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18세기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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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에서의 선진(先秦) 제자학(諸子學) 수용 양상 - 순자(荀子)에 대한 비판과 이해를 중심으로 - (The Aspect to Receive Pre-Chin Study of One Hundred Schools in Cho Sun Dynasty-Centered on the criticism and understanding of Hsün Tzu)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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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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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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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에서는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선진 제자학을 위상을 검토하고 아울러 순자사상의 한국적 수용과 전개 양상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여말선초부터 18-19세기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문집을 통하여 순자에 대한 이해양상과 시대별 흐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부터 고려 중엽까지는 지식인들이 선진 제자학 가운데 다른 학파나 사상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여말선초 이래 "맹자"가 유가의 정통 경전으로 확립되면서부터 순자를 비롯한 선진 제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고려부터 선초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으며, 다만 순자에 대한 이해의 심도가 점차 깊어짐을 알 수 있다. 성리학 전성기에 이르면 선초에 비해 순자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 강도가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토대로 한 성리학적 세계관이 이미 확립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성악설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대체로 순자의 다른 사상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원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17세기에 이르면 순자를 법가로 귀결시키는 논의도 일부 보이지만, 주자학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실학적 토대 위에서 제자학을 적극 수용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18세기에 이르면 순자에 대한 이해 범위가 보다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글자 고증에 있어서 순자의 원문 및 주석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요컨대 조선조 지식인들의 순자 비판은 시종일관 그의 성악설에 근거하며 나아가 분서갱유를 주도한 이사(李斯) 등의 법가와 연계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이를 제외한 순자의 기타 사상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수용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순자를 비판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제자서를 쉽게 접하거나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태도를 지녔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회격·회곽묘 출토 삽(翣)에 대한 고찰 (A Study on the Excavated Sab(a funeral fan) from Lime-filled Tomb and Lime-layered Tomb during the Joseon Dynasty)

  • 이승해;안보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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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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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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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삽(?)은 유교 예법에 따른 상장례(喪葬禮) 도구로 나무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백포(白布)나 두꺼운 종이를 붙여 그림을 그린 후, 자루를 달아 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례기(禮記)"에 따르면 삽은 주대(周代)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나타난 삽의 용례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본고에서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회격 회곽묘에서 발견되는 삽의 발굴 사례 및 문헌 기록을 통해 그 용례와 제작방식, 시기에 따른 유물의 특징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삽은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개수와 그리는 문양이 다른데, 사대부가에서는 주로 '아(亞)'형의 불삽 1쌍과 구름 문양을 그린 화삽 1쌍을 사용하였다. 삽의 크기는 너비가 2자[척(尺)], 높이 2자[척(尺] 4치[촌(寸)]로 만들었는데 초주지나, 저주지로 두 번 싸고, 세 번째는 연창지로 쌌다. 그리고 나서 백저포, 마포, 무명, 공단 등으로 덮었다. 그 양면에 보불을 그리고 구름 변아(邊兒)에 운기를 그리는데 대개 주사 또는 진사를 사용하였다. 사대부가 회격 회곽묘에서 출토되는 삽은 광중에 부장된 것으로, 삽자루와 분리된 형태이다. 즉, 출토되는 삽은 발인행렬시 삽을 매달았던 5자 길이의 삽자루는 태워 없애고, 관의 좌우에 세워 넣은 것이다. 출토 유물의 검토를 통해서도 제작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출토된 유물은 각(角)의 개수에 따라 각이 3개 달린 것과 2개 달린 것으로 대별된다. 먼저 각이 3개 달린 것(유형 I) 중에는 나무 통판을 사용하거나 대나무를 납작하게 갈라, 바구니처럼 엮은 것도 있다. 각이 3개인 삽은 비교적 조선 전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에 비해 그 제작방식이 다양한 편으로 생각된다. 반면 각이 2개 달린 삽의 경우에는 비교적 정형화된 제작방식이 보인다. 직사각형이나 역사다리꼴로 몸통부분을 만든 후, 2개의 각이 달린 삽의 윗부분을 연결한 형태이다. 다만 상단면을 곡선(유형 II) 또는 직선(유형 III)으로 처리하는 것이 다르다. 이러한 제작방식은 각이 3개 달린 것에 비해 간단하며, 제작기법 상의 차이는 크지 않다. 특히 상단면을 직선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분석에 사용된 30건 중 묘주의 몰년, 즉 삽의 제작 연대가 명확한 것만 선택하여 분석한 결과, 유형 I은 16세기 전반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유형 II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후반, 유형 III은 17세기 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요컨대 삽의 형태는 유형 I에서 유형 II로, 다시 유형 II에서 유형 III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는 변화의 시기로 유형 II III이 혼재되어 있다. 유형을 크게 3가지로 구분하였으나 유형 II III은 각이 2개인 측면에서 그 형태가 유사하다고 볼 때 주목할 만한 전환기는 16세기 중반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유형 I은 유형 II III에 비해 제작 과정상 공이 더 많이 들어갈 것으로 생각되며, 후대로 내려올수록 경제성의 원리에 따라 삽의 형태 및 제작방법도 간소해진 것으로 보인다. 상장례의 간소화 경향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예장(禮葬)이 몇 차례 중지되는 사건들을 통해 임진왜란 이후에 가속화된 변화로 볼 수 있다. 삽의 경우 이미 16세기 후반부터 간소화되고 있었으며, 심지어 18세기에는 삽을 따로 제작하지 않고 구의(柩衣) 및 관(棺)에 직접 그리는 현상까지 초래하였다. 그러나 형태적으로 단순화 되는 과정에도 "례기(禮記)"의 삽 사용 규정은 지켜지고 있어, 그 의례의 형식은 합리적으로 간소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 희랑대사상(希朗大師像)의 특징과 제작 의미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the Huirang Daesa Sculpture at Haeinsa Temple in Hapcheon)

