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1980년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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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부지역 농민운동의 조직 및 활동;1970년대 이후 예산 , 홍성 , 당진군의 사례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Organization and Activity of Peasant Movement in Western chungnam , Korea)

  • 배성의;이대열
    • 농촌지도와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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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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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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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 This study investigated and summarized the history of peasant movement which had been done by various peasant associations Yesan, Hongsong, and Tangjin from the beginning of Korean Catholic Peasant Movement from 1970 to 1995. First of all, we classified all the peasant movements(Yesan ; 120 times, Hongsong; 113 times and Tangjin; 107 times / total; 340 times) into 5 categories composed of movement time, movement type, movement method, the number of participators, and the movement subjects(issues). The frequency of peasant movement from 1990 to 1995, occupied 65.6%, which shows that the peasant movement was the most active during the time. The frequency of movement type, were we could find out, self-dependence type(62.9%), resistance type(15.6%) and request type(21.5%). The active way like congregation, demonstration, sit-in, rice file up struggle occupied 28.8% and it got the first place in movement way. In the movement subject category, the construction of organizations and solidarity activity amounted to 37.8% and democratization item(the union democratization and the social democratization related peasant) covered 16.8%. The 98 times of peasant movement were done in the active ways such as congregation and demonstration. However we cannot find these active ways in 1970s. In 1980s, the frequency of each item (congregation, demonstration, publicity and propaganda) was 28 times. But in 1990s, the frequency of congregation, or demonstration was higher than the others. The number of participators in peasant movement increased during 1980s∼1990s. The movement of which participators were 100∼499 was 32 times in 1980s and 70 times in 1990s each time. Such large scale movement amounted to over 30%. Furthermore, the large scale movement in which over 500 people participated amounted to 12 times in 199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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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음파 탄성 영상 알고리듬 (Algorithms for Ultrasound Elasticity Imaging)

  • 권성재
    • 비파괴검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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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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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4-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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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초음파를 사용해 음속도, 감쇠 계수, 밀도, 비선형 B/A 파라미터 등을 측정하여 인체 조직의 특성을 정량적으로 영상화하고자 하는 연구가 1980년대부터 많이 진행되어 왔으나 아직 상용화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에 시작된 탄성 영상법은 최근 들어 초음파 진단기에 상용화되어 임상에서 B-모드 영상법과 함께 전립선, 유방, 갑상선, 간, 혈관 등을 진단하기 위한 보완적이며 더 정량적인 모드로 사용되고 있는 단계에 진입하였다. 본고에서는 주로 준정적 또는 정적탄성 영상법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알고리듬을 소개하고 특성을 비교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알고리듬은 상호상관함수 또는 자기상관함수 방법에 그 기반을 두고 있으며 전자는 래그를 변화시켜가면서 시간 이동량을 찾지만 후자는 보간 과정 없이 고정된 래그에서의 위상차로부터 시간 이동량을 바로 구해 변위를 추정하는 점이다.

청계천 공간의 변화와 시기별 미디어 담론 변화에 대한 일 사례 고찰: 조선일보의 1960년대, 1980년대, 2005년 담론을 중심으로 (A Study On Changes in Cheong-gye-cheon & in Media Discourse: Based on Media Discoruse During 1960s, 1980s, and 2005 in Each Period)

  • 김병욱;엄정윤;김승현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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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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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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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청계천 공간의 역사적 변화 시기마다 미디어 담론이 청계천 공간 생산과 어떻게 관련을 맺게 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담론분석을 시도하였다. 특히, 청계천 공간의 생산과 미디어 담론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경험과 인식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담론의 규칙성을 찾는 작업에 주력하였으며, 그 결과 청계천 복원을 자본주의 확장 과정에서의 공간 생산과정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1960년대 미디어 담론의 하나로서 전근대적 육체와 시설이 시간의 효율성으로 쪼개진 공간을 실천하면서 근대적이고 도시적인 '일상'으로 전환되는 부분이 관찰되었다. 이후 1980년대의 담론 중에서 청계천은 '도심 부적격 시설'이 밀집된 공간으로 재현되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세계적 경기 침체의 영향을 받으며 자본축적의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지 못하게 된 청계천 공간에서 이질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질적인 정체성이란 다시 말해, 청계천 공구상가의 구조적 양식을 잉태한 청계천 공간의 '장소성'으로서, 담론화 과정을 통해 자본 축적의 효율성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었던 청계천 공간에 대한 '평가절하' 및 '가치파괴'로 재현되었고, 2000-이후 환경 및 역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상상'으로 이어져 청계천 복원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2005-복원된 청계천 공간은 청계천에 흐르는 물과 녹색 풍경, 역사적 구조물, 문화시설 등의 기표들을 통해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신화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동질화된 소비 패턴을 실천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생산의 시대에서 소비의 시대로 전환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의도적으로 혹은 비의도적으로 담론화 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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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의 창업교육 비교를 통한 한국 벤처창업 교육전략 수립 (Building Strategy for Successful Venture Creation Education in Korea by Reviewing Venture Creation Education of Korea and USA)

