honey and sesame oil were luxury foods for the upper-class people of the Koryo Dynasty, and they were carried in high-quality inlaid celadon vases in Meibyung style. Food names and measures written on wooden tablets and actual artifacts found in the 1st and 2nd ships of Mado are valuable materials for research into agriculture, cereal, and fermented foods of the Koryo Dynasty in the early 13th century. Besides, relics such as grains and bones of fish and animals from the Koryo Dynasty are expected to provide crucial information usable in studies on food history of the Korean Peninsula.

고려시대 경기지역 요업의 성격 (Trends of Ceramic Industry in the Gyeonggi Province During the Goryeo Period)

  • 장남원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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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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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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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고려시대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경기$\cdot$황해도 일원은 국가의 주요 기관들과 왕실 및 관료, 상업시설, 사찰 등 풍부한 도자기 소비처가 집중되었던 곳이자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기생산이 이루어진 곳이다. 요장의 규모와 구조, 생산품의 원료, 번조방법 등에서 중국남방 월주요계 전축요의 요업방식을 그대로 채용하여 중국기술이 직접 이식되었으나 중국과 달리 청자와 백자를 같은 요장에서 생산함으로써 초기부터 국내 상황에 맞춘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활한 자기생산을 위한 일정한 체체 구축이 불가피하였을 것으로 경기지역의 자기생산을 초기부터 국가적 운영체제 아래 이루어졌던 것으로 본다. 이는 개경 인근의 요장들이 서로간에 일정한 질과 조형을 가진 자기를 생산하고 있었던 점, 초기 전축요 시기부터 국가용 제기를 만들고 있었던 점, 또 실제로 소나 부곡의 존재와 일치하는 가마터들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에 요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직제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청자생산의 중심이 강진으로 옮겨진 이후 경기지역은 지역 수요에 부응하는 생산으로 그 성격이 바뀌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강진의 청자요업이 활성화 된 이후에도 경기지역의 전통적 요장들에서는 일정기간 국가용 제기를 만들고 있었음이 확인되어 고려요업의 성격과 변천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한서를 제공하였다. 한편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일대의 많은 소비처들의 존재와 그 출토품의 양상은 기록에서와 마찰가지로 개경 인근에 고려 중기 이후까지도 운영되었던 생산지가 현재까지 알려진 것 이상으로 터 많이 존재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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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경복궁의 공간구조성과 6조대로 - 광화문 앞의 행사와 그 의미 - (The Spatial Organization of Gyeongbok Palace and The Six Ministries A venu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 The Ceremony at the Main Gate and its Meaning -)

  • 김동욱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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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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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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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The Gyeongbok Palace was completed during the reign of King Taejo and King Sejo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most remarkable spacious feature of the palace is that it has an inner palace wall without an outer palace wall. The absence of the outer palace wall had its origin in the palace of the late Goryeo Dynasty which did not provide the outer palace wall. Gwanghwamoon was the main gate of the palace, and the office buildings of the Six Ministries were arranged on the right side in front of the main gate. A wide road called Six Ministries Avenue was made between the builidings. The avenue was completed during the reign of the third king of Joseon, Taejong, and it was assumed that this arrangement was influenced by the government office arrangements of Nanjing, the early capital city of the Ming Dynasty. Gwanghwamoon held national rituals as well as the civic and military state examinations nations in front of the gate. The avenue was decorated with flowers and silks when kings and the royal families, or Chinese envoys enter the gate, and the civilians watched the parade, Because there was no outer palace wall, all the events held at Gwanghwamoon and the Six Ministries Avenue ware opened to the public, it was the unique feature of Gyeongbok Palace that the palaces of Goryeo dynasty and China did not h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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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구조와 연계한 도시수체계의 구성형태와 역할에 관한 연구 - 경주, 개경, 한양,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 (A Composition and Role of Urban Water System in Connection with Historic City Structure - Focusing on Gyeongju, Gaegyeong, Hanyang, and Suwon Hwaseong -)