  • 정은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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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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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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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희랑대사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상으로 높이 82.4cm, 무릎폭 66.6cm, 앞뒤 최대폭 44cm에 이르는 등신상에 가까운 크기이다. 제작 기법은 승상의 앞면과 뒷면을 건칠과 나무를 접합하여 만든 것으로 동아시아의 유일한 사례로 주목된다. 유사한 기술이 나말여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에 이미 적용된 바 있어 이 시기의 특징으로 이해된다. 희랑대사상에 대해서는 18세기에 쓰여진 가야산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승상의 가슴에 있는 구멍과 힘줄과 뼈가 울퉁불퉁하다는 등의 독특한 특징은 현재의 희랑대사상과 정확하게 부합된다. 가슴에 있는 구멍은 신통력의 상징으로 3~4세기에 활동한 서역의 승려 불도징(佛圖澄)의 가슴에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에는 흑칠 상태였으며, 19세기에 현재와 같이 채색되었음도 알 수 있다. 봉안 전각은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과 진상전(眞常殿)이었으며, 이후 조사전과 보장전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승상의 제작과 봉안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문헌 기록에 등장하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매우 드문 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승상의 초상조각은 고려시대의 희랑대사상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제작된 나옹과 의상대사상 등 모두 네 구뿐이다. 이 가운데 희랑대사상은 고려 초기 10세기경에 제작된 상으로서 최고의 제작 기술과 사실적인 재현 그리고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 승상을 제작하여 숭배하고 신성시하는 전통은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다만 재료와 제작 기술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차이와 특이성을 보이며 발전하였다. 중국은 육신불(肉身佛)이 많은 편이며 일본은 건칠, 나무, 흙 등 시대마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많은 승상을 제작하였다. 저마다 다른 재료와 기법을 사용했지만 동아시아 각국의 승상 제작은 승려의 참모습과 정신성의 성공적 표현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20세기 초 한국과 유럽의 부엌 계획특성에 관한 비교연구 - 박길용의 개량부엌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부엌을 중심으로 - (The Comparative Study on Characteristics of the Kitchen Design of 20 century's Korea and Europe - Centered on Park Gil-Yong's improved kitchen and German Frankfurt kitchen -)