  • 장대성
    • 한국컴퓨터정보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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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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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9-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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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미국에서의 벤처기업의 확산과 성장은 1980년대 불경기의 미국을 지난 1990년대의 10년간 사상 최대의 호황경제로 만들었다. 미국 벤처기업의 성공은 대학과 벤처기업간의 산학협력은 물론 대학의 질높은 벤처창업 교육에 있었다. 미국의 벤처창업교육은 한국에 비하여 상당히 오래되었고 거의 모든 대학에서 장기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은 그 역사가 일천하고 아직도 피상적인 수준이다 이에 본 연구는 미국과 문화적 역사적 다른 한국에서 성공적인 벤처창업교육을 위한 5가지 기본적인 전략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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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스포츠과학 분야의 학문적 성장: 통계적 방법 적용의 역사

  • 강상조
    • 한국통계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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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통계학회 2002년도 추계 학술발표회 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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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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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이 글은 체육 및 운동과학 연구에서 각종 통계적 방법의 출현을 역사적으로 개관하고 이들 통계적 방법의 출현시기를 미국의 경우와 비교함으로써 한국 체육학연구의 학문적 성장을 확인하고 이들 방법 적용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통계적 방법 관련논문을 분석하고 통계적 방법이 체육 현장에서 어느 정도 중요하게 다루어 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측정,평가 담당교수의 학문적 배경과 교육적 경력을 조사하였다. 전공자의에 대한 의 체육학이 아직 학문적으로 자리를 잡기 전인 최초 태동 시기에 적용된 통계적 방법을 미국의체육학회지(RQES)와 비교해 볼 때 동일한 통계적 방법의 적용시기는 약 30년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미국에서 1980년도에 나타나기 시작한 진보된 다변량 통계기법을 1990년대에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좁혀졌으며 현재는 동일한 시기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진보된 통계적 기법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법을 적용하는데 필요한 기본가정이 충족되었는지에 대한 검토 없이 적지않은 논문이 보고되고 있다. 담당교수의 학문적, 교육적 배경이 통계학과 거리가 있는 교수가 47%로 나타남으로써 가르치는 내용과 범위에서 적지않은 제약이 따르고 있다. 또한 전문가에 의한 평가체제가 확립되지 못함으로써 적용된 통계적 기법의 적절성을 평가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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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도시공간 재현의 이데올로기적 변화에 관한 연구 - <살인의 추억>과 <극장전>을 중심으로 - (A Study for Modern City Space in Korean Film - & )

  • 이승환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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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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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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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한국의 도시화는 압축근대, 산업화의 신화를 바탕으로 국가주도로 매우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공간적 팽창과 도시로의 유입인구 증가는 단순히 지리적 공간 확대만의 상징만이 아니라 사회 상부구조 구축의 영역까지도 상징한다. 본고는 영화 <살인의 추억>과 <극장전>을 중심으로 1980년대 농촌과 도시혼성 형태의 공간과 2005년 서울 도심 공간의 함의 변화를 통해 현대화 과정에서의 억압과 공포, 그리고 포스트모던 사회로의 급격한 이행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 도시 공간의 이데올로기적 변화를 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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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음악이 한국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 - 편곡 테크닉 중심으로- (The Impacts of Cho Yong-Phil's Music on Korean popular music - Focus on Arrangement techniques -)