  • 강인애;이경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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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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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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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신라왕경 경주, 고려 개경, 조선 한양, 조선후기 신도시로 조성된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도시에서 나타난 도시수체계의 구성방법이 지니는 특성을 파악해보고자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특히 도시입지, 도로, 도시시설 배치 등을 중심으로 도시골격구조와 연계하여 물길이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고 수체계의 구성형태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도시 내 수공간 경영에 투입되었던 기술적, 계획적 요소와 함께 도시구조와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연구대상지에서는 자연수계를 기반으로 부분적인 하천 정비와 인공수계를 도입하여 도시수체계가 구축되고 있다. 특히 물과 자연수계는 도시의 입지를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도시구조와 도시발달과정, 도시구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지리적 관념과 어우러져 물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치수, 이수 등의 관점에서 요구되는 현실적 수요가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 공간과 관련된 다양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도시 형성·발달과정에서 물 공간을 경영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적, 기술적 요소가 도입되었다. 연구대상지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도시형성·발달과정에서 도시수체계가 지니는 계획적 요소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로 연구대상지로 선정된 신라왕경 경주, 고려 개경, 조선 한양, 수원 화성의 도시수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는 배수, 재해를 고려한 치수의 관점이 공통적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수체계의 구축방법이나 활용성에서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 물과 자연수계는 도시입지의 상징적 요소로서, 그리고 지리적 관념과 어우러진 도시 입지를 결정하고 도시의 좌향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로 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연수계는 지형여건과 어우러져 도시 형성·발달과정에서 구축되는 도시수체계의 구성형태를 결정하는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넷째로 자연수계를 기반으로 구축된 도시수체계는 자연물길과 계획적 인공수로가 결합되어 도시구조의 일부로서 위계별 수계의 활용성이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다섯째로 도시수체계는 배수체계와 재해를 고려한 치수의 관점 이외에 도시용지의 확보, 도시시설 배치와 영역 확보, 기능지역 구성, 토지구획과 연계하여 계획적으로 구축되고 있다.

고려의 향문화(香文化)와 향로(香爐) (Goryeo Dynasty Incense Culture and Incense Burners)

  • 박지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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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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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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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향을 피우는 행위는 불교 의례나 관습에서 유래되었으나 점차 일상의 습속(習俗)이 되어 향문화를 형성하였다. 고려는 종교나 국가적인 의례 외에도 일상 속에서 향을 폭넓게 향유하였는데, 특히 고려의 문인들은 연거분향을 통해 삶의 고아한 정취를 즐겼다. 이러한 분위기는 동아시아 향문화의 일환으로 분향방식 역시 동시기 중국과 같은 방식을 공유하였는데, 이는 고려 문인들의 문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분향방식은 향로의 크기나 형태 등에 영향을 주었는데, 일상화된 분향 문화에 적합한 간소화된 소형의 향로들이 널리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소형 향로로 배(杯) 형태의 향완이 대표적이다. 향완은 종교적 용도의 금속제 거향로로 인식되어 왔지만, 송대에는 소형 향완이 도자로 활발히 제작되면서 일상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송과 같은 향문화, 분향방식을 공유했던 고려에서도 도자 향완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하였다. 이는 개경에서 발견된 다수의 송대 백자향완, 그와 유사한 형태로 제작된 고려의 청자향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2~13세기에 제작된 청자 향완은 고려 내부의 적극적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중국 백자향완과 유사한 형태의 청자향완 외에도 금속기를 모방하거나 고려청자의 기법과 문양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고려만의 청자향완들이 제작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고려시대 향로는 기본적으로 각종 의례·의식의 필수품이었지만, 개인 향문화의 확산으로 아취를 위한 기호품으로도 사용되었다. 금속제 향로나 고급 청자 향로들이 주로 국가나 종교의 의례·의식에 사용되었다면, 비교적 생산이 용이한 간소화된 도자 향로는 개인적인 수요에 부응하며 향문화의 확산에 기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