  • 정찬미;김현정
    • 한국실내디자인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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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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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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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The change of idea about overall politics, society, technology, and culture in 20th century led to the change of kitchen which is the central space of household affairs as well. Frankfurt kitchen of Margarete Schuette Lihotzky which was introduced for the first time at Germany International Trade Exhibition in 1927 functionally designed small space of $6.5m^2$ with considering move-line and convenience. This is the beginning of kitchen type which has built-in sink and cupboard that is regarded as an universal option these days, and this has extensively been applied to kitchen system throughout the world after the repetitive development in America, Sweden and Switzerland. And improved kitchen of Park Gil-Yong which was influenced by rationalism introduced from the house improvement campaign and the opening of a port which were progressed in Korea in $1919{\sim}1930$ is the first stand-up kitchen which improved the inefficiency of Korean conventional kitchen.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change aspect of kitchen through the rationalization in each country by comparing the introduction background of the times, change of space for residence and kitchen, and the characteristics of kitchen plan which had influence at the turning point on the kitchen in Korea, Europe on the side of efficiency at the same period, take into consideration of our residing-culture which has rapidly been changed between tradition and modernity, and to see the direction of kitchen design which copes with the unique residential environment.

Natalia Goncharova의 무대의상 디자인 연구 - 20세기 초 러시아 발레(Ballets Russes)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tage Costume Design in Natalia Goncharova - Focused on Early 20th Century Ballets Russes -)

  • 박윤정
    • 복식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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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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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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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was to re-illuminated the artistic value of costume designs that had shared identical history with human beings through the formation and the progress of the newly introduced Russian avant-garde art. This resulted from the fact that the Russian avant-garde art changed the human esthetic sense through the trend of art that Natalia Goncharova introduced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research method defined the formation and progress of the development of the Neo-Primitivism centering the works of art by Natalia Goncharova. Based on this method, Goncharova designed the set and the costume designs for the Ballets Russes of Serge Diaghilev and studied the molding characteristics of the costumes worn in the performing art. The result were as follows. First of all, Goncharova's costume designs were all manufactured based on the theme of Russian folk art and genesis. In other words, Goncharova represented the Spanish passion, the Russian folk art Lubok, and Goldern cockerel or religious Icon-paintings in her costumes. she pursued straight lines and abstract shapes in her costume designs. her design displayed the Neo-Primitivism influence through the separation between the lines and the surfaces, which defined the costumes as a decorative art experiment. Therefore, the study of Goncharova had one realize that Neo-Primitivism was not only an art form of Avant-garde, but it also became the basis of the molding character of all the artworks. Natalia Goncharova reflected the miracle of the transformation of the early 20th century in their costume designs.