  • 이태윤;조태선
    • 한국산학기술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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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산학기술학회 2012년도 춘계학술논문집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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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3-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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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조용필은 가수로서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역사, 전설, 가왕, 국민가수 등의 여러 호칭으로 불리며 한국의 대중음악을 크게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 되고 있다. 그의 음악적 능력은 가수로서 뿐만이 아니라 1980년대에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이자 편곡가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우리 대중음악의 음악적인 스펙트럼을 확장시키고 이후 우리 대중음악의 편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본 논문은 조용필의 음악적인 색채가 본격적으로 구축된 것으로 평가받는 3집과 4집의 음악에 나타난 그의 편곡 테크닉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 아울러 우리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는 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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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문고전 번역의 가치담론과 번역자상에 대한 시론적 접근 (An Approach to Value Discourse on Translation of Korean Chinese written Classics)

  • 남지만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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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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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5-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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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한국 한문고전을 번역하는 가치에 대한 담론과 그 번역을 수행하는 번역자상을 다루었다. 연구의 범위를 한국(남한)에 한정하여, 민족문화추진회 등 관련 기관이 창설되고 국가지원을 통해 고전번역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인 1960년대 이후를 연구범위로 하여 한국 한문고전을 번역하는 번역가치담론의 변천을 시론적으로 살펴보았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민족문화추진회를 중심으로 민족문화 담론과 한학(漢學) 담론이 주조를 이루었다. 민족문화 담론은 근대화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한학 담론은 근대화 담론에 일정 정도 길항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번역자상은 한글을 구사할 수 있는 한학자상에 가까웠다. 민족문화 담론은 정신문화 담론과 짝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설립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으며, 이후 1980년대에 한국학 담론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80년대 중반 이후 김용옥에 번역학 이론이 소개되어 반향을 일으켰다. 70년대부터 시작한 "조선왕조실록"의 번역은 고전번역 현장의 고전번역 담론을 사업 담론으로 기울게 하였다. 이러한 대형번역사업은 전문역자군을 산출하여, 번역자상으로 전업적 고전번역자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2007년 한국고전번역원의 설립으로 고전번역사업의 안정적 기반이 마련되자 고전번역 담론은 사업 담론의 영역에서 고전번역학을 중심으로한 학술 담론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게 되었다. 고전번역학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와 함께 고전번역대학원이라는 학문기구의 설립 문제로 논의가 확장되었다. 이 시기의 학문 담론과 짝하여 고전번역자는 고전학자이자 번역자여야 한다는 연구 번역자상이 요청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고전번역 가치담론은 시대흐름에 따라 변화하였고, 그에 따라 고전번역자상도 변화하였다.

1970년대(年代) 중화학공업정책(重化學工業政策)이 자본효율성(資本效率性)과 수출경쟁력(輸出競爭力)에 미친 영향(影響) (The Effects of the Heavy and Chemical Industry Policy of the 1970s on the Capital Efficiency and Export Competitiveness of Korean Manufacturing Industries)