한국의 간척 기술

  • 윤오섭
    • 한국기술사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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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기술사회 1995년도 제25회 한일기술사 합동 심포지움 한국편 자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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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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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근 반세기 동안에 세계에서 간척 사업이 가장 활발하였던 곳은 화란의 북해안과 우리 나라의 서남해안이다. 이는 한반도의 서해안을 말하는 것으로 북한까지 포함된 것을 말한다. 그간 우리 나라는 간척 사업에 의해 농지의 외연적인 확대로 쌀의 지급율을 높이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 나라의 서해안은 간만의 차가 커서 \circled1간척지가 잘 발달되어 간척 적지가 많고, \circled2지구 내의 배수 방식이 외국에서처럼 기계 배수가 아니고 자연 배수가 가능하여 유지 관리비가 적게 든다. 그러나 \circled3 방조제. 축조시 불가피하게 강력한 조류속이 발생하지만 이에 견별 수 있는 자연 석재를 비롯하여 축제 재료의 구득이 용이하고, 돌망태 공법을 개발하여 공사가 용이하고 공사비도 저렴하다. 또한 태풍이나 해일에 의해 해면이 상승하는 기상조도 일본이나 화란의 3.5m인데 비해 우리 나라는 1.5m정도로 이들 나라에 비하여 같은 조건에서도 둑마루 높이가 2.0m정도가 낮아져 공사비도 저렴하고 외측 피복공 공사도 용이하다. 뿐만 아니라 서남 해안의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고 연안에는 섬들이 산재하여 있어, 매립 면적당 방조제의 길이가 짧고, 공사의 단계별 추진이 용이하다. 간석지의 토질도 비교적 단단하여 방조제의 축조나 토지 이용에 적합하는 등, 자연적인 간척 여건은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천혜의 입지 조건을갖추고 있다. 그동안 우리 나라의 간척 기술은 8 . 15 광복 이후, 소규모 간척 사업을 시행하다가 60년대에 이르러 국가 경제 개발의 일환으로 추진된 동진강 간척사업을 필두로, 70년대에는 남양, 아산, 삽교천 방조제 공사를 시행하면서 우리 나라 여건에 부합되는 방조제 구조와 공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하였고, 80년대에는 영산강, 대호, 금강, 90년 초에는 영암방조제 공사들을 무리없이 성공시켰고, 독자적인 기술 개발이 촉진되어 1994년 1월에는 세계 간척사상 유출입 조석량이 가장 큰(9억m$^3$로 그간 우리나라 및 화란에서 시행하였던 큰 규모는 약 3~억 m$^3$ 내외임) 시화 방조제 끝막이 공사를 우리 나라가 개발한 구조와 공법으로 성공시켰으며, 이에 힘입어 유출입 조석량이 18억m$^3$인 새만금 간척 공사를 독자적인 우리 기술에 의해 계획대로 시행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그간 우리 나라의 간척 기술개발 사항은 물론, 간척 사업 .전반적인 사항을 요약하였고, 세계 각국의 간척 사업과도 비교하여 우리나라 간척 사업에 대한 현주소를 여기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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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마임에 대한 역사적 고찰 (A Historical Study on the Mime in Chinese Theater)

  • 안상복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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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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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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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는 중국 마임에 대해 역사적 고찰을 진행한 글이다. 중국 전통극에서의 마임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하는 문제는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이나, 고대 배우들의 행위를 통해서 대략적이나마 초기의 자취가 발견된다. 필자는 사기(史記) "골계(滑稽)열전"에 수록된 초(楚)나라 장왕(莊王: B.C.613-591) 때의 배우 우맹(優孟) 이야기 속에서 그 근거를 찾아 제시할 수 있었고, 이를 근거로 중국의 마임은 최소 26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것으로 판단하였다. 중국의 마임은 전통극 중에서도 제의극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 발전은 각색행당제(脚色行當制)와 긴밀히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주(做)나 타(打)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정식동작(程式動作)들은 최근 몇 세기에 걸쳐 구체화되었지만 그것들의 좀 더 먼 기원은 고대의 무(舞)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대의 무는 다시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나뉘어 전개되었으니, 현재의 주나 타에 더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문무와 무무라 할 수 있다.

한반도 최근 10년 기후특성 (Climate Change during the recent 10 years in Korea)

  • 권원태;부경온;허인혜
    • 한국수자원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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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수자원학회 2007년도 학술발표회 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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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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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우리나라는 지난 94년간 1.5도 상승하여 전지구 온난화추세를 상회하였다. 기온뿐만 아니라 강수량 역시 변화하였는데 변동폭이 크기는 하나 장기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으로 20세기초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고 강수량도 많은 특성을 보인다. 평균적인 기후변화추이와 더불어 특히 최근 10년($1996{\sim}2005$년)은 1850년 이후 지구평균기온이 가장 높았던 기간으로, 세계적으로 열파, 홍수, 가뭄, 태풍 등 기상이변에 의한 인명과 재산 피해, 생물종의 멸종 등 사회경제적 피해가 막대하였다. 우리나라 역시 폭염, 호우등의 빈번한 출현으로 급격해지는 온난화추세 영향을 반영하였는데 이러한 기후 변화양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최근 10년간 기후 특성과 계절별 현상일수의 변화를 분석하였다. 최근 10년(1996-2005년) 우리나라 기후변화의 특성을 보면 우리나라(15개 관측지점자료)는 평균기온이 과거 30년$(1971{\sim}2000)$ 평균대비 $0.6^{\circ}C$ 상승하였다. 계절별로 봄은 평년대비 $0.7^{\circ}C$, 여름은 $0.4^{\circ}C$, 가을은 $0.6^{\circ}C$, 겨울은 $0.7^{\circ}C$ 상승하여 봄과 겨울의 상승폭이 가장 크다. 연강수량은 30년 평균대비 최근 10년 강수량은 11% 증가하였고 특히 여름은 증가폭이 가장 커서 18% 증가하였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기상현상의 변화도 나타났다. 3월 이후에 나타나는 늦서리의 종료일은 평균적으로 3월 말경에 나타났는데 최근 10년에는 3월 중순으로 2주 앞당겨졌고 이 추세는 특히 1993년 이후 뚜렷하다. 늦서리의 발생일수도 평균 4일 정도 줄었다. 일평균기온 $20^{\circ}C$이상인 날은 평년에 비해 최근 10년 동안 약 2일 증가하여 여름 시작시기가 빨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최저기온이 25도 이상인 열대야는 평년대비 최근 10년간 연간발생일수가 1.3일 증가하였으나 일최고기온 $35^{\circ}C$ 이상인 날의 수는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여름철 강수량이 증가하고, 호우발생빈도, 특히 8월의 강수일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름과 가을에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태풍의 수는 뚜렷한 추세를 보이지 않으나, 2002년 루사, 2003년 매미로 인하여 각각 6조원, 4조원 이상의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태풍에 의한 피해액은 GDP 대비 약 0.9%(태풍 루사)로 최근 경제상장률과 비교해 보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다.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태풍은 연근해의 해수면 온도가 높아지면 세기가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 폭설과 한파일수도 평년대비 최근 10년 감소하였고 일최저기온이 영하 $10^{\circ}C$ 이하인 날도 연간 발생일수가 감소하였다. 최근 10년간 우리나라 기후의 변화특성은 기온상승과 더불어 서리종료일이 앞당겨지고 열대야가 증가하고 폭설, 한파, 겨울철 일최저기온 영하 10도 이하인 날의 감소 등이 나타나고, 여름철 재해의 원인인 호우일수는 증가하는 추세이다. 앞으로 지구온난화는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이로 인한 피해규모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기후변화의 추이를 감안할 때, 기후변화에 대한 장기적인 대비책을 마련하여 이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국가차원의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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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능비(陵碑)의 건립과 어필비(御筆碑)의 등장 (Formative Stages of Establishing Royal Tombs Steles and Kings' Calligraphic Tombstones in Joseon Dynasty)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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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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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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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조선 초 중기,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세 시기로 나누어 조선왕릉에 건립된 신도비와 표석의 시기별 건립추이와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왕실 능비(신도비와 표석)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건립한 시기와 주체, 후계왕의 의도에 따라 시기별 차이를 보이며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15~17세기는 왕릉 신도비의 건립과 재건이 이루어진 시기, 18세기는 신도비가 표석으로 대치되어 다수 건립되었고 국왕의 어필을 직접 돌에 새긴 어필비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대한제국기는 황제국으로 격상됨에 따라 조선 개국자인 태조와 왕후, 선조들에 대한 추숭(追崇)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표석 중건이 이루어진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본다면, 결국 우리나라 능비의 역사는 조선후기를 기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왕릉 신도비의 형식은 삼국시대의 부정형한 석비의 초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귀부이수'형의 당비(唐碑) 형식을 수용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말 탑비의 퇴화된 양식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건립 당시부터 선왕에 대한 숭모 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국왕과 왕의 치적이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도비를 별도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신료들의 입장이 대치되면서 건원릉 제릉 헌릉 구 영릉 4곳에만 건립된 채 왕릉에는 한동안 석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신도비 건립이 중단된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왕릉에 아무런 표(表)를 해 둘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형식이 간소한 표석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82년 작 영릉(寧陵)의 표석은 최초로 왕릉에 건립된 표석이자 장대한 규모,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능표는 영조 재위 기간인 1740년대부터 대규모로 건립되었다. 열성(列聖)에 대한 추숭과 어필간행 등을 통해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공표하고자 했던 영조는 제릉의 신도비를 재건하는 한편, 의릉(懿陵)을 비롯하여 총 20곳에 달하는 곳에 표석을 세우는 역사(役事)를 추진했고, 처음 친필 글씨를 돌에 새긴 어필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어필비 제작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소실된 어필을 보존하려 한 숙종의 신념을 계승한 영조에 의해 제도적으로 추진되면서 어필을 새긴 능비가 등장한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시대사적으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표석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한번 다량 제작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태조의 조선 건국에 두고 태조와 그 4대 선조에 대한 추숭과 기념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면과 후면 모두 자신의 글씨로 채움으로써 역대 어느 왕보다 통치자로서 권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상 언급한 왕릉의 신도비와 표석의 건립 추이는 동시대 원 묘에 건립된 신도비, 표석과 비교 고찰을 통해 시대별 특징과 왕실 조각품으로서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다중표적 뼈 전이암의 하이브리드 세기변조(modified hybrid-VMAT) 방사선치료계획 유용성 평가 (Evaluation of the Modified Hybrid-VMAT for multiple bone metastatic cancer)