  • 유정호
    • KDI Journal of Economic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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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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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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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 한국경제(韓國經濟)가 고도성장(高度成長)을 이룬 지난 30년 동안 정부(政府)의 정책(政策)은 경제제일주의(經濟第一主義)라 할 만한 것이었으며 경제정책(經濟政策)은 시장기능(市場機能)에 대한 간섭이 매우 심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韓國)의 성장경험을, 정부(政府)가 시장(市場)의 자원배분기능(資源配分機能)을 간섭(干涉) 내지 대행(代行)함으로써 경제성장(經濟成長)을 촉진(促進)시킬 수 있다는 명제(命題)를 지지하는 증거로 보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이 견해가 옳은가의 여부에 따라 바람직한 정부(政府)의 역할은 크게 다르게 된다. 본고(本稿)는 정부(政府)에 의한 시장(市場)의 자원배분기능(資源配分機能) 간섭(干涉)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정책(重化學工業政策)의 효과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제조업내(製造業內)의 한국표준산업분류(韓國標準産業分類) 3단위의 개별 산업들에 관하여, 그리고 이들을 정책혜택(政策惠澤)을 받은 산업군(産業群)과 그 나머지로 나눈 두 산업군(産業群)에 관하여, (1) 자본집약도(資本集約度)를 추계한 후 그 변화추이(變化推移)가 시사(示唆)하는 바를 살펴보고, (2) 자본효율성(資本效率性)을 추정하여 자원(資源)의 최적배분조건(最適配分條件)과 비교함으로써 정책(政策)의 성장(成長)에 대한 기여(寄與)를 평가하였고, (3) OECD 회원국(會員國) 수입(輸入) 중 한국수출(韓國輸出)의 점유율(占有率)을 대만(臺灣)과 비교함으로써 정책(政策)이 한국수출(韓國輸出)의 경쟁력(競爭力)에 미친 영향을 저울질해 보았다. 정책혜택(政策惠澤)을 받았던 중화학공업군(重化學工業群)에서는 1970년대 중반에 자본집약도(資本集約度)가 빠르게 증가한 반면 경공업군(輕工業群)에서는 하락하거나 거의 증가하지 않았으며, 중화학공업군(重化學工業群)의 자본효율성(資本效率性)은 1970년대말까지 경공업군(輕工業群)에 비해 훨씬 낮았는데, 본고(本稿)는 이를 중화학공업(重化學工業)에 대한 과잉투자의 결과라고 보았으며 중화학공업정책(重化學工業政策)이 제조업(製造業)의 성장을 지체시키는 효과가 있었음을 시사(示唆)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OECD 수입(輸入) 중 한국수출(韓國輸出)의 점유율(占有率)은 경공업군(輕工業群)에서 대만(臺灣)에 비해 더 컸으나 1970년대 중반 이후 오히려 작아졌고, 중화학공업군(重化學工業群)에서도 그 점유율(占有率)이 대만(臺灣)에 비하여 점점 더 뒤떨어지게 되었다. 이같은 경쟁력(競爭力)의 상대적(相對的) 약화(弱化)가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음에 비추어, 본고(本稿)는 중화학공업정책(重化學工業政策)이 수출경쟁력(輸出競爭力)을 제고(提高)하는 효과(效果)가 없었거나 혹은 오히려 떨어뜨리는 효과(效果)가 있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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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시대 한국 하청애니메이션에 대한 연구 - 1970-80년대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 (A Study on Subcontract Animation in Korea during the Industrialization Era - Centered around Animations in 1970-80s -)

  • 김종옥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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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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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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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1966년 TBC 동화부의 황금박쥐로 시작된 한국 하청애니메이션의 역사를 1980년대 시기까지 분석하여, 한국애니메이션에서 30년 넘게 진행되어 온 하청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재조명하였다. 이를 위해 하청애니메이션 제작사 제작현황 산업의 규모 등 하청애니메이션 개괄적인 상황을 통해 당시 OEM산업의 실태를 점검하였고, 애니메이션이 하청제작산업으로 고착화된 배경을 시대상황과 연계하여 분석하였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하청애니메이션산업이 발생시킨 문제점과 한계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창작애니메이션을 활성화하기 위한 새로운 모색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애니메이션 역사 연구의 지평을 넓혀보고자 하였다.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이 국가적 목표였던 시기였다. 70년대 후반부터 애니메이션도 해외애니메이션 하청 수주를 통해 수출 주력산업으로 주목받았다. 하청 해니메이션 제작의 확대는 당시 대중문화에 대한 국가의 정책과 칼라TV보급, 비디오 제작 시장 활성화 등의 매체 변화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관객이 축소된 점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경제적 논리로 자체 애니메이션 제작을 기피했던 방송사 등 플랫폼 부재도 그 원인이었다. 하청애니메이션산업은 애니메이션 인프라의 구축과 신진 인력 양성 등 애니메이션 환경을 확장시켰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집약적인 '프로덕션' 단계 중심의 발전은 기획력 등 '프리 프로덕션'의 부재와 '포스트 프로덕션(후반작업)'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전문인력 양성에 왜곡된 구조를 만들었고, OEM산업으로 축적된 자본을 창작애니메이션 제작에 재투자하여 내수시장을 형성하지 못한 점은 부정적 측면으로 평가된다. 애니메이션은 한 나라의 문화적, 정신적 산물이다. 따라서 전문인력의 양성과 우수한 작품의 창작,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시장의 형성 등 창작애니메이션 활성화를 위한 체계적인 지원 정책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산업이지만 하드웨어 중심의 제조업이 아닌 창의력에 기반한 문화산업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이러한 인식의 부재로 이 시기 한국 애니메이션은 독자적인 작품 제작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과 투자를 통해 시장을 만들고, 창작애니메이션을 활성화하는 어떠한 정책 방안도 마련하지 못했다. 이러한 시도는 1990년대 이후 한국도 창작 애니메이션 보호 육성을 위한 다각적인 모색을 통해 새롭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