  • 정일훈;조윤진;장원석;김세준;하진숙;전미진;정인호;김종대;신동봉;이익재
    • 대한방사선치료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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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_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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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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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목 적 : 동일 선상축(co-axial image)의 다발성 뼈 전이암에 대한 하이브리드 세기변조(modified hybrid-VMAT) 계획의 유용성을 평가하고자 한다. 대상 및 방법 : 동일 선상축의 다발성 뼈 전이암환자 총 5명을 대상으로 치료계획시스템(Ray station, 5.0.2.35, Sweden)을 이용하여 치료계획을 수립하였다. 치료계획용적(planning target volume, PTV) 처방 선량은 30 Gy로 설정하여 총 3가지 치료계획: 용적변조회전치료계획(volumetric modulated arc therapy, VMAT); 배경방사선(background)을 고려하지 않은 하이브리드 용적변조회전치료계획(hybrid VMAT, VMAT(h)); 배경방사선을 고려한 하이브리드 용적변조회전치료계획(modified hybrid VMAT, VMAT(mh))을 비교하였다. 선량용적히스토그램(dose volume histogram, DVH)을 이용하여 PTV의 maximum dose($D_{max}$), mean dose($D_{mean}$), 처방선량지수(conformity index, CI), 선량균질지수(homogeneity Index, HI) 및 손상위험장기(organ at risk, OAR)의 선량을 분석하였다. 또한 monitor unit(MU)와 치료시간(beam on time)을 분석하였다. 결 과 : VMAT, VMAT(h)과 VMAT(mh)의 PTV $D_{max}$는 3188.33 cGy, 3526 cGy, 3285.67 cGy이고, $D_{mean}$은 3081 cGy, 3252 cGy, 3094 cGy이고, CI는 $1.35{\pm}0.19$, $1.43{\pm}0.12$, $1.30{\pm}0.06$이고, HI는 $1.06{\pm}0.01$, $1.14{\pm}0.06$, $1.09{\pm}0.02$로 평가되었다. VMAT(h)과 VMAT(mh)의 OAR은 3 % 증가와 18 % 감소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추가적으로 평균 MU는 904.90, 911.73, 1202.13 그리고 평균 Beam on time은 $128.67{\pm}10.97$초, $167.33{\pm}7.57$초, $190.33{\pm}4.51$초 소요되었다. 결 론 : 다중표적 치료 시에는 modified Hybrid-VMAT를 적용하면 선량의 겹침이 보정되어 과선량(over dose) 조사되는 것을 방지하는 다중표적을 치료할 수 있다. 그리고 PTV의 선량포함을 만족하면서 주위의 정상장기를 더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치료계획이 가능하다. 또한 modified Hybrid-VMAT의 임상적 효능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수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장기 추적 관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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